< 제150장 - 존버엘프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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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아침.
“뭐야, 뭐야. 뭔데 그래. 어젯밤에 대체 뭘 한 건데.”
카이사가 집요하게 코델리아의 쇄골에 남은 자국에 대한 진실 규명을 이어가나고 있을 때.
로열나이트 사라는 한 발 앞서 떠날 채비를 갖추고 있었다.
“조심해서 잘 다녀와.”
레온의 말에 사라는 피식 웃은 뒤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 되면 너도 마킹 좀 해두든가.”
“어?”
마킹?
레온이 영문을 몰라 눈을 껌벅이자 사라는 다시 웃더니 마지막으로 장비를 점검했다.
사라는 지금 기사라기보다는 사냥꾼에 가까운 복장을 하고 있었다.
어젯밤 황태후가 이야기한 것처럼 작금의 황실에는 엘프들의 도움이 절실했다.
친황제파의 거두이자 황태후의 아버지인 버킹엄 후작이 다스리는 서북부 지역까지 가기 위해서는 엘프들의 영역을 지나야 했기 때문이다.
물론 장기적으로 봤을 때 엘프들이 가지고 있는 막대한 재력과 제국에 대한 영향력도 무시할 수 없었다.
아니, 그냥 엄청나게 중요했다.
제국을 장악하려드는 악마 추종자들을 몰아내기 위해서는 엘프들의 도움이 필수였다.
“엘프들은 분홍 머리 안 좋아한대.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사라의 농담에 레온은 결국 쓰게 웃더니 사라에게 투구를 씌워주며 말했다.
“그래, 얼굴도 꼭꼭 가리고 다니고. 이상한 놈들이 껄떡일라.”
쿡쿡 웃은 사라는 고개를 끄덕이며 레온의 가슴을 가볍게 치더니 이내 황태후와 황제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예를 표하기 위함이었다.
엘프들에게 보낼 밀사가 필요했다.
황제와 황태후에게 길을 내어줄 수 있는지, 도움을 줄 수 있는지.
그리고 현재 제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명확히 알고 있는지.
사전에 아무런 이야기도 되지 않은 마당에 황제가 뚤레뚤레 엘프들의 영역에 들어설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 말이다.
때문에 로열나이트들 중에서도 가장 발이 빠른, 그것도 숲에서라면 엘프들 이상의 기동력을 자랑하는 사라가 밀사로 뽑힌 참이었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다녀오거라.”
“충성스러운 그대에게 신들의 가호가 함께할 것이다.”
황제와 황태후의 말을 받든 사라는 다시 한 번 공손히 예를 표한 뒤 한 발 먼저 오두막을 떠났다.
그리고 그 광경을 지켜보던 코델리아가 카이사에게 말했다.
“냄새가 나.”
“무슨 냄새? 밤새도록 끌어안고 있던 유더 냄새?”
“물론 그것도 나겠지만 다른 냄새.”
“와, 이제는 그냥 뻔뻔하게 나오는 것 좀 봐.”
“부러우면 너도 루카스 끌어안고 자든가.”
코델리아가 흥흥 거리며 말하자 카이사가 순간 당황했다. 그녀답지 않게 얼굴까지 붉히며 버벅였다.
“여, 여기서 루카스가 왜 나오는데?”
“흐으응?”
그냥 찔러본 건데 혹시? 아니, 역시?
[어째서 모든 화제가 그쪽으로 흘러가는 걸까요.]
냄새가 난다는 것도 어차피 사라와 레온에게서 커플의 냄새가 난다든지- 뭐, 그런 이야기겠죠.
멜리사의 발언에 무안해진 코델리아는 에헤헤 웃다가 다시 말했다.
“아무튼 우리도 여기 죽치고 있을 수는 없으니까. 아침 먹고 나면 바로 출발할 거야. 사라와 다시 만날 곳도 이미 약속해둔 상태고.”
“그래야지. 그런데 지금 누구한테 설명하는 건데?”
“몰라!”
아무렇게나 답한 코델리아는 새삼 다시 사라가 떠난 방향을 바라보았다.
본래 현상금 사냥꾼이 되어야 할 사라가 로열나이트가 되긴 했지만, 그녀의 특기인 혼령질주만은 변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떠나간 자리에 푸른 귀화의 흔적들이 남아 있었다.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
나비효과가 일어나고, 여러 변수가 더해졌음에도 불구하고 끝내 바뀌지 않는 것. 바꿀 수 없는 것.
마치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는 듯 일어나고 마는 사건들.
코델리아는 고개를 흔들었다.
갑자기 든 이상한 생각들을 떨쳐낸 뒤 다시 활짝 웃어보였다.
“아무튼 가자. 유더 밥은 엄청 맛있으니까 잔뜩 기대하고.”
“저기요, 내가 너희랑 여행한지도 이제 꽤 되었거든요?”
“그럼 더 잘 알겠네.”
자랑스럽다는 듯 흥흥거린 코델리아는 앞장서서 나아갔고, 카이사는 저도 모르게 슬쩍 루카스 쪽을 돌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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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틀 뒤, 늦은 오후 무렵.
황제와 황태후는 물론이고 어린 황족들 까지 대열에 합류한 마당이라 일행의 기동 속도는 눈에 띄게 느려졌다.
말이 부족한 것도 부족한 것이었지만 일반인보다 체력이 떨어지는 황족들이다보니 그냥 말 위에 오래 타고 있는 것부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서두른다고 능사가 아니었다.
어차피 밀사로 파견된 사라가 돌아오기 전까지는 이동할 수 있는 영역에 한계가 있었고, 재상부의 추격 역시 이미 한 차례 따돌린 뒤였다. 때문에 일행은 조급한 마음을 달래며 서쪽을 향해 느리지만 꾸준한 속도로 나아갔다.
‘결국 다시 아사인 고개인가.’
제국 서부는 야생의 땅에 가까운 불모지인데다가 엘프들의 영역이 가깝기 때문인지 재상부는 물론이고 제국의 영향력 자체가 약한 곳이었다.
때문에 평소 제국 극서 지역은 위험한 치외법권 취급을 받았지만 재상부의 추격을 받는 지금의 황실에게는 오히려 안전한 땅이었다.
그렇기에 서쪽으로 나아가면 나아갈수록 어린 황제의 얼굴은 밝아져 갔고, 황태후 역시 조금이지만 긴장을 풀 수 있었다.
하지만 딱 한 명.
일행 가운데 서쪽으로 가면 갈수록 불안해지는 인물이 하나 있었다.
“키라라, 괜찮아?”
“히에에?!”
코델리아의 물음에 움찔하며 꼬리를 발딱 세웠던 키라라는 어색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괘, 괜찮아요.”
하나도 안 무서워요.
아사인 고개 전부를 산왕이 장악하고 있는 건 아니- 지 않잖아. 아사인 고개 그냥 산왕 거잖아!
‘사, 살해당할 거야.’
산왕한테 붙잡혀서 고문당하다 죽을 거야.
산왕은 그런 놈이니까!
극악무도한 서쪽의 악마니까!
배신했다고 때려 죽일 거야! 막 채찍으로 때릴지도 몰라. 아니면 손톱발톱을 다 뽑아버린 다음에 소금물을 뿌릴 지도 모르고!
“키, 키라라?”
“흐윽. 흑. 짧은, 흑. 시간이었지만, 흑. 주인님을 만나 좋았어요.”
“아니, 그··· 키라라?”
키라라가 훌쩍이기 시작하자 당황한 코델리아는 일단 키라라를 꼭 끌어안았고, 키라라는 코델리아의 가슴에 얼굴을 묻으며 현실을 잊고자 했다.
지금까지 들은 이야기대로라면 엄청나게 강한 유더와 코델리아였지만 그래도 실제로 본 것은 아니었으니까. 그냥 이야기만 들은 것이 다였으니까.
하지만 산왕은 달랐다.
얼마나 강한지, 그리고 얼마나 잔인한지 바로 옆에서 몇 번이나 실감했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배신의 대가는 고통스러운 죽음뿐이라며 배신자의 사지를 산채로 뜯어내던 산왕의 모습이 선했다.
‘그, 그래도 배신은 안 할 거예요!’
이번에는 배신하지 않을게요.
주인님과 끝까지 함께할게요.
정말로 진짜.
정말정말 위험해지기 전까지는!
‘아, 아니. 이게 아닌데?’
그렇게 키라라가 본능과 이성 사이의 다툼을 이어나간 지 얼마나 지났을까.
일행이 본격적인 아사인 고개라 할 수 있을 어둡고 인적 드문 곳에 들어선 순간이었다.
“온다.”
유더가 돌연 고개를 들며 말했고, 선두에 서 있던 레온 역시 급히 소리쳤다.
“적습이다!”
“우오오오오오!”
여럿이 내는 함성이 레온의 목소리를 집어삼켰다.
때문에 레온은 당황했다.
충분히 경계하며 나아갔음에도 불구하고 적들의 숫자가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적어도 서른 명 이상.
저 정도 규모의 인원이 매복해 있던 것을 눈치 채지 못 했다는 말인가?
“산왕의 수하들이에요!”
바로 그때 키라라가 소리쳤다.
나타난 적들이 전원 다 수인들인 것도 있었지만, 특유의 복색을 보면 알 수 있었다. 산왕의 부하들은 죄다 오른팔에 검은 천을 묶고 다녔으니 말이다.
“키라라! 이 배신자!”
“히에에!”
산왕의 수하들 중 하나가 자신의 이름을 콕 집어 말하자 키라라는 울상이 되어 벌벌 떨었다.
역시 산왕.
집요했다.
어쩌면 고갯길에서 이렇게 많은 인원들이 나타난 것도 키라라 자신 때문일지 몰랐다.
그리고 반쯤은 사실이었다.
배신자는 반드시 응징하여 일벌백계한다가 산왕의 신조였으니 말이다.
“조져라!”
“키라라를 붙잡아라!”
“찢어발겨!”
정면뿐만 아니라 좌우에서도 튀어나온 수인들이 저마다 소리치며 돌진해오기 시작했다.
“귀인을 지켜라!”
“전원! 수비 대형!”
이런 곳에서 공공연히 황제의 이름을 외칠 수는 없었다.
때문에 황제를 귀인이라 표한 로열나이트들과 종자들은 동시에 검을 뽑아들고 황제의 곁에 모여들었다.
그리고 그 와중에 싸움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린 것은 카이사였다.
“쓸어주마!”
남부에서는 해적 사냥꾼으로 이름 높은 그녀였다. 카이사 입장에서는 해적이든 산적이든 똑같이 박멸해야 할 무리들이었기에 손속에 사정을 두지 않았다.
“크허헝!”
마치 짐승처럼 울부짖은 카이사는 방어를 굳히지 않았다. 오히려 공격해오는 무리 사이로 뛰어들더니 쇠사슬을 마구 휘둘러 순식간에 여러 명을 쓰러트렸다.
카이사의 괴력에 데몬 프린스를 봉인하던 성스러운 쇠사슬의 힘이 더해지니 제 아무리 강건한 수인들이라해도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바닥을 낮게 휩쓰는 쇠사슬에 걸려 나자빠지기 일수였는데, 일격에 다리가 부러지거나 근육이 상해 일어서지도 못 했다.
반대쪽도 상황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 성왕십자검 특유의 새하얀 오라 블레이드를 일으킨 루카스가 종횡무진하니 실로 양떼 무리 속에 뛰어든 늑대와 같았다.
산적들 치고는 제법 기강이 잡혀 나름의 대열을 유지하던 산왕의 수하들이었지만 두 사람의 활약 때문에 제대로 된 진형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싸움은 순식간에 난전이 되었고, 이렇게 되자 개별 전투력이 우수한 일행 쪽으로 급격히 전황이 기울기 시작했다.
“우오오!”
레온과 로열나이트들 역시 힘을 내었다.
따지고 보면 그들 역시 제국 전역에서 선출한 천재들이었다. 제대로 검술을 수련한 적도 없는 수인 산적떼 따위에 당할 자들이 아니었다.
그렇게 5분 남짓.
마흔 명이 넘는 무리가 전투에 임했지만 그쯤 되니 거의 정리가 되었다.
수인들 대다수가 바닥을 뒹굴며 골골거렸고, 후열에 있던 몇 명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러자 한숨을 돌린 레온은 검에 묻은 피를 털어내며 소리쳤다.
“놈들이 더 몰려오기 전에 도망칩시다!”
이쪽의 숫자는 적은데 저쪽은 많았다.
더욱이 지금 상대한 것은 평범한 산적떼 따위가 아니었다.
아사인 고개의 산왕이라면 레온도 들어본 적이 있었다.
수백에 달하는 수하들을 거느리고 있다는 아사인 고개의 패왕.
더욱이 소문대로라면 놈은 소드 마스터에 필적하는 엄청난 강자였다.
그러니 겨우 이 정도로 끝날 일이 아니었다.
여기서 그냥 물러서면 아사인 고개의 패왕으로서 지켜온 위엄이 땅에 떨어질 터이니 말이다.
눈앞에서 벌어진 싸움에 겁을 먹은 황제는 얼른 고개를 끄덕였고, 황태후 역시 긴장한 얼굴로 동의했다.
서둘러 아사인 고개를 넘는다.
아니, 아예 다른 루트를 찾는다.
하지만 바로 그때였다.
“저기.”
루카스였다.
살짝 손을 든 그는 로열나이트들이 자신을 돌아보자 미간을 살짝 좁히며 말했다.
“우리가 왜 도망을 가야 하죠?”
“에?”
“아니, 우리가 왜.”
그렇게 말한 루카스는 슬쩍 눈짓으로 어느 한 방향을 돌아보았고, 그 눈짓을 따라 같은 곳을 돌아본 로열나이트들은 모두들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아.”
“맞다.”
“그러네.”
수백에 달하는 수하들?
소드 마스터에 필적하는 강자?
그래서 뭐.
그게 뭐 대수라고.
싸움에 끼지 않은 두 사람.
앞서 싸우며 쪼렙들의 경험치를 뺏는 대신 그저 황제를 지키고 있던 유더와 코델리아의 존재.
모두의 시선에 유더는 머쓱하니 웃었고, 코델리아는 엣헴 거리며 어깨를 으쓱이더니 유더를 돌아보며 말했다.
“유더야, 유더야.”
“어, 코델리아야.”
“이 김에 해결할까?”
“좋지.”
산왕 관련 이벤트도 은근 꽤 되었으니까. 겸사겸사 키라라도 안심시키고. 어차피 넘어야 하는 아사인 고개니까. 오히려 산채에서 쉬어가는 쪽이 황제와 황태후에게도 좋지 않을까?
“주, 주인님?”
키라라가 당황해서 눈을 깜박이자 코델리아는 다정하게 웃으며 그런 키라라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그럼 가자.”
“그래.”
유더와 코델리아는 속이 까만 미소를 짓더니 어느 한 방향을 향해 돌아섰다.
아사인 고개 깊은 곳.
산왕의 산채를 향해 나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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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50장 - 존버엘프 #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