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06장 - 유더 바이엘 >
제106장 - 유더 바이엘
“허억! 헉!”
등 뒤에서 숨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황태후가 분명했다.
그렇기에 키라라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짐은 등에 업고 있는 황제만으로도 충분했다.
아니, 충분한 걸까?
애당초 키라라 자신이 짐을 져야만 하는 것일까?
‘무거워.’
문 크리스탈을 사용한 직후.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약 10여분 전.
레드 게이트 밖으로 공간 도약이 끝난 그 순간 제일 먼저 정신을 차린 것은 사라였다.
“키라라! 한 번 더!”
“다, 당장은 안 돼요!”
사라의 다그침에 키라라는 반사적으로 외쳤다. 문 크리스탈은 하루에 세 번 밖에 사용할 수 없다는 제약 외에도 한 가지 제약이 더 있었으니, 바로 연속 사용이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물론 소위 말하는 쿨타임이 그렇게까지 길지는 않았다. 하지만 1분 1초가 아쉬운 상황인 만큼 사라는 차선을 택했다.
“도망쳐야 합니다!”
사라의 외침에 황태후는 바로 답하지 못 하고 헉헉거렸다.
엘리오 롬바르디의 살기를 정면에서 뒤집어쓴 대가였다.
필사적으로 용기를 쥐어짜내 어찌어찌 블링크 스크롤을 사용했지만 이 이상은 무리였다.
얼굴이 하얗게 질린 황태후는 땀을 뻘뻘 흘리며 주저앉았고, 일어나지 못 했다.
다리에 힘이 풀린 탓이었다.
“황태후 전하!”
사라는 급히 황태후를 들쳐 업었고, 거의 노려보는 것 같은 시선으로 키라라를 보았다.
“히에에?”
“놀랄 때가 아니다! 황제 폐하를 업어!”
사라의 명령에 다시 힉하고 놀란 키라라는 허둥지둥 황제를 등에 업었다.
오랜 세월 눈칫밥을 먹다보니 정면에서 명령하면 저도 모르게 따르고 마는 것이 키라라의 버릇이었다.
“마인 경.”
“알겠다.”
마인은 어느새 울음을 터트리기 시작한 황제의 어린 동생들을 양쪽 옆구리에 끼웠다.
하지만 문제는 아직도 황제의 동생이 하나 남았다는 사실이었다.
“거, 걸을 수 있다.”
바로 그때 황태후가 억지로나마 몸을 일으켜 세웠다.
비지땀을 흘리며 헉헉 거리는 꼴이 몹시도 불안했지만 달리 방도가 없었기에 사라는 남은 황족- 정확히는 황제의 막내동생인 어린 황녀를 한팔에 들고 나머지 팔로 황태후를 부축하였다.
“가자!”
혹시나 하는 마음에 약속해둔 장소가 있었다.
사라의 재촉에 키라라는 달리기 시작했고, 문 크리스탈의 재사용 시간이 될 때마다 공간 도약을 펼쳤다.
그리하여 지금.
문 크리스탈을 처음 사용해 레드 게이트로부터 도망친 지 10여분이 흐른 순간.
‘무거워.’
이제는 거리가 제법 되었다.
하지만 안전하다고 자신할 수 없었다.
주인님들은 레드 게이트에 남으셨고, 다른 로열나이트들의 상황 또한 알지 못 했다.
‘도망쳐야 해.’
레드 게이트의 엘프들이 쫓아올 것이 분명했다.
금방 자신들을 찾아낼 것이 분명했다.
엘프들이었으니까.
추적의 달인들이었으니까.
‘무거워.’
키라라 자신과 덩치만 보면 별로 차이도 나지 않는 황제였다.
벗어던지고 싶었다.
무거운데다 헉헉 거리는 황제를 버리고 보다 빨리 도망치고 싶었다.
더욱이 황제는 중요한 인물이었다. 엘프들이 황태후나 다른 황족들은 포기하더라도 황제만은 붙잡으려 할 것이 분명했다.
즉, 제일 위험한 인물이란 소리였다.
‘키라라 이 멍청아 빨리 버려. 그리고 도망쳐. 목숨보다 귀한 게 어디있어? 일단 살아야 해. 무조건 살아남아야 한다고!’
머릿속에서 누군가가 말했다.
아니, 키라라 자신이 말했다.
도망쳐야 해.
배신해야 해.
살아남으려면 어쩔 수 없어.
살아남는게 제일 중요해.
약속했잖아.
무슨 일이 있어도 살아남겠다고 약속했잖아.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눈을 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환상이 보였다.
결코 지워지지 않는 기억들이 다시 한 번 머릿속을 뒤덮었다.
살아야 해. 살아남아야 해. 그러니까 어쩔 수 없어. 나쁜 건 내가 아니야. 그러니 배신하자. 그러니 혼자라도 도망치자. 황제를 버리고 가면 나 하나 정도는 엘프들도 그냥 보내줄거야. 도둑고양이 따위 그냥 놓아줄 거라고.
그러니 버리자.
그러니 배신하자.
그러니-
‘안 돼! 배신하면 안 돼!’
키라라는 마음속으로 외쳤다. 고개를 마구 흔들어 기억을 떨쳐냈다. 머릿속에 울리던 목소리 역시 몰아냈다.
‘배신 안 할 거야.’
이번에는 안 할 거야.
아직 배신할 때가 아니야.
그래, 아직이야.
아직이야.
아직, 아직, 아직.
‘아니야! 배신하기 싫어! 아직 같은 게 아니야!’
코델리아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코델리아의 품이 떠올랐다. 그녀의 온기가 기억났다.
안 돼.
이번만은 안 돼.
이번만은 싫어.
아직 괜찮잖아? 위험하긴 하지만 아직 아슬아슬하잖아?
‘코델리아는 이미 죽었을 지도 몰라.’
그러니까 쫓아오지 않지.
거기다 너도 봤잖아? 레드 게이트에는 엘프들이 많아. 개중에는 소드 마스터들 중에서도 강하다는 엘리오 롬바르디까지 있어. 그러니 끝이야. 이미 죽었을 거야. 그러니까- 그러니까-
‘닥쳐!’
머릿속에서 계속해서 울리는 목소리에 저항했다.
이제는 정말 자신의 마음인지, 아니면 누군가의 속삭임인지 알 수 없는 그것에 강하게 저항했다.
‘주인님은 신이야! 신이라구!’
그러니까 괜찮아.
그러니까 웃으며 나타나실 거야.
다시 꼭 안아주실 거야!
키라라는 엉엉 울면서 달렸다. 절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코델리아의 이름을 몇 번이나 반복해서 불렀다.
“이쪽이다! 이 귀쟁이 놈들아!”
카이사가 크게 소리치며 쇠사슬을 휘둘렀다.
레드 게이트 밖.
코델리아 덕분에 높은 성벽을 넘은 카이사는 키라라와 사라가 어느 쪽으로 향했는지를 간파했다.
그리고 그랬기에 전혀 다른 방향으로 이동했다. 엘프들을 유인하기 위함이었다.
“카이사! 옆에”
루카스의 외침이 귀에 닿은 순간 카이사는 돌아보는 대신 몸부터 날렸다. 바닥을 굴러 옆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엘프 기사의 검을 피한 그녀는 짧게 쥔 쇠사슬을 휘둘러 놈의 복부를 강타했다.
“컥!”
쇠사슬이 아니라 무슨 망치로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에 엘프 기사가 허리를 숙이며 컥컥거리자 카이사는 바로 연격을 펼쳤다. 엘프 기사의 다리를 후려 넘어트린 뒤 가슴을 짓밟아 버렸다.
콰직!
흉갑이 함몰되며 끔찍한 소리가 났지만 카이사는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 같은 얼굴로 꺽꺽 거리는 엘프 기사의 허리를 걷어찬 뒤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레드 게이트가 열리고 있었다.
자신들을 따라 성벽에서 뛰어내린 엘프들의 숫자만 열댓 명에 달했는데 문이 열리니 더 많은 엘프들이 보였다.
더욱이 이번에는 그냥 보병들이 아니었다. 준족으로 유명한 엘븐스티드 위에 올라탄 기사들이 몇 명이나 보였다.
“튀어!”
카이사는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하는 대신 돌아서서 달리기 시작했다.
그런 일행의 등 뒤로 엘프들이 쇄도했다.
‘혼자가 아냐.’
코델리아를 등에 업은 유더는 달리며 생각했다.
그림자 숲 전체의 지도를 떠올림과 동시에 작금의 상황에 대한 추론을 이어나갔다.
‘만약 예상대로 왕위 계승을 기다리지 못 해 일어난 일이라면.’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빈첸죠 롬바르디는 분명 엘프들의 대부였고, 제국의 엘프들이 지금처럼 대우받고 살 수 있게 만든 일등공신이었지만 인자하고 자상한 인물은 아니었다.
그는 다른 자들을 믿지 못 했다.
자수성가한 이들 대부분이 그러하듯이 다른 이들의 의견이나 생각보다는 자신의 경험을 최고로 쳤고, 오직 자신만이 엘프들을 이끌 수 있다는 확신에 차 있었다.
그렇기에 그는 가주직을- 사실상 제국 엘프들의 왕이나 다름없는 그 자리에서 결코 물러나지 않았다.
죽을 때까지 가주직을 수행할 생각이었다.
세일룬 왕국- 영원의 숲의 엘프들 사이에서는 이런 일이 생기지 않았다.
대부분 때가 되면 왕위를 물려주고 은퇴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유더는 엘리오를 이해했다.
호국공이 배신한 이유를 논리적으로 이해했던 것과 같았다.
‘레드 게이트 초입에서 쳤어.’
다른 엘프들이 보는 앞에서.
즉, 적어도 레드 게이트의 엘프들은 엘리오와 뜻을 같이한다는 소리였다.
구세대에 저항하는 젊은 세대들.
기득권을 움켜쥔 기성세대에 억눌려 신음하는 대신 혁신과 개혁을 외치며 새로운 길을 모색하려는 이들.
사람 사는 곳은 다 비슷한 법이었다.
전생에서도 몇 번이나 본 일들이었다.
‘엘프들 전체가 배신했을 가능성은 극히 낮아.’
빈첸죠 롬바르디는 악마 추종자라면 눈에 불을 켜는 자였으니까.
카마엘의 말처럼 엘프들은 해묵은 원한을 기억했다.
하지만 엘리오는 젊었고, 그를 따르는 엘프들은 더 젊었다.
‘정보의 부재. 정보의 격차.’
엘리오 롬바르디는 어디까지 알고 있을까.
어쩌면 그는 재상부 전체가 악마 추종자에 넘어갔다는 사실을 모를지도 몰랐다.
재상부가 대업을 위해 악마 추종자들을 이용하고 있다- 그 정도로 믿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애당초 악마 추종자들도 그렇게들 속였을 터이고 말이다.
‘오렌지 게이트까지는 엘리오의 소관이야.’
하지만 그 다음은 아니었다. 옐로우 게이트를 지키는 것은 그림자 숲의 유력 가문 가운데 하나인 바이렌 가의 가주였다.
“유더야!”
코델리아의 외침에 유더는 상념을 끊었다. 넓게 퍼트린 기감으로 상황을 인지했다.
엘프들에게 따라잡혔다.
단순한 기동력이라면 평범한 엘프를 아득히 능가하는 유더였지만 지금 이 곳은 숲이었다.
더욱이 그냥 숲이 아니었다.
천 년의 세월동안 엘프들과 교감해온 그림자 숲이었다.
유더는 빠르게 판단했다.
‘한 번 싸운다!’
이대로 뒤를 잡히는 것보다는 그쪽이 나았다.
유더는 급히 반전했고, 그것만으로 코델리아는 유더의 뜻을 읽어냈다. 날개를 활짝 펼치며 유더의 등을 박차 올랐다.
“빛이여!”
코델리아의 전신에서 무지막지한 빛이 방출되어 주변을 하얗게 물들였다. 그리고 그 순간 유더는 움직였다. 반전한 직후- 코델리아가 빛을 발하기 직전에 머릿속에 담아둔 경로를 따라 움직였다.
콰가가가가!
연달아 터진 굉음과 타격음이 하나로 이어졌다.
빛에 눈이 멀어 정신을 차리지 못 하던 엘프 일곱이 연달아 쓰러졌고, 유더는 인지했다. 빛이 일기 직전에는 없었던 존재의 공격을 막아냈다.
캉!
사마귀처럼 생긴 마인이었다.
어깨는 넓고 팔은 길어 바닥에 닿을 지경이었다.
놈의 겹눈이 번뜩였다. 낫과 같은 두 팔이 사정없이 몰아쳤고, 유더는 지면의 진동으로 마인 하나가 땅 속에 숨어 있음을 간파했다.
“죽어라!”
엘프들이 거칠게 소리치며 코델리아에게 달려들었다.
유더는 일단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마법의 시전을 방해하는 각종 주문들이 쏟아지는 것을 느꼈지만 코델리아를 믿었다.
숨을 멈추고 눈앞의 상대에 집중했다.
콰가가가가가가가-!
연격을 막아냈다. 아무리 빠르고 강하다 해도 결국 두 팔이 만들어내는 흐름이었다.
리듬과 패턴을 읽어냈고, 다름을 예상했다. 정확하게 쳐내 모든 공격을 무위로 되돌렸다.
마인의 얼굴에 당혹감이 번졌다.
그 당혹은 이내 두려움이 되었고, 유더는 좀 더 마인을 몰아붙였다. 속으로 숫자를 헤아렸다.
하나, 둘-
“키아!”
땅을 뚫고 마인이 솟구쳐 올랐다.
마치 매미의 유충을 떠올리게 하는 놈은 유더가 비워둔 옆구리를 가격했다. 그 순간 정면에 있던 사마귀 마인 역시 유더의 쇄골을 향해 낫을 휘둘렀다.
명중이었다.
피할 수 없는 각도와 속도였다.
그렇기에 두 마인의 공격은 유더의 옆구리와 쇄골을 강타했다!
카캉!
소리가 터졌다.
마인들이 기대한 소리가 아니었다.
뼈와 살이 갈라지는 소리 대신 마치 검과 검이 부딪히는 것 같은 소리가 났다.
피는 튀지 않았고, 마인들의 공격은 무위로 돌아갔다.
아니, 그저 무위로 돌아간 것이 아니었다.
유더가 오른손의 수도로 땅에서 솟구친 마인의 목을 베었다. 그 순간 휘두른 힘을 이용해 몸을 회전시키더니 그대로 사마귀 마인의 몸에 파고들었다.
“키아?!”
사마귀 마인이 당황하며 재차 낫을 휘둘러댔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유더의 수도가 놈의 가슴에 박혔고, 뽑아낸 순간 무지막지한 피가 튀었다.
“크악! 칵!”
사마귀 마인이 뒷걸음질 치며 곁눈을 깜박였다. 작금의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 했다.
어째서.
아니, 어떻게!
츠확!
유더는 대답을 주는 대신 날카로운 돌려차기로 사마귀 마인의 허리를 끊었다.
신검합일.
사용자를 검으로 만들고자 했던 블랙 혼 길드의 바람.
소드 오리진은 단순히 사지만 강화하는 것이 아니었다. 전신을 강화하는 신물이었다. 흑룡의 기운을 씌우면 사실상 팔이나 옆구리나 그게 그거였다.
“유더! 뒤에!”
긴박한 외침이었다. 그리고 그 외침으로 유더는 코델리아의 상태를 읽어냈다.
엘프들을 상대로 선전하고 있음을 믿으며 시선을 돌렸다.
[옵니다.]
벨렌시아의 말대로였다.
마인들과 충돌해 싸우는 사이에 엘리오 롬바르디가 거리를 좁혔다.
한 번 싸우고 물러나려 했지만 역시 무리였던 모양이다.
‘엘리오 롬바르디.’
그가 유더를 향해 쇄도했다.
< 제106장 - 유더 바이엘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