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25장 - 대사교 마누엘라 >
제125장 - 대사교 마누엘라
“몇 번을 다시 태어나도 똑같아. 반드시 너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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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대비가 쏟아졌다.
무거운 동시에 차가웠고, 시야를 어지럽혔다.
게일은 뜨거운 숨을 토했다.
비에 젖은 옷이 무거웠다.
진창이 된 바닥이 발을 붙잡았다.
“하아- 하-.”
칼날을 타고 빗물과 핏물이 함께 흘렀다. 서로 엉겨 바닥에 뚝뚝 떨어졌다.
장대비 소리가 비명과 울부짖음과 함성을 짓눌렀다. 아니, 억눌렀다.
재상군은 평범한 인간들로 구성되지 않았다.
저급한 마물들과 한 몸이 된 마물병들이 대다수를 이뤘고, 두려움과 공포가 거세된 놈들의 전투력은 왕국군의 병사들을 압도했다.
“볼텍스 오브 워터!”
낭랑한 목소리와 함께 일어난 거대한 소용돌이가 재상군 수십을 휩쓸었다. 지천에 깔린 것이 물이라 그런지 평소보다 훨씬 더 위력적인 물의 칼날이었다.
“게일!”
소용돌이가 전방의 적들을 휩쓸었기에 게일은 잠시나마 뒤를 돌아볼 수 있었다.
새하얀 광익을 활짝 편 채 이쪽을 보고 있는 아델리아가 보였다.
머리 위에 자리한 천사의 고리는 언제 보아도 잘 어울렸다.
하지만 쏟아지는 비에 쫄딱 젖은 머리칼과 옷, 헐떡이는 숨결 덕분에 안타까움이 먼저 일었다.
전투가 시작된 지 얼마나 지났을까.
매 해마다 바이엘 백작과 함께 몬스터 토벌을 다녔던 게일인 만큼 전장에는 제법 익숙했지만, 그런 그에게도 지금과 같은 전장은 처음이었다.
“워터 월!”
아델리아가 돌연 다시 두 팔을 높이 들며 마법을 발동시켰다.
그러자 바닥에서 솟구친 두 개의 벽이 전장을 가로질러 지형의 변화를 야기했다.
전장에서 좋은 마법사란 단순히 강력한 공격력을 갖춘 마법사가 아니었다.
마법이란 이름의 기적으로 전장 그 자체에 변화를 야기할 수 있는 자.
때로는 공격하고, 때로는 방어하며, 어떨 때는 지금과 같이 지형을 바꾸는 것으로 전투의 흐름을 바꿀 수 있는 자.
그런 의미에서 아델리아는 정말 좋은 마법사였다.
“아델리아.”
전투 중에 잡념은 금물이었지만 문득 떠오르는 것들이 있었다.
좋은 사람.
최고의 연인.
사랑하는 아내.
플레이아데스라는 세계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체이스 백작에게 대강이나마 전해들을 수 있었다.
믿기 어려운 이야기였다.
그리고 동시에 잔인한 이야기였다.
‘아이리스.’
게일 자신의 첫 약혼녀.
첫 아내.
결혼식을 올린 다음날 숨을 거둔 그녀.
어린 시절부터 병약하긴 했지만, 씩씩한 성격만큼이나 잘 웃던 그녀는 불치병에 걸려 시한부 인생이 되었다.
그런 그녀가 품었던 마지막 소원.
결혼식을 마치고, 첫날밤이 지난 뒤에 수척해진 얼굴로나마 미소를 지으며 숨을 거두었던 그녀.
체이스 백작은 회귀가 아니라고 말했다.
하지만 몇 번이나 같은 역사가 반복되었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유더가 태어나고, 열일곱 살이 되기 전까지의 역사는 언제나 동일하다.
그렇다면 아이리스는 무엇이었을까.
못난 자신의 신부가 되는 것만이 평생의 소원이었던 그녀는, 다른 소원을 떠올리지 못할 정도로 어린 나이에, 세상을 알지 못 하고 비탄에 젖어 죽어야만 했던 그녀는 무엇이었을까.
“게일!”
아델리아의 소리침에 게일은 고개를 들었다.
과거에서 깨어나 다시 현재를 보았다.
아델리아도 아이리스를 알고 있었다.
너무 어리기도 했고, 구음절맥에 시달리느라 침대에서 벗어나질 못 했던 유더는 제대로 기억하지 못 했지만 당시 십대 초반이던 그녀는 인근 영지에 사는 발랄하고 씩씩한 영애를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게일은 아델리아를 보았다.
체이스 백작에게 들은 다른 이야기들 역시 떠올렸다.
“이번이 처음일 거라더군.”
아델리아와의 만남.
그녀와의 이어짐.
‘끝내야 해.’
몇 번이나 반복되어온 이 미친 짓거리를.
‘지켜야 해.’
지금의 시간을.
아델리아와의 현재를.
게일은 숨을 골랐다.
정신을 집중했고 머릿속을 단순화 시켰다.
지킨다.
아델리아와 현재를.
눈앞의 적에 맞서 지금을.
“유더.”
걱정 섞인 아델리아를 미소로 안심시킨 게일은 다시 돌아섰다.
쏟아지는 장대비에도 불구하고 저 멀리 보이는, 붉고 거대한 빛의 기둥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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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친눈사태는 덩실덩실 춤을 췄다.
작은 아기곰의 귀여운 춤으로 병사들의 사기를 진작시키기 위함이 아니었다.
물론, 근처에 있던 엘프들과 주술사들에게 시각적 만족감을 주기는 했지만, 주된 목적은 다른 것에 있었다.
“으샤! 으샤! 으샤! 으샤!”
야생의 땅의 주술사들이 거친눈사태를 중심으로 원무를 추었다.
저 멀리 떨어진 야생의 땅에 자리한 야생신들의 힘을 이 자리로 이끌어냈다.
“쑥쑥 자라라! 쑥쑥!”
이마 위에 황금의 용왕의 문장이 떠오른 거친눈사태가 손짓하니 땅이 크게 요동쳤다.
수풀과 나무가 단숨에 솟구쳐 자라니 아무 것도 없던 평원이 금새 거대한 숲이 되었다.
자연의 균형을 깨트리는 무도한 짓거리였다.
하지만 지금 반드시 필요한 일이기도 하였다.
콰가가가가가가-!
지상을 뒤덮은 노도가 갑자기 생겨난 자연의 방파제와 충돌해 부서졌다.
거친눈사태는 다시 한 번 춤을 추었고, 주술사들과 엘프 정령사들은 부서진 노도의 파편들을 흩어놓기 위해 노력했다.
유더와 코델리아가 말한 7대 재앙 가운데 하나.
괜히 재앙이 아니었다.
야생신들의 힘을 모조리 모았음에도 불구하고 지금처럼 방해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하지만 거친눈사태는 포기하지 않았다.
야금야금이긴 하지만 노도의 기세가 약해지고 있었다.
부서지고 흩어놓는 작전이 먹히고 있다는 증거였다.
“온다.”
전방을 주시하던 붉은질풍이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부서진 노도 사이로 마물들이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노도 본인의 생각인지, 아니면 지휘하는 자가 따로 있는지 의문이었지만 올바른 수순이었다.
거친눈사태를 직접 공격하여 노도의 진격을 방해하지 못 하게 한다.
너무나 당연하면서도 눈에 빤히 보이는 목표였고, 그랬기에 붉은질풍은 충분한 대비를 해두었다.
“가자, 야생의 땅의 저력을 보여주자.”
이야기를 들었다.
유더와 코델리아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야생의 땅이 마주했을 처참한 미래.
악마들의 꼭두각시가 되어 북부와의 전쟁에 동원되는 엿 같은 운명.
“더 이상은 허락할 수 없다.”
거대한 도끼를 거머쥔 붉은질풍은 사납게 웃었다.
전진 나팔을 불게하며 다시 한 번 크게 소리쳤다.
“쿠라하!”
“쿠라하!”
“쿠라하!”
야생의 땅의 전사들이 호응했고, 그들 모두가 마음을 하나로 모았다. 눈앞에서 돌진해오는 마물들을 도륙하고자 저마다의 무기를 움켜쥐었다.
“칼날노래여, 전쟁노래를 불러다오.”
머나먼 땅에서 위대한폭풍이 그리 말했다.
주술사들이 노래하기 시작했고, 전사들은 눈꽃바람 평원에서의 전투를 기억했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위대한 칼날노래의 전쟁노래를 불렀다.
야생의 땅을 위해 희생했던 그들의 이름을 부르짖으며 전의를 고양시켰다.
“가라, 가라, 가서 찢어발겨라!”
“와아아아아아아아!”
야생의 땅의 전사들이 성난 기세로 돌진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흐레스벨그 백작이 검을 들었다. 갈까마귀들에게 돌진을 명령했다.
엘룬 역시 검을 들었다.
제일검과의 싸움으로 몸과 마음이 모두 크게 상한 그녀였지만 방에 틀어박혀 우는 대신 다시 한 번 검을 들었다.
다시는 그런 일을 겪고 싶지 않았으니까.
엘프들을 지키고 싶었으니까.
“유더, 코델리아.”
엘룬은 주문처럼 두 사람의 이름을 불렀다.
지평을 향해 나아가는 자로서 검을 들어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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곳곳에서 싸움이 격화되었다.
사라와 레온이 포함된 북부의 황제군이 재의 여인의 진격로를 가로막았고, 성십자수호단의 단장들이 지휘하는 수호단의 정예가 최상급 마인 자바워크의 맹진을 저지했다.
대륙 전체가 전화에 휩쓸렸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대환란.
하지만 너무나 갑자기 일으킨 것이었다.
겨우 이 정도로는 대소환을 일으킬 수 없었다.
그러니 기회가 있었다.
이번에야말로 대소환을 막아낼 수 있었다.
어린 신 아탈리아는 두 손을 모았다.
신이 아닌 플레이아데스를 살아가는 이의 하나로서 기도하고 소망했다.
마지막 희망.
몇 번이나 반복된 멸망에, 플레이아데스의 신인 아탈리아 자신조차도 마음이 부서진 그때에 다음을 생각했던 자.
절대로 포기하지 않았던 자.
“유더.”
아탈리아는 기도했다.
다시 한 번 소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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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발 쾅! 쾅! 쾅!”
문을 연 순간 코델리아가 크게 외치며 남은 폭탄 전부를 염동력으로 집어던졌다.
그리고 별 모양 폭발.
골드 스타 익스플로전.
별 모양 섬광이 눈앞을 뒤덮었다.
그 빛이 어찌나 강한지 문 너머의 공간 전체를 순간 빛으로 가득 채울 지경이었다.
하지만 잠깐에 불과했다.
빛과 소리는 있었지만 폭발로 인한 파괴가 없었다.
의식의 방을 지키고 있던 악마의 손의 총수- 카이라의 힘이었다.
그녀가 앞으로 쭉 뻗은 손을 움켜쥐자 폭발이 쪼그라들었다. 한 점에 집중되어 그대로 소멸해버렸다.
압도적인 염동력.
예상한 그대로였다.
그랬기에 폭발이 사라진 직후- 눈부신 빛이 사라져 시야가 개방된 그때 카이라를 비롯한 악마 추종자 무리들은 순간을 빼앗길 수밖에 없었다.
“다 싸워봤다 이거지.”
오퍼레이션 미티어 스트레이크 발동 하루 전.
유더와 코델리아는 황궁 침입조를 모아놓고 강의를 시작했다.
“정황상 의식의 방을 지키고 있는 건 이들일 겁니다.”
악마의 손의 총수 카이라.
악마의 눈의 총수 타네시아.
악마의 입의 총수 예카테리나.
아스모데우스의 일곱 자루 검중 하나인 대악마 포르테.
오랜 시간 악마 추종자들과 싸워온 카마엘 조차도 그 정체와 능력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 하는 자들이었다.
하지만 유더와 코델리아는 달랐다.
[알지? 내가 예카테리나 최단 시간 격파 기록 보유자인거.]
코델리아가 흥흥 거리며 메시지를 보내자 유더는 빙긋 웃으며 답했다.
[알지. 내가 카이라랑 포르테 최단 시간 격파 보유자잖아?]
유더의 메시지에 코델리아는 입술을 삐쭉 내밀었고, 그 사랑스러운 모습에 유더는 다시 미소를 지었다.
[후대, 중증이군요.]
벨렌시아의 날카로운 지적에 유더는 당황하지 않았다. 사실이었으니 말이다.
때문에 유더는 태연한 얼굴로 다시 강의를 시작했다.
누가 누구와 싸워야 할지.
각각을 어떻게 공략해야 할지.
“딱대! 지금 간다!”
쾅!
섬광은 말 그대로 눈속임이었다.
문을 열어젖힌 순간 코델리아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공간 지각 능력으로 적들의 위치를 파악했다.
섬광이 눈을 가린 그때 메시지 마법으로 일행 모두에게 이미지를 전달했고, 이미 각자의 눈으로 위치를 파악하고 있던 모두는 교차 검증을 통해 자신들이 향해야 할 곳을 완벽하게 인지했다.
쾅!
빛이 가신다.
소리가 흩어진다.
악마의 손의 총수 카이라가 폭발을 소멸시킨다.
그리고 그때는 이미 일행 모두가 서야할 곳에 서 있었다.
“흑뢰번천!”
유더가 칠흑의 번개가 되었다.
악마의 입의 총수 예카테리나는 지옥의 다섯 대군주 가운데 하나인 애증의 릴리스를 모시는 자였다.
강력한 서큐버스 퀸의 사도인만큼 예카테리나 또한 막강한 유혹의 힘을 지녔으니, 그녀와 눈이 마주친 자는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자발적인 노예가 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예카테리나를 상대하는 방법은 두 가지.
하나는 아예 눈을 감고 싸우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상당한 거리를 둔 채 원거리 포격만으로 쓰러트리는 것이었다.
하지만 유더는 한 가지 꼼수를 더 생각해냈다.
“역시 코델리아가 제일 예뻐.”
예카테리나의 하얗고 아름다운 얼굴을 마주한 순간 유더는 말했다.
유혹이 문제라면 이미 유혹에 걸린 상태이면 되지 않을까?
[안 그래도 단단한 후대의 콩깍지니까요.]
딱히 유혹 마법이 필요하지 않을 정도로.
벨렌시아의 즐거운 푸념에 유더는 빙긋 웃으며 답했다.
“코델리아 다음으로 예쁜 건 벨렌시아에요. 쟤는 높게 쳐도 세 번째 쯤 되겠네요.”
[네네, 아무튼 코델리아가 최고란 거잖아요?]
벨렌시아가 흥흥 거리며 말하자 유더는 다시 웃었다. 연이은 폭언에 흥분했는지 얼굴이 시뻘겋게 변한 예카테리나에게 사정없이 흑룡의 기운을 쏟아부었다.
캉!
검의 악마 포르테가 대검으로 카마엘의 검을 막아냈다. 하지만 급히 떨쳐내며 뒤로 물러나야만 했다. 카마엘의 검에서부터 일어난 한기가 포르테의 불꽃을 집어삼키려 했기 때문이다.
포르테는 뛰어난 검사였다.
그리고 카마엘 역시 그러했다.
포르테는 불. 카마엘은 얼음.
그러니 포르테의 상대는 카마엘이 될 수밖에 없었다.
“빛이여.”
악마의 눈의 총수 타네시아를 향해 레나가 돌진했다. 빛의 마법이 특기인 타네시아였지만 애당초 속성 자체가 빛이며 태양의 천사의 계보를 잇는 레나였다.
타네시아의 공격은 반감되었고, 반감된 공격 따위에 당할 레나가 아니었다.
그리고 한 사람.
악마의 손의 총수- 카이라의 얼굴에 당혹이 어렸다.
감정의 동요가 적은 그녀였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어찌할 수가 없었다.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치는 그녀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강철의 마음, 불굴의 의지, 천하무쌍의 육체.”
거대한 폭발조차 단숨에 우그러트리는 무지막지한 염동력이었다.
하지만 눈앞의 남자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짓뭉개고 으깨려 했지만 강철 같은 근육으로 튕겨냈다.
“우오오오오오!”
솔라 블레이드를 들고 돌진하는 2미터 30센티미터- 아니, 조금 더 자라 2미터 40센티미터가 된 남자의 돌진.
염동력으로 직접 공격하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카이라는 급히 주변 지형을 부숴 공격에 이용했지만 어림없는 일이었다.
쾅! 쾅! 쾅!
그 주먹은 하늘을 부수고, 그 발은 대지를 질타할지니.
란디우스는 솔라 블레이드조차 휘두르지 않았다. 주먹질과 발길질로- 그러니까 평타로 카이라의 모든 공격을 무력화시켰다.
돌입 즉시 맨투맨 상황을 만들어 적의 연계를 막는다.
유리한 상성을 이용해 놈들을 몰아붙인다.
코델리아는 정면을 보았다.
유더와 란디우스, 레나와 카마엘에게 밀린 총수들과 대악마는 방의 구석 쪽으로 밀려났고, 거대한 의식의 방 끝에 위치한 의식의 주체- 천상의 옥좌 위에 앉아 있는 대사교 마누엘라와 그 사이에 놓인 악마들을 노려보았다.
[우리도 갈까요?]
멜리사의 물음에 코델리아는 미소로 답했다.
황금빛 폭풍이 의식의 방을 집어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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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25장 - 대사교 마누엘라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