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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딩메이커-326화 (326/473)

< 제115장 - 솔라리의 비보 >

제115장 - 솔라리의 비보

죽음이 두 사람을 갈라놓을지라도.

&

유더는 천천히 숨을 골랐다.

곧게 뻗은 길 너머에 자리한 지평의 광경은 이내 아지랑이처럼 사그라졌다.

단지 본 것이었다.

아직 지평에 닿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똑바로 서서 지평을 바라볼 수 있게 된 것만으로도 큰 성과라 할 수 있었다.

‘검성.’

유더는 그랜드 소드 마스터인 엘룬과 동수를 이루었다.

그녀뿐만 아니라 요정검 벨렌시아도 유더가 그랜드 소드 마스터들과 겨루는 것이 가능하다 생각했다.

하지만 진정한 그랜드 소드 마스터인 것은 아니었다.

초월적인 신체 능력과 소드 오리진의 특성, 여기에 더해진 구천구문의 압도적인 기운이 더해진 결과 검술 실력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그랜드 소드 마스터급의 전투력을 갖춘 것에 불과했다.

만약 벨렌시아가 없었더라면.

그녀의 검에 익숙한 상태가 아니었다면.

엘룬과 동수를 이루는 것은 절대 불가능했으리라.

그런데 이제는 아니었다.

유더는 자력으로 지평을 보았다.

깨달음을 얻어 그랜드 소드 마스터들과, 저 검의 괴물들과 진정으로 같은 눈높이를 갖추게 되었다.

그것이 의미하는 것.

검술 실력이 부족하던 와중에도 그랜드 소드 마스터급의 전투력을 갖추었던 자가 진정으로 검성에 어울리는 실력을 겸비하게 됨에 따라 이루어지는 폭발적인 전투력의 상승.

‘기억.’

깨달음을 얻었다.

하지만 정상적인 경로를 거쳐 얻은 것이 아니었다.

기억을 통해 획득했다.

본래 자신의 것이었던 것을 다시 한 번 손에 넣었다.

“기억.”

다시 읊조린 유더는 마른침을 삼켰다.

절망 대신 희망을 품은 녹색 눈동자에는 이제 검의 지평 대신 다른 것들이 보였다.

이미 아득해진 기억들.

하지만 하나하나 실감할 수 있었다.

결코 거짓된 기억이나 망상 따위가 아니었다.

야생의 땅의 야만족들과 북부의 전쟁.

아버지 바이엘 백작과 형 게일의 사망.

계속된 싸움 속에 죽어가는 이들.

불타버린 고향과 마지막까지 자신을 걱정하다 숨을 거둔 마이아.

적으로 마주한 스칼렛과 시신조차 수습할 수 없었던 카이사.

루카스는 좋은 호적수였다.

아니, 최고의 친구였다.

하지만 마인이 되고 말았다.

적에게 붙잡혀 강제로 마인이 되었고, 유더 자신의 손에 죽음을 맞이했다.

최후의 순간 성검 바리다사 덕분에 인성을 회복한 그가 남긴 말이 귓가에 아른거렸다.

그리고 한 사람.

유더 자신이 싸울 수 있었던 이유.

유더 자신이 싸워야만 했던 이유.

“코델리아.”

약하고 겁 많은 약혼자를 누나처럼 보듬어주던 소녀.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미소를 잃지 않았던 태양같은 여인.

마인이 되었다.

유더 자신의 손으로 그녀를 베어야만 했다.

“하윽··· 윽······.”

머리가 깨질 것 같았다.

아니, 가슴이 타들어갔다. 세상 전부를 잃은 것 같은 상실감이었다. 더 이상 그녀가 존재하지 않는 세상을 살아가야한다는 사실이 불러온 절망감에 미쳐버리고 말았다.

“하악.”

숨이 거칠어졌다. 눈물이 끝없이 흘러내렸다.

코델리아.

코델리아.

코델리아.

계속 싸워야만 했다.

코델리아의 유지를 이어, 세계를 지키기 위해, 어떻게든 코델리아가 사랑했던 세상을 지키고자-

껍데기 밖에 남지 않은 사람.

가슴이 까맣게 불타 재밖에 남지 않은 사람.

“코델리아.”

유더는 울면서 그리 말했다.

격앙된 감정을 억누를 수 없었다.

희열 뒤에 찾아온 어마어마한 슬픔.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코델리아가 자신의 품안에 있다는 사실에서 오는 기쁨과 안도, 감사-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감정들.

“유더야.”

코델리아는 억누른 목소리를 내었다.

유더가 너무 세게 끌어안는 통에 정말로 온 몸이 으스러질 것 같았지만 고통보다 더 신경 쓰이는 것이 있었다.

유더의 눈물.

어린아이처럼 엉엉 우는 유더.

“괜찮아, 괜찮아.”

코델리아는 다정하게 말하며 유더를 보듬었다.

예전에 그러했던 것처럼 달래주었다.

예전에.

예전에 그러했던 것처럼.

순간 위화감이 들었지만 코델리아는 신경 쓰지 않았다. 코델리아 자신의 얼굴이 보고 싶어 두 팔에 힘을 푸는 유더와 얼굴을 마주하였다.

“코델리아.”

“그래 나 맞아. 어디 안 가. 여기에 있어. 항상 곁에 있을 거야.”

저도 모르게 흘러나온 말이었다.

꼭 해주고 싶었던 이야기처럼, 가슴에 오랜 시간 담아온 이야기처럼 목소리가 나왔다.

코델리아는 유더의 뺨을 어루만졌다.

눈물을 닦아주며 입술을 맞추었고, 숨이 거칠어질 정도의 시간이 지난 뒤에 달뜬 숨을 토했다. 똑같이 헐떡인 유더에게 장난스럽게 미소지었다.

“정신이 좀 들어?”

유더는 고개를 끄덕였다. 한 번 더 코델리아를 꼭 끌어안은 뒤 스스로의 손으로 눈물을 닦아냈다.

“하아.”

코델리아의 말처럼 이제야 정신이 좀 드는 것 같았다.

순간 유더 자신의 감정을 완벽히 지배한 기억들.

검은 사내의 것이었다.

검리에 닿은, 바람의 검을 구사하는 유더 바이엘의 기억이 분명했다.

하지만 어떻게 된 것일까.

원작의 유더가 아니었다.

영웅전기2의 유더는 야생의 땅과의 전쟁으로 인해 아버지인 바이엘 백작과 형인 게일을 잃지만, 코델리아와 연인이 되지는 않았다.

‘최악의 루트.’

검은 사내의 결말은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이미 그 과정 자체가 비참하기 짝이 없었다.

그 결말 또한 결코 평온하지 못 했으리라.

“하아··· 하······.”

유더는 코델리아의 온기에 의존했다.

터무니없이 부드러운 몸을 꼭 끌어안으며 생각을 이어나갔다.

‘기억.’

검은 사내의 기억.

어떻게 된 것일까.

원작의 유더가 아니라면 그 유더는 대체 누구인 것일까.

평행 세계?

다른 세계선의 유더 바이엘?

하지만 만약 그렇다 할지라도-

‘왜지?’

어째서 유더 자신이 그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 것이지?

여러 가지 가설들이 떠올랐다.

첫째는 역시 평행세계의 기억.

어떠한 연유에서 평행세계의 유더가 경험한 일들을 공유하게 되었다.

둘째는 회귀.

영화나 소설에 나오는 것처럼 유더 자신이 과거로 돌아왔다.

검은 사내의 기억은 실제로 일어났던- 유더 자신이 과거에 겪은 일련의 사건들이다.

어처구니없는 이야기였지만 유더 자신이 검은 사내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 이유가 평행 세계 가설보다는 설명이 잘 되는 편이었다.

하지만 두 가지 문제가 있었다.

‘그렇다면 전생의 기억은?’

유더 자신은 강진호였다.

플레이아데스에서 일어나는 여러 일들을 알고 있는 것은 강진호로서 영웅전기2를 플레이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회귀라면 강진호의 기억은 무엇일까.

강진호로 살아온 인생은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하는 것일까.

‘둘째는 회귀 자체가 가능한지의 여부.’

마법이 실존하는 세상이었다.

이미 기상천외한 일들을 많이 경험한 유더였다.

하지만 회귀는 이야기가 달랐다.

시간을 거스르는 것.

어쩌면 우주 전체의 시간을 되돌려야 할지도 모르는 것.

그런 것이 허락된단 말인가?

아니, 애당초 가능은 한 것인가?

혼란스러웠다.

그리고 이 와중에도 검은 사내의 기억은 흐릿해져만 갔다.

‘코델리아와 이야기해 보자.’

회귀든 평행세계이든 유더 자신만의 일일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코델리아에게도 홍유희의 기억이 있었으니, 유더 자신과 마찬가지로 ‘다른 자신’의 기억을 가지고 있을지 몰랐다.

“하아.”

일단 진정하기로 했다.

생각해보면 지금은 솔라리의 마지막 비보를 얻기 위한 시험을 보던 중이었다.

일단은 시험의 합격 여부가 중요했고, 어쩌면 가리우스에게 검은 사내의 기억에 관해 무언가 정보를 얻을 수 있을지 몰랐다.

‘그러니 진정하자.’

천천히 숨을 고르자 새삼 품에 안고 있는 코델리아의 존재가 분명히 느껴졌다.

너무나 작고 가녀리고 부드러운- 그러면서도 무척이나 따뜻한······.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딱딱해.”

코델리아가 아주 작게 말했고, 유더는 이내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았다. 저도 모르게 허리를 뒤로 빼며 얼굴을 붉혔다.

“아니, 이건 그······.”

하지만 제대로 된 변명이 나오지 않았다.

코델리아는 그런 유더는 타박하는 대신 빙긋 웃었고, 유더의 가슴을 살며시 밀어내 품안에서 빠져나왔다.

“일단은 시험부터 합격했는지 알아보자.”

나머지는 전부 다음에.

일단은 시험부터.

본래 흥분한 쪽을 이성적으로 이끄는 것은 유더의 역할이었는데, 지금은 입장이 정반대가 되었다.

“그러자.”

“응, 좋아.”

다시 씩 웃은 코델리아는 경기장 밖에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던 가리우스에게 물었다.

“시험은 통과한 거죠?”

“통과했다.”

시원한 대답에 만족한 코델리아는 고개를 크게 끄덕인 뒤 유더의 가슴에 콩하고 머리를 박았다.

“역시 우리집 짐승다워. 이따 상 줄 테니까 기대해.”

상.

무슨 상일까.

유더는 얼굴을 붉힌 채 흠흠 거렸고, 코델리아 역시 빨개진 얼굴로 다시 웃었다.

[뭐··· 좋은 게 좋은 거겠죠.]

[아무튼 진도 좀 나가죠. 그 진도 말고 이야기 진도.]

벨렌시아에 이어 멜리사가 말하자 새삼 정신이 든 유더가 가리우스에게 물었다.

“가리우스 님, 지금 제가 상대한 자는······.”

“그대가 기억하는 최강의 검사이다.”

고객센터의 매크로 대답처럼 가리우스의 사념이 빠르게 답했다.

아마 몇 번을 물어도 같은 대답만 내놓을 것 같았다.

“저기, 저도 궁금한 게 하나 있어요.”

“무엇이지?”

코델리아의 물음에 가리우스가 선선히 답하자 유더 역시 코델리아를 돌아보았다.

[왜?]

[아니, 그냥 좀 궁금한 게 있어서.]

메시지 마법으로 빠르게 답한 코델리아는 가리우스에게 물었다.

“지금 상대한 유더··· 여기서만 부를 수 있는 건가요?”

슬픈 눈을 한 유더는 어마어마하게 강했으니까.

다시 그 슬픈 눈을 마주하는 것은 싫었지만, 그래도 만약 불러낼 수 있다면 앞으로의 싸움에 무척이나 큰 도움이 될 터였다.

“오.”

코델리아의 발상에 감탄한 유더 역시 기대어린 눈으로 가리우스를 돌아보았지만, 이번에도 역시 가리우스의 대답은 실망스러웠다.

“무리다. 그는 기억으로부터 만들어진 존재. 일종의 환상. 사실 이 공간 자체도 환상에 가깝다. 경기장이 조금도 상하지 않은 것이 그 증거이지.”

“아.”

가리우스의 말대로였다.

어마어마한 싸움이 오갔음에도 불구하고 경기장에는 어디 하나 긁힌 곳조차 없었다.

재생한 것이 아니라, 애당초 부서지지 않은 것이었다.

[아쉽네.]

그래도 어쩐지 다행인 것 같기도 하고.

슬픈 눈을 한 유더를 보는 건 정말 너무 괴로웠으니까.

‘그렇게 되었구나.’

그 후에.

자신이 떠나간 뒤에.

“코델리아?”

“어? 어, 응. 아니. 그냥 갑자기 좀 어지러워서.”

헤헤헤 웃은 코델리아는 유더에게 몸을 기댔고, 유더는 그런 코델리아의 허리를 한 팔로 안은 뒤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좀 쉬었다 갈까?”

“지, 지금? 지금 쉬면 진짜 탈 날 것 같은데······.”

엉뚱한 대답이었지만 유더는 이해했다. 그랬기에 얼굴을 붉히며 답했다.

“그거 말고. 진짜 쉬는 거.”

정말로 그냥 쉬는 거.

어쩌다 이렇게 야한 생각만 하는 아이가 된 것일까.

“야, 너 때문이거든? 지난 며칠을 돌아봐야하지 않을까?”

코델리아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뻔뻔한 표정을 유지한 유더는 돌연 그녀를 번쩍 안아들었다.

“일단 내려가자.”

언제까지 경기장 한복판에 서 있을 수는 없었으니까.

[이제 이런 건 너무 자연스러워서 아무런 생각도 안 드네요.]

[저도 그래요.]

멜리사와 벨렌시아가 다시 한 마디씩 보탤 때였다. 코델리아가 문득 유더에게 물었다.

“그런데 유더야. 너 방금 더 세진 거 맞지?”

“맞아.”

벨렌시아와 제대로 이야기를 해봐야겠지만 폭발적인 성장을 이룬 것만은 분명했다.

“신난다.”

코델리아는 안긴 채로 어깨를 으쓱으쓱 거렸고, 유더는 다시 한 번 입술을 맞추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하지만 몇 번이나 서로 강조했듯이 때와 장소를 가릴 때였다.

“잠깐 물러가 있을까?”

가리우스의 사념이 솔깃한 제안을 했지만 유더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코델리아를 다시 바닥에 내려놓은 뒤 시험을 통과한 자로서 청하였다.

“솔라리의 챔피언이시여, 마지막 비보로 이어진 길을 열어주시기 바랍니다.”

새삼 예를 표하며 말하자 가리우스 역시 진지한 얼굴로 성호를 그었다.

“태양의 영광이 그대와 함께하기를.”

축복의 말을 전한 가리우스는 검을 뽑아들어 허공을 가리켰다. 그러자 황금으로 된 커다란 아치형 문이 눈앞에 나타났다.

저 문 너머에 자리한 장소.

영웅전기2에서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곳이었다.

하지만 코델리아의 고리와 날개가 반응했다.

천천히 열리기 시작한 문 너머에 무엇이 자리하는지, 저 장소가 어떤 곳인지 코델리아는 본능적으로 인지할 수 있었다.

솔라리 교단 최후의 비보.

챔피언 가리우스의 무덤에서만 닿을 수 있는 장소.

파이어 페어리들이 오랜 세월동안 진정으로 지켜온 성스러운 영역.

“솔라리······.”

코델리아의 날개가 빛나기 시작했다. 천사의 고리는 평소보다 더 강한 빛을 내었고, 코델리아가 가진 천사로서의 성스러운 힘이 배가되었다.

황금의 문 너머에 자리한 태양이 가득한 장소.

태양신 솔라리의 무덤이 그곳에 있었다.

&

< 제115장 - 솔라리의 비보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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