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엔딩메이커-325화 (325/473)

< 제114장 - 수호자 #3 >

&

검리.

검의 지평.

근원인 동시에 궁극.

지평을 바라보는 것은 가능하다.

하지만 도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지평은 이상과 같으니 닿을 수 없는 것이 이치이다.

하지만 지평을 향해 나아가는 자들이 있었다.

도달할 수 없는 환상의 경지에 닿기 위해 몸부림치는 자들이 있었다.

무수한 노력과 무수한 시도.

최초의 검사로부터 시작된 검의 계보는 수많은 이들에게 이어졌고, 지평으로 이어지는 수많은 길들이 탄생하였다.

만류귀종.

서로 다르나 결국엔 하나로 이어지는 길.

수많은 검사들이 저마다의 길을 걸었다.

지평은커녕 앞서간 이의 등을 좇기 급급한 이들도 있었고, 아무리 걸어도 닿지 않는 지평을 원망하며 울부짖는 자들도 있었다. 결국엔 포기하여 멈추고만 자들 역시 적지 않았다.

하지만 기적은 일어나기 마련이었다.

장구한 검의 역사 속에서 지평에 닿는 자들이 나타났다.

정말로 극소수였다.

무수히 많은 검사들 가운데서 겨우 몇 사람에 불과했다.

검리.

검의 지평.

닿을 수 없는 것에 닿아 기적을 일으킨 자들.

지평에 섬으로서 검리를 깨우친 자들.

사람들은 그들을 가리켜,

하늘의 검이라 불렀다.

&

검은 기운이 하늘을 뒤덮는다.

땅을 누르고 세상을 집어삼킨다.

구천구문.

어둠에 경기장이 지워졌다.

신전이 사라졌다.

어둠 속에 표표히 선 자만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유더는 숨을 쉴 수 없었다.

그저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혀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지금까지 경험해보지 못 한 위압감이었다.

왕도에서 마주했던 제일검도, 남부에서 세상을 진감시키던 말레키스도 지금 같은 위압감을 발하지는 못 하였다.

검리에 닿은 검사.

하늘의 검.

“커흑, 컥.”

억지로 숨을 쉬었다.

서툰 숨을 토하며 똑같이 구천구문의 힘을 발하였다.

제칠문.

구천구문이 추구하는 초월의 경지에 다가선 상태.

검리로 비유하자면 이제 막 지평을 보기 시작했다고 좋을 상황.

그렇기에 유더는 알 수 있었다.

눈앞의 유더- 검은 사내의 구천구문은 아직 그 수준이 낮았다.

제오문.

하지만 구천구문은 그 단계가 모든 것을 결정하지 않았다.

구천구문은 단순하게 보면 버프 계열의 기술이었다.

사용자의 모든 능력을 배가 시킨다.

때문에 사용자 자체의 역량 역시 중요했다.

똑같이 제칠문이라 하나 유더의 칠문과 란디우스의 칠문은 달랐다.

개문하지 않았을 때의, 순정 상태의 능력치에 어마어마한 격차가 존재했기 때문이다.

10에 100을 곱하는 것이 20에 100을 곱하는 것 간의 차이.

눈앞의 유더도 그러했다.

제오문에 불과했지만 발산하는 기운은 오히려 제칠문에 도달한 유더 자신을 능가했다.

[후대! 정신 차려요! 후대!]

벨렌시아의 목소리가 유더의 정신을 뒤흔들었다.

그녀 또한 검리에 닿은 검사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비록 영혼만 남아 검령이 된 그녀였지만, 그 영혼의 강함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후대!]

효과가 있었다.

벨렌시아의 거듭된 외침에 유더는 스스로를 찾을 수 있었다. 억지로 호흡을 바꾸었다.

땀이 비오듯 흘렀다.

등골이 서늘한 동시에 목이 탔다.

그리고 생각했다.

눈앞의 유더는 누구인가.

가리우스는 기억하는 최강의 검사라 말했다.

기억.

유더 자신의 기억.

[와요!]

벨렌시아가 먼저 나섰다.

아스칼론이 찬란한 황금빛을 발하며 검은 사내에게 쇄도했다.

빠르고 강맹하다.

마치 빛살과 같았다.

하지만 검은 사내는 이치를 터득한 자였다.

벨렌시아의 검로를 읽었다.

똑같이 지평에 닿았다고는 하나 육신을 가진 자와 그렇지 못한 자 사이의 격차는 분명했다.

바람이 분다.

거친 질풍이 인다.

바람의 검.

바이엘 백작가의 시조가 창시하여 수백 년간 이어져 온 그것.

유더는 알 수 있었다.

바람의 검의 궁극이 저기에 있었다.

그 누구도 도달하지 못 했던 진정한 바람의 검이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아아악!]

벨렌시아가 고통스러운 비명을 질렀다.

단순한 검격의 교환이 아니었다.

검은 사내의 기운은 너무나 강맹했다.

그 영혼으로부터 비롯된 어둠과 살기는 그저 닿는 것만으로도 주변을 파괴하기 충분하였으니, 검이 한 번씩 오갈 때마다 벨렌시아는 영혼이 불타는 고통을 느껴야 했다.

“아아아!”

유더가 소리쳤다.

이를 악물고 정신을 집중했다. 이미 지금의 싸움이 시험이란 사실은 잊었다. 각개격파를 피하기 위해 지면을 박차올랐다.

흑뢰번천.

벼락이 쳤다.

검은 사내의 범위 안에 유더가 들어섰고, 벨렌시아가 재차 몸을 날렸다. 영역 안에 들어선 유더를 두 동강 내려던 칠흑의 검을 간신히 막아냈고, 유더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찰나를 파고들어 맹진했다.

하지만 읽히고 말았다.

검은 사내는 그 모든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허공에 검을 휘둘렀고, 유더는 마치 빨려들 듯 그 일격에 휩쓸렸다.

유더 스스로가 검을 향해 몸을 던진 것은 아닌지 의심이 될 지경이었다.

쾅!

검격에 휩쓸린 유더가 지면에 내동댕이 쳐졌다. 벨렌시아가 급히 소리치며 그런 유더를 비호하려 했지만 무리였다. 검은 사내가 움직였다. 검은 질풍이 아스칼론을 거칠게 에워쌌고, 검은 사내의 발이 검신을 짓밟았다. 무지막지한 기운으로 벨렌시아의 영혼 자체를 몰아붙였다.

[크윽!]

벨렌시아는 결국 아스칼론에게서 의념을 거둘 수밖에 없었다.

강하다.

강해도 너무 강하다.

벨렌시아 자신이 육신을 가지고 있다 한들 과연 이길 수 있을지 의문일 정도로 엄청난 검사였다.

하지만 감탄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검은 사내의 살기는 진짜였다.

시험 운운하며 최악의 상황은 없을 거라 생각하는 것은 만용에 불과했다.

“하아··· 학.”

유더가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켜 세웠다.

아스카론의 기세를 완전히 죽여 버린 검은 사내가 그런 유더를 향해 돌아섰다.

하얀 얼굴에 드리운 깊은 피로.

심연과도 같은 검고 어두운 녹색 눈동자.

다시 바람이 불었다.

광풍이 일어 세상 모든 것을 집어삼켰다.

[후대!]

저항해야 했다.

발버둥이 된다 할지라도 광풍에 맞서야만 했다.

유더가 이를 악물었다. 몰아치는 바람에 맞섰다. 필사적으로 쏟아지는 검격에 저항했다.

쾅! 쾅! 쾅! 쾅! 쾅!

검은 사내의 검은 단순했다.

기교나 눈속임 따위는 조금도 없었다.

하지만 언제나 유더의 앞에 있었다.

유더는 검은 사내의 검을 피하지 못 했다.

마치 인과가 역전이라도 된 것처럼 검은 사내의 검에 노출되었다.

소드 오리진이라 하여 무적이 아니었다.

검격이 한 번 오갈 때마다 유더의 육신이 부서져갔다.

그나마 칠문의 힘이 어린 육신이기에 단번에 부서지지 않는 것이었다.

벨렌시아는 초조함을 느꼈다.

이대로 가면 패배는- 아니, 파멸은 시간문제였다.

어떻게든 유더를 지켜야만 했다.

무리임을 알면서도 무리를 해야만 했다.

소드 오리진 제2형태.

봉인검과 작금의 제1형태 다음에 존재하는 마지막 하나.

벨렌시아가 검령으로서의 힘을 발휘하였다.

소드 오리진은 물론이고 유더에게도 무리임을 알면서도 강제로 제2형태를 발동시켰다.

신검합일.

진정으로 검과 하나되는 상태!

쾅!

황금빛 섬광이 순간이나마 검은 기운을 몰아냈다.

아니, 순간 따위가 아니었다.

표표히 일어난 황금의 불꽃이 어둠을 살라먹었다.

검령 벨렌시아.

지평에 닿은 위대한 요정의 검사.

그녀의 영혼이 유더와 하나가 되었다. 소드 오리진을 보다 강하고 날카롭게 하는 동시에 영혼을 합쳐 더욱 강대한 영혼을 탄생시켰다.

유더가 벨렌시아의 영혼을 감당할 수 있을 것인가.

불완전한 합신이 서로의 영혼을 해치지는 않을 것인가.

고려할 때가 아니었다.

벨렌시아는 그저 유더에게 힘을 실어주는 것만을 생각했다.

[후대!]

마지막 외침이었다. 더 이상은 소리조차 지를 수 없었다.

검은 기운이 다시 황금의 불꽃을 집어삼키고자 노도처럼 밀려왔다.

미친바람이 모든 것을 부수기 위해 돌진해왔다.

유더는 벨렌시아를 느끼며 고개를 들었다.

아름답고 상냥한, 동시에 강대하기 짝이 없는 요정검의 힘으로 광풍에 맞섰다.

검이 교차한다.

검은 기운에 짓눌리지 않는다.

유더의 영혼이 벨렌시아의 영혼을 받아들임에 따라 황금빛 불꽃은 흑룡의 기운으로 화하였고, 검은 불꽃이 된 그것이 밀려드는 검은 바람 앞에서 아름답게 피어올랐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무리였다.

어찌어찌 기운의 총량을 맞추었지만 역량 차이가 존재했다.

검리가 담긴 검 앞에 유더는 조금씩 부서져 갔다.

하지만 유더는 포기하지 않았다.

문자 그대로 온몸이 부서져 가는 고통 속에서도 집중했다. 자신이 해야만 하는 일을 놓치지 않았다.

궁리.

계산.

가리우스는 말했다.

기억하는 최강의 검사라고.

상상이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분명 기억하는 것이라고.

기억.

알고 있다.

유더 자신은 눈앞의 검은 사내를 알고 있다.

의식의 수면 아래.

저 깊은 곳에 가라앉아 평소에는 들여다볼 수 없는 기억.

떠올려라.

일치시켜라.

기억하여 체득하라.

코델리아의 가슴을 찔렀다.

미안하다 말하는 그녀와 마지막 입맞춤을 나누었다.

마이아가 죽었다.

바일룬이 불탔다.

아버지가, 형이, 사랑하고 아끼던 모든 이들이 사라졌다.

“최고의··· 호적수니까요.”

루카스가 웃었다.

웃는 얼굴로 죽음을 맞이했다.

자신의 검 앞에 쓰러졌다.

끝없는 절망.

더 이상 지킬 것이 없어진 세상.

그럼에도 불구하고 싸워야만 하는 운명.

바람이 될 수밖에 없었다.

미친바람이 되어 몰아치는 것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검은 사내가 유더를 보았다.

유더 역시 검은 사내를 보았다.

검은 바람과 검은 불꽃이 뒤엉켜 하나가 되었다.

유더는 현실을 보았다.

검은 사내의 기억에 매몰되지 않기 위해 스스로를 떠올렸다.

자신을 자신으로 붙잡아둘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닻을 기억했다.

‘코델리아.’

그녀의 미소.

그녀의 온기.

“우오오오오오!”

유더가 포효했다. 검은 사내의 기억과 동조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검은 사내의 검을 분석하고 이해했다.

벨렌시아와 같은 검의 천재들과는 전혀 다른 방식이었다.

코델리아처럼 본능으로 느끼고 이해하는 것이 아니었다.

기억하고 계산한다.

해일처럼 밀려드는 검은 사내의 기억들을 계산하고 이해한다.

머리에 열이 올랐다.

동시에 가슴이 터질 것처럼 뛰기 시작했다.

검이 보인다.

한 발 늦게나마 따라잡을 수 있게 된다.

아주 조금이지만 검은 사내의 검이 어째서 저렇게 움직이는지 알 것만 같다.

몸이 뜨거웠다.

온몸이 바스러지는 것만 같았다.

그래도 유더는 멈추지 않았다.

뜨거운 숨을 토해가며 검은 사내의 검에 맞추었다.

기억 속의 자신을 재현했다.

검은 사내의 눈에 보이는 경치.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유더는 그 일부를 재현하는데 성공했다.

벨렌시아가 유더의 등을 밀어주었고, 검은 사내의 기억이 유더의 손을 이끌어주었다.

쾅! 쾅! 쾅!

일방적인 타격음이 아니었다.

검과 검이 맞물렸다.

유더의 검이 어떻게든 검은 사내의 검을 따라잡았다.

엘룬과 검을 섞었을 때와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하지만 본질적인 부분에서 닮아 있었다.

고통 속에서도 피어나는 환희.

벨렌시아는 저도 모르게 달뜬 숨을 토하였다.

검리에 도달했던 그녀였기에 더욱 검은 사내와의 검격에서 희열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유더는 취하지 않았다.

무아지경에 빠지는 대신 끊임없이 궁리하고 계산했다.

쾅!

격렬한 충돌.

서로가 밀려났다.

그리고 그 순간 유더는 이해했다.

지금까지와는 비교할 수 없는 것이 온다.

그저 휘두르는 것이었던 검격이 아닌, 진정한 바람의 검이 몰아닥친다.

풍뢰열광참.

검리가 담긴 그것이 작렬했다.

절망 그 자체인 검의 폭풍 앞에서 유더는 생각했다.

무아지경에 빠지지 않고 계속해서 계산했기에 가능한 판단이었다.

‘바람의 검으로는 안 돼.’

이제는 알 수 있었다.

바람의 검은, 엘리오를 꺾었던 풍뢰열광참은 눈앞의 검은 사내로부터 기인한 것이었다.

그러니 같은 바람의 검으로는 검은 사내와 맞설 수 없었다.

다른 검을 펼쳐야만 했다.

열세 개의 검격으로 이루어진 풍뢰열광참의 첫 번째 일격이 펼쳐진다.

그 순간 유더 또한 펼칠 수 있는 최강의 검을 펼쳤다.

흑익무극참.

벨렌시아와 유더 자신의 검.

지금의 유더가 카마엘의 설화십이검과 란디우스의 구극태양신공을 얻어 이룩해낸, 벨렌시아와 함께 만든 적멸의 검.

교차했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흑익무극참 역시 열세 개의 검격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풍뢰열광참과 흑익무극참이 정면에서 충돌했고, 예상대로의 일이 벌어졌다.

[후대!]

유더의 검은 검은 사내의 검과 같을 수 없었다.

어찌어찌 쫓아가고 있었지만 둘 사이의 격차는 분명했다.

유더가 부서져 간다.

검격이 한 번 교차할 때마다 유더의 영육이 파괴되어 간다.

하지만 유더는 멈추지 않았다.

이를 악물고 정면을 노려보았다.

검은 사내를 향해 울부짖으며 흑익무극참을 펼쳤다.

깎이고 부서지고 파괴된다.

하지만 멈추지 않는다.

약해짐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한 수 한 수가 펼쳐질 때마다 간격을 좁혀 나간다!

콰가강!

열두 번째 검.

이어지는 마지막 일수.

풍뢰열광참의 빛과 바람이 유더를 집어삼켰다.

동시에 흑익무극참의 검은 날개가 바람을 찢어발겼다.

유더는 검은 사내를 쓰러트리지 못 했다.

하지만 검은 사내 또한 마찬가지였다.

마지막 검은 상쇄되어 흩어졌고, 유더와 검은 사내는 서로를 마주하였다.

유더가 일으킨 작은 기적.

검은 사내는 검을 거두었다. 유더를 바라보며 옅게나마 미소를 머금었다. 슬픔과 절망으로 가득한 눈을 천천히 감으며 어둠에 녹아들었다.

“유더!”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세상을 뒤덮고 있던 어둠이 사라졌고, 코델리아가 보였다. 이쪽으로 달려와 안기는 그녀를 와락 끌어안았다.

“하아··· 하아··· 학······.”

유더는 거친 숨을 토하며 코델리아를 보듬었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들었다.

검은 사내는 사라졌다.

그의 기억은 한여름 밤의 꿈처럼 아득해졌다.

하지만 유더가 일으킨 작은 기적은 사라지지 않았다.

지평을 향해 이어진 길.

검은 사내의 등 너머로 보이는 것이 아닌, 유더 자신 앞에 온전히 모습을 드러낸 검의 지평선.

유더는 그것을 바라보았다.

가슴이 터질 것 같은 희열 속에 코델리아를 다시 한 번 끌어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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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14장 - 수호자 #3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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