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18장 - 검의 지평 >
제118장 - 검의 지평
죽고 싶지 않다.
약해지고 싶지 않다.
더 강해지고 싶다.
나날이 쇠약해져가는 현실을 견딜 수 없다.
호국공이 말했다.
제국으로부터 왕국을 구했던 구국의 영웅은 자신의 욕망- 아니, 필사적인 갈망을 위해 모든 것을 저버렸다.
나라를 버리고, 자식 같은 왕을 버리고, 그간 쌓아온 모든 명성을 버리고.
호국공의 이야기에 제일검은 고개를 끄덕였다.
비웃거나 비난하는 대신 그저 그럴 수도 있겠다며 동의해주었다.
호국공은 사람이었다.
이미 결정했다며 스스로를 몰아붙이고는 있었지만 마음 한 구석에서는 여전히 흔들리는 구석이 있었다.
나라를 저버리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왕족들을 몰살하는 것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하지만.
호국공은 숨을 멈췄다. 의식적인 행동으로 생각 역시 끊어버렸다.
이미 결정했다.
일을 진행시켰다.
이제는 되돌릴 수 없었다.
그랬기에 호국공은 제일검을 보았다.
자신과 같은 선택을 한 이를 보며 생각했다.
‘무엇 때문이냐.’
자신과 마찬가지로 십검호의 일인.
아니, 어떤 의미로는 자신 이상이었다.
겨우 서른 남짓한 나이에 검성이 된 자.
왕국 전체를- 아니, 대륙의 역사 전체를 돌아봐도 손에 꼽을 빛나는 재능의 소유자.
아직 젊었다.
호국공 자신처럼 죽음의 기척을 느낄 나이가 아니었다.
그런데도 제일검은 마인이 되는 길을 택했다.
무엇 때문일까.
명예라면 이미 충분히 누리고 있을 터인데.
돈? 지위? 권력?
그런 것이 아니었다.
호국공은 알 수 있었다.
단순히 검사의 자리에 머물지 않고 왕당파의 거두에까지 올라섰던 그는 수많은 사람들을 보아왔다.
제일검은 그런 것에 연연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아니, 그런 것에 진심으로 욕망을 품고 있는지도 의문이었다.
겉으로 보면 한량.
언제나 느긋한 사내.
술과 여자를 좋아하는 남자.
모두 사실이었다. 틀린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제일검과 실제로 마주한 순간 호국공은 알 수 있었다.
제일검에게 있어 술과 여자, 부와 권력, 명예- 그런 것들은 그리 큰 의미가 되지 못 했다.
굳이 비유하자면 좋아하는 반찬, 좋아하는 색깔 정도의 가치 밖에 없었다.
얼마든지 참을 수 있는.
있으면 좋지만 없어도 그만인 것들.
제일검에게 그나마 가치를 지니는 것은 검문과 스펜서 공작 정도였다.
그런데 제일검은 마인이 되기 위해 저 두 가지를 저버렸다.
어째서일까.
제일검이 마인이 되기로 한 이유는 무엇일까.
평소라면 궁금하지 않았을 터였다.
제일검이 무슨 생각을 품든 신경 쓰지 않을 자신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알고 싶었다.
제일검의 욕망을 알고 나면, 그도 자신과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나면 세일룬 왕국을- 아니, 헨리를 배신한 자신을 용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호국공은 끝내 입을 열지 못 했다.
제일검에게 어째서 마인이 되었느냐고, 자신처럼 불로영생에 집착한 것이냐고 결국 소리 내어 묻지 못 했다.
이미 추해질대로 추해진 마당이었지만 더 추해지고 싶지 않아서였다.
제일검도 호국공 자신과 같다.
저 젊은 천재도 호국공 자신과 같은 선택을 했다.
그러니 괜찮다.
다른 누구도 비슷한 선택을 할 것이다.
합리화.
그런 것에 의지하려는 초라한 자신.
그래서 결국 입밖에 내지 못 했다.
무엇 때문에 마인이 된 것인지, 자신처럼 불로영생을 하고 싶었던 것인지, 죽고 싶지 않아 몸부림 친 것인지 묻지 않았다.
제일검은 그런 호국공을 보았다.
호국공이 무슨 말을 하고 싶어하는지, 그가 어떤 말을 참고 있는지 이해했다.
하지만 굳이 호국공을 위해 답을 내주지는 않았다. 그저 들고 있던 술잔을 내려놓은 뒤 호국공과의 자리를 파하였다.
달이 밝은 밤이었다.
건국 기념일까지 이제 겨우 며칠이 남은 상황.
별궁을 나와 정원을 가로지르던 제일검은 문득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그리고 다시 시선을 돌려 저 먼 서쪽을 바라보았다.
호국공의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제일검은 세속적인 것들에 그다지 연연하지 않았다.
초탈한 것이 아니었다.
욕심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제일검이 평범한 사람들과 달랐기 때문이다.
“어릴 때부터 보였거든.”
저 먼 지평이.
과연 닿을 수 있을지조차 의문인 저 근원으로의 길이.
술과 여자는 좋았다.
부와 명예도 있어서 나쁠 것이 없었다.
하지만 저것 앞에서는 모든 것이 하찮았다.
지평으로의 길.
검이 좋았다.
검술을 펼치는 순간이 좋았다.
검을 통해 생사결의 대결을 펼치는 것은 유쾌하기 짝이 없었다.
지평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실감이 들었으니까.
실제로 지평을 향해 발걸음을 내딛는 과정이었으니까.
유더와 코델리아가 좋은 것도 그래서였다.
두 사람을 통해서 자신의 지평을 보다 명확히 느낄 수 있었으니까. 언젠가 강해진 두 사람과의 대결이 지평에 보다 가까워지는 길이 될 터였으니까.
“당신과 같아.”
마인이 된 이유.
불로영생을 갈망한 이유.
“아직··· 닿지 못 했거든.”
닿기 위해서는 까마득한 세월이 필요할지도 모르거든.
검의 지평.
검리로의 길.
제일검은 다시 서쪽을 보았다.
닿을 수 있을 것 같으면서도 닿을 수 없는, 아득히 먼 지평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
유더와 코델리아는 술잔을 몇 번 더 나눈 뒤 슬그머니 연회장을 빠져나왔다.
제일검과의 악연을 끊고 엘룬을 지원하겠다는 뜻이야 공유한 두 사람이었지만 이러한 사실을 주변에 이야기하는 것은 무리였기 때문이다.
‘말리려는 사람이 더 많겠지.’
그림자 숲의 엘프들과 재상군의 싸움이 언제부터 시작될지, 어떤 식으로 전개될지 아직 아무 것도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더욱이 그림자 숲까지는 적잖은 거리가 있었다.
제국의 국경을 넘은 뒤에도 재상부가 장악한 지역을 한참이나 달려야 도달할 수 있는 곳이었으니 일단 말리고 보는 것이 정상이었다.
‘그런 식으로 무리하게 개입하기보다는 우리와 함께 재상군의 본대를 꺾고 북진하여 재상군 전체를 압박하는 것이 낫네.’
황금의 검성인 이안 맥클라인이라면 아마 저렇게 말하겠지.
때문에 유더는 괜히 자신들의 생각을 밝히는 대신 코델리아와 함께 슬쩍 사라지는 쪽을 택했다.
“후아··· 다행이다. 언니 속일 수 있을지 걱정했는데.”
다른 사람은 몰라도 아델리아의 눈을 속일 수는 없었으니까.
코델리아의 뒷모습만 봐도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간파가 가능한 그녀였다.
“뭐··· 형님이랑 같이 한 발 먼저 사라지신 것 같으니까.”
“하여간 진짜. 나한테는 뭐라고 하더니.”
코델리아가 꿍얼거리자 유더는 다시 작게 웃었다.
좀 그런 생각이긴 했지만, 역시 핏줄은 무시 못 하는 모양이었다.
‘그냥 다 같이 짐승인가.’
“뭐야, 무슨 생각하는데?”
“예쁘고 고운 생각.”
유더의 능글맞은 답변에 코델리아는 미간을 찌푸렸지만 무어라 토를 달지는 않았다.
“아무튼 그럼 바로 출발할 거야?”
“그래야겠지. 왜, 걱정 돼?”
“당연하지. 우리 눈 뜨자마자 무리해가며 칠천 군대를 격파한 후거든? 그 뒤에 물약도 먹고 대충 쉬기도 했지만 제대로 쉰 건 아니잖아.”
무한체력, 무한체력 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유더가 정말 무한한 체력의 소유자인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유더는 문제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더니 코델리아의 뺨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난 오히려 우리 공주님이 걱정되는데? 괜찮겠어?”
“나야 뭐 등에 업혀있기만 하면 될 테니까. 그리고 평소에도 좀 그렇게 신경을 쓰라구.”
“평소 언제?”
유더의 물음에 코델리아는 무어라 답하는 대신 입술을 삐쭉였고, 손바닥에 닿은 뺨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낀 유더는 능글맞게 웃었다.
“아무튼 그럼 공주님, 함께 가실까요?”
“네, 왕자님. 등 대세요.”
유더가 돌아서자마자 폴짝 뛰어오른 코델리아는 유더의 목을 단단히 끌어안았다.
“일단 빠져나간 다음에 팬텀스티드로 갈아타자.”
처음부터 팬텀스티드를 타고 가면 너무 눈에 띌 테니까.
“알았어, 얼른 가자. 이랴이랴!”
“히히힝.”
코델리아의 재촉에 말울음 소리까지 한 번 낸 유더는 흑풍도래를 펼쳤다. 하지만 직후, 유더는 바로 지면을 박차는 대신 코델리아를 고쳐 업으며 물었다.
“그런데 코델리아.”
“응, 유더야.”
“편지는 남겼지?”
“어, 남겼어.”
몰래 사라지더라도 최소한 어디로 향했는지는 알려야 했으니까.
유더는 킥킥 웃으며 말했다.
“코델리아가 스스로 사랑의 편지를 남기는 날이 오다니. 정말 가슴이 웅장해져.”
“흥, 전에도 한 번 남겼거든?”
영원의 숲을 빠져나올 때라든가.
“어, 그래서 더 좋아. 다음에는 내용도 보여줄 거지?”
“음··· 하는 거 봐서?”
코델리아의 새침한 대답에 유더는 다시 유쾌하게 웃었다.
“그럼 가자.”
“응, 가자.”
서쪽으로.
검은질풍이 황금빛 선풍과 함께 했다.
&
시간이 흘렀다.
하루.
밤을 끝내기 위해 떠올랐던 아침 해가 황혼과 함께 저물어 다시 밤을 불러온 때.
엘룬은 레드 게이트 위에 주저앉아 하얗고 둥근 달을 보았다.
계속해서 급보가 전달되고 있었다.
제일검이 이끄는 재상군이 레드 게이트를 향해 거침없이 다가오고 있었다.
병력의 규모는 최소 4만 이상.
제국에 거하는 엘프들을 모두 합쳐도 수만 명이 되지 못 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실로 어마어마한 대군이었다.
막을 수 있을 것인가.
엘프들의 대부 빈첸죠 롬바르디는 그림자 숲의 전 병력을 레드 게이트에 집결시키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그렇게 모두 모아봐야 5천을 조금 넘는 숫자였지만, 레드 게이트에 의존한다면 어떻게든 버틸 수 있을 터였다.
‘황제군을 움직여야 한다.’
제국 북부에서 재상군과 대치 태세만 이어가고 있는 황제군.
그림자 숲이 함락되면 내전의 구도 자체가 뒤집어질 수 있으니 황제 쪽에서도 작금의 위기를 관망하지만은 않을 터였다.
그러니 일단은 버틴다.
어떻게든 버텨서 시간을 만들어낸다.
이쪽에 4만에 가까운 대군을 투입했다는 것은 다른 쪽에서 그만큼 병력이 비었다는 뜻이니 황제군 쪽에서도 지원군을 파병할 여력이 생기리라.
엘룬은 고개를 돌렸다.
레드 게이트의 성벽 위에 자리한 이질적인 존재들을, 엘프가 아닌 인간들을 바라보았다.
유더의 친구들.
착하고 우직한 루카스와 장난기가 많고 쾌활한 카이사, 새침하지만 귀여운 스칼렛.
세 사람 모두 진지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엘룬 역시 굳은 표정을 지었다. 무섭다며 숨어버린 페어리들을 생각하니 마음 한 구석이 무거워졌다.
바람이 불었다.
동쪽에서 서쪽을 향해 불어오는 바람.
평소와 다른 냄새가 섞여 있었다.
그랬기에 엘룬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레드 게이트의 정문 위에 우뚝 서서 동쪽을 바라보았다.
“장관이네.”
동쪽에 선 자가 말했다.
재상군은 아직 반나절 거리에 있었다.
밤이 깊었으니 바로 공격해오기 보다는 일단 자리를 잡고 새벽에 공격해올 가능성이 높았다.
그런데 그는 지금 눈앞에 있었다.
재상군보다 몇 발 먼저 레드 게이트에 도착했다.
“한 번쯤 해보고 싶었거든. 혼자서 성을 함락시키는 거.”
천천히 검을 뽑아들었다.
이제는 엘룬만이 아니라 성벽 위에 있던 모든 엘프들이 그를 보았다. 겨우 한 명뿐이었지만 그가 검을 뽑아든 순간 엘프들은 깨달았다. 급히 나팔을 불고 전투태세를 갖추었다.
고작 한 명.
하지만 엘룬은 입안이 마르는 것을 느꼈다.
유더와 대련했을 때와는 전혀 다른 기분이었다.
흥분으로 몸이 달아오르기는커녕 손발이 차갑게 변했다.
검의 괴물.
검의 악마.
제일검은 웃었다. 성벽 위에 서서 이쪽을 노려보는 엘룬을 눈에 담았다.
그림자 숲을 지키는 요정의 검.
전설처럼 전해져 내려오는 벨렌시아의 검을 계승한 자.
그녀와의 대결은 분명 제일검 자신을 앞으로 나아가게 하리라.
“하지만 아직도 멀어. 너무 멀단 말이지.”
푸념처럼 중얼거린 제일검은 다시 엘룬을 보았다.
저 너머에 자리한 지평과 그녀를 겹쳐 보았다.
“가자.”
제일검이 스스로에게 말했다. 성벽 위의 엘룬에게 속삭였다.
가볍게 휘두른 검.
거대한 검기가 레드 게이트를 집어삼켰다.
&
< 제118장 - 검의 지평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