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엔딩메이커-353화 (353/473)

< 제126장 - 궤적을 이어가는 자들 >

제126장 - 궤적을 이어가는 자들

“언제까지나.”

&

하늘이 갈라졌다.

붉은 빛의 기둥이 조각나 흩어졌고, 산산이 부서진 빛의 가루들이 하늘을 뒤덮었다.

푸른 하늘이 붉게 물들었다.

강제된 황혼이 세상을 뒤덮었다.

밤이 온다.

노을이 번진다.

황혼의 끝에서부터 일어난 보랏빛이 질척질척한 질감을 뿌리며 세상을 짓누른다.

눈이 있는 자는 볼 수밖에 없었다.

귀가 있는 자는 들을 수밖에 없었다.

날개가 하늘을 뒤덮는다.

절대적인 명령이 들려온다.

루카스와 벨키안과 프란만이 아니었다.

악마들 역시 하늘을 보았다.

마물들과 악마 추종자들 역시 그러했다.

제물로 바쳐지기 위해 제도에 억류되어 있던 사람들 역시 멍한 얼굴로 하늘을 바라보았다.

핏빛으로 물든 하늘 아래 거룩한 아름다움이 있었다.

붉은 역십자가가 아로 새겨진 삼각의 투구와 길게 뻗은 어깨 가리개, 허리와 등을 감싸는 황금빛 날개 형태의 보호구들.

열두 장의 날개가 빛으로 화했다.

저마다 다른 색의 빛을 그 끝에서부터 발해 보는 이의 눈을 현란케 하였다.

심판의 대천사 아우리엘.

성화에나 나올 법한 그 장엄하고 아름다운 자태에 많은 이들이 감탄을 금치 못 했다.

마침내 하늘에서부터 내려온 구원의 손길이라 생각하여 무릎 꿇고 기도하는 자가 있었다.

울면서 감사하는 이도 있었다.

구해주세요.

도와주세요.

제도에 억류되어 있던 수많은 이들이 울며 기도했다.

그리고 그들의 기도는 제도의 상공에 나타난 대천사에게 빠짐없이 전달되었다.

애원과 간청과 눈물.

아우리엘은 미소지었다. 어처구니가 없어 실소했다.

“조금도 변하지 않았구나.”

너희는 언제나 그러하지.

스스로의 힘으로 일어설 생각 따위 하지 않고 그저 언제나 구해달라 애원만 하지.

자신들을 동정하고만 이의 고혈을 빨아 그 생을 이어가는 거머리들.

존재해서는 안 될 버러지들.

아우리엘이 심판의 검을 움켜쥐었다.

그 순간 벨키안이 소리쳤다.

스칼렛이 급히 지상으로 시선을 돌렸다. 제도에 억류된 이들이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안 돼.”

저도 모르게 말한 그때 아우리엘이 심판의 검을 휘둘렀다.

그 순간 루카스는 알 수 있었다.

아우리엘이 공격하려는 것은 제도의 일부 정도가 아니었다.

“엎드려!”

프란이 벼락처럼 외쳤다. 벨키안이 손을 놀려 언데드들로 하여금 하늘로 뛰어오르게 하였다. 공격을 위해서가 아니었다. 무식하기 짝이 없는 방법이었지만 공격을 막아내기 위함이었다.

“온다.”

카이사가 말한 순간이었다.

하늘에서 빛이 작렬했다.

핏빛의 하늘로부터 반짝임이 일었고, 수백, 수천- 아니, 수만을 훌쩍 넘을 빛의 칼날들이 지상을 향해 폭우처럼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콰가가가가가가가가가가가가-!

모든 소리를 짓눌렀다.

모든 소리를 집어삼켰다.

강제된 고요 속에서 사람들의 비명 소리는 울리지 않았다.

울부짖음 또한 무거운 침묵에 짓뭉개질 따름이었다.

세상 전체가 핏빛으로 물드는 것 같았다.

선홍색 칼날이 가로놓인 모든 것들을 꿰뚫으며 지상을 두들겼다.

“아아··· 아아아······.”

항상 밝고 명랑한 아델라이데조차 두려움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베일 속에서 그녀는 울음을 터트렸다.

하얗게 질린 뺨을 따라 끝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사람들이 죽는다.

마물들이 죽는다.

공평무도한 빛의 심판 앞에 제도에 자리한 모든 이들이 일소당한다.

악마들도 다를 것이 없었다.

제도를 누비던 놈들은 대천사가 손수 불러낸 심판의 검을 막아낼 엄두조차 내지 못 했다.

대소환을 일으킬 때까지 협력한다는 것은 대천사와 대군주 사이의 이야기였다.

하등한 잡것들의 생존까지는 아우리엘도, 심지어 아스모데우스도 개의치 않았다.

“정신차려!”

카이사가 크게 소리치며 아델라이데의 멱살을 당겼다.

벨키안이 언데드들로 방패를- 직설적으로 말해 고기 방패를 만들었지만 심판의 검을 막아내기에는 어림 없는 일이었다.

언데드들의 방벽을 뚫고 심판의 검들이 쏟아져 내리니, 이곳이라 해서 안전지대 따위가 아니었다.

“제 곁으로!”

굉음 속에서 루카스의 필사적인 외침이 닿았다.

클라우솔라스로부터 순백의 검기를 길게 뽑아낸 루카스는 머리 위에서부터 쏟아지는 심판의 검들을 필사적으로 밀쳐냈다.

콰가가가가가-!

폭우는 쉬이 멈추지 않았다.

때문에 완벽히 막아내는 것은 불가능했다.

“안 돼!”

태양노래의 어깨를 심판의 검이 꿰뚫었다.

스칼렛을 대신하여 몸을 날린 카이사의 등에 심판의 검이 작렬했고, 늙은 검신의 오른팔이 의식을 잃은 제자를 대신하여 소멸하였다.

루카스 또한 무사하지 못 했다.

심판의 검이 부서지며 만들어진 파편들로 인해 전신이 피투성이가 되었다.

프란 또한 더 이상 오리온의 모습을 유지할 수 없었다.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왔고, 벨키안은 소환했던 거의 모든 언데드들을 잃고 말았다.

그리고 어느 순간.

마침내 폭우가 멈췄다.

벨키안은 이제 껍데기 밖에 남지 않은 언데드들을 걷어 하늘이 드러나게 하였다.

아니, 더 이상 껍데기들을 유지하는 것조차 무리라 무너트린 것에 가까웠다.

제도의 광경이 모두의 눈에 들어왔다.

헛구역질을 하던 아델라이데는 베일을 걷고 토악질을 해댔다.

플레이아데스 제일의 미모라는 것은 허언이 아니었지만 그녀의 빛나는 외모조차도 다른 이들의 시선을 사로잡을 수 없었다.

말도 안 돼.

그 짧은 말조차 입 밖으로 낼 수 없었다.

불과 몇 십초 만에 제도의 모습이 완전히 변했다.

수만에 달하던 마물들은 모조리 죽어 시체가 되었고, 제도에 억류되어 있던 십만이 넘는 사람들 역시 전멸하였다.

건물들은 무너지고 부서져 그 형태를 제대로 유지하지 못 했다.

대륙에서 가장 거대한 도시는 이제 그 터만을 겨우 확인할 수 있을 따름이었다.

카이사는 숨넘어가는 소리를 내었다.

고통 때문만이 아니었다.

두려움이었다.

공포였다.

프란 또한 그랬다.

거친 숨을 토하며 파라곤 왕국을 멸망으로 몰고 갔던 데몬프린스를 떠올렸다.

벨키안이 떠올린 것은 남부의 하늘을 뒤덮었던 에인션트 블랙 드래곤 말레키스였다.

둘 모두 강대한 존재들이었다.

실로 신과 같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강자들이었다.

하지만 미치지 못 한다.

하늘 위에 고고히 자리한, 저 높은 곳에 자리한 존재와는 감히 비교조차 할 수 없다.

스칼렛은 하늘을 보았다.

루카스 역시 클라우솔라스를 축 늘어트린 채 지상을 내려다보는 아우리엘을 보았다.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아우리엘은, 그녀는, 저 천상의 심판자는.

신과 같은 자 따위가 아니었다.

진정한 신이었다.

&

정신없이 싸우던 사라와 레온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 제도가 있는 방향을 보았다.

붉은 빛의 기둥이 사라졌다.

하지만 유더와 코델리아 일행이 성공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핏빛으로 물든 하늘을 보며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는 자는 없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돌아보았다.

무언가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직감했다.

&

갈까마귀들을 독려하던 흐레스벨그 백작은 흐름이 변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주 조금이지만 마물들의 힘이 강해졌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강해지고 있었다.

아직은 미미한 수준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성장세가 계속된다면 나중에는 어찌할 도리가 없어질 것이 분명했다.

‘어째서.’

흐레스벨그 백작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려 제도를 보았다. 이해를 넘어 깨달았다.

핏빛으로 물든 제도의 하늘.

저 하늘에 이유가 있었다.

&

“흔들리고 있는 거야.”

서쪽 숲의 마녀는 알았다.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대천사 아우리엘이 강제로 플레이아데스에 강림한 그 순간 저울눈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대천사라는 거대한 존재의 강림으로 인해 발생한 파문을 아스모데우스가 이용했다.

핏빛의 하늘 너머에서 지옥의 문이 열리고 있었다.

지금까지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거대한 문이.

대천사가 세상에 가하는 상처가 커지면 커질수록 더 큰 파문이 일어날 터였고, 그 파문의 힘은 지옥의 문을 더 활짝 열게 할 원동력이 될 터였다.

그로 말미암은 변화.

사방의 군대가 강해진다.

지옥이 가까워진 만큼 마물들의 힘이 강해지고, 악마들이 본연의 힘을 발할 수 있게 된다.

당연히 지옥에 근본을 둔 재앙들 역시 더욱 더 강해질 터였다.

아우리엘을 막아야 했다.

그녀를 막고 어떻게든 핏빛의 하늘을 거둔 뒤 지옥의 문까지 닫아야만 사태를 해결할 수 있었다.

그렇지 않는다면 그저 시간이 흐르는 것만으로도 돌이킬 수 없는 사태가 벌어질 터였다.

사방의 군대가 전멸한다.

마물들과 악마들이 플레이아데스 전역으로 퍼져나가며 끔찍한 학살을 자행한다.

그리하여 일어나는 것은 대환란.

그 끝에 기다리고 있는 것은 대소환으로 말미암은 플레이아데스의 멸망.

서쪽 숲의 마녀는 두 손을 모아 쥐었다.

누구에게인지도 모를 기도를 하며 제도를 바라보았다.

&

아우리엘은 무심한 얼굴로 검을 휘둘렀다.

열두 장의 날개를 활짝 펼치니 그 끝에 자리하고 있던 색색의 깃털들이 허공에 흩어졌다.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핏빛의 하늘 아래 비산하는 빛.

바람을 따라 흩날리는 천사의 깃털들.

하지만 가까스로 살아남은 이들은 모두 알 수 있었다.

장엄하기까지한 저 아름다운은 또 다른 절망의 전조라는 것을.

하늘에서 하늘하늘 춤추며 내려오던 수백에 달할 깃털로부터 빛이 일었다.

하나하나가 천사의 모습을 갖추었다.

아름다운 여인의 얼굴과 한 쌍의 날개와 한 자루 검을 손에 든 순백의 천사들.

그녀들이 지상을 보았다.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검을 들어올렸다.

그 아름다움에 혹해 이번에야말로 구원을 청하는 생존자들의 눈을 바라보았고, 즐겁게 검을 휘둘렀다.

저급한 천사들이었다.

하지만 평범한 인간들이 당해낼 수 없는 존재였다.

일천에 달하는 천사들이 제도 곳곳을 누비며 생존자들을 박멸했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으며, 해맑게 웃으며 학살을 이어가는 천사들의 모습은 그 자체로 공포였다.

“막아, 막아··· 야 해.”

프란이 간신히 말을 만들어냈다.

벨키안도 동의했다.

하지만 당장 이쪽을 향해 몰려드는 천사들을 상대하는 것조차 힘겨운 상황이었다.

벨키안의 언데드 군단은 전멸했다. 이미 죽은 언데드들을 다시 일으키긴 했지만 숫자만 많을 뿐 제대로 된 전력이 될 수 없었다.

프란 또한 힘이 바닥난 상태였다. 연이어 이어진 재앙에 제도의 땅은 힘을 잃었다.

더 이상 정령들을 불러낼 수 없었다.

“으아아아아아!”

스칼렛이 비명처럼 외치며 사복검을 휘둘렀다.

달려드는 천사들을 마구 베며 공간을 만들었다.

그녀의 시선은 정면에 있었지만 바닥에 쓰러져 있는, 자신에 대신해 심판의 검에 직격당한 결과 신음하며 괴로워하는 카이사를 머릿속에서 지우지 못 했다.

피닉스와 하나 된 붉은바람이 날아올랐다.

창염의 불길로 천사들을 불사르며 미친 듯이 맹진했지만 조금씩 그 힘을 잃어갔다.

루카스는 검을 휘둘렀다.

그리고 보았다.

대천사가 강림하고 있었다.

무심한 얼굴로 지상을 내려다보며, 마치 개미를 관찰하는 것 같은 눈으로 자신들을 보며 지상에 안착하고 있었다.

아우리엘의 발이 지면에 닿았다.

그 순간 파문이 일었다.

마치 노래하는 것 같은 아름다운 선율과 함께 황금빛 파문이 연속해서 퍼져 나갔다.

처음 한 번은 견딜 수 있었다.

하지만 두 번, 세 번, 네 번이 되니 제자리에 버티고 서 있는 것조차 어려웠다.

스칼렛은 피를 토하며 무너졌고, 프란은 주저앉아 심장을 움켜쥐었다. 벨키안 또한 더 이상은 서 있을 수 없었다.

붉은바람이 추락했다.

겨우 추슬렀던 상처가 다시 터진 카이사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루카스는 쓰러지지 않았다.

강철의 마음과 불굴의 의지를 지닌 그는 클라우솔라스를 들어올렸다.

성왕의 빛을 다시 한 번 일으켰다.

아우리엘이 그것을 보았다.

천사들을 뚫고 자신에게 돌진해오는 인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리고 불쾌함을 표현했다.

“솔라리를 욕보이는구나.”

감히 네가 그 아이의 검을 더럽히다니.

의념을 보냈다.

그리고 그것으로 충분했다.

루카스의 손에 들려있던 클라우솔라스가 요동치더니 그대로 루카스의 손바닥을 찢고 날아올랐다. 거짓말처럼 자연스럽게 아우리엘에게 돌아갔다.

“엎드려 죽어라.”

아우리엘의 말은 명령이 되었다.

무지막지한 힘이 검을 잃은 루카스를 짓눌렀다. 강제로 무릎 꿇게 한 뒤 쓰러트렸다.

“커헉!”

루카스가 왈칵 피를 토했다. 이미 무리에 무리를 거듭한 그는 더 이상 움직일 수 없었다.

“루카-!”

스칼렛의 외침은 완성되지 못 했다.

천사들의 검이 그녀의 몸을 꿰뚫었다.

네 자루나 되는 검에 등과 가슴과 허벅지와 허리를 꿰뚫린 그녀는 모든 구멍에서 피를 흘리며 무너지듯 쓰러졌다.

천사들이 프란을 짓밟았다. 그 가슴에 칼을 박아 넣었고, 벨키안의 팔을 잘랐다.

무자비한 폭력이 자행되는 가운데 아우리엘은 발걸음을 떼었다.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진 검신이 최후까지 지키고자 한 자신의 대행자를 바라보았다.

“막시밀리언.”

아우리엘은 플레이아데스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증오했다.

하지만 그나마 애착을 가진 것이 하나 있다면 눈앞의 대행자이리라.

“태양노래!”

천사의 검이 태양노래의 가슴에 박혔다.

울부짖으며 비명지르는 붉은바람의 등을 천사들이 짓밟았다. 마치 곤충채집을 하듯 그녀의 배에 칼을 꽂아넣어 움직이지 못 하게 하였다.

죽는다.

모두가 죽는다.

심장의 고동이 점점 더 작아져 마침내 끊어지고 만다.

“아-우-리-엘!”

바로 그 순간 격노가 지면을 부수고 솟구쳤다.

눈부시게 빛나는 태양의 신위가 하늘을 밝혔다.

코델리아 체이스.

솔라리의 계승자.

그녀의 광익과 헤일로부터 막대한 빛이 방출되었다.

아우리엘은 놀란 얼굴로 그녀를 보았고, 그 당황의 틈바구니를 란디우스가 파고들었다.

< 제126장 - 궤적을 이어가는 자들 > 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