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25장 - 대사교 마누엘라 #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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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 뭉쳐!”
“알았어! 영감! 헉?! 영감! 오른쪽!”
“알고 있다!”
벨키안이 소리치자 오른쪽 측방에 자리하고 있던 스켈레톤들이 일시에 폭발했다.
수백, 수천 조각에 달할 뼛조각들이 사방으로 튀는 대신 오직 전방으로만 향했고, 마치 클레이모어가 터진 것처럼 마물들을 찢어발겼다.
“허억··· 헉······.”
거친 숨을 토한 벨키안은 얼른 손을 놀려 마나 포션을 삼켰다.
전황이 썩 좋지 못 했다.
겨우 몇 사람이서 몇 천- 아니, 몇 만의 군세를 막아내고 있으니 이 정도만 해도 정말 잘하고 있는 것이겠지만 세계의 운명이 걸린 이 싸움에서 중요한 것은 과정이 아닌 결과였다.
“일단 빼! 밀집하자고!”
정령들을 부리는 것만으로는 부족해서 스스로 숲의 신 오리온의 화신으로 변신한 프란이었다.
머리에는 사슴의 뿔이 돋아나고, 하반신은 거대한 전마처럼 된 그는 세계수의 가지로 만든 지팡이로 땅을 찍었다.
“우르우르 흔들려라!”
대지가 프란에게 호응했다.
지면이 출렁출렁 흔들렸고, 돌진해오던 마물들이 넘어져 저들끼리 깔아뭉개기 시작했다.
“하하하! 병신들!”
예쁜 얼굴에 어울리지 않게 욕지거리를 토한 프란은 다신 손을 놀렸다. 정령들을 앞으로 내보내 시간과 공간을 만든 뒤 다시 나머지 일행을 재촉했다.
“모여! 모이라고!”
“루카스!”
카이사가 쇠사슬을 휘두르며 소리쳤고, 스칼렛은 아델라이데의 허리를 안은 뒤 프란 쪽으로 달렸다.
붉은바람은 태양노래와 함께 이미 뒤로 물러나 일종의 방어선을 구축하고 있었다.
“어서 빨리!”
붉은바람의 재촉에 막시밀리언을 등에 업은 검신이 카이사를 지나쳐 달렸다.
그리고 마지막 한 사람.
한 자루 검으로 노도를 막아서고 있는 이.
루카스는 모두의 목소리에 행동으로 응답했다.
성왕의 검이 다시 한 번 빛나며 거대한 검기가 발산되니 그의 전방에 자리하고 있던 마물들이 일시에 증발하듯 사라졌다.
“루카스!”
“알았어요, 카이사도 어서!”
숨이 제법 거칠었지만 그래도 얼굴색이 나쁘지는 않았다.
카이사를 안심시킨 그는 서둘러 물러섰고, 프란은 그런 루카스를 보며 생각했다.
‘란디우스 같아.’
단순히 검사라 그런 것이 아니었다.
‘다시 만난 란디우스는 별로 검사 같지도 않고.’
갑자기 왜 그렇게 주먹질을 하기 시작한 걸까.
그래도 일단 강하니 상관 없지만.
‘아무튼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고.’
스스로에게 제동을 건 프란은 다시 루카스를 보았다.
세계수 이르무트의 계보를 잇는 최후의 드루이드인 그는 단순히 눈으로는 볼 수 없는 수많은 것들을 볼 수 있었다.
루카스는 카마엘과 같은 재능을 타고났다.
프란 자신이 아는 최고의 검사와 같은 재능을 타고 났으니 그야말로 축복받은 천재들 가운데 하나이리라.
하지만 프란은 알고 있었다.
카마엘의 재능은 최고의 재능이 아니었다.
그보다 더 뛰어난 재능들이 이 세상에는 존재했다.
당장 검신이라는 저 노인만 해도 카마엘과 루카스를 능가하는 재능을 타고났다.
그 등에 업혀 있는, 방금까지 적이었던 놈은 노인보다도 뛰어난 재능을 타고났고 말이다.
하지만 카마엘은 저 둘보다 강했고, 루카스 역시 그러했다.
‘전생인가.’
‘이어 붙이기’의 진실을 알게 된 프란은 이제 어렴풋이나마 전생을 볼 수 있었다.
이제 겨우 십대 후반인 저 아이가 저렇게까지 강해질 수 있었던 것은 전생의 힘을 이어받은 덕분이었다.
하지만 그렇다하여 루카스를 무시할 수 없었다.
몇 번의 전생을 거듭했다하여 반드시 지평에 닿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으니 말이다.
‘마음이 강해.’
스스로에게 지지 않는 강철의 마음.
외부의 압력에 굴하지 않는 불굴의 의지.
그런 면에서 란디우스를 닮았다.
그랬기에 저 아이는 지금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었다.
“여기서 버틴다! 사수해라!”
벨키안의 외침에 언데드 무리가 응답했다.
죽음의 기사들이 깃발을 높이 들며 전의를 고양했고, 스켈레톤과 좀비들이 울부짖었다.
프란도 정신을 차렸다.
지팡이를 땅에 꽂아 토템으로 세운 뒤 크게 노래하여 일행 모두에게 축복과 가호를 선사했다.
‘란디우스.’
루카스가 유더와 코델리아를 믿고 있듯이 프란 역시 란디우스를 믿었다.
그 어떤 절망 속에서도 굴하지 않는 자.
캄캄한 어둠을 걷어내는 모두의 태양.
프란은 있는 힘껏 노래했다.
눈앞을 가득 채우는 절망 속에서 희망을 꽃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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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 죽어! 죽으란 말이야!”
악마의 눈의 총수 타네시아가 맹공을 퍼부어댔지만 레나는 쉬이 꺾이지 않았다.
사방천지를 가득 채우며 쏟아지는 빛의 마탄들을 회전하는 빛의 방벽들로 모조리 막아냈다.
타네시아는 초조함을 느꼈다.
방어 일변도였고, 쉬이 꺾이지 않는 것일뿐 자신의 공격에 조금씩 약해지고 있었다.
그러니 이대로 장기전으로 끌고 가면 타네시아 자신이 승리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래서는 타네시아 자신이 레나에게 발목이 잡히고 만다.
지금 중요한 것은 대사교 마누엘라의 사수였다.
“죽으란 말이야!”
타네시아가 허공에 만들어낸 거대한 마법진으로부터 직경이 5미터는 족히 될 빛의 기둥이 쏟아져 나왔다.
강력한 공격으로 레나의 발을 묶은 뒤 그 틈을 타 마누엘라 쪽으로 이동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어림없는 일이었다.
강력한 공격은 그만큼 틈이 많은 법이었다.
허공에 마법진이 형성되는 순간 이미 어떤 공격이 들어올지 예측하고 있던 레나는 블링크로 허무할 정도로 쉽게 빛의 기둥을 피했다. 오히려 타네시아에게 미약하게나마 반격을 성공시켰다.
“어디에도 못 가.”
레나가 작게 말하며 미소지었고, 타네시아는 두 손을 악마의 것으로 바꾼 뒤 레나에게 달려들었다. 원거리 포격이 무엇 하나 통하지 않으니 근접전을 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것이야말로 레나가 원하는 바였다.
“란디우스에게 많이 배웠거든.”
근접박투.
레나가 휘두른 철퇴가 타네시아의 뺨을 때렸다.
쾅! 쾅! 쾅!
연속해서 굉음이 터졌다.
불과 얼음이 서로 충돌할 때마다 폭발이 일었기 때문이다.
“좋아! 재밌어! 만족스러워!”
음욕의 대군주 아스모데우스는 검의 군주이기도 하였다.
그가 아끼는 일곱 자루의 검들은 모두 작위를 가진 대악마들이었고, 그들 대부분은 검에 미친 검귀들이었다.
검이 좋다.
검술이 좋다.
지평을 향해 나아가는 그 순간이 너무나 짜릿하다.
아군이 각개격파 당하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대악마 포르테는 기뻐 날뛰었고, 카마엘은 감정을 내비치지 않았다.
오직 포르테를 상대하는 것에만 온 신경을 집중하였다.
포르테를 붙잡는다.
포르테를 쓰러트린다.
그것에만 집중하면 된다.
그 이상은 필요하지 않다.
‘란디우스.’
그가 있으니까.
자신들의 태양이 이곳에 함께하고 있으니까.
설화십이검.
일곱 번째 꽃송이.
설화난영.
꽃잎을 연상시키는 수백 수천에 달할 검기가 포르테를 뒤덮었다.
“으아아아아아아아!”
코델리아가 두 손을 앞으로 뻗으며 최후의 폭발을 일으켰다.
빛의 폭풍 전부를 전방에 내몬 뒤 일시에 폭발시키는 것으로 눈앞의 모든 것들을 문자 그대로 일소했다.
무리한 일이었다.
이제까지의 싸움과 방금 일격으로 가지고 있던 마력의 절반 이상을 소모했다.
하지만 필요한 일이었다.
코델리아는 비틀거리며 소리쳤다.
“란디우스 님!”
“우오오오오오오오오!”
란디우스가 응답했다.
코델리아 열어놓은 길을 향해 몸을 날렸고, 그대로 마누엘라가 앉아 있는 천상의 옥좌를 향해 돌진했다.
[전방에 마력이!]
멜리사의 비명같은 외침은 정확했다.
코델리아가 수백에 달할 악마들을 일소했지만 그렇게 만들어진 공간을 가로지른 순간 어마어마한 마력이 발산되었다.
그리고 코델리아는 어디서 이렇게 많은 악마들이 쏟아져 나온 것인지는 이해할 수 있었다.
“지옥의 문!”
마누엘라가 자리한 천상의 옥좌 앞.
공간의 틈바구니 속에 숨겨져 있던 지옥의 문이 모습을 드러냈다.
눈꽃바람 평원에서 보았던 것처럼 거대한 문이였고, 활짝 열려 지옥의 마물들과 악마들을 쏟아내고 있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자잘한 악마들 따위가 아니었다.
마누엘라가 준비해둔 한 수.
포효하며 힘을 발하는 그것!
“데몬프린스!”
코델리아의 말에 응답하듯 지옥의 문 안쪽에서부터 거대하고 흉악한 주먹이 쏟아져 나왔다.
단숨에 란디우스를 짓뭉갤 기세로 맹진했다!
란디우스도 그것을 보았다.
거대한 주먹이었다.
직경이 3미터는 족히 될 것 같았다.
하지만 란디우스는 멈추지 않았다. 솔라 블레이드를 쥔 주먹에 힘을 모았고, 다시 한 번 태양의 힘을 발산했다!
구극태양신공 오의,
구극!
주먹과 주먹이 격돌했다.
충돌의 순간 의식의 방 전체가 뒤흔들렸고, 어마어마한 충격파가 사방천지를 휩쓸었다.
“꺄아!”
코델리아가 비명과 함께 밀려났다.
예카테리나를 격파하자마자 몸을 날린 유더가 그런 코델리아의 허리를 낚아채듯 끌어안았고, 정면을 보았다.
인간의 주먹이 데몬프린스의 주먹을 분쇄하는 광경을 목도하였다.
“우오오오오오오오오오!”
밀려났다.
데몬프린스의 일권이 튕겨 나갔다. 지옥의 문이 흔들렸고, 란디우스는 멈추지 않았다. 정면을 주시하며 솔라블레이드를 품안으로 당겼다.
“란-디-우-스-!”
지옥의 문 사이로 데몬프린스의 머리와 어깨를 내밀었다.
붉은 황소의 머리와 노란 안광과 유황과도 같은 숨결과 검고 거대한 일곱 개의 뿔로부터 란디우스에 대한 증오가 발산되었다.
하지만 란디우스는 두려워하지 않았다.
뜨겁게 불타오르는 와중이었지만 냉정하게 생각했다.
아직 지옥의 문을 온전히 나서지 못한 데몬프린스의 힘을 계산했다. 솔라 블레이드에 태양의 힘을 집중시켰다.
벤다.
가른다.
어둠을 갈라 빛을, 영광된 아침을 이끄리라!
“개벽의 검이여!”
란디우스가 포효하며 검을 휘둘렀다.
말레키스를 놈의 브레스와 함께 베어냈던 태양의 검이 다시 한 번 란디우스의 손끝에서부터 펼쳐졌다.
어마어마하게 거대한, 황금으로 빛나는 칼날이 지옥의 문을 휩쓸었다.
콰가가가가가가가가가가가-!
빛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태양의 빛이 어둠을 모두 집어삼켰다. 지옥의 문을 분쇄했고, 데몬프린스의 강림을 저지했다.
어마어마한 일격이었다.
천하의 란디우스도 지금의 일격으로 말미암아 서 있을 힘조차 잃고 말았다.
하지만 란디우스는 쓰러지지 않았다.
앞으로 나아가지 못할지언정 쓰러지지 않았고, 그대로 선 채 정면을 보았다.
천상의 옥좌를 주시하며 소리쳤다.
“유더!”
최후의 일격을 가하는 것이 자신일 필요는 없었다.
길을 여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렇기에 전력을 다했다.
유더가 있기에 여력을 남기지 않아도 되었다.
가라.
가라.
마누엘라를 격파해라!
구천구문 제팔문.
흑뢰번천.
유더가 칠흑의 번개가 되었다.
사납게 포효하며 코델리아의 곁을 떠났다. 란디우스를 지나 마누엘라에게 돌진했다.
쾅! 쾅! 쾅!
굉음과 함께 천상의 옥좌 앞으로 방벽들이 솟구쳐 올랐다.
하지만 유더는 멈추지 않고 주먹을 내질렀다.
첫 번째 방벽을 구극태양신공의 일권으로 파괴했다.
두 번째 방벽을 벨렌시아의 검으로 베어냈다.
세 번째 방벽을 향해 흑룡의 기운들을 발산했다.
콰가가가가가가가-!
세 개의 방벽들이 모두 무너졌다.
쏟아지는 잔해들을 박차 다시 한 번 흑뢰번천을 발동시켰고, 마누엘라를 향해 쇄도했다.
카카캉!
마지막 저항이었다. 천상의 옥좌로부터 심판의 검들이 쏟아져 나왔다.
유더는 그것들을 보며 팔을 당겼다. 검고 거대한 검기를 뽑아낸 뒤 움겨쥐었다.
그리고 펼치는 것은 풍뢰열광참.
바람과 번개의 검이 심판의 검들을 모조리 밀어냈다.
더 이상 대사교 마누엘라를 지킬 수 있는 것은 무엇 하나 남아있지 않았다.
“마침내.”
란디우스가 말했다.
레나가 천상의 옥좌를 돌아보았다.
카마엘이 가슴 깊은 곳에서 감정이 폭발하는 것을 느꼈다.
파라곤 왕국.
작지만 아름다웠던 그 곳.
“가라.”
가라 유더.
마지막 일격을.
파라곤 왕국을 멸망시킨 악마에게 최후를.
“유더.”
코델리아는 가슴을 움켜쥐었다.
저도 모르게 눈물을 보였다.
대소환을 막아낸다.
이번에야말로 완벽한 해피엔딩을 이끌어낸다.
“우오오오오!”
유더가 포효했다.
풍뢰열광참의 마지막 한 수를 마누엘라의 가슴에 박아 넣었다.
이것으로 마지막.
길고 길었던 여정의 종착지.
마누엘라의 육신이 풍뢰열광참의 힘을 견뎌내지 못 하고 바스라졌다.
10년에 가까운 세월동안 마누엘라를 추적했던 란디우스는 파라곤 왕국을 떠올렸다.
레나는 울음을 터트렸고, 카마엘조차도 눈물을 보였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이었다.
타네시아가 미소를 지었다.
포르테가 광소를 터트렸다.
코델리아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 눈을 부릅떴다.
무언가가 잘못되었다.
그리고 그 사실을 가장 명확하게 인지한 것은 유더였다.
‘이미 죽어 있었어.’
검기를 박아 넣은 순간 느낄 수 있었다.
천상의 옥좌 위에 앉아 있던 것은 시체였다.
마누엘라는 이미 숨을 거둔 상태였다.
어떻게 된 것일까.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 것일까.
[역시, 너희는 굉장하구나.]
바스러져 흩어지는 마누엘라의 시신에서부터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누엘라의 것이 분명했다.
[사념이다. 나는 어제 이미 죽었거든. 마지막 계획을 위해서.]
의식은 계속되고 있었다.
마치 마누엘라의 죽음이 신호였다는 듯 하늘로부터 쏟아지는 붉은 핏빛의 기둥이 더욱 강한 힘을 내뿜기 시작했다.
[너희는 강해. 끈질기고, 언제나 기적을 일으키지.]
파라곤의 다섯 영웅들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었다.
몇 번이나 이어진 삶 속에서 단 한 번도 포기하지 않고 최후의 최후까지 저항했던 남자.
어린 신 아탈리아의 검 유더 바이엘.
[그래서 애당초 당할 것을 전제로 삼았다. 너희가 어떤 수단과 방법을 강구해서라도 제도에 강습한 뒤 이곳까지 쳐들어와서 나를 죽일 거라는··· 그런 전제하에 계획을 구상했지.]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마누엘라 자신이 이곳에 있었어도 크게 달라질 것은 없었을 터였다.
[나는 너희와 싸울 생각을 버렸다. 내 목숨을 보다 중요한 곳에 쓰기로 하였지. 물론, 별로 내키는 일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레나와 카마엘은 혼란을 느꼈다.
하지만 유더는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마누엘라가 세운 계획.
놈이 준비한 일들.
[어째서 오늘이었다고 생각하지?]
재앙들을 세상에 풀어놓은 날.
어째서 오늘일까.
강림의 그날 풀어놓는 것이 정석이지 않을까?
[너희의 계산은 틀리지 않았어. 빛의 기둥만 본다면 대천사 소환까지 20일 정도의 시간이 필요한 것이 맞지. 하지만 여기에 촉매를 하나 더 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지옥의 대군주들 모두의 힘을 받은 자.
그들 모두의 화신과 같은 자.
대사교 마누엘라가 스스로의 목숨을 불태운다.
그 영육을 대천사 소환에 쏟아 붓는다.
[천사를 부르기 위해 내 목숨을 불태우게 될 줄이야. 이래서 인생이란 재미있는 것이겠지.]
재앙들이 세상에 풀려난 날 대사교 마누엘라는 자신의 목숨을 의식의 제물로 바쳤다.
사념을 남겨 상황을 지휘하긴 했지만, 말 그대로 사념일 뿐이었다.
[내 목숨으로 단축되는 시간은 5일 남짓. 아슬아슬했지만 어떻게든 된 모양이군. 너무 스스로를 자책하지는 마. 내 이야기를 듣는 시간 동안 뭔가 했다 할지라도 무리였을 테니까. 나는 앞으로 하려고 하는 일을 상냥하게 이야기해주는 바보가 아니거든. 너희가 이 방에 진입했을 때 이미 천상의 문은 열려있었다. 단지 그녀가 문을 지나는데 시간이 오래 걸렸을 뿐.]
마누엘라의 사념은 웃음을 흘렸다.
그대로 소멸하며 마지막 목소리를 내었다.
[작별이다, 파라곤의 영웅들이여.]
이번에야말로-
아니, 몇 번이나 그러했던 것처럼 다시 한 번 운명 앞에 무너지고 말 자들이여.
유더는 고개를 들었다.
하늘을 보았다.
천장에 막혀 보이지 않았지만 느낄 수 있었다.
“아우리엘.”
코델리아의 나직한 부름에 응답하듯 붉은 빛의 기둥이 갈라졌다.
프란은 볼 수 있었다.
벨키안은 거친 숨을 토했고, 스칼렛은 이를 악물었다. 카이사는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붉은바람은 덜덜 떨리는 손을 주체하지 못 했다.
루카스가 검을 늘어트린 채 하늘을 보았다.
순백의 갑주를 걸치고 열두 장의 날개를 펼친 심판의 대천사.
그녀가 천천히 눈을 떴다.
차가운 눈으로 지상을 굽어보았다.
< 제125장 - 대사교 마누엘라 #3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