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엔딩메이커-321화 (321/473)

< 제113장 - 마음대로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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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델리아는 눈을 떴다.

아침.

아니, 대낮.

아니, 그것도 아닌가. 모르겠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따위 알 수 없었다.

그냥 며칠이 지났다고 해도 믿을 것 같았다.

몸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뭔가 붕 뜬 느낌.

하지만 동시에 아늑하다는 기분도 들었다.

따뜻한 온기.

조금씩 돌아오기 시작한 감각을 통해 느껴지는 단단함.

언제나 믿고 의지할 수 있는 든든한 품.

코델리아는 눈동자를 굴렸다.

예상대로 유더의 얼굴이 보였다.

눈을 감고 있는, 멋있고, 잘생기고, 아무튼 진짜 쩔어주는 얼굴.

‘미쳤나봐.’

솔직히 콩깍지가 쓰인 건 인정했다.

그런데 오늘따라 콩깍지 보정이 더 강해진 기분이었다.

그리고 유더의 어깨.

거기서부터 이어지는 형태가 뚜렷한 크고 단단한 팔.

코델리아 자신을 안고 있었다. 실오라기 하나 사이에 두지 않고 맨살끼리 맞닿아 있었다.

새삼 얼굴이 달아올랐다.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꿀꺽 삼켰다.

어젯밤.

유더는 평소와 달랐다.

코델리아 자신이 아는, 언제나 냉정하고 침착한 그런 유더가 아니었다.

‘짐승.’

그래, 짐승.

진짜 이러다 잡아먹히는 건 아닌가- 그런 생각조차 들었으니까.

‘맨날 나보고 짐승이라더니.’

그런데 왜일까.

자꾸만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은. 슬금슬금 미소가 새어나왔다.

어젯밤.

처음에는 그래도 배려라는 걸 하는 것 같았다.

조급함을 애써 억누르며 스스로를 억제하는 것이 눈에 보였으니까.

하지만 그리 오래 가지는 않았다.

안달하는 모습이 불쌍해서, 그리고 솔직히 코델리아 자신도 달아올라서 다시 한 번 말했을 때- 그러니까 한 번 더 마음대로 하라고 말했을 때.

유더는 정말 짐승이 되었다.

짐승이란 말 외에는 표현할 길이 없었다.

키스도, 손길도 모두 평소와는 달랐다. 훨씬 더 격렬하고 또 격렬했다.

잡아먹힌다.

정말로 잡아먹힌다.

“아우.”

어제의 기억을 떠올리던 코델리아는 더더욱 얼굴을 붉혔다.

새삼 어제의 자신이- 그 순간 떠올렸던 생각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겁이 나는데 좋아.

무서운데 좋아.

아픈데도 좋아.

잡아먹히고 싶어.

“아우우우.”

미쳤지 진짜.

이게 다 카이사 때문이었다.

카이사가 이상한 책을 줘서 정신을 오염시킨 탓이었다.

그 다음.

그 이후.

코델리아 자신도 나름 격렬해졌던 것 같았다.

유더가 너무 짐승 같아서 코델리아 자신의 격렬함은 그냥 애교로밖에 보이지 않았겠지만, 나름 짐승이 되긴 했던 것 같았다.

‘그리고······.’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머릿속이 정말 하얗게 변했으니까.

책에서 본 것과 다르게 상대가 유더라 그런지, 아니면 유더가 천무지체라 그런지, 아니면··· 아, 몰라. 아무튼 좋았다. 너무 좋아서 아무 생각도 못 할 정도였다.

‘그냥······.’

중간에 몇 번 의식을 잃었던 것 같기는 하다.

유더의 격렬함에 깨고 졸도하고 깨고 졸도하고.

‘하여간 진짜 짐승이야.’

오늘부터 짐승이라고 놀리기만 해봐라.

자기야말로 짐승인 주제에.

‘응응, 우리집 짐승.’

우리집 사기꾼이면서 우리집 짐승.

이게 뭐라고 다시 웃음이 나왔다.

코델리아는 살짝 입술을 깨문 뒤 눈동자를 굴렸다. 다시 유더의 얼굴이 보고 싶어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우리 공주님, 일어났어요?”

오랜만에 듣는 속삭임이었다.

제3자의 시선으로 보면 닭살이 돋다 못 해 닭으로 변신할 것 같은 멘트요 목소리였지만 코델리아에게는 다르게 들렸다.

그야말로 흐물흐물 녹는다고 해야 할까.

얼굴이 다시 달아올랐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싶었다.

하지만 유더의 커다란 팔에 팔이 눌려 있는 상태라 그것도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우으우.”

코델리아는 묘한 소리를 흘리며 그나마 자유로운 오른손으로 주변을 짚었다. 새삼 알몸인 게 신경쓰여서였다.

가리고 싶다.

이미 서로 다 보여준 사이지만 그래도 가리고 싶다.

하지만 이번에도 뜻대로 되지 않았다.

유더의 입술이 목에 닿았고, 간지럽다며 움찔하는 순간 유더의 혀끝이 쇄골을 핥았다. 짜릿한 감각과 함께 허리가 휜 것은 불가항력이었다.

“너어······.”

말도 잇지 못 했다.

유더가 조금 더 아래쪽을 복숭아 베어 물듯 앙하고 문 탓이었다.

그리고 혀.

가만히 있을 생각을 하지 않는 혀끝.

코델리아는 입술을 깨물어 버텼다. 새어나오려는 소리를 애써 억누르며 유더를 흘겨보았지만 위치상 눈을 마주치는 것은 무리였다.

“우읏.”

그래, 그렇게 나온다 이거지?

코델리아는 그나마 자유로운 오른손을 움직였다. 반격을 가하기 위해 유더의 장골에 손을 얹었고, 그대로 미끄러지듯 내려보냈다.

절대로 단련할 수 없다는 약점을 공격하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막상 그 약점에 닿은 순간.

“흐에에?”

키라라 같은 목소리를 내고 말았다.

뜨겁고 크고 아무튼 불같고.

“씨, 씻을까? 어, 씻을래. 나 씻고 싶어.”

어버버 거리며 말을 잇자 유더가 움직임을 멈췄다. 그대로 고개를 들어 코델리아를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원한다면.”

그리고 번쩍.

어찌 저항할 틈도 없었다. 저도 모르게 꺅 소리를 내며 유더의 목에 매달리는 게 고작이었다.

“가자.”

“아니, 그······.”

혼자 씻을 수 있거든?

하지만 소리없는 아우성일 뿐이었다.

아우아우 하는 동안 유더는 어느새 아래층에 있는 목욕탕으로 이동했고, 욕조 안에 코델리아를 내려놓았다.

“자, 씻자. 목욕시중 들어줄게.”

능청스러운 말에 코델리아는 다시 흠칫했다.

목욕시중?

갑자기 왜?

부, 부끄럽거든?

하지만 입술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그 사이에 유더는 마법으로 욕조를 채우더니 어제 가져다 놓은 것 같은 목욕도구들을 챙겨들었다.

“자, 잠깐만.”

겨우 목소리를 낸 코델리아는 나름 열심히 몸을 가린 뒤 최대한 유더의 얼굴만 보기 위해 노력하며 말했다.

“너, 넌 왜 벗고 있는데. 어?”

백작가의 시녀들은 목욕시중 들어줄 때 다들 옷 입고 있었거든?

나름 논리적인 주장이었지만 지금의 유더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유더가 훨씬 더 직관적인 논리를 내세웠기 때문이다.

“물이 튀면 젖잖아.”

그렇지.

물이 튀면 젖겠지.

그러니까 아예 벗고 있는 게 편하겠지.

“자, 어차피 허리에 힘이 없어서 몸도 잘 못 가누잖아? 내가 다 해줄게.”

아니, 야. 애당초 허리 나간 게 누구 때문인데.

그, 그리고 왜 또 그런데. 어? 왜 또 어마어마한데.

“모, 목욕만 하는 거야. 알았지? 목욕만 하는 거다?”

코델리아의 말에 유더는 답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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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목욕만 한다고 했잖아!”

한나절 뒤.

밀려온 어둠과 노을이 뒤섞여 보랏빛 하늘을 만들 때.

유더의 등에 업힌 코델리아는 앙증맞은 주먹을 휘두르며 항의했고, 유더는 언제나처럼 논리적으로 대답했다.

“그런 적 없는데?”

목욕만 한다고 한 건 너고.

나는 대답한 적 없거든?

“우씨, 진짜 미워 죽겠어!”

앙칼진 소리였지만 유더는 미소를 잃지 않았다. 믿는 구석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싫었어?”

“뭐가.”

“싫었냐구.”

천연덕스러운 물음에 코델리아는 입술을 깨물더니 고개를 슬쩍 돌렸다. 정직한 천사답게 얼굴을 붉히며 중얼거렸다.

“···왤케 잘하는 건데.”

사실 답은 알고 있었다.

그놈의 천무지체.

몸으로 하는 건 다 잘한다고 그렇게 유세를 떨더니 정말이었다.

그리고 궁합도 좋았으니까.

정말로 날 때부터 하나가 될 운명이었던 것처럼 모든 게 잘 맞물렸으니까.

“으휴.”

누구에게인지 모를 한숨을 토한 코델리아는 다시 유더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런데 이제 보니 좀 이상한 것이 있었다.

“유더야.”

“왜 코델리아야.”

“그런데 너 아까부터 뭘 먹는 거야?”

달리는 와중인데도 틈틈이 뭔가를 마시고 있었으니까.

코델리아의 물음에 유더는 다시 한 번 씩 웃더니 작은 유리병을 들어올렸다.

“정력제.”

“어?”

“아버님이 주신 정력제.”

코델리아는 눈을 깜박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뭐라고?

지금 누가 뭘 먹는다고?

“머, 먹지 마! 먹지 말라고!”

안 그래도 힘든데!

힘들어 죽겠는데!

니, 니가 그걸 왜 먹어!

어? 누굴 죽이려고!

“괜찮아 코델리아. 네 몫도 있으니까.”

유더는 빙긋 웃으며 다른 병 하나를 들어 올렸고, 코델리아는 기대와 흥분과 두려움과 아무튼 만감이 뒤섞인 얼굴로 울상을 지었다.

“아우으으.”

“흠, 생각보다 더 반응이 좋은데?”

미친놈이 뭐라는 거야.

반응이 좋긴 뭐가 좋아.

“짐승. 오늘부터 짐승이야. 짐승.”

“응, 짐승. 짐승이지. 짐승이고 말고.”

흐흐흐 웃기까지 하니 진짜 짐승 같았다.

“너 왜 이래. 너 이런 캐릭터 아니었잖아.”

“아닌데. 이런 캐릭터 맞는데. 아주 그냥 짐승인데.”

실없는 농담을 주고 받으며 달리기를 얼마일까.

유더는 어느 순간 멈춰 섰고, 얼굴을 너무 붉힌 끝에 약간의 어지러움까지 느끼던 코델리아는 시선을 멀리하였다.

“별의 무덤.”

영웅전기2에서도 경관이 아름답기로 소문난 장소.

과연 이번에도 그러했다.

저 멀리 지평 너머로 사라지는 태양과 어둠에 녹아 흐르는 노을.

보랏빛 하늘 아래 펼쳐져 있는 넓은 분지와 빛을 받아 반짝이는 별의 파편들.

하지만 최고는 역시 분지를 가득 채운 흐드러지게 많은 꽃들이었다.

바람이 전해준 꽃의 향기.

숨을 깊이 삼킨 코델리아는 유더의 어깨에 턱을 얹은 채 눈을 감아보았다.

영웅전기2에서 별의 무덤에 오면 들을 수 있는 노래가 귓가에 들리는 것 같았다.

“아니, 잠깐. 진짜잖아?”

진짜 노래 소리.

머릿속에서 만들어낸 기억의 재생이 아닌 지금 이 순간 바람을 타고 들려오는 노래.

얼른 눈을 뜬 코델리아는 마법으로 시력을 강화했고, 유더 역시 이능을 발동시켜 멀리 보았다.

밤이 오고 있었다.

도도한 달빛과 함께 검은 드레스를 걸친 달의 여신이 모습을 드러냈고, 수많은 별들이 그 뒤를 이었다.

밤이라 하여 빛이 없는 것이 아니었다.

분지를 가득 채운 하얀 꽃들이 달빛을 받아 빛났고, 부는 바람 따라 춤추던 이들이 반딧불이처럼 저마다의 빛을 발했다.

날개 달린 요정들.

불의 속성력을 상징하는 파이어 페어리.

“예쁘다. 쥐불놀이 같아.”

“아니, 쥐불놀이는 좀··· 뭐, 예쁜 건 동의하지만.”

쓰게 웃은 유더는 코델리아를 고쳐 업은 뒤 말을 이었다.

“원작에서는 딱히 페어리들이 없었는데··· 사라졌던 걸까?”

“아마도?”

원작에서 7대 재앙이 강림하기 시작한 이후로는 페어리들을 찾아보기가 정말로 힘들어졌으니까.

“아무튼 잘 됐네. 일석이조겠어.”

가리우스의 무덤을 찾아왔는데 파이어 페어리들까지 만난다니.

이제까지 모은 페어리들의 가호가 여섯이었으니, 파이어 페어리의 가호까지 추가하면 일곱이었고, 이는 곧 요정왕의 가호까지 딱 한 걸음이 남았다는 걸 의미했다.

“춘하추동 풍수지화.”

사계의 가호와 사성의 가호.

그로 말미암아 탄생하는 영웅전기2 최강이라 불리는, 하지만 누구도 이루지 못한 환상의 가호인 요정왕의 가호.

“신나.”

절로 어깨가 들썩거릴 지경이었다.

“그럼 쉬었다가 내일 가자.”

“어?”

“아니, 만전을 기하는 게 좋으니까. 낮에 가리우스의 무덤을 탐험하고 밤에 파이어 페어리들을 만나자.”

“그럼 오늘은?”

오늘 밤은?

코델리아의 물음에 유더는 말없이 미소를 흘렸다. 아까 마시던 정력제를 새삼 들어 올리며 말이다.

“짐승.”

정말로 진짜.

짐승, 짐승, 짐승!

유더는 딱히 부정하지 않았다. 툴툴 거리면서도 빨개진 얼굴로 목을 꼭 끌어안는 코델리아와 함께 미련 없이 돌아섰다.

잠자리로 삼을만한 곳을 찾아 시선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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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대는 짐승이에요.]

< 제113장 - 마음대로 #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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