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엔딩메이커 SS #5 결전전야 >
엔딩메이커 SS #5 결전전야
해가 진 것은 벌써 몇 시간 전의 일이었다.
하늘은 완전한 칠흑이었다.
셀레네와 헬레네도 숨어버린 밤엔 별들이 반짝이기 마련이었지만 오늘은 그 작고 빛나는 녀석들조차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어둡고 깊은 밤.
하지만 그래도 하늘을 우러르는 자가 있었다.
그리고 그는 마침내 작은 별 하나를 찾아낼 수 있었다.
너무나 작고 흐릿한, 하지만 분명히 빛나는 별.
“란디우스.”
나직한 부름에 그는, 남자는, 파라곤 왕국이 자랑하던 태양 기사단의 유일한 생존자는 시선을 돌렸다.
그의 눈에는 아직 앳된 티가 남아 있는 아름다운 소녀가 들어왔다.
“하늘에 뭐가 있어요?”
레나 아인스버그.
파라곤 왕국의 왕실 마법사였던 바르도 아인스버그의 애제자.
왕실의 마법사치고는 지나치게 인자하고 순박했던 그는 하나뿐인 애제자를 딸처럼 대하였고, 태어나자마자 수도원에 버려진 레나 역시 바르도를 아버지처럼 따랐다.
그녀가 마법에 입문한 나이는 너무 늦었다고 해도 좋았다.
바르도에 눈에 띄었을 때는 이미 열 살 남짓이 되었을 때였으니 말이다.
뭐든 일찍 시작하면 좋은 법이었지만, 마법은 그 정도가 심했다.
‘아스트랄 라인이었나.’
모든 영혼의 고향.
세상을 에워싼 빛의 고리.
영혼을 가진 존재들은 모두 아스트랄 라인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아스트랄 라인에서 태어난 존재가 지상에서 삶을 누리고, 그 삶을 마감하면 다시 아스트랄 라인으로 향한다.
위대한 영혼의 흐름에 뒤섞여 정화된 뒤 다시 한 번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마법사들이 좋아하는 어려운 이야기를 치워두고 보자면, 결국 모든 영혼은 아스트랄 라인에서 시작된다는 것이었는데, 이 때문에 마법에 입문하는 나이는 무조건 조금이라도 어린 것이 좋았다.
‘나이가 들면 들수록, 그러니까 아스트랄 라인에서 떨어져 나간 시간이 길어질수록 우리는 망각해버리거든.’
마법은 세상의 시스템에 인위적인 조작을 가하는 것이고, 그렇기에 세상의 시스템의 일부인 아스트랄 라인에 몸담고 있던 당시의 감각이나 잠재된 기억 등이 조금이라도 더 남아 있는 상태- 즉 태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다시 한 번 그 감각을 일깨워주는 것이 중요했다.
‘흔히 말하는 마법과의 친화도, 마력제어 능력··· 그런 것들이 결정되는 시기니까 말이야.’
왕실 마법사인 바르도가 기사들 역시 ‘기사도’라는 유사 마법을 사용하는 만큼 마법에 대해 어느 정도는 알아야 한다며 강제로 듣게 했던 마법 개론을 떠올린 란디우스는 다시 레나를 보았다.
자신을 보며 예쁘게 미소짓고 있는 이 작고 가냘픈, 아직 스무 살도 채 되지 못 한 소녀는 마법에 입문하는 나이가 너무 늦었다.
하지만 그녀는 천재였고, 그녀의 재능과 바르도의 헌신은 놀라운 기적을 일으켰다.
열다섯 살이라는 너무나 어린 나이에 정식 마법사 자격을 취득한 그녀는 바르도의 사문이기도 한 회색탑에 입문하여 단 3년 만에 모든 과정을 이수하는 쾌거를 이룩하였다.
‘스승님이 빨리 보고 싶어서 그랬어요.’
언젠가, 어떻게 그렇게 빨리- 그러니까 보통은 8년, 무척 뛰어난 자들도 5년은 족히 걸리는 회색탑의 전과정을 3년 만에 이수하였느냐고 묻자 그녀가 수줍게 꺼낸 대답이었다.
‘스승님하고 다시 파라곤에서 살고 싶었어요. 그리고······.’
이유가 조금 더 있다는 듯 말끝을 흐린 그녀였지만 끝내 무어라 더 답을 내놓지는 않았었다.
그런 그녀.
회색탑의 모든 과정을 수료하고, 다시 아버지 같은 스승님과 만난다는 기쁨에 이런저런 선물을 잔뜩 싸들고 귀국했던 그녀.
“그냥. 이렇게 어두운데도 별이 하나 있어서.”
란디우스는 그리 말하며 하늘을 가리켰고, 레나는 커다랗고 파란 눈동자로 하늘을 우러렀다.
“와, 진짜네.”
감탄은 레나의 입에서 나오지 않았다.
모닥불 건너편에 앉아 있던 소년의 입에서 나왔다.
“영감, 저것 봐요. 이렇게 캄캄한데 진짜 별이 있어요. 물론 엄청 작고 흐릿하긴 하지만.”
무척이나 잘생긴- 아니, 예쁘게 생긴 소년이었다.
누가 소년이라고 알려주지 않으면 다들 소녀라고 생각할 것이 분명-하다기 보다는 그냥 알고 봐도 소녀로 보이는 신기한 소년이었다.
드루이드 프란.
솔라리 교단은 그 계보가 끊겼다고들 알려져 있고, 사실 실제로 그러하기도 했지만 파라곤에서만큼은 그런 말을 할 수 없었다.
단절된 계보를 어떻게든 잇기 위해 조잡하게나마 다시 솔라리 교단을 부활시킨 장소였기 때문이다.
진짜인지, 아니면 그저 지어낸 이야기인지 알 수 없지만 왕가에는 태양신의 솔라리의 피가 흐른다는 이야기도 있었는데, 란디우스는 그 이야기를 믿고 있었다.
왕실의 기사로서 가지는 충성심 때문이 아니었다.
란디우스에게는 나름 그만의 이유가 있었다.
어찌되었든 다시 프란.
예쁘고 되바라진 소년.
“영감, 안 보여요? 맨날 그런 칙칙한 가면을 쓰고 있으니까 그렇죠. 그거 가면의 렌즈 닦기는 하는 거죠?”
프란은 이제 겨우 열다섯 살이었다.
즉, 지금 저렇게 툭툭 건들며 되는대로 말을 던지고 있는 대상보다 5분의 1도 살지 않은 새파랗게 어린 아이였다.
하지만 그는 파라곤 왕국 최강의 드루이드였다.
파라곤 왕국의 드루이드들이 프란 한 명을 빼고는 전멸했기 때문에 하는 소리가 아니었다.
물론, 그것도 사실이기는 했지만 그 전부터 그는 파라곤 왕국 최강의 드루이드였었다.
‘선택받은 아이.’
숲의 신 오리온의 아이라는 이야기도 있었지만, 진위 여부는 불확실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가 파라곤 왕국의 서쪽 끝자락에 위치한 숲에 모여 살고 있던 드루이드들의 마지막 생존자라는 것과 오리온의 이름을 들먹여도 될 정도로 어마어마한 역량을 갖춘 자라는 사실이었다.
그의 고향은 불타버렸다.
악마 추종자들의 서쪽 숲을 불태웠고, 드루이드들을 전부 죽인 뒤 꼬챙이에 꿰어 나무들 사이에 전시해 두었다.
대드루이드에게 거짓말을 치고 이웃 나라 축제에 놀러갔던 프란은 다행히 화를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프란은 그것을 다행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함께 죽었어야 한다는- 그런 감상적인 이유가 아니었다.
‘내가 있었다면 쳐들어 온 놈들을 다 죽여 버렸을 텐데.’
가능했을지 여부는 알 수 없었지만, 프란의 성격을 여실히 드러내는 이야기이기는 했다.
프란은 복수를 생각했다.
자연의 순리를 따르는 드루이드에게 복수라는 것은 제법 낯선 이야기였지만 프란에게는 타당한 명분이 갖추어져 있었다.
‘저것들은 자연의 순리가 아니에요.’
하늘에서 내려친 번개도 아니었고, 길 가던 맹수도 아니었고, 하다못해 드루이드들이 가지고 있을지 모를 보물을 탐내 쳐들어 온 도적들도 아니었다.
악마 추종자들과 악마들.
이계의 존재들.
자연의 순리를 거스르는 괴물들.
그래서 프란은 싸움을 선택했다.
다시 이웃나라로 도망치는 대신 그는 파라곤 왕국의 중심을 향해 나아갔고, 일행과 조우하였다.
“아, 영감. 저쪽이요. 저쪽. 진짜 눈이 침침하신가.”
프란이 하늘을 향해 삿대질을 하며 목소리를 높이자 란디우스는 슬쩍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 옆을 바라보았다.
프란은 서쪽 숲의 드루이드들- 그러니까 노인들 사이에서 자란 소년이었고, 그래서 노인들을 좋아했다.
하지만 노인에도 종류가 있는 법이었다.
프란이 계속 막말을 퍼붓고 있는 상대.
벨키안.
성은 알려지지 않았다.
그저 이름만 알려진 노인이었다.
그는 사령술사였고, 파라곤 왕국의 왕실 마법사인 바르도의 오랜 친구였다.
항상 파라곤 왕국에 머무는 것은 아니었지만 1년 중에 절반 정도는 파라곤에서 보내는 편이었는데, 사실 왕실 기사단에게는 여러모로 익숙한 인물이었다.
‘란디우스, 자네는 언제나 너무 무모하군. 자네가 비록 튼튼하기는 하지만 그런 식으로 마법이나 저주를 몸으로 받아내는 건 무리라네.’
벨키안은 사령술사인 동시에 뛰어난 약제사였다.
그는 파라곤 왕국에서 머물 때마다 많은 약들을 만들어냈고, 다치는 일이 많은 만큼 기사단의 모두는 벨키안의 신세를 지는 일이 많았다.
거기다 그는 때때로 기사단에게 마법사를 상대하는 방법- 즉, 전투 훈련을 시켜주고는 했기 때문에 파라곤 왕실 기사단에게는 일단 ‘스승’에 가까운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신기하단 말이지.’
벨키안은 분명 좋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강력한 마법사답게 아주 정상적인 사람은 아니었다.
더욱이 그는 죽은 자들의 영혼을 다루는 사령술사였다.
죽음의 마력을 가진 그는 죽음의 냄새를 주변에 퍼트렸고, 그의 작은 몸짓 하나하나는 살아있는 자들에게 위협처럼 느껴졌다.
그에게 비교적 익숙한 파라곤 왕실의 기사들조차도 그 앞에서는 쉬이 긴장을 풀지 못 할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프란은 벨키안을 보통 노인처럼 대했다.
파라곤 왕국의 명예를 위해 첨언하건데 파라곤 왕국의 모든 국민들이 노인을 저렇게 막대하는 것은 절대로 아니었다.
그냥 막돼먹은 프란이 다른 노인들을 대할 때와 마찬가지로 벨키안을 대한다는 이야기였다.
란디우스 자신이라면 차라리 맨손으로 악마들과 싸우면 싸웠지 절대로 하지 못 할 짓이거늘.
그런데 신기하게도 벨키안도 프란에게 딱히 화를 내지는 않았다.
평소 그의 성격을 생각한다면 이미 오래 전에 프란을 개구리로 바꾸거나, 무언가 저주를 걸어 애걸복걸하게 만들었을 벨키안이었는데 말이다.
[어라, 몰랐어요? 지금도 걸고 있어요. 프란이 튕겨내서 그렇지.]
레나가 보낸 메시지 마법에 란디우스는 깜짝 놀라 눈을 휘둥그레 떴다.
‘저주를?’
[네, 다만 아주 강력한 저주는 아니지만요. 벨키안 님이 작정하고 저주를 걸면 프란이라도 저렇게 웃으며 튕겨내지는 못 할 거예요.]
란디우스의 얼굴만 봐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다는 듯 레나가 추가로 메시지를 보내며 쿡쿡 웃었다.
그런데 레나는 하늘의 별도, 프란과 벨키안도 보지 않고 란디우스 자신을 보고 있었던 건가?
생각해보면 레나가 곧잘 그러기는 했다.
무심코 시선을 느껴 돌아보면 언제나 자신을 바라보는 레나의 눈을 마주할 수 있었으니까.
어찌되었든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저주를 걸고 있었구나.’
그런데 그걸 또 튕겨내고 있었고.
어찌보면 무척 심각한 상황이었지만 란디우스는 저도 모르게 웃음을 흘렸다.
이상하게 유쾌한 기분이었다.
“저 별은······ 알테아다.”
작지만 아름답고 분명한 목소리에 일행 모두가 시선을 돌렸다.
무너져 내린 교회의 귀퉁이.
모닥불의 온기가 겨우 닿을듯 말듯한 곳에 앉아 있던 청년은 하늘을 우러르던 시선을 내려 일행을 마주하였다.
카마엘.
파라곤이라는 성을 받지는 못 했지만, 왕가의 피를 분명히 잇고있는 자.
무척이나 아름다운 청년이었다.
대놓고 그냥 소녀로밖에 보이지 않는 프란과는 달랐다.
여인이라 착각할 정도로 아름답기는 했지만, 카마엘의 얼굴에는 분명 사내다움이 어려 있었다.
중성적인 아름다움.
거기에 더해진 차가움이 만들어내는 인형 같은 인상.
“알테아요?”
프란의 물음에 카마엘은 괜한 말을 했다는 듯 미간을 살짝 찌푸렸지만 질문을 무시하지는 않았다.
“그래, 알테아. 작고 흐릿하지만 지금처럼 아무리 어둡고 깊은 밤이라 할지라도 찾아볼 수 있는 신비한 별이다.”
중성적인 외모와 달리 카마엘의 목소리는 톤이 낮고 강직한 부분이 있어 무척이나 남자다웠다.
프란은 얼굴이랑 어울리지 않는 목소리지만, 그 자체로 일단 듣기 좋은 미성이니 좋다고 말했다가 카마엘의 살벌한 눈빛을 받은 전적이 있었고, 레나는 그냥 듣기 좋은 목소리라는 식으로 가볍게 칭찬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란디우스는 저 목소리가 카마엘이 일부러 꾸며서 만들어낸 목소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중성적인 외모 때문에 이런저런 말을 듣는 그였던 터라 목소리라도 어찌해보려고 노력했으니 말이다.
실제 카마엘의 목소리는 저것보다 더 높고 훨씬 더 아름다웠다.
그리고 란디우스가 이러한 사실을 아는 이유는 단순했다.
‘너밖에 없다.’
이런 부탁을 할 수 있는 상대는.
수치심인지 부끄러움인지 아무튼 얼굴을 붉히며 말하던 몇 년 전의 카마엘을 떠올린 란디우스는 속으로만 작게 웃었다.
카마엘의 목소리 변조 훈련을 도운 것이 바로 란디우스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뭐, 그냥 듣고 평가해준 정도지만.’
사실 란디우스는 카마엘의 진짜 목소리가 좀 더 자연스럽고 좋다고 생각했지만 목소리의 주인인 카마엘이 지금을 좀 더 마음에 들어 했기에 이런저런 말을 늘어놓지는 않았다.
일단 본인이 좋은 것이 제일이었으니 말이다.
“신기하네요. 왜 전 저걸 모르고 있었죠?”
“수행을 게을리 했기 때문이겠지.”
벨키안이 역병의사의 가면 속에서 때는 이때라는 듯 말하자 레나는 저도 모르게 풋 하고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드루이드가 하늘의 별을 모르고 있었다니, 정말로 게을렀던 모양이군.”
벨키안이 추가타까지 가하자 더 이상 참지 못 한 레나는 배를 잡고 바닥을 굴렀고, 프란은 불만스러운 얼굴로 볼을 부풀렸다.
‘그래도 반박은 못 하는군.’
평소였다면 억지를 써서라도 반박을 했을 텐데 이번에는 정론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사실 프란에게는 조금 억울한 일이기도 했다.
알테아는 평상시에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별이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알테아를 볼 수 있는 것은 오직 파라곤 왕국의 궁전에서만이었다.
때문에 알테아의 존재를 명확히 아는 것은 파라곤 왕가의 피를 잇는 자들뿐이었는데, 카마엘은 굳이 이러한 사실까지는 밝히지 않았다.
프란이 망신을 당하든 말든 신경 쓰지 않는 것이 첫 번째 이유였고, 이러나저러나 프란을 제외한 모두가 즐거워하고 있다는 것이 두 번째 이유였다.
“으휴, 아무튼 내일이네요.”
프란이 지나가듯 꺼낸 말에 모닥불 앞의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내일.
데몬 프린스 바이카젤이 이미 자신의 영지화 시킨 파라곤 왕국의 왕궁으로 쳐들어가는 날.
솔직히 말해 미친 짓이었다.
겨우 다섯이서 신과 같은 자라 불리는 데몬 프린스와 그 군대에 맞서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과 같았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래도 해야만 했다.
왕실 마법사인 바르도가 죽기 직전에 남긴 말.
파라곤 왕국의 왕궁 지하에 만들어진 지옥의 문.
그 문을 닫지 않으면 더 큰 재앙이 이 세상을 엄습할 터였다.
‘앞으로 일주일.’
바르도가 말한 최악의 상황까지 남은 시간.
그렇기에 일행은 파라곤 왕국을 빠져나가 왕국이나 제국에 도움을 요청한다는 선택지를 고를 수 없었다.
그래서는 너무 늦고 말았다.
다섯이서 데몬 프린스를 꺾고 지옥의 문을 닫는다.
멸망의 겁화가 불러온 참극을 파라곤 왕국만으로 제한한다.
“내일이 지나면··· 그러니까 우리가 이긴다면······ 그 다음에는 무슨 일들을 할 거예요?”
레나가 모닥불을 바라보며 말했다.
도화지처럼 모닥불의 붉고 노란 빛을 받아들인 그녀의 하얀 얼굴에는 작은 미소가 어려 있었다.
불안과 두려움이 어린, 하지만 그것들을 이겨내기 위해 억지로나마 지은 미소.
“나는 연구를 계속할 생각이다.”
벨키안이 낮게 말했다.
모두의 시선이 모이자 그는 비록 가면 속이었지만 약간의 미소까지 더하며 말을 이어나갔다.
“마무리 짓고 싶은 연구가 있다. 이번 일로 인해 새로이 연구하고 싶은 것들도 생겼고. 그래서 나는 연구를 계속해나갈 생각이다.”
벨키안의 말에 란디우스와 레나는 미소를 머금었지만 프란은 인상을 찡그렸다.
“진짜 영감다운 이야기네. 평생 연구실에서 살았는데 여생도 연구실에서 보내겠다구? 그러지 말고 나랑 여행이나 다니는 건 어때? 세상 구경도 좀 해야지.”
언제나와 같은 되바라진 말에 란디우스는 슬쩍 벨키안의 눈치를 살폈지만 역병의사의 가면 때문에 표정을 알 길이 없었다.
[아, 지금 좀 센 저주 들어갔어요. 이번에는 좀 먹힌 거 같아요.]
음, 그렇구나.
레나의 해설에 란디우스는 다시 헛기침을 터트리며 애써 못 본 척, 못 들은 척 했고, 저주의 여파인지 프란은 돌연 골골거리며 말했다.
“크흠. 음. 나는 방금 말한대로 여행을 떠날 거야. 평생 파라곤 왕국에서만 살았으니까. 전 세계를 돌아보고 싶어.”
“평생이라고 해봐야 15년 밖에 안 되는 것이.”
뒤끝이 있는 벨키안다운 말에 란디우스도 그만 풋 하고 웃음을 터트렸고, 레나는 다시 배를 잡고 웃기 시작했다.
“흐유, 하여간. 영감탱이 성격이 꼬였어요, 꼬였어.”
얼굴을 찡그리며 툴툴거리던 프란은 레나를 돌아보며 물었다.
“레나는 뭐할 거야?”
“저는······.”
거기까지 말한 레나는 슬쩍 란디우스를 돌아보더니 이내 다시 모닥불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평범하게 살고 싶어요.”
“평범하게?”
“네, 마법사들은 보통 연구실에 틀어박혀서 평생 홀로 살아가잖아요? 그런 평범함 말고······ 그냥 보통 사람들처럼요. 나이를 먹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고, 결혼해서 아이도 낳고······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가는 삶이요.”
이루기 어려운 소망이었다.
선조회귀를 통해 이미 천사가 된 그녀는 평범한 인간과 너무 동떨어진 존재가 되었다.
내일의 싸움에서 어떠한 운명에 처할지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작은 미소를 그리며 자신의 소망을 밝혔다.
남들에게는 당연할지 모르지만, 그녀에게는 평생 바라며 꿈꾸어온 소원을.
란디우스는 그런 레나를 돌아보며 부드럽게 말했다.
“레나는 예쁘고 착하니까. 분명 좋은 사람을 만날 수 있을 거야.”
따뜻하고 좋은 말이었다.
하지만 레나는 어쩐 일인지 차게 식은 눈이 되어 입술을 움츠렸고, 옆에서 쳐다보던 프란은 질린 얼굴이 되어 말했다.
“와,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어요?”
“어? 내, 내가 뭐 실수했나?”
란디우스는 깜짝 놀라 레나를 돌아보았지만 레나는 무어라 답하는 대신 그저 입을 꾹 다문 채 모닥불만 바라보았고, 프란도 끌끌끌 혀만 찰 뿐 무어라 대답을 해주지는 않았다.
“벨키안 님?”
“그냥 그렇게 살게나.”
이건 또 무슨 말일까.
하지만 이 와중에도 웃는 자가 있었으니, 카마엘은 작게 웃으며 말했다.
“그래, 레나는 착하고 예쁘니까. 분명 좋은 사람을 만나겠지.”
카마엘의 말에 란디우스는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어찌되었든 동조자가 생긴 셈이었으니 말이다.
“하아, 진짜. 아무튼 그럼 카마엘은 뭐할 거예요? 다시 나라 세울 거예요?”
파라곤 왕국은 멸망했다.
설사 지금 이 자리에 모인 다섯이 승리한다 할지라도 그 사실만은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왕가의 피가 완전히 끊긴 것은 아니었다.
카마엘은 비록 사생아라해도 왕의 자식이었고, 그의 몸에는 파라곤 왕가의 피가 흘렀다.
“그럴 생각은 없다.”
카마엘의 표정이 다시 차가워졌다.
대부분의 사생아들이 그러하듯이 그 역시 혹독한 어린 시절을 보냈고, 성인이 된 이후에도 그 사정이 썩 나아진 것은 아니었다.
다행히 왕가에 적통들이 많아 왕위를 위협하는 분쟁의 씨앗 같은 것으로 여겨지기는커녕 오히려 기사로서 수업을 받을 수 있었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카마엘은 파라곤 왕가에 그다지 애정이 없었고, 왕가를 다시 일으켜 세우겠다는 사명감도 없었다.
“그럼 뭐할 건데요?”
프란이 재차 묻자 카마엘은 눈살을 살짝 찌푸렸지만 이내 다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성십자수호단에 가담할 생각이다.”
악마 추종자들에 맞서 대륙을 수호하는 자들.
다른 이들에게는 의외의 이야기처럼 들렸지만 란디우스에게는 아니었다.
카마엘의 스승인 마이트 경이 성십자 수호단 출신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 란디우스는요?”
모두의 시선이- 특히 레나의 시선이 란디우스에게 향했다.
란디우스는 그 모든 시선에 빙긋 웃더니 다시 한 번 하늘을 우러렀다.
“솔직하게 말해도 되나?”
“물론이죠. 막 하렘왕이 되고 싶다는 소원도 들어드릴게요.”
프란의 말에 레나가 흠칫하며 눈초리를 날카로이 했지만 이를 눈치 챈 이는 카마엘뿐이었다.
란디우스는 껄껄껄 웃으며 말했다.
“하렘왕은 무슨. 한 사람에게만 전력을 다해도 온전히 전할 수 없는 게 사랑인······ 표정이 왜 그러냐.”
“아뇨, 뭐. 그냥 넘어가죠.”
프란의 마뜩찮은 표정에 란디우스는 살짝 불만스러운 얼굴이 되었지만- 그리고 레나가 어쩐 일인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다는 것에 의아해 했지만 이내 다시 표정을 정돈한 뒤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
“대사교 마누엘라를 추적할 생각이야.”
파라곤의 비극을 일으킨 원흉.
왕비를 타락시켜 왕궁 내에서 다수의 악마를 소환한 그는 이미 파라곤 왕국을 떠난 상태였다.
놈을 추적해 쓰러트린다.
파라곤 왕국의 복수를 완수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놈이 다시금 이 세상에 해악을 끼치는 것을 막기 위하여.
세상의 모든 이들을 지키기 위하여.
어줍잖은 영웅심의 발로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 자리에 있는 누구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참으로 란디우스다운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솔라 블레이드도 너를 택한 것이겠지.”
벨키안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솔라 블레이드.
태양신 솔라리의 검.
파라곤 왕국의 비보이지만 그 누구도 사용할 수 없었던 봉인의 검.
그 검이 란디우스를 택했다.
란디우스 앞에서 다시 한 번 태양의 빛을 발했다.
“뭐, 란디우스는 영웅이 맞으니까요.”
프란이 낄낄 웃으며 말하자 레나가 살포시 고개를 끄덕였고, 카마엘조차도 동의한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아니, 갑자기 왜들 이래. 부끄럽게.”
그리고 정말로 얼굴을 붉히며 뒷머리를 긁적이는 란디우스.
그 모습에 나머지 네 사람은, 후일 파라곤의 영웅들이라 불린 이들은 모두 미소지었다.
내일.
분명 힘든 싸움이 펼쳐질 터였다.
어쩌면 기적적인 승리를 거둔 뒤에도 이 자리에 돌아올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을지 몰랐다.
무서웠다.
두려웠다.
하지만 그래도 맞서 싸울 수 있었다.
자신들 곁에 태양이 있었으니까.
언제 어디서고 믿고 의지할 수 있는, 항상 나아갈 길을 알려주는 희망과 같은 존재가.
“그만 잘까?”
내일을 위해서.
그리고 다시 이어질 또 다른 내일을 위해.
란디우스의 말에 모두는 다시 웃었다.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했다.
&
란디우스는 앞을 바라보았다.
10년이 넘는 시간 앞에 조금은 변해버린 폐허를 마주하였다.
파라곤 왕궁.
악마의 기운이 진하게 남아 누구도 살지 못하는 땅이 되어버린 곳.
하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악마의 기운들이 조금씩이지만 사라지고 있었다.
피와 죽음만이 가득하던 폐허에 다시금 생명의 기운들이 깃들었다.
“란디우스.”
작은 부름에 란디우스는 돌아섰다.
예상대로의 여인이 서 있었다.
“레나.”
십 년이 지났지만 그녀는 여전했다. 성숙해진 얼굴 사이사이로 예전의 앳된 모습이 남아 있었으니 말이다.
“잘 되었지?”
밑도 끝도 없는 말이었지만 란디우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말대로였으니 말이다.
대사교 마누엘라는 이제 존재하지 않았다.
플레이아데스를 위협하던 대천사와 대군주 역시 격멸되었고, 플레이아데스는 안정을 되찾았다.
단 둘이 지옥으로 떠났던 제자와 그 연인도 무사히 돌아왔고 말이다.
“살짝 아쉽긴 하겠다.”
“뭐가?”
“8.5문이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좀 더 강해진 구천구문 펼쳐보지 못한 거.”
구천구문의 여신을 만나 깨달음을 얻기는 했지만 여전히 구문을 여는 것은 무리였다.
하지만 란디우스는 나름의 성취를 이룩할 수 있었다.
과거 파라곤의 멸망을 야기했던 데몬프린스 바이카젤은 물론이고 남부에 출현했던 에인션트 블랙 드래곤 말레키스까지.
지금의 란디우스라면 단신으로 해치우는 것조차 가능할 터였다.
하지만 란디우스는 조금도 아쉬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힘을 쓸 기회를 박탈당한 것에 기꺼워했다.
“싸우지 않는 것이 최선이니까.”
누군가가 죽거나 다치고······ 그로인해 남겨진 자들이 상처받고.
그런 일들은 이제 충분하였으니까.
“그럼 이제 뭐할 거야?”
란디우스는 순간 멈칫하였다.
그리고 지금의 질문이 10년 전의 연장선임을 깨달았다.
대사교 마누엘라를 쓰러트린 지금.
란디우스 자신의 바람은 무엇일까.
앞으로 무엇을 하고 싶은 것일까.
잠시 고민하던 란디우스는 웃었다.
10년 동안 란디우스 자신도 조금은 성장했으니까.
이제는 그렇게까지 눈치가 없지 않았다.
아니, 지금도 눈치를 못 채면 그게 이상한 것이겠지.
이미 10년 전과는 여러모로 상황이 변했으니 말이다.
란디우스는 고개를 내렸다.
레나가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부끄러운지 살짝 떨고 있었지만, 10년 전 그날처럼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지는 않았다.
그 파란 눈동자.
“결혼하자.”
담백하게 말했다.
본래 좀 더 멋지게 말하고 싶었지만, 결국 입 밖에 나온 것은 너무나 투박한 말이었다.
하지만 이것으로 충분했다.
커다란 손으로 레나의 뺨을 어루만졌고, 레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저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더니 이내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응, 하자. 결혼하자.”
유더랑 코델리아가 보고 질색할 정도로 달달하게 살자.
아이도 잔뜩 낳아서 행복하게 살자.
두 사람도 이제는 전생을 기억했다.
언제나 결국 이루지 못하고 어그러진 레나의 소망을, 그녀의 전생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달라졌다.
레나는 지옥의 문을 닫기 위해 스스로를 희생하지 않았다.
란디우스는 무리하게 팔문을 열다가 자멸하지 않았다.
“내가 아니면 누가 란디 같은 거인이랑 살겠어. 내가 란디 구해줘야지.”
레나가 울면서 그리 말하자 란디우스는 껄껄 웃으며 동의했다.
너무나 사랑스러운 여인을 번쩍 들어 입술을 맞추었다.
&
파라곤이라는 나라가 있었다.
작지만 아름다운 곳이었다.
지금은 멸망해버린 그 땅에서 나고 자란 이들이 있었다.
그들은 두려움을 모르지 않았다.
죽음을 무서워하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들은 결코 도망치지 않았다.
때로는 넘어지고, 뒷걸음질치고, 주저앉을 때도 있었지만 그들은 계속해서 앞을 향해 나아갔다.
그리하여 마침내 기적을 일으킨 자들.
다시 한 번 어두운 밤을 걷어내고 새로운 아침을 이끌어낸 자들.
사람들은 그들을 파라곤의 다섯 영웅이라 불렀다.
fin
< 엔딩메이커 SS #5 결전전야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