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엔딩메이커-341화 (341/473)

< 제120장 - D-day (현생 코델리아 & 전생 코델리아 일러스트 포함) >

제120장 - D-day

여자의 말에 남자는 웃었다.

잿더미가 된 세상에서 절망해 쓰러지는 대신 마지막 힘을 다해 일어서며 말했다.

“알고 있어. 기억이 남는다 할지라도 나란 존재는 결국 사라지는 것이겠지. 하지만 설사 그렇다 할지라도-”

남자의 말은 이어졌고, 여자는 쓰게 웃었다.

눈물 섞인 얼굴로 아주 작게 속삭이듯 말하였다.

“언제나와 같군요. 당신이란 사람은.”

&

아침이 밝았다.

무리한 행군과 간밤의 전투를 치룬 갈까마귀들과 야생의 땅의 전사들은 야영지를 설치하자마자 전투력 회복을 위한 수면- 즉, 낮잠에 돌입했다.

유더와 코델리아 역시 다르지 않았다.

중간에 휴식을 취하기는 했지만 따지고 보면 솔라리의 무덤에 들어선 이후 지금까지 연속해서 전투를 치룬 셈이었으니 말이다.

하루에 두 번이나 대군을 패퇴시키고 최상급 마인을 둘이나 쓰러트렸으니 덮어놓고 쉴 자격이 충분했다.

“잘 자.”

“잘 자.”

엘프들이 마련해준 침대에 나란히 누운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이 없이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그렇게 몇 시간.

제법 평온한 시간들이었다.

붉은바람을 마주한 키라라가 끙끙 앓는 소리를 내고, 흐레스벨그 백작의 복잡한 눈빛에 루카스가 땀을 뻘뻘 흘리기는 했지만, 카이사와 스칼렛이 강렬한 눈빛 교환을 몇 번이나 해댔지만 전반적으로 보면 나쁘지 않았다.

엘룬은 크게 지쳤지만 목숨에 지장이 없었고, 레드 게이트에 피해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치룬 싸움들에 비하면 경미한 정도였다.

하지만 고작해야 몇 시간.

새로이 들려온 소식에 짧은 평온은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다.

&

다프네 왕녀와 황태후가 거의 동시에 급보를 전해왔다.

애당초 많은 내용을 담을 수 없는 원거리 통신답게 내용은 단순했다.

재상군이 대천사 아우리엘을 강림시키려 한다.

대천사 아우리엘이 직접 대소환을 일으키려 한다.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야기였다.

악마 추종자가 천사를 강림시키려 한다는 이야기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이었고, 급보를 듣자마자 대강의 전모를 파악하는 이도 있었다.

“아우리엘.”

플레이아데스의 모든 인간들 가운데서 가장 전생의 기억들을 많이 가지고 있는 유더는 부족한 정보를 추론으로 충당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단번에 간파해냈다.

“천계의 대천사들······.”

급보에는 아탈리아가 행한 ‘이어 붙이기’에 대한 이야기가 없었다.

하지만 유더는 단언할 수 있었다.

적어도 대외적인 명분은 이어 붙이기가 분명했다.

“이런 미친. 이게 말이 돼? 그럼 우리보고 그냥 멸망하라는 거야?!”

코델리아가 노성을 터트렸다.

당연한 이야기였다.

애당초 플레이아데스의 멸망을 야기한 것은 지옥과 천계였다.

대소환으로 말미암아 세 개의 세계가 온전히 이어지자 지옥과 천계는 이제까지와는 다른 노선을 취했다.

먼 옛날 지옥의 대군주 가운데 둘이 플레이아데스에 강림한 것은 천계와는 무관한 일이었다.

마찬가지로 솔라리를 비롯한 대천사들이 플레이아데스에 강림한 것은 지옥의 공세를 막기 위함이 아니었다. 그저 신음하는 플레이아데스의 인간들을 차마 두고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소환 이후에는 모든 것이 달라졌다.

전격적인 대공습.

지옥은 플레이아데스를 천계를 정벌할 전진기지로 삼으려 했고, 천계는 플레이아데스에서 지옥의 군세를 막아내고자 했다.

플레이아데스를 무대로 한 두 세계의 총력전.

아마겟돈에 의해 플레이아데스는 멸망했다.

그렇기에 아탈리아는 다시 시작할 방법을 꾀한 것이었다.

“애당초 라구엘 뿐이었어.”

단서가 주어지자 조금씩 기억이 떠올랐다.

몇 번이나 반복된 대전쟁에서 진정으로 플레이아데스의 인간들을 아끼고 보살핀 것은 정의의 대천사 라구엘 뿐이었다.

나머지 대천사들은 플레이아데스의 인간들을 그저 유용한 자원으로만 보았다. 마치 지옥의 악마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말이다.

때로는 지옥이 승리했다.

때로는 천계가 승리했다.

하지만 어느 쪽이 승리했든 플레이아데스의 운명은 동일했다.

멸망.

잿더미가 되어버린 세상.

유더의 이야기를 들은 코델리아는 욕지거리를 토했다.

“아니 씨발! 그럼 지금 결국 이런 이야기인 거야? 몇 번이나 리겜하게 해서 빡친다고?”

물론 코델리아도 알고 있었다.

단순히 게임을 반복하는 것과는 다른 이야기였다.

아무런 허락도 구하지 않고 천계의 존재들에게 이어붙이기를 강요한 상황이었으니 말이다.

“개소리! 아우리엘도 이쪽을 신경 쓴 적이 없잖아! 유더 네 말마따나 라구엘 외에는 그 누구도!”

플레이아데스의 인간들이 죽든 말든, 플레이아데스라는 세계가 멸망하든 말든!

유더는 눈을 감았다.

복잡한 이야기였다.

사실 설사 천계가 개입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플레이아데스는 멸망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다.

지옥의 군세를 막아낼 힘이 없었으니 말이다.

결국 선택할 수 있었던 것은 지옥과 천계의 아마겟돈 자체를 막는 것.

대소환을 저지하여 양쪽 모두의 개입을 받지 않는 것.

잘 되어 가고 있었다.

이번에야말로 대소환을 저지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판이 뒤집혔다.

대천사가 직접 강림하여 대소환을 일으키려 하고 있었다.

“아직 끝난 게 아니야.”

유더는 천천히 말했다.

흥분해서 거친 숨을 토하던 코델리아는 유더를 바라보았다.

“대소환은 아직 일어나지 않았어.”

아직 기회는 남아 있었다.

대천사 급의 존재가 플레이아데스에 강림하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지옥의 문을 설치하는 것 이상으로 많은 자원과 시간을 소모할 것이 분명했다.

그러니 아직 시간이 있었다.

벌써부터 절망하는 것은 너무 이른 판단이었다.

“일단 조금 더 정보를 모으자. 란디우스 스승님과도 연락을 해야 해.”

전력을 가다듬고 수단을 강구해야 했다.

유더의 말에 코델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많이 화가 나 뭐라도 폭발시키고 싶은 기분이었지만 애써 억눌렀다.

“정보를 공유하자.”

이어 붙이기에 대한 이야기는 숨기려 했다.

하지만 일이 이렇게까지 진행되었다면 최소한 주요 인사들에게만은 진실을 전할 필요가 있었다.

코델리아는 이번에도 고개를 끄덕였다. 몇 번이나 숨을 가다듬은 뒤 조금은 침착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아버지를 모셔올게.”

“부탁할게.”

코델리아의 이마에 가볍게 입술을 맞춘 유더는 엘프 기사에게 부탁해 자리를 마련하였다.

레드 게이트 입장에서 보면 외부 인사- 그것도 외국의 인간인 유더였지만 제일검과의 격전을 목격한 엘프들 가운데 유더의 명을 거역하는 자는 없었다.

존경과 신의를 담아 성실히 유더의 명을 수행했다.

사람들이 모였다.

왕국을 대표하여 바이엘, 체이스, 흐레스벨그 세 백작들이 참석하였고 야생의 땅을 대표하여 붉은질풍과 거친눈사태가 자리했다.

엘프들 측에서는 엘룬과 그녀의 부관이 자리를 지켰다.

그리고 유더가 특별히 부른 몇 사람.

붉은바람과 태양노래, 키라라와 루카스, 스칼렛, 카이사.

“조금··· 아니, 솔직히 많이 당혹스러운 이야기일 겁니다.”

유더는 담담한 목소리로 자신이 아는 것들을 하나하나 설명했다.

너무 깊지 않게, 하지만 그렇다고 가볍지도 아니하게.

지금까지 몇 번이나 역사가 반복되었다.

플레이아데스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멸망을 피하지 못 했다.

대소환을 막아야 한다.

일단 대소환이 일어나면 멸망을 피할 수 없다.

“아우리엘의 강림을 저지하면 대소환을 막을 수 있을 겁니다.”

유더는 대천사들을 기억하고 있었다.

사리엘과 라파엘라는 인간들에게 무심했지만 그렇다 하여 목적을 위해 악마들과 손을 잡을 정도의 인물들은 아니었다.

아우리엘만 저지할 수 있다면, 그 뒤에 악마 추종자들을 박멸한다면 이번에야말로 대소환이 없는 미래로 나아갈 수 있었다.

“이상입니다.”

유더의 설명이 끝났지만 누구 하나 쉬이 입을 열지 못 했다.

그만큼이나 충격적이고 당혹스러운 유더의 이야기였다.

하지만 모두들 직감할 수 있었다.

유더는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니었다.

지금의 이야기는 모두 진실이었다.

무거운 침묵이 흐른 지 얼마나 지났을까.

바이엘 백작이 차분한 목소리로 침묵을 깨트렸다.

“그렇다면 결국, 지금이 최상이라는 것이구나.”

대소환을 위한 대륙의 환란이 부족했다.

이대로는 대소환이 일어날 수 없기에 대천사가 무리를 해가며 강림하려는 것이었다.

바이엘 백작의 말은 정확했다.

무척이나 큰 위기임에는 분명했지만, 이 위기 자체가 증거였다.

기존의 그 어떤 회차들보다도 더 나은 상황이라는 증거 말이다.

“예, 말씀하신 그대로입니다. 아버지.”

그런데 유더가 말한 직후였다.

회의실 밖에서 갑작스러운 소란이 일어났다. 엘프 기사 하나가 문을 벌컥 열며 소리쳤다.

“바, 밖을 보십시오!”

다급한 외침에 창가에 서 있던 루카스가 커튼을 거뒀다. 저도 모르게 숨을 삼키고 말았다.

저 멀리 제도가 있는 땅.

하늘에서 빛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선명하고 붉었기에 낮임에도 불구하고, 어마어마한 거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명확히 볼 수 있었다.

제도의 악마 추종자들이- 대주교 마누엘라가 아우리엘의 강림을 위한 의식을 시작한 것이 분명했다.

시간이 얼마나 남은 것일까.

명확히 알 수 없었다.

누구도 자신할 수 없었다.

한 달? 두 달? 어쩌면 열흘?

“스무날 하고도 하루가 남았어.”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유더와 코델리아는 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예상했던 얼굴이 그 자리에 있었다.

“마녀님.”

서쪽 숲의 마녀.

아스모데우스에게서 풀려난 그녀는 아탈리아에게 향하지 않았다.

어린 신인 그녀는 이제 막 잠에서 깨어났을 뿐이었다.

그녀에게는 작금의 상황을 어찌할 힘이 없었다.

그렇기에 유더와 코델리아를 찾아왔다.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붙잡기 위해, 운명의 두 사람을 돕기 위해.

“21일이 지나면 아우리엘이 강림할 거야.”

천계와 지옥이 힘을 합친 결과였다.

아마도 지금 제도에서는 어마어마한 숫자의 사람들이 피의 제물로 바쳐지고 있을 터였다.

유더는 마른 침을 삼켰다.

작금의 상황을 어찌해야 할지 필사적으로 생각했다.

제도.

제도를 에워싸고 있는 적의 병력.

아직 등장하지 않은 네 개의 재앙.

본격적으로 나설 것이 분명한 최상급 마인들.

하지만 남겨진 시간은 고작해야 21일.

머리가 아팠다.

가슴이 답답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이었다.

“간단한 이야기다.”

체이스 백작이 말했다.

언제나처럼 코웃음을 치며, 엄격하고 진지한 얼굴을 한 채.

“힘을 모아서 적을 분쇄한다.”

정말로 간단한- 단순한 이야기.

하지만 정답이었다.

애당초 그 이상의 답은 존재하지 않았다.

바이엘 백작이 웃었다.

친우의 어깨를 몇 번인가 두드린 뒤 자리에서 일어나 유더에게 다가섰다.

“유더, 아까와 같은 이야기다.”

근 2년 사이에 유더는 정말 많이 자랐다.

가슴께에나 올까 싶었던 녀석이었는데 이제는 올려다봐야만 할 정도로 큰 키가 되었다.

하지만 그래도 유더는 유더였다.

바이엘 백작 자신의 아들이었다.

유더는 다소 멍한 얼굴로 바이엘 백작을 보았고, 바이엘 백작은 그런 유더의 어깨 위에 손을 올렸다. 급박한 상황에 몰려 유더가 잊고만 사실들을 다시 한 번 깨우쳐 주었다.

“지금이 최상이다. 너와 코델리아 덕분에 우리는 많은 전력들을 온존할 수 있었다.”

이제까지와는 달랐다.

세일룬 왕국은 멸망하지 않았다.

갈까마귀들을 이끄는 흐레스벨그 백작은 지금 이 자리에 있었다.

바이엘 백작 자신도 체이스 백작과 함께 건재했다. 대악마 따위에게 죽음을 맞이하지 않았다. 오히려 검성으로서의 기량을 회복했다.

“남부는 무너지지 않았다. 영원의 숲은 죽음의 땅이 되지 않았다. 세이렌들은 말레키스의 주구가 되는 대신 우리와 함께하고 있다.”

야생의 땅은 멸망하지 않았다.

붉은질풍은 병사하는 대신 전사들을 이끌고 지금 이 땅에 서 있었다.

거친눈사태를 비롯한 야생신들 또한 건재했다.

“재앙은 플레이아데스를 유린하지 못 했다.”

광룡 얄라바스카는 탄생조차 하지 못 했다.

미쳐버린 인공 정령왕은 유더와 코델리아에 의해 격퇴되었다.

괴수 자바워크 또한 마찬가지였다.

본래라면 제국의 북부를 초토화 시켰을 불의 거인 카르트 또한 다르지 않았다.

“북부의 황제군이 건재하다. 남부의 왕국군이 건재하다.”

십검호들 또한 배신자들을 제하고는 모두 온존될 수 있었다.

제일검을 끝으로 배신자들은 모조리 처단이 된 상황이었다.

“그리고 그들 또한 건재하지.”

파라곤의 다섯 영웅들.

이 땅에 기적이 실존할 수 있음을 증명한 진정한 영웅들.

“수많은 이들의 운명이 바뀌었다.

루카스와 코델리아 두 사람 모두 마인이 되지 않았다.

스칼렛과 카이사 역시 타락하거나 마인이 되지 않고 루카스의 곁에 함께 했다.

붉은바람과 키라라는 서로를 죽이지 않았다.

왕국의 기사들, 야생의 땅의 전사들, 라이카 왕녀를 비롯한 엘프들, 세이렌들, 본래라면 죽거나 타락했어야 할 정말로 수많은 사람들.

유더는 무어라 말을 잇지 못 했다.

코델리아의 눈시울이 붉게 달아올랐다.

바이엘 백작은 웃었다.

창 밖으로 보이는 붉은 빛기둥을 보며 오히려 당당하게 선언했다.

“궁지에 몰린 것은 우리가 아니다. 악마 추종자들이다.”

지금까지 해왔던 모든 방법을 포기하고 대천사 강림에 매달릴 정도로.

그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존재하지 않을 정도로.

맞는 말이었다.

바이엘 백작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모두 너희가 해낸 일이다.”

수많은 이들의 운명을 바꾼 것도.

악마 추종자들을 궁지에 몰아넣은 것도.

바이엘 백작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전생의 일들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 하는 그였지만, 마음에 와닿는 것이 있었다.

아버지이기에 알 수 있는 것들이 있었다.

“몇 번이나 멸망을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굴하지 않고, 절대로 포기하지 않고 노력한 끝에 너희가 이뤄낸 결실들이다.”

바이엘 백작은 미소를 지었다.

연인을 잃고, 가족을 잃고, 친구를 잃고- 언제나 상처 투성이가 되어가면서까지 싸우고 또 싸운 아들의 뺨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정말로 잘해주었다. 정말로 잘해주었어.”

유더는 결국 눈물을 보였다.

코델리아는 저도 모르게 울음을 터트렸다.

잘못되지 않았다.

헛되지 않았다.

오히려 지금이야말로 그간의 노력을 보답 받을 때이다.

바이엘 백작은 틀리지 않았다.

체이스 백작의 코웃음은 이번에도 정확했다.

“급보입니다!”

다급히 전해진 또 하나의 소식.

하지만 이번에 담고 있는 것은 절망이 아니었다.

또 하나의 희망이었다.

[제자야, 네게 팔문으로의 길을 알려주마.]

란디우스에게서 온 전보.

유더와 코델리아는 서로를 마주보았고,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미소지었다.

시원한 웃음을 터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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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그림 님이 그려주신 현생 코델리아와 전생 코델리아의 합동 일러스트입니다.

멋진 일러스트 정말 감사합니다 ;ㅁ;b

< 제120장 - D-day (현생 코델리아 & 전생 코델리아 일러스트 포함)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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