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에필로그 #1 >
에필로그 #1
지옥의 문이 닫혔다.
사방의 군세에 전해지던 힘은 단절되었고, 승기는 다시 왕국군과 제국군- 플레이아데스를 지키는 자들 쪽으로 기울었다.
“우오오오오!”
바람의 검성 바이엘 백작의 손끝에서 펼쳐진 풍뢰열광참의 마지막 한 수가 재의 여인의 목을 갈랐다.
방심하지 않고 때를 기다리던 체이스 백작의 불꽃이 재의 여인을 불살랐고, 마침내 무너지는 재앙의 모습에 제국군은 승리의 함성을 터트렸다.
“이겼다! 이겼어!”
“바람의 검성!”
“붉은폭풍!”
제국군 병사들이 왕국군 장수들의 이름을 부르짖는 다소 기묘한 상황이 발생했지만 제국군의 장교들 가운데 이를 나무라는 이는 없었다.
제국 쪽의 소드 마스터들조차 바이엘 백작과 체이스 백작의 이름을 부르짖고 있는 마당이었으니 말이다.
“한 건 했군.”
체이스 백작이 지상에 안착하며 말했다.
2미터에 육박하는 거구인 그는 여전히 당당하고 강인해 보였지만 오랜 친구인 바이엘 백작은 알 수 있었다.
겉모습만 멀쩡했지 이미 쓰러지기 일보 직전인 체이스 백작이었다.
“자네도 느꼈겠지만··· 갑자기 약해졌어.”
바이엘 백작의 말에 체이스 백작은 포션 한 병을 꿀꺽 삼킨 뒤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이미 재가 되어 무너진 재의 여인을 다시 한 번 태우며 말했다.
“재앙을 강화하던 지옥의 힘이 끊어졌다. 제도의 하늘도 바뀌었고.”
“그래, 그 아이들이 제대로 해낸 모양일세.”
그 아이들.
체이스 백작의 눈빛이 조금 아련해지자 바이엘 백작은 작게 웃었다. 더 이상 서 있을 기력이 없었기에 바닥에 털썩하고 주저앉으며 제도가 있는 남쪽을 바라보았다.
유더와 코델리아.
바이엘 백작 자신의 차남과 며느리.
몇 번이나 반복된 세계 속에서도 언제나 변함없이 서로를 사랑한 두 사람.
솔직히 전생의 기억은 떠오르는 것이 거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유더의 말대로라면 바이엘 백작 자신은 언제나 전쟁 초기에 전사했으니 말이다.
기억하고 싶어도 기억할만한 일이 별로 없는 셈이었다.
‘하지만 그렇다 할지라도······.’
어렴풋이 떠오르는 것들이 있었다.
기억나지 않아도 추정할 수 있는 것들이 있었다.
“이번에야말로 둘이 함께 행복하기를.”
서로가 서로를 해하는 일 없이.
어느 한쪽만 살아남아 눈물로 날을 지새우는 일 없이.
이번에야말로 두 사람이 함께, 서로 사랑하며 살아갈 수 있기를.
“흥.”
체이스 백작이 코웃음을 치자 바이엘 백작은 웃었다.
성격과 외모, 평소 하는 행동 때문에 오해를 사기 쉬운 체이스 백작이었지만 바이엘 백작은 이번에도 알 수 있었다.
체이스 백작 역시 동의하고 있었다.
진심으로 그러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래서 바이엘 백작은 유더의 아버지답게 짓궂은 물음을 던졌다.
“아더, 이제 유더를 인정하겠나?”
“흥, 아직이다.”
“그래, 이제 인정한다는 말이군. 하기야 유일하게 문제 삼던 덩치 문제도 해결이 되었으니까. 이제 제법- 아니, 그냥 듬직하지 않나?”
“아직이다.”
“그래, 만족한다는 말이군.”
이어지는 엉뚱한 대답에 체이스 백작은 눈을 가늘게 떴지만 무어라 불만을 터트리지는 않았다.
사실 전부 맞는 말이었으니 말이다.
비리비리하던 약골 유더는 이제 없었다.
유더는 정말 듬직하게 자랐고, 강해졌다.
대륙- 아니, 인간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가장 어린 나이로 검성의 경지에 올랐고, 바이엘 백작의 말대로라면 지평에까지 닿은 존재였다.
왕국의 구원자.
아니, 이제 플레이아데스라는 세계 전체의 구원자.
거기에 인맥도 굉장했다.
대륙 양강인 왕국과 제국 모두에게 엄청나게 큰 은혜를 남겼고, 남들은 평생 한 번 보기도 힘든 페어리들과 우의를 다졌다.
영원의 숲의 엘프들뿐만 아니라 그림자 숲의 엘프들 역시 유더와 관계가 좋았다.
저 폐쇄적인 그랜드 소드 마스터 엘룬 조차도 유더는 좋아했으니 말이다.
엘프들의 동맹자.
세이렌들의 구원자.
드워프들의 물주.
야생의 땅의 수호자.
그러고 보니 돈도 많았다.
아마 왕국의- 아니, 대륙 전체의 10대들 가운데서 가장 부유한 인물은 유더가 아닐까.
‘진짜 영웅담의 주인공이군.’
아니, 영웅담에서도 이러면 개연성 밥말아먹었냐고 욕을 먹으리라.
체이스 백작의 얼굴에 흐뭇한 미소가 번지자 바이엘 백작은 다시 큭큭 웃었다.
사실 대단한 것은 코델리아 역시 마찬가지였으니 말이다.
절세가인.
코델리아보다 더 아름다운 여인을 대륙에서 찾을 수 있을까? 힘들 터였다. 아니, 불가능에 가까울 것이 분명했다.
더욱이 코델리아는 천사였다.
그것도 저 태양신 솔라리의 신위를 이어받은 천사.
까놓고 말해 이제 그냥 여신이라 해도 좋았다.
그리고 유더와 언제나 함께한 코델리아다보니 유더의 인맥이 곧 코델리아의 인맥이었다.
유더가 굉장한 만큼 코델리아 역시 굉장했다.
“결혼식이 기대되는군.”
체이스 백작의 입에서 무심코 튀어나온 진담에 바이엘 백작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정말 기대되는군.”
어쩌면 대륙 역사상 최대 규모의 결혼식이 되지 않을까?
세계를 구한 두 사람의 결혼식이니 하객들도 엄청나겠지.
잠시 결혼식의 모습을 상상해본 바이엘 백작은 어린 시절로 돌아간 것처럼 해맑게 웃었다.
결국 같이 웃기 시작한 체이스 백작과 함께 두 사람의 얼굴을 떠올려 보았다.
&
“이겼어요.”
넋 나간 얼굴로 역시나 넋이 나간 목소리로 말한 키라라는 눈을 깜박였다. 팔에 감긴 뱀의 왕을 돌아보았고, 다시 옆에 자리한 거친눈사태를 돌아본 뒤 눈을 크게 떴다.
제자리에서 폴짝 뛰어오르며 소리쳤다.
“우리가 이겼어요!”
노도는 마침내 흩어져 사라졌다.
레드 게이트가 무너지고 옐로우 게이트가 침수 될 때만 해도 이제 다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 노도의 힘이 약해졌다.
거친눈사태를 비롯한 야생신들의 힘을 거침없이 짓밟으며 전진하던 노도는 옐로우 게이트의 성벽 앞에 가로막혔다.
때를 놓치지 않은 거친눈사태의 반격에 부서지고 허물어졌다.
마치 방파제에 부딪힌 파도처럼 말이다.
“와아! 와! 이겼어요! 우리가 이겼단 말이에요!”
키라라는 거친눈사태의 손을 잡고 방방 뛰었고, 녹초가 된 거친눈사태는 제대로 뛰지도 못 해 헉헉거리다 짜증을 냈다.
“아 일단 좀!”
쉬자.
일단 숨부터 좀 고르자.
바닥에 털썩 주저앉은 거친눈사태는 아예 발라당 드러누워 버렸다.
어느새 저쪽에 있던 엘룬에게 쪼르르 달려가 다시 방방 뛰기 시작한 키라라의 뒷모습을 보다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쟤도 많이 변했네.’
썩어도 준치라고 일단은 ‘신’이라 불리는 거친눈사태였다.
전생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나자 이것저것 떠올릴 수 있는 것들이 많았다.
대부분이- 아니, 그냥 전부 다 끔찍한 기억들이었는데 개중에는 키라라에 관한 것들도 있었다.
언제나 가면을 쓰고 있던 아이.
웃는 낯으로 사람들을 대하지만 속으로는 언제나 배신하고 도망칠 생각만 하고 있던 아이.
그런데 지금은 아니었다.
아이답게 활짝 웃으며 솔직한 자기 마음을 드러냈다.
“와아아! 이겼어요! 이겼어!”
“응응, 이겼어! 우리가 이겼어!”
키라라와 엘룬이 손을 잡고 같이 방방 뛰었고, 그 귀여운 모습에 다 죽어가던 병사들과 전사들 역시 미소를 지었다.
‘이번에도 분명 너희가 뭔가를 해낸 거겠지.’
거친눈사태는 누워서 하늘을 보았다.
푸르고 맑은, 참으로 멋진 하늘이었다.
야생의 땅을 구하고, 왕국을 구하고, 제국을 구하고, 이제는 세계까지 구한 두 사람.
‘키라라의 마음 또한 구했다고 해야 하나.’
물론 거친눈사태 자신의 운명 역시도.
‘미운 녀석들.’
너무 고마워서 어떻게 감사해야 할지 모를 녀석들.
거친눈사태는 아기곰다운 미소를 지으며 유더와 코델리아를 생각했다.
두 사람의 미소를 기억했다.
&
학살자 게오르그는 도망쳤다.
다른 재앙들과 다르게 교활한 인간의 자아를 가진 놈이었다.
힘이 약해진 순간 군사들도 버리고 도망치니 이미 피해가 막심했던 게일과 아델리아 입장에서는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게일, 괜찮아요?”
“예, 버틸 만합니다.”
부부가 되었지만 여전히 서로를 존대하는 두 사람이었다.
아델리아는 이런 관계에서 때론 거리감을 느꼈지만, 이런 것이 또 자신들다웠기에, 게일다운 모습이었기에 싫어하지 않았다. 오히려 좋아하는 편이었다.
“무수 님은?”
“오른팔을 잃으셨어요. 그래도 목숨에는 지장이 없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다행이군요.”
검사에게 있어 주력으로 사용하던 팔을 잃는 것은 죽음이나 마찬가지였지만 다행이라 말할 수밖에 없었다.
어찌되었든 목숨이 붙어 있으면 어떻게든 되기 마련이었으니 말이다.
당장 게일 자신도 의수에 완전히 익숙해지지 않았던가.
“게일.”
“예, 아델리아.”
“우리··· 이긴 거겠죠?”
“예, 우리가 이겼습니다.”
담백한 말을 주고받은 두 사람은 가볍게 입술을 맞추었다.
서로 전투 때문에 피와 땀에 젖어 고약한 냄새가 났지만, 얼굴도 평소처럼 단정하지 못 했지만 그런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게일은 아델리아를 꼭 끌어안았다.
전생의 기억 중에 회복한 것은 거의 없지만 그래도 알 수 있었다.
이번이 처음이었다.
겨우 이어진 자신과 아델리아였다.
“나, 남들이 봐요. 여, 여기서는 좀······.”
“네? 아, 예.”
아델리아가 뺨을 붉히며 말하자 당황한 게일은 서둘러 물러섰다.
“흠흠, 흠흠흠.”
그런데 그냥 포옹 정도인데 왜 저런 걸까.
사실 이것도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왕도에서 목숨을 구한 이후에- 달의 힘을 얻어 바람의 늑대라 불리기 시작한 이후 게일 자신에게는 모종의 변화가 일어났으니 말이다.
‘좀··· 짐승 같기는 하지.’
여러 가지 의미로.
다시 헛기침을 터트린 게일은 아델리아를 등 뒤에서 가볍게 끌어안았다.
함께 북쪽을 보며 말했다.
“이제 두 사람 차례네요.”
“네, 이제는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 같아요.”
체이스 백작의 기질을 쏙 빼닮은 아델리아다운 대답에 게일은 크게 웃었다.
부끄러워하는 동시에 눈을 흘기는 자신의 아내를 다시 한 번 꼭 끌어안았다.
&
역병의 주인인 순백의 기사는 도주했다.
어느 순간 갑자기 강해진 놈에 의해 이미 전력의 5할 이상을 잃은 상태였던 성십자 수호단은 추적을 포기했다.
생존자들을 추스르고 부상자들을 호송하는데 전력을 다하였다.
칠살검 세류와 신속검 세바스찬은 각기 다른 곳에서 주저앉거나 드러누워 휴식을 취했다.
양쪽 모두 부상이 심했다.
세류는 그나마 쉬면 완치될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세바스찬은 아니었다. 어쩌면 다시 검을 쥘 수 없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당장은 그런 것을 생각하지 않았다.
이겼다는 사실 하나에 감사하며 눈을 감았다. 더 이상 무얼 할 생각도 하지 못 하고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곳곳에서 승전보가 이어졌다.
난생 처음 겪은 전쟁 속에서도 중심을 잃지 않고 왕녀로서의 위엄을 보이던 라이카 왕녀였지만 역시 전투가 끝나자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긴장이 맥이 탁 끊긴 그녀는 주저앉아 일어서지 못 했고, 충직한 미다스와 바네사는 그런 왕녀를 일으켜 세우는 대신 함께 주저앉는 것으로 창피를 나누었다. 아니, 사실 두 사람 모두 서 있을 여력이 없었다.
다프네 왕세녀는 승전 소식을 서둘러 전파하였고, 세일룬 국왕 헨리 2세는 왕국의 백성들 앞에 나섰다.
왕국의 승리를 모두의 앞에서 선포하였다.
사실 조금 이른 승리선언이었다.
아직 실라테스 평원이 남아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황금의 검성은 자신들의 왕이 거짓말쟁이가 되는 것을 저지하는데 성공했다.
마인이 된 제국의 그랜드 소드 마스터 루시우스를 격파한 그는 계속해서 북진하여 왕국이 열린 이래 최초로 실라테스 평원 북부 이상으로 진출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리고 시간이 흘렀다.
낮이 밤이 되고, 다시 아침이 찾아올 시간.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던 마이아는 연속해서 들려온 승전보에 안도의 숨을 쉬었다.
이제는 단짝이 된 달리아의 생존 소식이 전해졌을 때는 저도 모르게 눈물까지 보였다.
‘이겼어.’
전쟁이나 싸움은 잘 몰랐다.
하지만 '이번 싸움에서 이겼다'라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도는 알고 있었다.
이제 다 끝났다.
더 싸울 일은 없다.
달리아는 살아서 돌아올 것이고, 도련님과 마님도 그러실 터이다.
다시 돌아와, 다 같이 영지에 돌아가서, 평온하고 행복한 하루하루를 보낸다.
마이아는 두 손을 모아 기도했다.
감사하고 또 감사했다.
하지만 다시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도.
두 달이란 시간이 훌쩍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유더와 코델리아는 돌아오지 않았다.
&
가을이 지나 겨울이 찾아왔다.
제도에서의 결전으로부터 반년.
마이아는 달리아와 함께 영지로 돌아갔다.
세일룬 왕국 중앙과 남부 사이에 위치한 어거스트 백작령은 한 겨울에도 활기가 넘쳤다.
애당초 농업보다는 공업과 상업이 발달한 교역도시였기 때문이다.
유더와 코델리아가 데려왔던 명공 카시우스는 어느새 사라졌지만 그녀의 부재와 별개로 드워프들은 여전히 매일처럼 쇠를 두드렸고, 헤아리기 힘들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어거스트 백작령을 방문했다.
“이번 달 결산 보고입니다.”
“고마워요. 거기 두고 가세요.”
마이아의 공식 직책은 메이드장이었지만 사실상 그녀는 어거스트 백작가의 집사장이나 다름이 없었고, 나아가서는 어거스트 백작령 전체를 총괄하는 최고 책임자였다.
물론 평생을 메이드로 살아온 그녀가 왕국에서도 손에 꼽히는 교역도시 전부를 완벽하게 책임지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보통 사람 이상의 총기를 가진 마이아였지만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이 있기 마련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마이아는 훌륭하게 임무를 수행해나갔다.
바이엘 백작과 체이스 백작이 보내준 우수한 관료단 덕분이었지만 역시 1등 공신을 논하자면 달리아였다.
어거스트 백작령의 기사단장인 그녀는 마이아를 훌륭하게 보필하는 동시에 지탱해주었다.
마이아는 안경을 벗고 한숨을 길게 쉬었다.
오늘 안에 검토를 마쳐야 할 서류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지만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아 어쩔 수 없었다.
시간이 너무 많이 흘렀다.
이제 조금 있으면 한 해가 끝나는 날이 왔다.
그리고 그것은 곧 유더와 코델리아- 도련님과 마님이 지옥의 문 너머로 떠나신 지 반년이 넘게 지났다는 것을 의미했다.
지옥에서의 반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상상을 하려는 시도조차 두려웠다.
두 분은 어떻게 되신 것일까.
살아 계신 걸까.
돌아오실 수 있는 걸까.
마음이 약해졌다.
자꾸만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마이아.”
퍼뜩 정신을 차려 고개를 드니 달리아가 보였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더니 이내 마이아 자신을 꼭하고 끌어안았다.
“괜찮아. 무사하실 거야. 꼭 돌아오실 거야.”
유더가 마이아의 친동생이나 다름이 없다면 코델리아는 달리아의 친동생과 같았다.
저도 모르게 하얗게 질린 얼굴이 되어 있던 마이아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달리아의 온기에 의존하듯 그녀의 몸을 마주 끌어안았다.
“이제 좀 진정이 돼?”
달리아의 물음에 마이아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 반 년간 동병상련의 아픔을 안고 서로 의지하다보니 어느새 말까지 놓게 된 두 사람이었다.
“그럼 가자. 손님이 오셨어.”
“손님이?”
“루카스 경이 오셨어.”
루카스 흐레스벨그.
왕국이 자랑하는 대영웅.
십검호 가운데서 최강이라 추앙받는 하늘의 검성
하지만 마이아에게 있어 루카스의 의미는 조금 달랐다. 그는 도련님의 가장 친한 친구였다.
예고도 없이 방문하신 이유는 무엇일까.
혹시라도 반가운 소식이 있는 것은 아닐까?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동시에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만약 이번에도 별다른 소식이 없다면.
오히려 절망적인 소식이 전해진다면.
“괜찮을 거야. 같이 오신 스칼렛 님이랑 카이사 님 표정이 밝으셨는걸. 키라라도 그렇고.”
달리아가 달래듯 말하자 마이아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옷매무새를 가다듬은 뒤 허리를 곧이 세워 자세 역시 정돈하였다.
“오, 이제야 얼음 여왕님답네.”
백작가의 메이드들과 집사들이 부르는 짓궂은 별명에 마이아는 미간을 찌푸렸고, 달리아는 다시 웃었다.
마치 레이디를 에스코트 하듯 마이아의 손을 잡고 집무실을 나섰다.
&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응접실에 들어선 마이아는 일단 예부터 표했다.
유더를 대신하여 백작령을 다스리고 있는 마이아였지만 실제 신분은 평민에 불과했다.
그런 반면 지금 눈앞에 자리한 이는 왕국 굴지의 대귀족인 동시에 본인부터가 세계를 구한 대영웅이었다.
하지만 그 영웅은 마이아에게 똑같이 정중한 예를 표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마이아.”
못 본 사이에 좀 더 수척해진 마이아의 얼굴에 루카스는 걱정스러운 얼굴이 되었고, 마이아는 옅은 미소로 그를 안심시켰다.
스칼렛과 카이사, 키라라와도 인사를 나눈 뒤 자리에 착석했다.
“마이아, 오늘은 꼭 전해드릴 이야기가 있어 왔습니다.”
분위기를 풀기 위한 잡담이 끝나자마자 루카스가 자세를 바로하며 말했다.
이미 예상하고 있던 전개였지만 마이아는 손끝이 살짝 떨리는 것을 느꼈다. 달리아 역시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아시다시피··· 유더와 코델리아가 지옥의 문 너머로 떠난 지 반년이란 시간이 지났습니다. 그리고 그 둘은 아직도 돌아오지 않고 있습니다.”
차분히 나열된 사실에 마이아는 이를 악물었다.
달리아는 그런 마이아의 손을 가볍게 잡아주며 루카스를 보았다.
고작 이런 이야기를 하기 위해 이곳까지 방문했을 루카스가 아니었다.
“유더와 코델리아는 살아있습니다. 막연한 믿음 같은 것이 아닙니다. 소망도 아닙니다. 분명한 사실입니다.”
루카스는 단언했다.
너무나 듣고 싶은 말이었지만 마이아와 달리아는 기뻐하는 동시에 당황했다.
이전에 방문했을 때까지만 하더라도 이렇게까지 단호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 루카스였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페어리들에게 확인을 받았습니다. 요정왕의 가호는 여전히 두 사람과 함께하고 있습니다.”
담백한 말이었지만 가지는 의미는 컸다.
잠시 이해하지 못 하던 달리아는 이내 눈을 크게 떴고, 마이아는 다시 한 번 마른 침을 삼켰다.
루카스가 계속해서 말했다.
“유더와 코델리아는 살아있습니다. 두 사람은 지금도 지옥 어딘가에서 싸우고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구출대를 결성하기로 하였습니다.”
“구출···대요?”
달리아가 저도 모르게 되묻자 루카스는 다시 한 번 고개를 끄덕였다. 옆에서 잠자코 듣고 있던 카이사가 씩 웃으며 말했다.
“맨날 우리만 당하고 있으란 법 없잖아요?”
천계도 지옥도 플레이아데스에 쳐들어오기만 하였다.
왜 그래야만 하는가.
왜 플레이아데스만 당하고 있어야 하는가.
“천계는 이제 우리의 적이 아니에요. 대천사 라구엘이 약속해주었어요. 그러니 우리는 지옥에만 집중할 수 있어요.”
스칼렛의 말에 달리아는 마이아를 돌아보았다.
총명한 마이아는 루카스 일행이 하는 말을 바로 이해했다.
구출대가 가지는 의미 또한 깨달았다.
“우리는 갈 거예요.”
키라라가 말했다.
두려움과 공포 대신 커다란 눈에 전의를 가득 채우며 주먹을 꼭 움켜쥐었다.
루카스가 마이아를 보았다.
빌트바인과 같이 믿음직한 영웅의 얼굴로 말하였다.
“우리는 지옥에 쳐들어가 두 사람을 구해낼 것입니다.”
&
< 에필로그 #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