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08장 - 그랜드 소드 마스터 >
제108장 - 그랜드 소드 마스터
엘룬 이브레아.
추밀원에 소속된 12가문 가운데 하나인 이브레아 가문의 가주.
순혈 하이엘프인 그녀는 같은 하이엘프인 빈첸죠 롬바르디의 먼 친척이었는데, 항렬만 따진다면 엘리오의 고모뻘 되는 인물이었다.
‘그랜드 소드 마스터.’
그림자 숲만이 아니라 대륙 전역에 존재하는 엘프들 가운데서 최강의 검사.
하지만 나이는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이제 겨우 이백여 살 남짓.
인간 기준으로는 굉장히 연로한 나이였지만 엘프, 그것도 천 년을 살아가는 하이엘프로 따지면 이제 이십대 초반에 불과한 어린 나이였다.
하지만 그녀는 엘프들 가운데 오직 둘 밖에 없는 그랜드 소드 마스터 가운데 하나였고, 많은 이들에게 최강의 엘프로 여겨졌다.
다른 하나인 성십자 수호단의 엘사리온 프라임이 너무 연로한 탓이었다.
그리고 사실 엘사리온이나 호국공이 그러했던 것처럼 너무 연로한 나머지 신체가 약해진 경우를 제외한다면, 소드 마스터의 나이를 따지는 건 무의미한 일이었다.
‘그야말로 될 놈 될이니까.’
소드 마스터는 노력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었다.
물론 노력하지 않는 자가 소드 마스터가 되는 것은 불가능했다. 하지만 노력한다고 모두 소드 마스터가 되는 것 역시 아니었다.
벨렌시아의 해설에 따르면 소드 마스터는 검리의 지평을 바라볼 자격을 얻은 자들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검리의 지평이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 했고, 설사 그 존재를 안다 할지라도 바라보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그랜드 소드 마스터는 지평을 향해 나아가는 자들.
그렇기에 나이가 중요하지 않았다.
벨렌시아의 말에 따르면 중요한 건 경험과 기술이 아닌 깨달음의 유무였으니 말이다.
[그래서 후대는 사기인 거예요.]
깨달음도 없는데 왜 지평을 바라보는 거죠?
사실 기존의 유더는 제대로 된 소드 마스터가 아니었다.
단순 스펙이 너무 강하다보니 소드 마스터조차 꺾을 수 있는 강자가 된 것일 뿐, 검에 대한 깨달음 따위 조각조차 얻지 못한 상태였으니 말이다.
그런데 이제는 정말 소드 마스터가 되었다. 마치 구렁이가 담을 넘어가듯 자연스럽게 경지에 오르더니 이제 지평을 바라보며 나아가고 있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 것일까.
천무지체이기 때문인 것일까?
아니면 다른 무언가가 더 있는 것일까.
‘엘룬 이브레아.’
유더는 눈앞의 상대에게 집중했다.
쪼그려 앉은 채 반쯤 조는 것 같은, 나른한 눈으로 이쪽을 바라보는 맨발의 여인.
영웅전기2에서 그녀는 엘리오와 함께 등장했다.
그림자 숲에 닥친 재앙에 맞서 싸울 동료로 말이다.
‘원작에서는 결국 듀크한테 죽었지.’
악마의 손의 최상급 마인.
란디우스를 뺀다 할지라도 영웅전기2에 등장하는 마인들 가운데서 가장 많은 네임드 캐릭터를 죽인 자.
‘그런데 왜 저렇게 쳐다보지?’
원작의 엘룬은 매사에- 정확히는 검 외에는 관심이 없는 여인이었다.
그녀는 타인과의 교류를 말 그대로 귀찮아했다. 얼마나 타인에게 관심이 없는지 사람 이름을 외우는 것조차 제대로 하지 못 할 정도였다.
그런데 이쪽을 바라보는 시선이 심상치가 않았다.
반쯤 감긴 나른한 눈에 숨길 수 없는 호기심이 어려 있었기 때문이다.
“소개 안 해줘? 다시 말하자면 나는 엘룬인데.”
쪼그려 앉아 있기도 귀찮아졌는지 엘룬은 바닥에 누우며 그리 말했다. 웅크린 채 흐느적거리는 것이 무척이나 자연스러웠다.
“세일룬 왕국에서 온 유더 어거스트 바이엘 백작입니다. 이쪽은 제 약혼녀인 코델리아 어거스트 체이스 백작이고······.”
“로그 마스터의 후예인 스칼렛 바이퍼입니다.”
유더에 이어 스칼렛이 자신의 이름을 밝히자 엘룬이 희미하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유더. 유더. 유더. 유더. 유더. 유더 어거스트 바이엘. 외웠어. 나머지는 뭐라고 했지? 카델리아? 바이칼? 음, 몰라도 상관없겠지.”
무례하기 짝이 없는 말에 스칼렛의 인상이 구겨졌지만 코델리아는 조금 다른 의미로 눈매를 날카로이 했다.
엘룬이 본래 저런 인간- 아니, 엘프인 것은 이미 잘 알고 있던 터라 이름을 제대로 외우지 못 하는 건 별로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
그런데 뭐지.
왜 유더 이름에 저렇게 집착하는데.
엉?
왜 외우려고 하는데?
‘생각해보니 소드 마스터에 에로프잖아.’
그야말로 안 좋은 건(?) 다 갖춘 셈이었다.
코델리아의 눈빛이 보다 흉흉해졌지만 엘룬은 관심이 없다는 듯 유더만 보며 말을 이었다.
“일단 까먹기 전에 중요한 것부터 말할게. 빈첸죠 할아버지가 화가 정말 많이 나셨어. 엘리오는 아마··· 적어도 백 년은 햇빛을 보지 못 할 거야.”
가벼운 어조로 말하고 있었지만 그녀의 말마따나 중요한 내용이었다.
‘역시 엘프 전체가 이반한 게 아니야.’
빈첸죠 롬바르디는 이쪽 편이다.
물론 이 모든 게 낚시이고 오렌지 게이트 안에 들어가서 안심할 즈음에 엘룬의 급습이 이어질 수도 있었다.
하지만 유더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다른 누구도 아닌 엘룬이었으니까.
그녀에게 그런 귀찮으면서도 고도의 연기력을 필요로 하는 일은 절대 무리였다.
‘그럴 거면 애당초 이 자리에 엘룬이 아닌 다른 이가 나왔겠지.’
유더가 그렇게 생각하는 와중에 엘룬은 입을 몇 번 뻐끔거리더니 이내 손바닥을 펼치고 무언가를 읽기 시작했다.
커닝 페이퍼라도 있는 모양이었다.
“아, 그래. 그리고 빈첸죠 할아버지가 오렌지 게이트로 오고 계셔. 황제 폐하를 모시고 싶으니 계신 곳을 알려달라고도 하셨어. 알려주면 우리가 모셔올게. 추밀원에서 특별히 그림자 기사단을 데려왔어. 황제 폐하를 모시는데 실례가 없도록 할 거야. 의심이 다 풀리지 않았겠지만 그래도 부디 믿어줬으면 해. 휴, 다 했다.”
읽기를 마친 엘룬이 해맑게 웃자 도끼눈을 뜨고 있던 코델리아와 스칼렛조차도 표정을 풀 수밖에 없었다.
너무나 맑고 순수한 미소였기 때문이다.
“알겠습니다. 엘프들을 믿어보도록 하죠.”
유더가 즉답하자 엘룬은 다시 한 번 배시시 웃더니 마치 유령처럼 스르륵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그럼 빈첸죠 할아버지가 시키신 일은 끝났으니까, 다음은 내 용무를 볼게.”
말이 끝났을 때 엘룬은 이미 서 있었다.
모든 동작이 너무나 자연스러운 나머지 눈앞에서 움직이고 있음에도 움직이고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마치 바람이 불고 물이 흐르는 것처럼 말이다.
“이야기를 들었어.”
엘룬의 옷차림은 무척이나 야했다.
팔은 하얀 어깨를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고, 치마 역시 너무 짧아 허벅지가 전부 드러날 지경이었다.
하지만 야하다는 생각이 조금도 들지 않았다.
하얀 원피스 차림의 그녀는 자연의 일부일 뿐이었다.
“엘리오를 이겼다며? 그것도 완전히 찍어 누르듯이.”
목격자들의 보고였고, 크게 틀리지도 않았다.
검리가 담긴 풍뢰열광참 앞에서 엘리오는 일방적으로 몰리다 패배했으니 말이다.
“그래서 나도 해보고 싶어. 너도 나랑 해보고 싶지 않아?”
엘룬의 초록빛 눈동자에 은은하지만 꺼지지 않는 열망의 불꽃이 일었다.
사실 이는 드문 일이었다.
엘룬은 타인과의 대련조차 귀찮아 하는 일이 많았으니 말이다.
“어떻게 생각해? 응? 나랑 하지 않을래?”
엘룬이 아이처럼 조르며 한 걸음을 내디뎠다. 그리고 그 순간 유더는 손바닥을 앞으로 내밀어 엘룬을 정지시켰다.
“조건이 있습니다.”
유더의 말에 모두가 주목했다.
거절이 아닌 제안.
조건의 제시.
코델리아의 눈이 살짝 가늘어졌고, 스칼렛은 어느새 성벽 위에 가득 찬 엘프들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엘룬이 물었다.
“뭔데? 뭘 해야 하는데?”
“대단한 조건은 아닙니다. 그냥 대련을 하기 위한 비용 정도로 생각해주세요. 엘룬 님이 제 소원을 하나 들어주셔야 합니다.”
유더의 말에 코델리아의 눈이 더욱 가늘어졌고, 스칼렛은 ‘설마?’ 하는 얼굴로 엘룬을 보았다.
대련 한 번 하자고 저런 조건을 수락하지는 않겠지?
“알았어, 그렇게 할게. 그럼 이제 하는 거야?”
하지만 역시 엘룬이었다.
생각할 겨를조차 없었을 거 같은 즉답이었다.
그랬기에 유더는 무척이나 다정하면서도 친절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아뇨, 조건이 더 있습니다. 대련이라도 승패는 있기 마련이니까요. 제가 이기면 소원을 하나 더 들어주셔야하고, 제가 지면 소원을 하나 더 들어주셔야 합니다.”
“어?”
저도 모르게 말한 것은 스칼렛이었다.
아니, 잠깐.
이겼을 때랑 졌을 때랑 조건이 똑같잖아?
이거 완전 사기 아니야?
하지만 이번에도 엘룬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그럴게.”
“그럼 여기 사인하시죠.”
그리 말한 유더는 언제 준비해뒀는지 계약서 한 장을 꺼내 엘룬에게 다가갔다. 물론 인장을 찍을 빨간색 인주도 준비해둔 상태였다.
엘프들이 적이 아니라면 엘룬이 나올 거라 이미 예상한 바였기 때문이다.
“여기 찍으면 돼?”
“예, 거기 찍으시면 됩니다.”
엘룬이 이번에도 고민 없이 지장을 찍자 스칼렛은 저도 모르게 신음을 삼켰다.
‘저기요, 조건란이 지금 공란이거든요?’
저러면 나중에 아무 내용이나 써넣을 수 있거든요?
사실상 사기 계약이나 다름이- 아니, 그냥 사기 계약이었다.
“감사합니다.”
속이 까만 미소를 지은 유더는 계약서를 돌돌 만 뒤 코델리아에게 다가갔다.
“여기.”
“흐으응.”
코델리아는 다소 마뜩찮은 얼굴이었지만 계약서를 받아든 뒤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자신은 있구?”
이러나저러나 그랜드 소드 마스터인 엘룬이었으니까.
코델리아의 물음에 유더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걱정 돼?”
“아니, 안 돼.”
새침한 대답에 유더는 다시 웃었다.
옆에서 스칼렛이 괴로움을 호소했지만 신경 쓰지 않고 코델리아의 뺨을 가볍게 꼬집어준 뒤 돌아섰다.
‘그랜드 소드 마스터.’
언젠가 반드시 마주해야 할 제일검과 같은 경지에 오른 자.
분명 강했다.
하지만 이길 수 없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유더 역시 엘룬과의 대련을 갈망했다.
실험하고 싶은 것들이 있었으니까.
칠문을 열며 새로이 손에 넣은 것들이 있었으니까.
오문을 열었을 때 얻은 투시안과 육문을 열었을 때 얻은 정신방어.
칠문도 같았다.
또 하나의 이능을 유더에게 선사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칠문을 열고 다시 한 번 선녀를 마주했기에 또 한 번의 진보를 이룬 것.
“이제 하는 거야?”
엘룬의 손에는 검이 들려 있었다.
쉽게 부러질 것처럼 가늘고 긴 검이었지만 그 위에는 그랜드 소드 마스터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강대한 검강의 빛이 어려 있었다.
유더는 고개를 끄덕였다.
두 팔을 늘어트림과 동시에 칠문을 열었다. 갑작스러운 기의 개방으로 오렌지 게이트 전체를 뒤흔들며 엘룬을 보았다. 나른하면서도 환희에 찬 표정을 지으며 돌진해오는 그녀를 인지했다.
강하다.
그러니 숨기지 않는다.
처음부터 전력을 다한다.
[후대는 사기꾼이에요.]
벨렌시아의 말에 웃으며 펼쳐보였다.
신뢰십이보迅雷十二步.
세 번째 발걸음.
하늘을 뒤덮는 그것은 흑뢰번천黑雷翻天.
검은 번개들이 세상을 뒤덮은 그때.
엘룬의 시야에서 유더가 사라졌다.
&
< 제108장 - 그랜드 소드 마스터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