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19장 - 준비하는 자들 #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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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중심.
이제는 악마 추종자들에 의해 점령된 제도.
황궁의 가장 깊은 곳에서 대사교 마누엘라는 위대한 분의 목소리를 경청하였다.
“단순한 이야기다. 아우리엘을 도와라. 그녀가 대소환을 일으킬 것이다.”
악마의 손의 총수.
그녀의 입을 통해 전해진 명령에 마누엘라는 당혹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음욕의 대군주 아스모데우스의 숙적인 심판의 대천사 아우리엘.
그녀와 함께 싸운다는 선택지는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해하지 못 하는 눈치구나.”
아스모데우스의 눈과 입이 된 악마의 손의 총수는 평소보다 훨씬 더 사람다웠다.
옥좌 위에 앉은 그녀는 다리를 꼬며 웃었고, 그 아래 무릎 꿇고 있던 마누엘라는 감히 무어라 말하는 대신 그저 고개를 조아렸다.
“단순한 일이다. 플레이아데스가 행한 이어붙이기··· 그래, 그 행위는 결코 용납될 수 없는 일이다.”
플레이아데스의 멸망을 피하기 위해 같은 시점을 몇 번이나 반복했다.
그 과정에서 피해가 있든 없든 중요한 것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플레이아데스가 천계의 운명을 유린했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한 것이었다.
“가장 큰 명분이지. 아마··· 대천사들 가운데 라구엘을 제한 나머지 셋은 원 역사대로 대소환이 일어나야 한다 생각할 거다.”
설사 그로인해 어마어마한 희생이 발생한다 할지라도 그것이 순리였으니까.
더욱이 그 희생은 천계가 아닌 플레이아데스의 것이었다.
천계의 입장에서 플레이아데스는 이계였다.
플레이아데스의 인간들은 이계의 인간들이었다.
몇이 죽든, 희생되든 상관 없는 일이었다.
“그런 것을 신경 쓰는 천사는 라구엘을 제하고는 이미 모두 사라진 뒤이니 말이다.”
솔라리와 에로스, 가브리엘.
아스모데우스의 설명에 마누엘라는 마른 침을 삼켰다.
방금 이야기에 대해서는 마누엘라도 이견이 없었다.
이성적으로 보아 천계의 분노는 지당했다.
하지만 마누엘라가 거부감을 느끼는 것은 그 다음의 이야기였다.
대소환을 일으키기 위해 천계와 지옥이 손을 잡는다.
함께 대소환을 일으킨다.
대소환 뒤에 있을 아마겟돈을 위하여.
천계와 지옥의 결판을 위해.
하지만 이런 것이 과연 가능한 것일까?
그토록 오랫동안 싸워온 천계와 지옥인데?
그리고 엄밀히 말해 솔라리의 원수는 플레이아데스가 아닌 지옥이었다.
플레이아데스를 짓밟기 위해 지옥과 손을 잡는다니, 너무나 이상한 이야기였다.
“이상하지 않다.”
아스모데우스가 하얗게 웃으며 말했다.
속마음을 읽힌 탓에 움찔하는 마누엘라에게 보다 자세한 설명을 들려주었다.
“아우리엘은 지옥을 증오한다. 플레이아데스 이상으로 우릴 증오하고 있다. 하지만 그런 우리에게 칼을 꽂아 넣기 위해서는 일단 같은 장소에 서야만 한다. 여기까지 이야기하면··· 너도 이해할 수 있겠지?”
“복수를 위해··· 일단 불러내기 위해 손을 잡는다는 겁니까?”
마누엘라의 조심스러운 대답에 아스모데우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바로 그것이다. 현재 천계와 지옥은 이어져 있지 않아. 우리에게 복수하기 위해서는 연결된 땅이 필요하지. 그리고 플레이아데스야말로 그 땅이 되기에 적합하고. 더욱이 플레이아데스가 전장이 되는 것은 본래의 역사를 따르는 순리이기도 하고 말이다.”
아우리엘은 진정으로 악마들과 손을 잡은 것이 아니었다.
악마들을 결투장으로 불러내기 위해, 그저 그때까지 유지될 한시적인 동맹을 수락한 것이었다.
“물론 이것 자체도 거부감이 대단한 일이지. 아마 천계의 다른 대천사들··· 사리엘과 라파엘라는 대소환 자체를 돕지 않을 거다. 대소환이 일어난다면 그때 천계의 대천사로서 지옥과 맞서 싸우겠다- 이 정도 선에서 그쳤을 터이지. 라구엘은 아마 대소환 자체를 막으려다가 아우리엘에게 봉인되었을 가능성이 높고.”
마치 천계를 직접 들여다 본 것 같은 아스모데우스의 이야기였다.
“대소환 직후··· 아우리엘은 우리 지옥의 대군주들의 뒤통수를 칠 생각을 하고 있을 거다. 우리 역시 그런 생각을 하고 있고. 서로 등에 칼을 숨긴 채 악수를 하는 격이지.”
아스모데우스는 어깨를 흔들며 웃었다.
검의 군주인 그였지만 이런 식의 모략 역시 싫어하지 않았다.
“두 가지 이유. 그리고 마지막 하나. 아우리엘이 가지는 플레이아데스에 대한 적개심. 아니··· 아우리엘 자신의 광증.”
지금의 아우리엘은 과거의 아우리엘과 달랐다.
솔라리라는 태양을 잃어버린 이후 그녀는 망가지고 말았다.
“분노에는 대상이 필요한 법이지.”
솔라리의 소멸에 관련된 모든 것들에 대한 노여움.
아우리엘은 스스로에게도 몹시 화가 나 있었다.
그나마 지금까지 참을 수 있었던 것은 이성의 존재와 명분의 부재였다.
그런데 이제 강력한 명분이 만들어졌다.
플레이아데스의 잘못.
지켜져야 할 순리.
증오하는 플레이아데스와 지옥을 함께 불사를 수 있는 기회.
이성적이지 않았다.
감정적이었고, 너무나 주관적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또 어떻단 말인가. 애당초 세상의 일이라는 것이 늘 합리에 따라 돌아가는 것은 아니지 않던가.
아스모데우스는 다시 웃었다.
망가져 버린 오랜 숙적의 모습에 약간의 슬픔과 기꺼움을 느끼며 계속해서 이야기했다.
“아우리엘을 도와라. 그녀가 플레이아데스에 강림할 수 있도록 의식을 준비해라.”
지옥보다는 천계 쪽의 강림이 좀 더 수월했다.
천계와 지옥이 함께 힘을 합치면 대천사의 강림을 성공시킬 수 있었다.
물론 보통 일은 아니었다.
막대한 힘이 소모될 터였고, 아우리엘 역시 많은 것을 희생해야만 할 터였다.
하지만 그렇기에 아스모데우스 입장에서는 마다할 일이 아니었다.
“저울눈이 너무 기울었다. 이대로는 대소환을 일으킬 수 없어. 그러니 아우리엘이 필요하다. 대천사인 그녀가 직접 지상에 강림하여 환란을 일으킨다면 대소환을 일으키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신을 강림시킨다.
플레이아데스를 증오하는 심판의 신을.
“명을··· 받들겠습니다.”
대사교 마누엘라는 공손히 예를 표하였고, 아스모데우스는 악마의 눈의 총수를 통해 높은 곳을 보았다.
아우리엘의 얼굴을 떠올리며 복잡한 미소를 머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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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시각.
천상의 목소리가 지상에 닿았다.
라구엘의 필사적인 경고에 다프네 왕녀와 황태후는 경악을 금치 못 했다.
천계의 대천사가 강림하려 한다.
스스로의 손으로 대소환을 일으키려 한다.
데몬프린스와 동급의 힘을 가진 말레키스조차 신과 같은 자로 군림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런 데몬프린스를 상회하는, 진정한 신이 지상에 강림한다면 모든 것이 끝이었다.
크게 놀란 다프네 왕녀와 황태후는 서둘러 신뢰할 수 있는 자들을 모았다.
너무나 충격적인 소식이었기에 널리 퍼져서는 안 될 이야기였다.
그리고 때를 같이 하여 제국의 동부.
라구엘의 경고를 들은 자가 하나 더 있었다.
애당초 은둔을 깨고 나온 것부터가 라구엘의 목소리를 들었기 때문인 자였다.
“맙소사.”
드루이드 프란.
파라곤의 다섯 영웅들 가운데 가장 어린 소년이었던 그는 10년의 세월을 거쳐 아름다운 청년으로 거듭나 있었다.
카마엘처럼 여자로 착각될 정도의 미색을 갖춘 것은 아니었지만, 몸에 동물 가죽과 수풀을 두른 그의 모습은 마치 신화 속에서 튀어나온 숲의 신 오리온과 같았다.
“미친, 정말로 미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 그는 서둘러 방을 나섰다.
파라곤의 다섯 영웅들은 제국 동부에 위치한 성십자수호단의 요새에서 전력을 집중하고 있는 와중이었다.
‘란디우스, 일단 란디우스에게 전해야 해.’
다섯 영웅들을 이끄는 자.
그 어떤 절망 속에서도 믿고 의지할 수 있는 태양과 같은 존재.
“드루이드님을 뵙습니다.”
“어, 그래. 안녕.”
예를 표하는 성십자수호단원들에게 적당히 대답해주며 프란은 코를 킁킁 거렸다.
란디우스의 냄새를 추적하기 위함이었다.
“저쪽이군.”
다행히 늑대로 변신할 필요까지는 없었다.
프란은 요새 외곽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프란.”
“레나?”
성벽의 끝.
숲이 내려다보이는 성곽 위에 레나는 물론이고 벨키안과 카마엘까지 서 있었다.
다들 걱정이 가득한 얼굴들이었다.
“뭐야, 설마 너희도 천상의 목소리를 들은 거야?”
“천상의 목소리라니? 라구엘 님에게서 무언가 말씀이 있으셨던 거니?”
레나가 놀란 얼굴로 되묻자 프란은 입술을 움츠렸다.
한시라도 빨리 전달해야 할 사안이기는 했지만 의구심이 앞섰기 때문이다.
라구엘이 전한 급박한 사안 때문이 아니라면 왜들 저런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일까.
전선의 상황이 좋지 못 해서?
물론 그것도 있을 터였다.
하지만 이렇게 한 자리에 모여 다 같이 인상을 쓰고 있을만한 이유 같지는 않았다.
더욱이 지금 이 자리에는 란디우스가 없었다.
그 사실이 프란을 무척이나 불안케 했다.
“란디우스는?”
질문에 대한 답이 아니었지만 레나는 순순히 성벽 아래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 아래에 있어.”
레나의 대답에 프란은 흡하고 숨을 삼켰다. 이쯤되니 란디우스가 왜 여기에 없는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짐작이 갔기 때문이다.
“괜찮을 거다.”
역병 의사의 가면에 숨겨진 벨키안의 표정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목소리마저 숨길 수는 없었다.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에서 벨키안의 긴장을 읽을 수 있었다.
“카마엘?”
프란의 부름에 카마엘은 답하지 않았다.
레나와 벨키안, 프란과 달리 그는 전생의 기억을 일부나마 각성한 상황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알고 있었다.
란디우스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칠문의 벽을 넘지 못 하였다.
“란디우스······.”
카마엘은 주먹을 움켜쥐며 성벽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마음 같아서는 지금 당장이라도 그를 말리고 싶었다.
하지만 할 수 없었다.
란디우스가 그것을 거부했다.
그의 의지를 꺾는 것은 카마엘에게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프란, 다시 물을게. 라구엘 님의 말씀이 있었던 거니?”
레나가 다시 물었다.
란디우스가 걱정되기는 그녀 역시 마찬가지였지만 프란이 가져왔을 소식 역시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게······.”
한 차례 이를 악문 프란은 라구엘에게 들은 것들을 모두에게 전해주었다.
천계의 격노.
대소환을 일으키기 위해 지옥의 악마들과 손을 잡은 아우리엘.
갑작스러운 이야기에 레나와 벨키안은 당혹을 금치 못 했다.
전생의 기억 덕분에 어느 정도 전모를 파악하고 있던 카마엘조차도 아우리엘이 직접 강림을 꾀한다는 이야기에는 아연실색할 따름이었다.
플레이아데스는 지금까지 몇 번이나 멸망을 경험했다.
대소환은 마치 필연이라도 된 것처럼 반복해서 일어났다.
하지만 대소환을 위해 대천사가 강림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대천사.
천계의 신.
데몬프린스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절대적인 존재.
천사인 레나는 너무나 큰 충격에 무어라 말을 잇지 못 했다. 벨키안은 비틀거리다 벽에 몸을 기대었고, 카마엘은 눈을 꽉 감고 거친 숨을 쉬었다.
데몬프린스의 강대함을 누구보다 실감한 그들이기에 대천사의 존재가 가지는 절망감 또한 절실히 느낀 탓이었다.
어찌해야 할 것인가.
이제 어찌해야만 하는 것일까.
눈앞이 새카맣게 변하는 기분이었다.
검은 절망이 세상을 뒤덮는 것만 같았다.
새카만 밤.
어둠.
데몬프린스를 처음 마주했을 때 느꼈던 무력감.
그런데 바로 그 순간이었다.
카마엘은 저도 모르게 눈을 떴다.
레나는 고개를 돌렸다.
벨키안과 프란은 같은 방향을 바라보았다.
새카만 밤이었다.
어둠이 가득한 시간이었다.
하지만 한 줄기 빛이 보였다.
밤이 깊으면 깊을수록, 어둠이 짙으면 짙을수록 더욱 밝게 빛나는 그것이 하늘로 치솟았다.
황금빛 태양.
절망과 어둠을 걷어내는 찬란한 희망의 빛.
멍하니 바라보던 레나는 이해했다. 자리에서 폴짝 뛰더니 광익을 펼쳐 날아올랐다.
벨키안과 프란 역시 환호성을 질러댔다.
카마엘 역시 웃었다.
이제까지의 무력감이 우습게도 환한 웃음을 터트렸다.
“란디우스.”
우리의 태양.
아무리 깊고 어두운 절망이 드리운다 할지라도 너와 함께라면 나아갈 길을 찾을 수 있겠지.
언제나처럼 우리를 이끌어주겠지.
황금빛 섬광이 숲은 물론이고 요새 전체를 밝게 비추었다.
어둠을 몰아내며 아침의 영광을 이끄는 그것은 진정 황금빛 태양 그 자체였다.
철인 란디우스.
황금빛 섬광의 중심에서 그는 호쾌한 웃음을 터트렸다.
전생의 기억을 각성함에 따라 자신이 몇 번이나 실패했음을, 매번 팔문을 열기 위해 시도하다 목숨을 잃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전생의 경험들이 있었다.
유더를 통해 배운 것들이 있었다.
“항상 근육이 함께하기를.”
구천구문 제팔문.
진정한 초월의 경계.
란디우스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저 높은 하늘을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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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19장 - 준비하는 자들 #4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