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엔딩메이커 SS #13 지구로 (6) >
엔딩메이커 SS #13 지구로 (6)
‘네, 네가 왜 여기서 나와!’
육성은 터지지 않았다.
정신적인 비명에 가까웠다.
홍유희와 강진호는 서로를 보았고, 정신적인 비명을 지른 뒤에 바로 같은 생각을- 아니, 같으면서도 다른 생각을 떠올렸다.
‘아웃복서009?’
‘노란폭풍?’
오, 오빠가?!
쟤가?!
문자 그대로 충격과 공포였다.
신음소리 하나 튀어나오지 않았지만 두 사람의 당혹스러운 표정이 그 모든 것들을 설명해주고 있었다.
[어째 우리 때보다 더 놀라는 거 같은데?]
[쟤네는 충격의 종류가 다르니까.]
벽 뒤에 숨어서 머리만 빼꼼 내밀고 있던 코델리아의 메시지에 유더 역시 메시지로 답했다.
플레이아데스에서 전생의 기억을 각성한 뒤 처음 만났을 때.
그 때 두 사람은 바로 목소리를 토했고, 그 직후에도 나름 이성적인 사고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홍유희와 강진호는 아니었다.
유더의 말마따나 충격의 종류가 달랐기 때문이다.
[우리는 낯선 곳에서 생각지 못한 인물을 만난 것뿐인데, 저쪽은 연결할 생각도 못 했던 두 사람이 사실 동일인물이라는 걸 안 상황이지. 거기다 양쪽 모두 꽤 환상을 품고 있던 상황이고.]
[이상이 무너지고 있다는 거야? 그래서 더 충격이 크고?]
[그런 셈이지.]
플레이아데스에서 코델리아가 유더의 정체가 사실 옆집 오빠라는 것을 알았을 때와는 상황이 달랐다.
그때는 이미 코델리아가 유더에게 푹 빠진 상태였으니 말이다.
이미 좋아하는 사람이 예전에 동경했던 사람과 동일인물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의 충격은 굳이 따지면 ‘즐거운 놀라움’에 속할 터였다.
하지만 홍유희에게 있어 아웃복서009- 그러니까 아복이는 그냥 개초딩이었다.
물론 6년 동안 같이 놀다보니 정이 많이 들긴 했지만 악우에 가깝다고 해야 할 터였다.
그런데 그 아복이가.
그 개초딩 아복이가.
정말정말 멋진 오빠라고 상상해오던, 그야말로 환상 속의 이상형 같던 옆집 오빠와 동일인물이었다?
[너도 나한테 환상 품고 있었어?]
[뭐··· 착하고 예쁜 아이라는 인상 정도였지.]
[흥, 예쁜 건 알아가지구.]
코델리아가 흥흥거리자 유더 역시 피식하고 웃었다.
‘아무튼 나도··· 강진호도 충격이 클 거란 말이지.’
노란폭풍이 여자- 그것도 자기보다 한참 연하의 옆집 소녀라는 사실을 안 순간 어마어마한 부끄러움을 느꼈을 테니까.
자기보다 훨씬 어린 어린 여자애를 상대로 온갖 유치한 짓을 다 해왔으니 말이다.
어찌되었든 흥미진진한 가운데 유더와 코델리아는 다시 강진호와 홍유희를 바라보았다.
“그······ 어······ 설마 노란······ 폭풍?”
그나마 먼저 정신을 수습한 것은 역시 강진호였다.
잘 안 움직이는 뇌를 억지로 가동시켜 한 가지 결론을 이끌어낸 강진호는 심호흡을 하며 홍유희를 바라보았고, 홍유희는 강진호의 말에 새삼 화들짝 놀라더니 어버버 거리다 답했다.
“아, 아닌데요?”
저도 모르게 부정했다.
마치 잘못을 저지른 아이들이 뭐라고 하면 일단 아니라고 거짓말을 하듯이 말이다.
“아, 아니야?”
아닌데요!라는 대답에 적잖게 놀란 유더가 저도 모르게 되묻자 홍유희는 다시 어버버 거리다 쭈뼛쭈뼛 거렸고, 새빨개진 얼굴로 눈시울을 붉히더니 두 손으로 얼굴을 덮으며 답했다.
“마, 맞아. 맞아요.”
왜 빤히 보이는 거짓말은 해가지구!
홍유희는 마음속에서나마 스스로의 목을 졸랐다.
그리고 생각했다.
‘잠깐만. 그럼 진짜 아웃복서009야?’
옆집 오빠가?
옆집 오빠가 그 개초딩 아복이라고?
진짜?
정말로 진짜?
리얼루다가?
‘아, 안 돼.’
지금도 눈을 감으면 아복이의 개초딩 짓들이 떠올랐다.
미친듯이 낄낄 거리며 자신을 놀리던 아복이.
이를 악물고 놀려대던 아복이.
처음 만났을 때부터 게임 존나 못한다고 개소리를 왈왈 짖어대던 아복이.
옆집 오빠가 있었다.
멋있는 오빠였다.
노을 진 한강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담배는 몸에 해로운 거였지만 아무튼 담배 연기를 뱉으며 우수에 찬 눈으로 한강을 바라보는 옆집 오빠는 너무나 멋졌다.
그 옆집 오빠가 홍유희 자신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낄낄 웃으며 말했다.
“내가 또 1등이지롱!”
“씨발!”
저도 모르게 욕지거리를- 아니, 감탄사를 내뱉었다.
아, 안 돼.
안 돼.
소중한 게 부서져 버려.
망가져 버려.
하지만 머릿속 상상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엉덩이를 흔들며 춤을 추는 옆집 오빠.
자기 점수가 더 높다고 뻐기는 옆집 오빠.
강화하다 깨졌다고 엉엉 우는 옆집 오빠.
드랍템 훔치고 도망치는 옆집 오빠.
파워섹스라 말하면 얼굴 붉히며 부끄러워하는 옆집 오빠.
‘오, 이건 좀 좋을지··· 아니지. 아니지. 좋은 게 아니지!’
아복이가 옆집 오빠라잖아!
아복이가!
극심한 혼란 속에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비틀거리던 홍유희는 손가락 사이를 벌려 다시 정면을, 현실을 마주하였다.
곤란한 표정을 하고 서 있는 옆집 오빠.
‘씨, 씨발.’
여전히 잘생겼다.
아복이인걸 알고 봐도 일단 잘생기고 멋진 건 변함이 없었다.
그 옆집 오빠가 말했다.
“그··· 어······.”
사실 충격을 받은 건 홍유희만이 아니었으니까.
착하고 귀엽고 예의바르다고 생각한 옆집 소녀가 입에 씨발을 달고 다는 노폭이였을 줄이야.
코델리아한테 하악하악 거리면서 코델리아 일반짤은 물론이고 야짤까지 모으던 노폭이가 옆집 소녀였을 줄이야.
그리고 부끄러움.
끝없는 수치심.
‘아아악!’
강진호는 아까부터 정신적인 비명을 질러대고 있었다.
부끄러웠다.
아웃복서009로서 노란폭풍에게 한 모든 언행들이 사나운 총탄이 되어 날아들고 있었다.
‘알렉세이! 알렉세이!’
어, 어떡하면 좋죠?
어떻게 해야 하는 거죠?
적진에 홀로 고립되었을 때도 지금처럼 막막하지는 않았다.
나타샤가 나오는 야한 꿈을 꾼 다음날 아침, 나타샤를 정면으로 마주했을 때도 이렇게 부끄럽지는 않았다.
아윽.
윽.
윽.
하지만 그래도 강진호였다.
초인적인 인내력을 발휘해 이 모든 괴로움이 얼굴 밖으로 드러나는 것을 막았다.
적어도 겉모습만 보면 비교적 태연해 보일 것이 분명했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릴렉스하자.
당황을 드러내지 말자.
동요하고 있는 것을 들키면 적이 유리해질 뿐이다.
진정하자.
진정하자 강진호.
[심호흡을 하는군. 어느 정도 패닉을 회복하고 있는 모양이야.]
[오.]
유더와 코델리아가 피식피식 웃으며 지켜보는 가운데 강진호는 몇 번이고 심호흡을 반복했다.
그리고 다시 옆집 소녀 홍유희를 바라보았다.
‘침착하자.’
한 살이라도 더 먹은- 아니, 어쩌면 거의 열 살 가까이 더 먹었을 자신이 진정해야 했다.
산전수전 다 겪은 강진호 자신도 이렇게 당황했는데 이제 막 스무살이나 되었을 옆집 소녀는 어떻겠는가.
‘그래, 노폭이는 멘탈이 약했지.’
그러니까 여기서는 강진호 자신이 진정해야 했다.
강진호 자신이 연장자로서 상황을 수습해야만 했다.
“그··· 노폭이?”
“유, 유희요. 홍유희.”
유더가 닉을 입에 담자마자 홍유희가 반사적으로 이름을 말했다.
여기서 서로 닉네임을 부르면 부끄러운 건 둘째치고 머릿속이 더더욱 혼란스러워질 것 같았으니 말이다.
[오, 과연. 본능적으로 답을 찾아내는 저 자질은 여전하구나.]
[흥흥.]
코델리아가 잘난척 하는 가운데 강진호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 유희야. 어, 유희야. 난 강진호다.”
“어··· 으······ 네, 오빠.”
홍유희가 아주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듯 말했다.
얼굴이 어찌나 빨간지 톡 건드리면 터질 것 같았다.
[어쩜 좋아. 오빠래, 오빠. 너무 귀엽지 않아?]
[귀엽긴 한데, 넌 홍유희 덕후인 거니.]
홍유희는 코델리아 덕후더니만.
유더의 핀잔에 코델리아는 흥흥 거리더니 다시 두 사람에게 집중했다.
“아무튼, 어······ 일단. 어, 일단. 밥이나 먹을래?”
일단 모이면 점심부터 다 같이 먹기로 했었으니까.
강진호의 제의에 홍유희는 입술을 깨문 채 안절부절 못 하다가 결국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그대로 고개를 들며 답했다.
“으응! 아, 아니. 네······.”
작고 소심한 대답.
그런 두 사람 사이로 끝없이 까톡까톡 거리는 알림음과 진동음이 들려왔지만 두 사람 모두 휴대폰을 보지 않았다.
아니, 볼 수 없었다.
“가자.”
강진호가 먼저 돌아섰다.
홍유희는 다시 어쩔줄 몰라하다가 그런 강진호를 거리를 둔 채 따라가기 시작했고, 그렇게 열 걸음 정도 걷자 강진호가 우뚝 멈춰섰다. 그대로 돌아서더니 따라서 멈춘 홍유희를 보며 무언가 고민하는 얼굴이 되었다.
“으으음······.”
손짓으로 부르는 건 역시 좀 그렇겠지.
그렇다고 지금처럼 뚝 떨어져서 걷는 것도 그렇고.
그래서 결국 강진호는 홍유희에게 다시 다가섰다.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곳까지 돌아간 뒤에야 다시 말했다.
“가자.”
옆에서 나란히.
일단은 일행이었으니까.
강진호는 앞만 보고 걸었고, 대답 대신 고개만 끄덕였던 홍유희는 슬쩍 강진호의 옆모습을 훔쳐보았다.
그리고 다시 그런 둘을 훔쳐보고 있는 두 사람.
[어뜩해, 어뜩해. 둘 다 귀여워 죽겠어.]
코델리아가 제자리에서 방방 뛰며 감탄하자 유더는 빙긋 웃으며 생각했다.
‘그러게, 코델리아가 너무 귀엽네.’
강진호고 홍유희고 코델리아가 최고지.
유더가 그렇게 생각하는 동안 강진호와 홍유희는 근처에 있던 피자집에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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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유희는 피자를 좋아했다.
오늘 정모 점심은 무조건 피자라고 우긴 것 역시 홍유희였다.
가게를 고른 것도 홍유희였고 말이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홍유희는 피자 맛을 느낄 수 없었다.
아니, 애당초 피자가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도 알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리고 그건 강진호 역시 마찬가지였다.
슥슥슥.
사각사각.
착착착.
피자를 접시에 담고, 소스를 뿌리고, 조금씩 잘라서 입에 가져가고.
두 사람 모두 손에 들고 먹는 대신 그렇게 했고, 그렇게 두 사람 사이에는 대화 대신 효과음만이 이어지고 있었다.
숨막히는 침묵.
무거운 침묵.
괴로운 침묵.
사실 어느 정도 각오를 하고 나왔던 두 사람이었다.
남녀노소 온갖 경우를 다 상상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 많은 상상 가운데 이런 것은 없었다.
‘이런 건 없었다구!’
홍유희는 몸을 비틀며 괴로워했고, 강진호는 알렉세이의 가르침들을 머릿속으로 열심히 재생하였다.
그리고 코델리아는 행복한 얼굴로 말했다.
“맛있당. 이 맛이 그리웠어.”
“피자라면 내가 저쪽에서도 몇 번 해줬잖아.”
“응, 그것두 맛있지만 장소라고 해야 하나? 그런 것두 있잖아?”
“흠.”
“에이, 삐지지 말구. 응?”
코델리아가 애교를 부리자 유더는 결국 다시 웃더니 코델리아의 입가에 묻은 소스를 닦아주었다.
“천천히 먹어.”
“응응.”
뒷자리 커플(?)과는 다르게 보는 사람 인상이 다 일그러질 정도로 꽁냥거리는 두 사람이었다.
그리고 약 30분 뒤.
어찌어찌 피자를 다 먹은 강진호와 홍유희는 가게를 나섰다.
본래라면 이다음에 VR게임장에 가서 놀 예정이었다.
그럴 예정이었는데······.
“그··· 유희야?”
“네? 아, 네.”
강진호과 홍유희를 보았고, 홍유희가 강진호를 보았다.
그리고 코델리아가 긴장된 얼굴로 두 사람을 보았다. 유도는 코델리아를 보았고 말이다.
그렇게 몇 초.
강진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왕이니까······ 가볼래?”
VR게임장.
강진호의 제안에 홍유희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네, 오빠.”
약간은 소심하지만 묘한 기쁨이 섞여 있는 대답.
그 대답에 코델리아는 가슴을 움켜쥐며 괴로워했고, 강진호 역시 욱신하고 가슴의 통증을 느꼈다.
이유는 둘 다 같았다.
‘귀, 귀여워!’
직접적으로 생각한 건 코델리아였고, 강진호는 애써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을 지워버렸다.
“아무튼··· 가자.”
이번에도 강진호가 먼저 돌아섰지만, 아까와는 조금 달랐다. 기다리거나 되돌아가지 않았는데도 홍유희가 바로 강진호를 따라붙었다.
“흐흐흐.”
그 모습을 본 코델리아는 음흉하게 웃었고, 유더는 약간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 뒤는 제법 순조로웠다.
같이 게임하고, 영화보고, 다시 저녁 먹고.
처음에는 엄청 쭈뼛쭈뼛한 홍유희였지만 게임장을 나설 즈음에는 얼굴에 미소가 어리기 시작했다.
‘재밌어.’
재밌다.
게임도 재밌고 영화도 재밌다.
저녁도 맛있고.
물론 이러한 즐거움이 이어질 수 있었던 것은 두 사람 모두 암묵적인 합의를 했기 때문이다.
영웅전기 이야기 하지 말기.
노폭이와 아복이 이름도 꺼내지 말기.
신기하게도 그렇게 정하고 노니 제법 노는 것에 집중할 수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홍유희는 이런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이거······ 데, 데이트 아냐?’
남녀가 단 둘이 만나서 밥 먹고, 게임하고, 영화보고······.
‘저, 정신 차려!’
홍유희는 얼른 도리질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눈앞에 있는 것은 아복이 아니던가 아복이!
‘그, 그치만······.’
옆집 오빠기도 하잖아?
꿈속에서 코델리아가 말한 것처럼 엄청 잘생기고 멋진 옆집 오빠.
그리고 친절하고 상냥했다.
‘생각해보니 아복이도······.’
꿈속의 코델리아가 말한 것처럼 언제나 선은 넘지 않았으니까.
섹드립이 나오면 부끄러워하고는 했으니까.
‘오오오······.’
섹드립에 부끄러워하는 옆집 오빠의 모습을 떠올린 홍유희는 묘하게 흥분하는 자신을 느낄 수 있었다.
아무튼 그렇게 다시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저녁 식사까지 마치고 나니 어느새 밖이 깜깜해져 있었다.
이제 슬슬 돌아가야 할 때였다.
“그, 그럼······.”
여기서 안녕.
그렇게 인사하기 위해 꾸벅 고개를 숙인 홍유희였지만 강진호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
여기서 헤어져서 각자 집으로 향한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집에 데려다 줄게.”
“네?!”
“아니, 같은 방향이잖아.”
어디 같은 방향 수준인가? 그냥 옆집이었다.
“아, 으, 그, 어······.”
홍유희는 다시 어버버거렸고, 강진호는 저도 모르게 웃었다.
“가자.”
“네? 어, 네.”
그리고 다시 이동.
하지만 홍유희는 이내 의구심을 품었다.
‘어디······ 가는 거지?’
지하철 역은 이쪽 방향 아닌데.
버스도 아니구······.
홍유희가 의아해하는 가운데 강진호가 도착한 곳은 홍대 지하 주차장이었다.
그랬다.
지하주차장.
서로 옆집에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홍유희와 강진호가 서로 다른 방향에서 왔던 이유.
“여기.”
강진호는 그리 말하며 조수석 문을 열었고, 홍유희는 다시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의자가 두 개밖에 없네?’
그랬다.
강진호의 차는 2인승 스포츠카였다.
차에 대해 잘 모르는 홍유희였지만, 아무튼 하얗고 예쁜 게 무척 마음에 들었다.
‘이게 옆집 오빠 차였구나.’
집 근처에서 몇 번 본 기억을 떠올린 홍유희는 주저주저하다가 조수석에 탑승했고, 문을 닫아준 강진호는 다시 운전석에 자리했다.
“안전벨트 매고.”
“네.”
그리고 찰칵.
시동 걸고 잠시 대기하다가 출발.
평범한 차보다 훨씬 낮은 시야에 잠시 당황하던 홍유희는 마른 침을 꿀꺽 삼킨 뒤 슬쩍 옆자리를 돌아보았다.
정면을 보고 운전 중인 강진호의 모습이 보였다.
진지한 얼굴.
운전하는 모습.
‘진짜 어른이야.’
진짜 어른.
어른인 척 하는 꼬맹이가 아니라 진짜.
저도 모르게 뺨을 붉힌 홍유희는 얼른 고개를 돌렸다. 마구 쿵쾅거리기 시작하는 심장을 진정시키듯 가슴을 꾹 누르며 정면을 보았다.
그리고 다시 이십 분쯤 지났을까.
애당초 홍대와 그렇게 거리가 멀지 않은 덕에 집에 돌아오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아파트 지하 주차장.
이번에도 먼저 내린 유더는 자연스럽게 조수석 문을 열어주었다.
홍유희는 쭈뼛거리다가 조심스럽게 차에서 내렸고 말이다.
“음··· 갈까?”
엘리베이터도 같이 타야 했으니까.
홍유희는 이번에도 고개를 끄덕였고, 두 사람은 천천히 승강기가 있는 곳을 향해 발걸음을 떼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이었다.
펑!
갑작스러운 굉음과 함께 천장에 부착되어 있던 스프링클러에서 물이 미친듯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꺅?!”
홍유희가 비명을 지르는 가운데 강진호는 반사적으로 움직였고, 결과적으로 두 사람은 금방 스프링클러 밑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지만 이미 물벼락을 뒤집어 쓴 후였다.
“으아?”
“괘, 괜찮아?”
강진호의 물음에 홍유희는 무어라 대답도 하지 못 했다.
물벼락을 정통으로 뒤집어 쓰는 바람에 머리가 젖는 수준이 아니라, 아예 속옷까지 다 젖어버렸기 때문이다.
‘씨발!’
기분 좋았었는데!
속으로 감탄사를 토한 홍유희는 성질을 부리는 대신 한숨을 길게 내쉰 뒤 말했다.
“이, 일단 들어가요.”
그나마 다행인 것은 엘리베이터 타고 조금만 이동하면 집이라는 사실이었다.
젖어서 짜증나지만 들어가서 바로 샤워하고 옷 갈아입으면 되겠지.
“그래.”
강진호는 갑자기 터진 스프링클러를 한 차례 돌아본 뒤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시 몇 분 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두 사람은 다시 어색한 얼굴로 서로를 보았다.
“그, 어······ 그럼.”
“어, 으, 네.”
“자, 잘 가?”
“오, 오빠두요?”
일단은 인사.
하지만 이대로 돌아가서 영웅전기2에 접속하면 서로가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럼 이제 뭐라고 해야 하지?
영웅전기2에서 보자고 해야 하나?
하지만 두 사람은 결국 어설픈 인사를 끝으로 돌아선 뒤 각자의 문앞에 섰다.
그런데 여기서 다시 문제가 발생했다.
“어?”
홍유희네 집 문이 열리지 않았다.
전자도어가 고장이라도 났는지 아무리 맞는 번호를 입력해도 소용이 없었다.
“어어어.”
당황한 홍유희는 급히 초인종을 눌렀지만 안에서도 대답이 없었다.
그리고 사실 이는 당연한 일이었다.
부모님은 어제 저녁에 갑자기 당첨된 온천 여행권을 가지고 여행을 가셨으니까.
집에 사람은 없고 문은 열리지 않는다.
열쇠 아저씨를 부르면 될 것도 같았지만 이렇게 늦은 밤에 부르면 올까? 와도 금방 될까?
더욱이 홍유희 자신은 지금 쫄딱 젖은 상황이었다.
어찌해야 하는가.
어떡하면 좋은가.
“저기?”
바로 그때 들려온 목소리에 홍유희는 반사적으로 돌아섰다.
문 앞에 서서 이쪽을 보고 있는 강진호.
관찰력이 좋은 그였다.
단번에 홍유희의 상황을 추리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그랬기에,
강진호는 고심했다.
너무 오지랖을 부리는 것일지도 몰랐으니까.
어쩌면 너무 큰 오해를 부를지도 모를 일이었으니까.
‘하지마.’
이성이 말렸다.
하지만 동시에 마음속의 또 다른 강진호가 말했다.
‘저대로 방치할 거야? 이웃의 정이 있는데? 그것도 그냥 이웃이 아니라 노폭이인데?’
살짝 이질적인, 마치 타인의 것처럼도 들리는 그것.
하지만 합리적이었다.
강진호 자신의 속마음과 일치하고 있었다.
“그······.”
강진호는 말끝을 흐렸고, 홍유희는 눈을 깜박이며 그런 강진호를 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강진호가 말했다.
“쉬었다 갈래?”
말한 직후 후회했다.
아니, 말을 해도 쉬었다 갈래가 뭐야.
다른 말도 많은데!
그리고 그렇게 강진호가 초조함과 긴장 속에 자책을 이어나가는 순간.
홍유희는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강진호와 그 뒤에 자리한 강진호의 집 문을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대답을 내놓았다.
to be continued
< 엔딩메이커 SS #13 지구로 (6)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