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엔딩메이커-306화 (306/473)

< 제107장 - 비보 #2 >

&

엘리오가 배신한 순간, 황족들과 함께 도주한 것이 키라라와 사라였던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만약의 사태를 대비한 유더의 인사 배치였다.

‘그림자 숲의 엘프들 가운데 소드 마스터는 셋.’

그 셋이 전부 배신했을 경우는 상정하지 않았다.

애당초 그런 상황이면 답이 없었으니 말이다.

‘물론 그럴 가능성 자체가 거의 없다고 봐서 그런 거지만.’

나머지 둘은 엘리오의 파벌이 아니었다.

물론 그림자 숲의 엘프들은 모두가 엘프들의 대부 빈첸죠 롬바르디의 수하들인 터라 빈첸죠의 의사에 따라서는 소드 마스터들뿐만 아니라 엘프들 전체가 황제의 적이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악마 추종자들을 이용하는 것 정도는 감수할 수 있다는 엘리오와 달리 빈첸죠 롬바르디는 악마 추종자라면 이를 가는 이였다. 그런 빈첸죠가 악마 추종자들은 물론이고 마인들까지 거느린 재상부와 손을 잡을 가능성은 한 없이 0에 가까웠다.

‘아무튼 엘리오의 독단이라 본다면.’

일행이 각기 흩어져서 도주할 경우 엘리오는 유더 자신을 추적해올 가능성이 높았다.

다른 병력으로도 상대가 가능한 황제나 로열나이트들과 달리 유더 자신과 코델리아는 오직 엘리오만이 상대가 가능했기 때문이다.

‘안 쫓아오면 어떻게든 쫓아오게 할 생각이었고.’

어찌되었든 정황은 유더의 예상대로 흘러갔다.

엘리오 롬바르디와 마인들은 유더 자신과 코델리아를 추적해왔고, 황제와 로열나이트들에게는 일반적인 엘프 병력이 붙었다.

‘문크리스탈이 있으니 도주 자체는 황제가 제일 유리해.’

거기에 키라라와 사라는 도주의 프로들이었다.

공간 도약까지 손에 쥐어준다면 도망치지 못 할 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역시나 추적이 집중되는 것은 로열나이트들.’

그리고 그들을 위협할 수 있는 전력이라면 소드 마스터들과 사실상 같은 항렬에 놓아야 하는 상급 마인들.

그래서 유더는 루카스와 카이사를 황제에게 붙이는 대신 레온에게 붙였다.

상대가 소드 마스터라면 루카스와 카이사가 힘을 합친다 해도 상대하기 버거울 터였다.

하지만 상급 마인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졌다.

“아싸 좋구나!”

카이사가 휘두른 성스러운 쇠사슬이 상급 마인의 몸을 단단히 옥죄었다.

투구벌레처럼 생긴 거대한 상급 마인은 완력을 발휘해 쇠사슬을 끊으려 했지만 도저히 무리였다.

“어, 어째서?”

손가락 한 마디 굵기조차 되지 않은 쇠사슬이거늘.

상급 마인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사실 당연한 일이었다.

데몬 프린스조차 억압하고 있던 쇠사슬을 상급 마인 따위가 끊어내는 것은 불가능했다.

더욱이 카이사의 쇠사슬은 그냥 단단하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성스러운 태양의 빛이여!”

“크아악!”

카이사가 주문을 외우자 쇠사슬 전체에서 황금빛 태양의 기운이 발산되었다.

태양신 솔라리의 힘이니 지옥에 근간을 둔 상급 마인들에게 있어서는 상극이나 다름이 없었다.

“크오오!”

상급 마인은 온몸을 비틀며 힘을 발하려 했지만 그것도 쉽지 않았다. 카이사의 상상을 초월한 괴력 때문이었다.

몸을 뒤틀어도 카이사는 꼼작도 하지 않았다. 아무리 크다고는 해도 여자인 터라 기껏해야 수십 kg밖에 나가지 않을 터인데도 상급 마인의 괴력에 당당히 맞서고 있었다.

물론 카이사로서도 지금이 한계였다.

상급 마인을 훌륭히 봉쇄하고 있었지만 힘과 마력을 총동원해서 붙잡고 있는 게 전부였다.

이쪽도 저쪽도 공격 수단이 없다.

하지만 속수무책인 상급 마인과 달리 카이사에게는 대책이 있었다.

“루카스!”

카이사의 부름에 루카스가 호응했다.

성왕십자검.

수많은 악마들을 베어 인계를 지킨 성왕의 검.

성왕십자검은 인간을 대상으로 발전한 검술이 아니었다. 애당초 악마들을 상대하기 위해 만들어진 검술이었고, 그렇기에 성왕십자검의 오의 하나하나는 악마들에게 치명적인 위력을 자랑했다.

루카스는 숨을 가다듬었다.

사슬에 묶인 채 몸부림치는 상급 마인에게 돌진했고, 놈이 발악하듯 쏟아낸 촉수들에 당황하지 않았다. 최소한의 움직임만으로 촉수들을 피하고 차단한 뒤 성왕의 검을 펼쳐보였다.

그랜드 크로스.

성스러운 천계의 십자가.

성왕십자검의 오의에 직격당한 상급 마인의 육신을 거대한 순백의 십자가가 뒤덮었다. 그리고 그것은 솔라리의 기운과 하나가 되어 상급 마인을 불태웠다.

“크아아······.”

상급 마인이 재가 되어 흩어졌고, 루카스는 숨을 한 차례 토한 뒤 검을 회수했다. 영지에 있을 때 혼자서 연습한 보람이 있었는지 검집에 검을 꽂아 넣는 모습이 흡사 영웅 소설의 한 장면 같았다.

“재는 재로, 먼지는 먼지로.”

빌트바인 영웅전의 주인공인 빌트바인의 결정대사를 아주 작게 읊조린 루카스는 살짝이지만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실로 만족스러운 승리였기 때문이다.

“오오 루카스! 믿고 있었다구!”

카이사가 활짝 끌어안으며 루카스의 목을 끌어안았다. 거침없는 스킨십에 깜짝 놀란 루카스는 어정쩡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 어······.”

“어 뭐?”

“아, 아닙니다.”

루카스는 애써 눈동자를 굴려 다른 곳을 보았다.

카이사가 목을 끌어안아 당기니 자연스럽게 루카스의 얼굴이 카이사의 가슴 바로 앞으로 이동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카이사는 개의치 않는다는 듯- 아니, 일부러인 듯 오히려 더 세게 당기더니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무튼 잘했어. 역시 강해. 멋져.”

원색적인 칭찬이 부끄러웠지만 솔직히 싫지는 않았다.

이전 레온과 대련했을 때 드러났듯이 칭찬과 인정에 굶주린 루카스였기 때문이다.

“흠흠.”

루카스가 뺨을 붉히며 헛기침을 토하자 카이사의 눈이 가늘어졌다. 무언가 계략을 성공시킨 책사 같은 미소를 짓더니 루카스의 목 대신 허리를 안으며 말했다.

“나랑 호흡도 잘 맞고 좋은데? 앞으로도 같이 다닐까?”

“예, 어차피 일행이기도 하니까요.”

“흐음.”

카이사가 살짝 못마땅한 표정을 짓자 루카스는 당황했지만 잠깐 뿐이었다. 루카스 나름의 답을 찾아냈기 때문이다.

“카이사도 정말 굉장했습니다. 상급 마인을 완전히 봉쇄했으니까요. 정말 감탄했어요.”

“음··· 뭐······ 흐흣.”

아닌 척 하다가 결국 활짝 웃은 카이사는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런데 언제까지 존댓말 쓸 거야?”

“예?”

“아니, 우리도 이제 꽤 가까워졌잖아? 존댓말 쓰고 그러면 딱딱한 느낌이니까.”

카이사가 머리칼 끝을 살짝 꼬며 말하자 루카스는 다시 어버버 거리며 말했다.

“그, 그래도 말을 놓는 건 좀······.”

이러나저러나 루카스보다는 세 살이나 연상인 카이사였으니 말이다.

“괜찮아, 괜찮아. 그냥 카이사라고 불러.”

“으응··· 아, 알았어. 카이사 누나.”

루카스가 수줍게 말하자 카이사의 얼굴에 다시 미소가 번졌다.

누나라고 하는 게 살짝 아쉽긴 했지만, 그게 또 귀엽기도 한 터라 아무튼 좋은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런 두 사람을 지켜보던 이가 하나 있었으니.

“서두르는 게 어떨까 합니다.”

상급 마인들과 함께 나타난 엘프 병력을 쓰러트린 레온과 로열나이트들이 뚱한 얼굴로 말하자 루카스는 눈에 띄게 당황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 으, 예. 그러죠. 카이사 양···이 아니라 카이사 누나. 어서 가자.”

“흐흣, 그래.”

씩 웃은 카이사는 앞장서라는 듯 레온에게 눈짓을 보냈고, 레온은 짧은 한숨을 한 차례 토한 뒤 앞장서서 달리기 시작했다.

목표지점은 황제와 만나기로 약속한 장소.

빠르게 치고나가는 로열나이트들과 카이사의 뒤- 최후방에 자리해 뒤를 지키던 루카스는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레드 게이트 너머.

유더와 코델리아가 도망친 방향.

‘부디 무사하기를.’

무척이나 강한 두 사람이었지만 그래도 단 둘이서 적진에 들어간 셈이었으니까.

기도를 마친 루카스는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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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더는 천천히 눈을 떴다.

낯선 천장 대신 익숙한 것이 보였다.

커다란 나뭇가지들과 거기서 뻗어 나온 나뭇잎들로 뒤덮인 하늘.

현실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꿈 역시 아니었다.

익숙한 장소.

유더 자신의 영육 속에 자리한 소드 오리진 벨렌시아의 거처.

“후대, 정신이 드나요?”

다정하고 부드러운 목소리에 유더는 목소리를 내어 대답하는 대신 몸을 일으켜 세웠다.

목이 말랐다.

어차피 벨렌시아의 거처에서는 그저 정신체만이 존재하는 셈이었지만, 그래도 목이 말라 무어라 목소리를 내기 어려웠다.

“아직 지친 감이 남아 있어서 그래요.”

나무 밑둥에 몸을 기대고 앉은 유더에게 다가선 벨렌시아는 나무잔을 하나 내밀었다.

“마셔요, 도움이 될 거예요.”

유더는 시키는대로 나무 잔 안에 든 하얀 액체를 삼켰다.

단숨에 원기가 회복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좀 살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후대, 이야기 할 수 있나요?”

“한 잔··· 한 잔만 더 주실 수 있을까요?”

“잠시만 기다려요.”

그렇게 말한 벨렌시아가 잔 위를 손바닥으로 한 번 덮었다 떼자 다시 하얀 액체가 잔 안에 가득찼다.

“다른 곳에 저장해둔 걸 가져온 거예요.”

어떻게 하는 것일까.

그리고 애당초 영혼 속인데 이 하얀 액체는 어떻게 만든 걸까.

유더는 더 의문을 갖는 대신 바로 액체를 삼켰다.

처음에는 아예 맛을 몰랐는데 고소한 맛이 나는 것 같았다.

“맛있죠? 제 기운이 담겨서 그렇답니다.”

방긋 웃은 벨렌시아는 바닥에 아무렇게나 앉았다. 그러자 졸졸졸 냇물 흐르는 소리와 작은 새 소리 같은 것들이 들리기 시작했다.

제대로 파고들지 않아서 몰랐을 뿐이지 소드 오리진 안은 생각 이상으로 넓은데다가 다양한 것들이 들어 있는 모양이었다.

아마 방금 마신 액체도 소드 오리진 안에 있는 여러 가지 것들을 조합해서 만든 것이리라.

“하아.”

나무잔을 내려놓은 유더는 어깨를 늘어트리며 한숨을 토했다. 하얀 액체 덕분인지 안에서 기운이 끓어올라 점점 더 정신이 또렷해지는 것 같았다.

그렇게 몇 분이나 지났을까.

유더는 무어라 재촉하는 대신 그저 기다리고 있던 벨렌시아에게 말했다.

“검리를 보았습니다.”

길의 끝에 자리하고 있던 지평선.

저만치 먼 곳에 서 있던 남자가 도달한 경지.

검리라는 단어를 누군가 알려준 것은 아니었다.

그저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검리.

이치.

검의 길을 걷는 자들이 도달하고자 하는 궁극적인 영역.

벨렌시아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소드 오리진의 검령인 그녀는 유더와 한 몸이나 다름이 없었다.

때문에 유더가 펼친 바람의 검을 마치 자신이 펼친 것처럼 소상히 알 수 있었다.

“후대가 사용한 검술은 처음 보는 것이었어요. 후대가 제게 알려준 적이 없는, 후대조차 모르는 검술이었죠.”

바람의 검.

유더는 바람의 검을 제대로 배운 적이 없었다.

유더가 사용할 줄 아는 것은 바람의 검의 기초적인 부분들뿐이었다.

그런데 유더가 사용한 풍뢰열광참은 바람의 검의 정수라 할 수 있는 기술이었다.

어떻게 된 것일까.

아예 배운 적도 없던 검술을 어떻게 펼친 것일까.

그것도 검리까지 깃든 궁극의 검을.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벨렌시아의 물음에 유더는 바로 답하는 대신 일단 한 번 기억을 더듬었다.

엘리오 롬바르디와의 싸움.

칠문을 열기 위해 지금까지의 기억을 되짚었다.

일문에서 육문까지 각각의 문을 열었을 때 몸에서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지를 기억했고, 억지로 그것을 재현하였다.

음과 양의 조화가 아닌 충돌.

그로인해 발생한 막대한 기운.

칠문을 열었고, 지평을 보았다.

지평과 자신 사이에 서 있던 남자.

오랜만에 모습을 드러낸 선녀.

그녀가 자신에게 한 말.

유더는 천천히 자신이 겪은 것들을 이야기했고 벨렌시아는 유더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뭔가··· 아실 것 같나요?”

유더의 물음에 벨렌시아는 미간을 좁혔다.

“솔직히 모르겠는 거 투성이에요. 제칠문을 연 과정 자체가 황당하기 그지 없으니까요.”

벨렌시아의 말은 진심이었다.

그런 식으로 칠문을 열 줄이야.

아니, 그런 것이 가능할 줄이야.

“다만··· 지평은 좀 알 것 같네요.”

선녀와 남자에 대해서는 벨렌시아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유더가 보았던 지평이라면 벨렌시아도 본 적이 있었다.

“검리.”

검의 길을 걷는 자들이 궁극적으로 도달하고자 하는 곳.

그것은 근원이었고 곧 세상의 이치였다.

오직 깨달은 자만이 도달할 수 있는 지고의 영역이 있다면 그곳이 바로 저 지평의 너머이리라.

“저도 검리에 닿았어요.”

벨렌시아는 담담하게 말했지만 실로 굉장한 일이었다.

기나긴 엘프들의 역사 속에서도 검리에 도달한 검사들의 숫자는 한 손으로 겨우 꼽을 정도에 불과했으니 말이다.

“후대, 다시 한 번 보여줄 수 있나요?”

엘리오 롬바르디를 제압했던 바람의 검을.

유더는 고개를 끄덕인 뒤 자리에서 일어섰다.

흑룡의 기운을 길게 뽑아 검을 만드는 대신 벨렌시아가 건네 준 목검을 쥐고 자세를 잡았다.

풍뢰열광참.

기억에 의존해 펼쳤다.

비록 칠문을 열지 않아 그 위력이 많이 약해지긴 했지만 애당초 벨렌시아가 보고자 했던 것은 풍뢰열광참의 형이었다.

열세 번의 참격으로 이루어진 강력한 연계기.

유더의 풍뢰열광참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본 벨렌시아는 미간을 좁혔다.

그리고 그 이유를 유더는 알았다.

풍뢰열광참을 펼친 유더 스스로가 느꼈기 때문이다.

“후대, 지금 후대의 검에는 검리가 담겨있지 않아요.”

그랜드 소드 마스터에 임박한 엘리오 롬바르디조차 완벽하게 제압했던 풍뢰열광참.

하지만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검리가 담겨있었기 때문이다.

유더의 검에는 지금 검리가 담겨있지 않았다.

그저 빠르고 위력적인 검에 불과했다.

“하지만······.”

말꼬리를 흐리던 벨렌시아는 작게나마 미소 지으며 말을 맺었다.

“후대의 검술이 크게 늘었어요. 그것만은 분명해요.”

지금까지 유더의 검은 지나칠 정도로 계산적이었다.

압도적인 신체 능력과 무지막지한 기운을 이용한 패도적이면서도 날카로운 검술.

하지만 지금은 조금 달랐다.

검리가 담긴 것은 아니었지만, 분명히 한 걸음을 내디뎠다.

깨달음을 얻어야지만 가능한 변화.

하지만 유더는 물론이고 벨렌시아도 알았다. 유더는 지금 깨달음을 얻은 상태가 아니었다.

“지금으로서는··· 구천구문에 비밀이 있는 것 같네요.”

벨렌시아의 의견에 유더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선녀와 길 위에 서 있던 남자에게 해답이 있을 것 같았다.

“스승님을 만나면 상담해봐야겠습니다.”

구천구문의 전문가는 란디우스였으니까.

하지만 유더의 말에 벨렌시아는 미간을 좁히더니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음··· 하지만 지금 이야기를 들으면 란디우스가 화병이 나지 않을까요?”

무리하게 팔문을 열려고 한다든지.

벨렌시아의 주장은 무척이나 타당했지만 유더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에이 설마요.”

란디우스인데.

스승님인데.

“뭐··· 후대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죠.”

말과 달리 별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듯 쓴 웃음을 지은 벨렌시아는 다시 유더에게 다가섰다.

“아무튼 후대, 지금은 좀 더 자세요.”

아직 회복이 되려면 멀었으니까.

벨렌시아는 유더의 이마를 검지로 찌르며 다정하게 속삭였고, 유더는 마치 마법에 걸린 것처럼 눈을 감았다.

다시 한 번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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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이다. 유더 표정이 편안해졌어.”

유더에게 무릎베개를 해주고 있던 코델리아가 활짝 웃자 멜리사도 기분 좋은 목소리로 말했다.

[네, 이제는 편히 주무시는 것 같네요.]

“그치? 다행이야.”

유더의 잠든 얼굴을 쓰다듬으며 코델리아는 안도의 숨을 토했다.

이러나저러나 정말 걱정했으니 말이다.

약혼자를 순수한 마음으로 걱정하는 약혼녀.

보기만 해도 훈훈해지는 광경이었지만 스칼렛은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왜?”

“아니··· 뭐, 하긴. 에인션트 블랙 드래곤도 잡은 애들인데 이제와서 소드 마스터 정도는 새삼스럽지.”

저만치 구석에서 짐짝처럼 놓여 있는 엘리오 롬바르디.

코델리아에게 자세한 사정을 들은 스칼렛은 어디 갈 때마다 큰 사건에 휘말리는- 아니, 이쯤되면 큰 사건을 일으키는 것 같은 유더와 코델리아에게 여러 가지 의미로 감탄한 뒤 현실적인 이야기를 꺼냈다.

“아무튼 그럼 여기서 좀 쉬다가 유더 깨어나면 가는 거야? 저치 데리고?”

“응, 스칼렛도 같이 갈래? 아니, 같이 가자. 도와줘요 언니. 네?”

“이럴 때만 언니래.”

코델리아의 애교에 스칼렛은 흥흥 거렸지만 내심 싫은 눈치는 아니었다.

제국의 운명을 건 대사건에 로그 마스터로서 참여한다는 것이 무척 매력적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거기에 루카스 공자도 간만에 볼 겸.’

왕도에 있을 때는 그냥 그랬는데, 이상하게 왕도를 떠나고나자 가끔씩 머릿속에 얼굴을 들이미는 루카스였다.

코델리아를 돕고 싶다.

함께 제국을 구하고 싶다.

하지만 스칼렛은 선뜻 입이 열리지 않았다.

한 가지 사실 때문이었다.

‘그런데 도움이 되긴 할까?’

솔직히 실력에는 자신이 있었다. 또래 중에는 상대가 별로 없다고도 자부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유더와 코델리아 앞에서는 작아질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이야기를 들어보니 소드 마스터 급 적들이 심심하면 튀어나올 것 같은 상황이었다.

이런 와중에 과연 스칼렛 자신이 도움이 되긴 하는 것일까?

“스칼렛은 검술도 잘하고 마법도 잘하잖아? 거기에 잠입공작도 뛰어나고··· 제국 사람이라 제국 실정에 대해서도 밝지?”

“흠······.”

마치 스칼렛 자신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코델리아가 딱 적절한 답을 내어주었다.

스칼렛 자신의 가치.

“흠······.”

스칼렛이 다시 말끝을 흐리자 코델리아는 빙긋 웃었다. 스칼렛의 바람을 간파했기 때문이다.

‘하여간 단순해. 단순.’

스칼렛이 들었다면 다른 사람도 아닌 네가?!라며 역정을 낼 생각이었지만 흐흣 웃은 코델리아는 계속해서 스칼렛의 칭찬을 늘어놓았다.

“변장도 잘하구, 미인계 같은 것도 쓸 줄 알구, 손재주도 좋구······.”

“알았어, 알았어. 같이 갈게. 대신에 너희도 내 일을 하나 도와줘.”

코델리아의 칭찬세례에 얼굴이 빨개진 스칼렛이 손을 내저으며 말하자 코델리아는 바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동물적인 직감을 발휘해 말했다.

“저거 말하는 거지?”

스칼렛을 며칠 째 붙잡아둔 로그 마스터의 비밀문.

“맞아, 블랙망토가 깨어나면 도움 좀 받아볼까 해서.”

인정하긴 싫었지만 유더의 머리는 진짜배기였으니까.

하지만 스칼렛의 말에 코델리아는 고개를 끄덕이는 대신 조심스럽게 일어섰다.

“코델리아?”

“유더까지 갈 필요 없어. 내가 열어줄게.”

코델리아의 말에 스칼렛은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지은 뒤 말했다.

“야, 쉽게 보지 마. 블랙망토라면 모를까 핑크폭탄 네가 열만한 물건이 아니거든? 참고로 말하지만 언락 주문도 안 통한다?”

[코델리아 님, 제 생각에도 좀 무리가 아닐지······.]

마법의 천재라 해도 과언이 아닐 코델리아였지만 놀라운 지성을 발휘해 로그 마스터의 암호를 파훼하는 모습은 상상이 가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코델리아는 거침없이 걸어 비밀문에 부착된 패널 앞에 섰고, 스칼렛은 끌끌끌 혀를 차며 말했다.

“그래, 도전하는 건 자유니까. 내가 널 무시해서 하는 말은 아닌데, 나도 못 한걸 네가 잘도 열겠다.”

[그게 무시하는 말 같기는 하지만 저도 살짝 동의······.]

“열었다.”

[하지 않아요!]

멜리사는 급히 말을 바꾸었고, 스칼렛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방금 뭐라고?

“열었다.”

다시 한 번 말한 코델리아는 씩 웃으며 비밀 문을 활짝 열었다. 문자 그대로 넋이 나간 스칼렛에게 매력적인 윙크를 건네며 어깨를 으쓱였다.

“참 쉽죠?”

머리는 기억하지 못 해도 몸은 기억하고 있었으니까.

아니, 환생한 상황이니 영혼이 기억한다고 해야 할까.

자꾸 유더에게 묻혀서 그렇지 코델리아도 당당한 썩은물 가운데 하나였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을 아는 것은 코델리아 본인뿐이었다.

영문을 모르는 스칼렛은 망치로 뒤통수를 맡은 사람처럼 어버버 거리며 눈을 깜박였다.

“어어? 어어으?”

코델리아가 열었어?

내가 사흘 넘게 매달렸는데도 열지 못 한걸?

코델리아가?

그 코델리아?

[전 처음부터 믿고 있었답니다.]

“너 거짓말 완전 티 나거든?”

멜리사의 말에 흥흥거린 코델리아는 다시 스칼렛에게 손짓했다.

“아무튼 열었으니까 빨리 챙기자.”

로그 마스터의 비보.

코델리아의 손짓에 반사적으로 일어선 스칼렛은 활짝 열린 문앞에서 다시 당황하더니 코델리아를 돌아보며 말했다.

“야.”

“왜.”

“너 혹시 일부러 그런 거야? 블랙망토 앞에서 막 귀여워 보이려고 멍청한 척을 했다든가··· 사실 그게 다 연기였다든가······.”

[헉, 저 지금 막 소름 돋으려고 해요.]

스칼렛과 멜리사의 말에 코델리아는 인상을 구겼다. 듣자 듣자하니까 이것들이 못 하는 말이 없어.

“내가 챙긴다?”

저거 그냥 내가 먹는다?

코델리아의 경고에 스칼렛은 흠칫하더니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유더 이상의 지략가- 아니, 음험한 음모가일지 모를 코델리아에게 괜히 반항하는 대신 로그 마스터의 비보에만 집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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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07장 - 비보 #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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