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엔딩메이커 SS #14 지구로 (7) >
엔딩메이커 SS #14 지구로 (7)
강진호는 문을 열었다.
전자도어의 잠금이 해제되는 소리가 오늘따라 요란하게 들렸다.
쿵쾅쿵쾅.
심장이 뛴다.
두근두근도 아니고 쾅쾅쾅 뛰고 있다.
입안이 마른다.
저도 모르게 침을 삼키자 꿀꺽하고 커다란 소리가 난다.
‘내가 지금 뭐하는 거지?’
옆집소녀를, 노폭이를, 집에 데려온다.
쫄딱 젖은, 그래서 집에 데려오면 일단 샤워하라고 욕실부터 빌려줘야 하는, 그리고 그러다보면 갈아입을 옷도 준비해줘야 하는, 당연히 지금 입고 있는 옷가지들은 속옷까지 포함하여 전부 세탁해줘야 하는, 그런, 그런, 그런 상대를 집에, 방에, 그것도 이렇게 야심한 시간에, 남자도 아니고 여자를, 노폭이를, 옆집소녀를, 유희를.
‘알렉세이. 알렉세이. 알려줘요. 알렉세이.’
어떻게 해야 하는 거죠?
적진에 홀로 고립되었을 때도 이런 기분은 들지 않았다.
지금은 뭐라고 해야 할까.
단신으로 완전무장한 일개 대대와 싸우기 위해 나아가는 기분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 부비트랩으로 가득 찬 기지에 맨몸으로 잠입하는 쪽이 좀 더 정답에 가까울 것 같았다.
‘치, 침착하자 강진호.’
승리조건을 생각해라.
이번 전투의 승리조건은 무엇이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머릿속의 강진호들이 총집결하여 군사회의를 진행 중이었지만 작전 목표조차 명확히 할 수 없었다.
“함락! 홍유희 함락!”
머릿속 강진호 가운데 하나가 소리쳤고, 회의를 주관하던 대장 강진호가 소리쳤다.
“저 자식 끌어내!”
“으으읍! 읍읍!”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이던 강진호가 다른 강진호들에게 입이 막힌 채로 끌려나갔다.
이제 보니 나타샤 알몸을 상상하던 강진호가 저놈인 것 같았다.
“대장, 제가 한 말씀 드려도 될까요.”
바로 그때 안경을 쓴 강진호가 손을 들며 말했다.
강진호들의 시선이 집중되자 대장 강진호가 발언권을 주었다.
“말해라.”
“객관적으로 생각합니다. 애당초 타깃을 집에 초대한 이유가 무엇이죠? 물에 쫄딱 젖은 타깃을 이대로 거리에 내모는 짓은 너무나 비인간적이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강진호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에 힘을 얻은 안경 쓴 강진호가 다시 한 번 말했다.
“집에 데려와서 씻기고 옷을 갈아입힌 뒤 추후 대책을 모의한다! 이 정도를 일단의 작전목표로 정해야 한다고 봅니다.”
“오오오.”
이번에도 강진호들이 동의했다.
하지만 이야기를 듣던 강진호들 가운데 하나가,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집안 관리를 책임지고 있는 가정주부 강진호가 손을 들고 말했다.
“추후 대책이라면 무얼 의미하는 거지?”
추후 대책.
홍유희를 일단 집에 들인 다음에 무엇을 할 것인가.
“그야 야한 지- 읍읍!”
“저 자식도 끌어내!”
이상한 소리를 하던 강진호가 다른 강진호들에게 붙잡혀 이번에도 막사 밖으로 끌려나갔다.
대장 강진호는 흠흠 헛기침을 토한 뒤 말했다.
“일단 이 사태의 원인은 홍유희의 집 문이 잠겨있다는 것에 있다. 집에 들여서 일단 씻기고, 직접 문을 해체하거나 업자를 불러 원인을 제거한다.”
“그렇다면 업자를 부르는 쪽이 좋을 겁니다. 만약의 경우 전자도어를 부숴야 할 텐데, 창고에는 대체품이 없습니다.”
“그래, 그쪽으로 고려해보지.”
안경 쓴 강진호에게 답한 대장 강진호는 다시 모두를 돌아보며 말했다.
“너무 두려워하지 마라. 긴장도 하지 마라. 별 거 아닌 일이다. 이웃집 사람이 곤경에 처했으니 이웃으로서 돕는다. 그것뿐이니 조금도 긴장할 필요 없다. 알겠나?”
“Yes, Sir!”
강진호 일동이 우렁차게 답했고, 대장 강진호는 만족했다.
하지만.
“씨, 씻을래?”
“네······?!”
현관.
강진호의 물음에 홍유희는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며 당황했다.
덕분에 덩달아 당황한 강진호가 허둥거리며 말했다.
“아, 아니! 그, 그러니까! 저, 젖었잖아?”
객관적 사실의 나열이었다.
하지만 강진호는 더더욱 당황했고, 홍유희 역시 마찬가지였다.
새빨개진 얼굴.
뜨겁다.
너무 뜨겁다.
하지만 강진호는 애써 심호흡을 했다. 총탄이 빗발치는 전장을 떠올리며 어떻게든 말을 이어나갔다.
“젖었으니까. 어, 그러니까. 집에 세탁기랑 건조기가 있거든. 소량이니까 금방 마를 거야. 세탁에 건조까지 두 시간? 그러니까 어, 그. 일단 젖었으니까. 샤워하고······.”
“샤, 샤워하고?”
홍유희의 얼굴에 새로운 경악이 번졌고, 강진호 역시 그러했다.
샤워.
샤워.
샤워.
‘아니, 샤워가 왜!’
그냥 평범한 거잖아?
젖었으면 샤워를 해야지.
어, 샤워.
발가벗고 하는 샤워.
‘저 자식 끌어내!’
머릿속에서 대장 강진호가 다시 음란마귀에 휩싸인 강진호를 쫓아낸 그 순간, 강진호가 입을 열어 말했다.
“아니, 그. 어. 그래. 일단 씻어야지. 감기 걸릴라.”
감기.
타당한 이유.
마침내 다시 찾아온 합리.
강진호가 진땀을 흘리며 스스로의 논리에 만족하고 있을 때, 홍유희의 머릿속에서는 다급한 목소리들이 오가고 있었다.
“어, 어떡하지?”
“샤워해도 되는 거야?”
“하지만 진짜 젖기는 했으니까.”
“이러다 감기 걸릴지도 몰라.”
“맞아맞아, 말하고나니까 추워.”
“찝찝하기두 하구.”
홍유희들이 너도나도 목소리를 내는 가운데 한복 차림의 홍유희가 도끼 눈을 뜨며 말했다.
“이것들이 지금 뭐라는 거야! 여기 지금 남의 집이거든? 남자는 전부 늑대야! 늑대! 늑- 읍읍!”
“저 년 끌어내!”
대장 홍유희의 선언에 동의한 홍유희들이 한복차림인 ‘유교 홍유희’를 길드하우스 밖으로 내쫓았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공대장! 중대한 문제가 있습니다!”
공대 뛸 때마다 맹활약했던 ‘군인 홍유희’가 손을 번쩍 들며 외치자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무슨 문젠데? 어?”
옆집 오빠 집에 쫄딱 젖은 상태로 와서 샤워를 할지 말지 하는 이 시국에 중대한 문제라니 뭔데, 대체 뭔데 그래!
홍유희들이 긴장한 얼굴로 군인 홍유희를 바라보았고, 군인 홍유희는 비장한 얼굴로 말했다.
“공대장, 오늘 속옷 짝짝이입니다. 깔맞춤에 실패했습니다!”
“어?!”
짝짝이?
위아래가 다르다고?
“그, 그게 무슨 상관인데!”
얼굴이 새빨개진 공대장 홍유희가 소리치자 군인 홍유희는 단호한 얼굴로 다시 말했다.
“상관있습니다! 빨래를 한다! 건조기를 돌린다! 곧! 속옷을 상대방에게 노출하게 된다!”
“꺄아!”
홍유희들이 일제히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문제는 이게 다가 아니었다.
“거기다 공대장, 오늘 속옷 좀 야합니다.”
아래는 그냥 평범한데, 위는 검정색에 레이스가 좀 많이 들어갔습니다. 살짝 망사 느낌이기도 하고.
생략된 설명에 공대장 홍유희는 패닉에 빠져 소리쳤다.
“아니이! 나한테 왜 야한 속옷이 있는데!”
“그게 호기심에······ 헤헤헤.”
호기심이 왕성한 여고생 홍유희가 뒷머리를 긁적이며 말하자 공대장 홍유희가 분노했다.
“저 년도 끌어내!”
“억울해요! 억울하다고요!”
하지만 여고생 홍유희도 유교 홍유희와 마찬가지로 길드하우스 밖으로 쫓겨나고 말았다.
“하아··· 하······.”
공대장 홍유희는 절로 거칠어진 숨을 토하며 이마에 흐른 땀을 닦아냈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보던 군인 홍유희가 다시 손을 들었다.
“공대장, 거기다 중대한 문제가 하나 더 있습니다.”
“또?!”
“그렇습니다. 정말정말 중요한 문제입니다.”
군인 홍유희가 거듭 강조하자 공대장 홍유희는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얼굴이 되었고, 그건 다른 홍유희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군인 홍유희는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며 낮은 목소리로 설명했다.
“아복이··· 그러니까 옆집 오빠의 말대로라면 세탁과 건조에 필요한 시간은 두 시간 정도입니다. 두 시간.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지요.”
그랬다.
두 시간은 짧지 않았다.
하지만 그게 뭐 어쨌다는 것일까.
지나친 당혹 때문에 이미 머리가 굳어버린 공대장 홍유희와 여러 홍유희들은 떠올리지 못 했고, 그래서 군인 홍유희는 한숨을 쉬었다.
고개를 한 차례 내저은 뒤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두 시간입니다. 그 두 시간 동안 대체 뭘 입고 있어야 하는 거죠?”
“꺄아!”
비명이 터져나왔다.
그리고 홍유희 중 하나가 눈을 깜박이다가 무심코 말했다.
“아, 알몸?”
“저 년 끌어내!”
“어, 억울해요!”
하지만 이번에도 변명은 통하지 않았다.
살짝 야한 홍유희가 질질 끌려나가자 안경을 쓴 홍유희가 손을 들어 말했다.
“알몸일리는 없어. 상식적으로 생각한다면 다른 걸 입겠지. 아마도······ 옆집 오빠의 옷이지 않을까?”
“여, 옆집 오빠의 옷?”
“커다란 흰색 와이셔츠라든가······ 하의실종 패션으로······.”
안경 쓴 홍유희- 즉, 동인녀 홍유희가 므흐흐 웃으며 말한 순간 다시 한번 홍유희들 사이로 비명이 터져나왔다.
“꺄아아!”
“그, 그럴 리가 없잖아! 야한 만화를 너무 많이 봤어!”
“맞아맞아! 맞다구!”
홍유희들의 거센 반발에 동인녀 홍유희는 흥하고 코웃음을 쳤고, 군인 홍유희는 더더욱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아무튼 공대장, 갈아입을 옷은 중대한 문제입니다.”
정말로 그러했기에 공대장 홍유희는 고개를 끄덕였고, 현실의 홍유희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 저기. 오빠.”
“어?”
“그··· 씨, 씻으면 옷 말릴 동안 뭘······.”
“어? 어. 어. 그······.”
강진호는 당황했다.
총탄이 빗발치는 전장에서도 이성적인 사고를 이어가던 그였는데, 이번에는 그러지 못 했다.
어버버 거리다가 겨우 굳어버린 뇌를 움직여 말을 만들어냈다.
“티셔츠··· 어, 그래. 티셔츠. 새 거 있거든? 속옷도. 일단··· 그거라도?”
“새, 새 거요?”
“어, 새 거. 전부 새 거야. 포장되어 있어. 반바지는 새 거가 아니겠지만······.”
“그, 그럼 괜찮을지도······.”
새 거니까.
입던 게 아니니까.
그리고 티셔츠는 평범하기도 하고.
속옷도 뭐 새거니까 남성용이라도 일단 입을 수는 있겠지.
반바지는 속옷 위에 입는 거고 바지니까 뭐.
‘응, 괜찮아. 괜찮을 거야!’
-라고 생각하던 시절이 홍유희에게도 있었다.
‘괜찮긴 뭐가 괜찮아!’
욕실.
정확히는 거실에 붙은 화장실.
구조 자체는 익숙했다.
집 화장실하고 똑같았으니까.
하지만 그것만으로 마음이 안정되지는 않았다.
구조가 같을 뿐 모습은 달랐으니까.
일단 전등의 색부터가 달랐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진짜진짜 중요한 거.
티셔츠는 정말 새거였고, 반바지는 고무줄이 달린 거라 입어도 문제가 없어 보였다.
진짜 문제가 된 것은 속옷.
‘이, 이거 드로어즈라고 하던가?’
착 달라붙는 남성용 속옷.
요즘엔 유니섹스용이라고 해서 여자용도 나오는 것 같기는 한데.
아무튼 그거.
“으으으······.”
남자 속옷을 이렇게 가까이서 지긋하게 관찰해본 적이 있던가.
홍유희는 빨개진 얼굴로 드로우즈를 여기저기 돌려보았고, 이내 싫어도 한 가지 상상을 할 수밖에 없었다.
드로우즈만 입고 서 있는 옆집 오빠의 모습.
‘아우으······.’
뭐, 뭔가 멋지다. 아니, 멋지다기 보다는 이걸 뭐라고 해야 할까.
군침 돈다고 해야 하나?
‘미쳤어? 군침이 왜 돌아!’
홍유희가 스스로에게 버럭 소리를 지른 그 순간이었다.
“그, 난 잠시 다른 곳에 있을 테니까, 세탁할 옷들은 문 밖에 놔둬.”
화장실 문 밖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홍유희는 퍼뜩 고개를 들며 외쳤다.
“네, 네!”
옷가지를 밖에 내놓는다.
즉, 그러기 위해 일단 옷을 벗는다.
남의 집.
그러니까 옆집 오빠네 화장실에서.
‘으아아아아아.’
홍유희는 다시 한 번 머리를 감싸 쥐다가 심호흡을 크게 했다.
이상하게 생각하니 이상하게 느껴지는 거였다.
한 걸음 물러서서 보면, 진정하고 생각해보면-
‘그래도 이상하잖아!’
으앙.
엄마 미워. 아빠 미워.
왜 여행을 간 거야.
대문은 왜 망가진 거야.
울상이 된 홍유희는 훌쩍이며 옷을 벗었고, 다시 몸을 비틀며 괴로워하다가 옷가지들을 문 밖에 내놓았다.
‘시집 다 갔어. 다 갔다구!’
히잉 거리던 홍유희는 천천히 몸을 씻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시 20분 뒤.
실제로 씻는데 걸린 시간은 10분도 되지 않았지만 강진호가 마련해준 옷가지를 입고 나가는데 다시 10분이라는 시간이 필요했다.
커다란, 너무 커다란 하얀 셔츠와 억지로 줄여 입은 반바지.
속에는 남성용 드로우즈.
홍유희는 엉거주춤 서서 강진호를 마주했고, 강진호는 시선을 여기저기 돌리다가 다시 헛기침을 터트리며 말했다.
“커흠, 흠. 그··· 어··· 유희야? 집에는··· 이야기 했니?”
사실 할 틈 따위 없었다. 집에 데려오자마자 설명 마치고 욕실에 보냈으니.
하지만 어쨌든 중요한 사안이었고, 강진호의 말에 퍼뜩 정신을 차린 홍유희는 얼른 휴대폰을 손에 들었다.
“지, 지금 할게요!”
바로 전화를 걸려던 홍유희는 순간 강진호를 보더니 카톡으로 마음을 바꿨다.
가족 톡방에 들어가 작금의 상황- 그러니까 쫄딱 젖은 상태로 옆집 오빠 집에 와서 샤워하고 옆집 오빠 풀세트를 챙겨 입었다는 이야기가 아닌, 집 문의 망가져서 못 들어간다는 이야기만 전하였고, 엄마의 대답은 간결했다.
[너무 늦었으니까 열쇠 아저씨는 내일 아침에 불러. PC방 가지 말고 찜질방 가고. 알았지?]
PC방 가서 날밤 깐 적이 몇 번 있는 홍유희라 그런지 딸이 밖에서 1박하게 된 와중에도 느긋한 엄마였다.
‘하긴 동네니까.’
어디 다른 동네도 아니고 10년도 넘게 산 우리 동네였으니까.
물론 엄마도 지금 있는 장소라든가, 상황을 알면 반응이 전혀 달랐을 터였다.
‘쓰, 쓸데없는 이야기는 하지 말자.’
그리고 심호흡.
새삼 후으-하고 다시 긴 숨까지 내쉰 홍유희는 고개를 들며 말했다.
“어, 엄마가 내일 아침에 열쇠 아저씨 부르래요.”
“그, 그래? 그럼 오늘은······.”
강진호와 홍유희 사이에 다시 침묵이 흘렀다.
하지만 그 침묵은 결코 고요한 침묵이 아니었다.
강진호와 홍유희의 머릿속에서는 적색경보가 울리는 가운데 강진호들과 홍유희들의 열띤 토론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수십 초.
아니, 몇 분이 지났을 때.
“그··· 유희야?”
“네?”
홍유희가 빨개진 얼굴로, 저도 모를 기대를 담아 강진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시선에 강진호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더니 본래 하려던 것과는 전혀 다른 말을 입 밖에 내고 말았다.
“게임··· 할래?”
“게, 게임이요?”
“어··· 응. 게임. 어, 게임.”
게임.
재미있는 놀이.
강진호의 제안에 홍유희는 눈을 깜박였고, 이내 홀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to be continued
< 엔딩메이커 SS #14 지구로 (7)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