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엔딩메이커 SS #15 지구로 (8) (수정) >
엔딩메이커 SS #15 지구로 (8)
남만고양이.
김혜은.
27세.
여성.
웹디자이너.
미혼.
겨우겨우 급하게 터진 일을 수습한 뒤 집에 돌아온 그녀는 극한 갈등에 휩싸였다.
아무 생각 없이 일단 목욕부터 할 것인가, 아니면 맥주나 한 캔 따면서 게임이나 할 것인가.
잠시 망설이던 그녀는 게임 쪽을 택했고, 옷가지를 대충 벗어던진 뒤 잠옷 대용으로 입는 늘어진 티셔츠에 반바지를 입은 그녀는 컴퓨터 앞에 앉아 맥주 캔을 땄다.
“하아.”
지친다.
본래 휴일인데 왜 이래야 하는 걸까.
예정대로였다면 정모 나가서 채팅방 애들도 보고, 신나게 놀 생각이었는데.
“흐아아······.”
성격이 모질지 못 한 탓이라 그런지 욕- 아니, 감탄사도 제대로 토하지 못 한 그녀는 어깨늘 축 늘어트리다 모니터를 보았다.
영웅전기2
벌써 몇 년째 하고 있는 게임.
분명 살 때는 패키지 게임이었는데, 이제는 거의 MMORPG라는 감각으로 플레이 중이었다.
제작사도 그렇게 운영하는 것 같았고 말이다.
‘그러고 보니 진짜 소식이 없네.’
로그인 화면을 킨 뒤 습관적으로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입력한 김혜은은 접속 버튼을 누르기 직전에 손을 놀려 휴대폰을 켰다.
단톡방에 새로 뜬 메시지는 고작해야 몇 개.
그나마도 전부 AAA와 코와붕가의 말들이었다.
AAA : [뭐임. 대체 어케 된 거임. 둘이 만남?]
코와붕가 : [만났어? 만난 거야?]
AAA : [아니 왜 대답들이 없어.]
코와붕가 : [현피 뜨고 있는 건 아니지?]
비슷한 메시지가 몇 건.
결국 제풀에 지쳤는지 AAA와 코와붕가도 말이 없어졌다.
‘진짜 무슨 일 생긴 거 아냐?’
아예 아무 말이 없는 게 좀 이상하기는 했다.
만나면 만났다, 안 만났으면 안 만났다 말이라도 나와야 했으니 말이다.
‘설마 진짜 현피 뜬 건 아니··· 겠지?’
잠시 상상해보던 김혜은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럴 리가 없었다.
노폭이랑 아복이가 서로 사이가 나빠 보여도 사실은 사이가 엄청 좋았으니까.
무슨 만화나 소설에서 튀어나온 악우같은 사이라고 해야 할까.
더욱이 김혜은은 노폭이의- 그러니까 홍유희의 진짜 모습을 알고 있었다.
설사 아복이가 노폭이한테 어떤 억하심정을 품고 있었다 한들, 실제로 홍유희를 만나면 마음이 사르르 풀릴 것이 분명했다.
‘기집애가 이쁘긴 하니까.’
귀엽기도 하고.
좀 잘 꾸미고 다니면 좋을 텐데.
아무튼 현피의 가능성은 낮았다.
‘억하심정이 있어도 유희가 있을 테니까.’
맨날 1등하면서 이기던 아복이한테 무슨 억울한 마음이 있겠는가.
‘유희 성격상 오프에서까지 덤비지는 못 할 테고.’
은근히가 아니라 대놓고 소심한 면이 있는 아이였으니까.
‘흠, 그런데 이런 식으로 생각하다보니 또 걱정이 되네?’
홍유희는 김혜은에게 있어 순하고 어린 양과 같은 아이였다.
하지만 아복이는 어떤가.
‘일단 보통 놈은 아닌데.’
이야기하다보면 기본적으로 선한 사람인 것 같기는 했다.
AAA나 코와붕가처럼 패드립이나 섹드립을 치는 것도 못 봤고.
노폭이 놀릴 때만 미친개초딩이 되어서 그렇지 평소에 다른 이들을 대할 때는 무척 정상적인- 오히려 상식있는 어른 느낌이 들었으니까.
‘아니, 상식이 있다기 보다는 무심하다고 해야 하나.’
노폭이랑 놀 때만 생기가 도는 느낌?
실제로 노폭이가 없을 때는 대화가 길게 이어진 적이 없었다.
사담을 나눈 적도 거의 없었고 말이다.
‘아무튼 이상한 놈은··· 아니겠지?’
아복이의 진짜 정체.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알 수 없었다.
게임에서 말투만 보고 성별을 판단하는 건 너무 어리석은 행동이었으니까.
어쩌면 섹드립을 즐겨하는 AAA는 물론이고 대놓고 초딩질을 해대는 코와붕가 역시 여자일지 몰랐다.
아복이의 정체.
남자일까 여자일까.
나이가 많을까 적을까.
‘아씨, 궁금하네.’
이래서 오늘 정모 꼭 나가고 싶었던 건데.
어찌되었든 생각하다보니 역시 괜한 고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복이가 설사 험상궂게 생긴, 몸에 문신 꽤나 있는 무서운 남자라 해도 홍유희를 어떻게 할 것 같지는 않았으니 말이다.
‘진짜로 그러면 유희 쪽에서 먼저 모른 척하고 도망쳤을 테니까.’
다른 건 몰라도 감 하나는 끝내주는 홍유희가 아니었던가.
‘그런데 왜 아무 말이 없는 거지? 갠톡도 대답이 없고.’
아복이 만났느냐.
아복이 어떻게 생겼느냐 등등.
사실 이미 틈날 때마다 갠톡을 보낸 김혜은이었다.
그런데 돌아온 대답은 전무.
심지어 읽지도 않았다.
‘사고난 거 아냐?’
둘이 같이 교통사고라도 당했다던가.
‘아, 아냐. 그럴 리가 없어.’
도리질을 쳐 불길한 생각들을 애써 떨쳐낸 김혜은은 바로 게임에 접속했다.
혼자 이런 식으로 고민해봐야 불길한 생각만 들 따름이었다.
“후우, 좋아.”
11명의 플레이어블 캐릭터들 중 하나인 코델리아.
하지만 노폭이의 코델리아와는 전혀 달랐다.
머리칼은 오렌지색이었고, 안경을 쓴데다가 머리 스타일도 달랐다.
‘유희는 순수파였으니까.’
원형 그대로의 코델리아가 좋다며 가끔 브릿지나 넣는 정도지 머리색이나 피부색 같은 것에는 전혀 손을 대지 않았다.
‘아무튼 접속하자.’
캐릭터 선택까지 마치고나자 몇 초 만에 플레이아데스 길드하우스로 이동할 수 있었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 길드 단체 메시지가 날아왔다.
AAA : [이제 왔어? 혹시 노폭이랑 아복이 소식 아는 것 좀 있고?]
코와붕가 : [둘 다 정모 나간 뒤로 연락이 없어. 둘이 손잡고 이계라도 간 거 아냐? 트럭에 치여서.]
AAA : [오, 그리고 둘 중 하나는 여자가 되어서 커플이 되는 건가?]
코와붕가 : [캬, 죽인다. 죽여.]
역시나 개소리 담당들답게 개소리가 찰졌다.
‘노폭이는 원래 여자거든?’
속으로만 한 번 쏘아준 김혜은은 서둘러 키보드를 두드렸다.
남만고양이 : [게임에도 아예 접속 안 한 거야?]
AAA : [어, 혹시나 해서 접속 명부 봤는데도 없어.]
코와붕가 : [진짜 뭐 일 생긴 거 아냐?]
남만고양이 : [에이, 그럴 리가.]
AAA : [혹시나 해서 홍대 쪽에 사고난 거 없나 찾아봤거든. 교통사고 기록 같은 것도.]
코와붕가 : [뭐야, 너님 무슨 일 하길래 그런 걸 찾아보는건데.]
AAA : [아무튼 찾아봤는데 별 일 없더라고.]
코와붕가 : [그럼 역시 현피인가? 현피 뜨다가 둘 다 크게 다쳐서 병원에 갔다든가?]
AAA : [가능성이··· 있어!]
남만고양이 : [헛소리들 하지 말고. 걔네 둘이 만난다고 진짜로 현피 뜨겠니?]
AAA : [하긴, 노폭이 걔가 말만 험하지 속은 엄청 말랑말랑하니까.]
코와붕가 : [외강내유로다. 외강내유.]
남만고양이 : [아무튼 걱정되네. 현피도 아니고 사고도 아니면 뭐지?]
코와붕가 : [진짜 눈 맞은 거 아냐?]
AAA : [눈이 맞다니?]
코와붕가 : [아니, 어쩌면 딱 만났는데 한 명은 여자고, 한 명은 남자라 첫눈에 딱! 게임에서 맨날 싸우던 원수가 직접 보니 이상형?이라든가.]
AAA : [라노베를 너무 많이 봤군요.]
코와붕가 : [내가 십덕후인건 인정하는데 진짜 그럴 수도 있자능.]
AAA : [흠······ 둘 중 하나가 여자라면 노폭이가 여자일 거 같은데. 평소에 말하는 것도 그렇고. 좀 귀엽게 말하잖아?]
코와붕가 : [막 귀여운 소녀라든가. 혹시 고딩 아냐? 입에 씨발을 달고 사는 입 험한 겜돌이 미소녀. 와씨. 존나 꼴려.]
AAA : [미친놈이 뭐라는 거야. 나도 동의. 어, 보감.]
코와붕가 : [아우 씨발 아재개그. 야, 하지마. 하지말라고.]
AAA : [근데 우리도 그냥 디코 파는 게 낫지 않아? 목소리도 듣고 어.]
코와붕가 : [말 돌리고 앉았네. 아무튼 남만 생각은 어때?]
남만고양이 : [내 생각?]
코와붕가 : [어, 진짜 둘이 눈 맞은 거 아냐?]
코와붕가의 말에 김혜은은 바로 답하는 대신 잠시 고민했다.
놀랍게도 코와붕가의 말마따나 홍유희는 입에 씨발을 달고 사는 입 험한 겜돌이 미소녀가 맞았으니까.
‘거기다······.’
여자의 감이라고 해야 할까.
아복이가 은근히 멋진 남자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정말 둘이 눈이 맞을 수도 있지 않을까?
AAA : [남만이?]
코와붕가 : [남만이도 사라지는 거야?]
남만고양이 : [사라지기는 무슨. 그리고··· 둘이 눈이 맞아서 사귀다니. 노폭이랑 아복이잖아.]
AAA : [둘이 사귀면 진짜 라노베 각이네.]
코와붕가 : [지금 손잡고 이계 갔을지도 몰라. 막 이계에서 눈 떴더니 서로 약혼한 사이라든가.]
코와붕가의 개소리를 듣던 남만고양이는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그래, 말도 안 되는 소리지.
노폭이랑 아복이가 사귄다니.
라노베나 만화에나 나올 것 같은 이야기니까.
‘사고는 아닐 테고······ 아무튼 걱정되니까 빨리 들어와 이 아가씨야.’
카톡에 추가되어 있는 홍유희의 프로필 사진을 잠시 바라보던 김혜은은 다시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같은 시각.
아웃복서009- 강진호의 집안에서,
사고가 발생했다.
&
“아싸! 대형사고! 이 사이에 치고 가시고요!”
“크으윽!”
탱크탑에 츄리닝 바지를 입은 강진호와 커다란 셔츠에 반바지 차림인 홍유희.
두 사람은 닌텐도 스위치 조이스틱을 움켜쥔 채 범인을 초월한 집중력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겼다! 내가 이겼어! 내가 이겼다구?”
1등으로 결승선을 돌파한 순간 홍유희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폴짝폴짝 뛰며 좋아했고, 강진호는 정말로 분한 얼굴이 되어 바닥에 엎드렸다.
“1등이다! 1등이야!”
정말 좋았다.
너무 좋았다.
아웃복서009를 재끼고 1등이라니.
세상에 이런 쾌락이 또 있을까?
그래, 이게 바로 야스지.
이게 바로 야스야!
“캬!”
저 패배의 고통에 몸부림치는 아복이라니.
“신이나, 신이나, 엣헴엣헴 신이나.”
홍유희가 어깨춤을 추며 좋아하자 강진호는 두 손으로 얼굴을 덮은 채 계속해서 괴로워했다.
샤워하고 나와서 세 시간.
입고 왔던 옷이 건조가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홍유희는 여전히 강진호의 옷을 입고 있었다.
왜냐하면 세 시간 내내 게임을 해댔기 때문이다.
강진호가 사놓기만 하고 그간 플레이하지 못 했던 온갖 2인용 게임들.
‘흐흐흥, 좀 치사하게 이긴 것 같긴 하지만 아무튼 이긴 건 이긴 거니까?’
강진호에게는 대부분 처음하는 게임들이었다.
반면 홍유희는 대부분 적어도 한 번 이상은 해본 게임들이었다.
강진호에게는 한국에 현실 친구가 없었지만, 홍유희에게는 남만고양이- 김혜은이라는 친한 겜순이 언니가 존재했으니 말이다.
“보았느냐, 이게 너와 나의 눈높이다.”
“크으윽······.”
강진호가 다시 분해했고, 한참 의기양양하던 홍유희는 이내 살짝 뺨을 붉혔다.
‘뭔가 좋아.’
샤워를 나오고 게임을 하다보니 양쪽 모두 점점 아복이와 노폭이가 드러나기 시작했고, 지금에 와서는 완전히 아복이와 노폭이가 되어 게임을 즐기고 있었다.
그러다보니 뭐랄까, 좋으면서도 싫다고 해야 할까.
게임을 하면 할수록, 아복이의 모습이 보이면 보일수록 동경하던 옆집 오빠가 사라져갔으니 말이다.
‘안녕히 옆집오빠!라는 느낌이었는데······.’
옆집 오빠 모습으로 아복이 짓하는 걸 보고 처음에는 경악에 빠지기도 했지만······.
‘좀··· 좋은 것 같기도?’
이걸 뭐라고 해야 할까.
반전매력?
갭모에?
살짝이지만 아까부터 지금까지 계속 가슴이 두근두근했다.
‘여전히 멋있기두 하구······.’
생긴 게 어디 가지는 않으니까.
저렇게 웃는 모습도 뭔가 인간미 있어서 좋고.
홍유희는 입술을 움츠리며 이런저런 생각들을 떠올렸고, 스스로는 몰랐지만 열심히 눈에 콩깍지를 한 겹 한 겹 씌우기 시작했다.
“한 판, 딱 한 판만 더 하자.”
“흥, 그렇게나 애원한다면야.”
흥흥거린 홍유희가 다시 자리에 앉았을 때였다.
띵동.
벨소리에 놀라 움찔했지만 잠깐뿐이었다.
인터폰 화면 너머로 반가운 실루엣이 보였기 때문이다.
“치킨왔나 보네.”
야식으로 시킨 치킨.
강진호는 현관으로 나가서 치킨을 받아왔고, 홍유희의 얼굴에 다시 미소가 번졌다.
“캬!”
이게 바로 야스지.
이게 야스가 아니면 뭐야?
맛있는 치킨과 맥주.
재미있는 게임.
편한 옷.
눈앞에 앉아있는 옆집 오빠.
‘아, 아니지. 마지막은 아니지.’
새삼 얼굴이 빨개진 홍유희는 커다란 맥주 잔으로 얼굴을 가리며 강진호를 힐끔 쳐다보았고, 닭날개를 뜯어먹던 강진호는 고개를 살짝 갸웃했다.
“왜?”
“아니, 그냥······ 헤헤.”
옆집 오빠.
개초딩 아복이.
옆집 오빠.
개초딩 아복이.
이상하게 자꾸 웃음이 나왔다.
왜일까.
왜 이렇게 자꾸 웃음이 나오는 걸까?
홍유희는 더 이상 고민하는 대신 맛있게 맥주를 마셨다.
그리고 다시 몇 시간 뒤.
[이게 뭐야. 둘 다 그냥 잔다구? 그것도 게임하다가?]
그랬다.
강진호와 홍유희는 손에 조이스틱을 쥔 채 거실에 각자 쓰러져 잠들어 있었다.
술먹고 게임하다 자연스럽게 잠든 것이었다.
[으아, 이게 뭐야. 이게 뭐냐구.]
잔뜩 실망한 코델리아는 제자리에서 방방 뛰었고, 옆에 서 있던 유더는 끌끌끌 혀를 찬 뒤 말했다.
[그럼 대체 뭘 더 바란 건데. 이 정도면 됐지.]
[안 돼, 부족해. 막 쪽쪽도 했어야지!]
[코델리아, 쟤네 나랑 너거든? 우리가 처음 키스하는데 걸린 시간이 얼마나 되었는지 기억해?]
유더의 물음에 코델리아는 급 얼굴을 붉히더니 우물쭈물하였다.
처음으로 키스 비슷한 것을 했던 건국기념회 사건 뒤의 밤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그, 그치만! 그건 그거구! 이건 이거구!]
[그래, 우린 우리고. 애넨 얘네지. 아무튼 이 정도만 해도 장족의 발전이야. 물꼬는 확실하게 뚫었다고 봐도 돼.]
오늘을 위해 준비한 몇 가지 수들이 모두 유효하게 작용했다고 봐야 했다.
하지만 코델리아는 여전히 아쉬운 지 끙끙 앓는 소리를 내었고, 이내 악동같은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최소한 이건 할래.]
그리고 염동력.
코델리아가 슥슥 강진호와 홍유희를 움직이는 것을 본 유더는 묘한 쓴웃음을 흘렸다.
[둘 다 일어나서 놀라지 않을까?]
[그러라고 하는 건데?]
까르르 웃은 코델리아는 다시 한 번 강진호와 홍유희를 내려다보았다.
아까까지만 해도 한참 떨어진 곳에 각자 널브러져 있던 두 사람이었는데, 지금은 꼭 붙어 있었다.
정확히는 강진호의 품에 홍유희가 안긴 채로 말이다.
[그래두 잘 어울리지 않아?]
서로 꼭 끌어안은 채 잠든 두 사람의 모습이.
[그러네.]
이러나저러나 저 둘 역시 운명의 두 사람이었으니까.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한 유더는 코델리아의 허리를 안았고, 코델리아는 그런 유더의 품에 기대었다. 자연스럽게 입술을 맞추었다.
[그럼 일단 빠질까?]
[응, 빠지자.]
[돌아가서 우리도 게임하자.]
[응! 게임!]
[그래, 게임.]
약간 다른 동상이몽을 입에 담은 두 사람은 다시 입맞춤 한 뒤 강진호의 집을 나섰다.
그리고 다시 몇 시간.
아침 해가 떠오르고도 한참이 지났을 때.
“어으으······.”
기묘한 소리를 내며 눈을 뜬 홍유희는 화들짝 놀라 비명을 지를 뻔했다.
그도 그럴 것이 눈뜨자마자 옆집 오빠의 단단한 가슴이 보였기 때문이다.
‘뭐, 뭐야. 뭐냐구?’
눈동자를 굴려보니 옆으로 누운 채 눈을 감고 있는 옆집 오빠의 얼굴과 자신의 어깨와 허리를 안고 있는 단단한 팔이 보였다.
그랬다.
홍유희 자신은 지금 무슨 곰인형이라도 된 것처럼 옆집 오빠의 품에 꼭 안겨 있었다.
‘흐에에?’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이게 대체 무슨 일일까.
홍유희는 필사적으로 생각했지만 기억이 나지 않았다.
게임하다가 눈을 감은 것까지 밖에 생각이 나지 않았다.
‘오, 오빠 냄새.’
저도 모르게 코를 한 번 킁킁거린 홍유희는 이내 다시 아주 작게나마 도리질을 쳤다.
정신을 차려야 했다.
지금 이렇게 옆집 오빠 냄새 맡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아, 아무 일도 없었겠지?’
둘 다 옷 입고 있으니까?
기억이 없으니까?
‘여, 옆집 오빠는 신사고?’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어찌나 정신이 없는지 머릿속의 홍유희들 역시 패닉에 빠져 있을 뿐 제대로 된 의견들을 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깨, 깼나?’
강진호.
사실 홍유희보다 10분 정도 일찍 눈을 뜬 그는 눈을 감은 채 번뇌했다.
처음 잠에서 깼을 때 소스라치게 놀랐다.
자신이 술김에 무언가 사고를 친 것은 아닐까 엄청나게 걱정하며 기억을 복기하고 또 복기했었다.
하지만 역시 아무 일도 없었다.
그냥 게임하다 잠든 것이 전부였다.
‘그런데 왜!’
왜 이런 자세로 자신이 홍유희를 끌어안고 있는 것일까.
‘달아.’
홍유희의 살냄새가 달콤했다.
머리에서 나는 샴프향 역시 평소 자신이 쓰던 것임에도 불구하고 다르게 느껴졌다.
그리고 무엇보다 너무나 작고 부드럽고 말랑말랑했다.
홍유희의 작은 몸.
부드러운 몸.
‘정신차려 강진호!’
일단은 이 위기를 탈출하는 것이 먼저였다.
강진호는 여전히 잠이 든 척 아주 작게 앓는 소리를 내며 몸을 움직였다. 자연스럽게 품에서 홍유희를 풀어주기 위함이었다.
‘일단 유희를 빠져나가게 하고, 그 다음에 늦잠을 잔 척하면서 눈을 뜨자.’
그래, 그게 좋다.
그게 최선이다.
하지만 강진호의 계획은 시작부터 난항에 부딪혔다.
‘유희야? 설마 아직도 자는 거니?’
홍유희가 움직이지 않았다.
아니, 움직이긴 했는데 빠져나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품에 파고들었다.
‘뭐야, 아직 안 깬 거야? 그런 거야?’
눈을 뜨고 확인해보고 싶은 욕구가 엄청났지만 차마 그럴 수 없었다.
‘뭐지, 대체 왜?’
사실 그 이유는 홍유희도 몰랐다.
분명 강진호의 팔이 움직여서 이제 빠져나갈 수 있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계속 이대로 있고 싶었다.
조금 더 강진호의 품에 안겨 있고 싶었다.
그리고 사실 그건 강진호 역시 마찬가지였다.
홍유희는 천천히 눈을 감았고, 강진호는 눈을 뜨지 않았다.
암묵적인 합의라고 해야 할까.
서로의 바람이 만들어낸 대치 국면이라고 해야 할까.
어느 쪽이든 좋았다.
그렇게 두 사람은 서로를 꼭 끌어안은 채 숨결과 온기를 나누었다.
서로를 만끽했다.
&
다시 시간이 흘렀다.
대충 두어 시간.
점심 때가 다 되어서야 두 사람은 어설픈 연기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섰고, 그때부터는 그다지 말이 없었다.
서로 너무 민망했기 때문이다.
“그······ 밥, 먹고 갈래?”
“어, 으, 네. 오빠.”
강진호는 늦은 점심을 준비했고, 홍유희는 방에 들어간 뒤 주섬주섬 건조가 끝난 옷을 챙겨 입었다.
그리고 다시 조용한 점심 식사.
한 없이 이어졌으면 했지만 결국 끝나고만 그것.
“이제··· 가야지?”
“네, 오빠.”
어설프게 인사한 홍유희는 현관에 가 신발을 신었고, 그 모습을 바라보던 강진호는 똑같이 신발을 신었다.
“오빠?”
“아니, 그냥. 어. 맞아. 열쇠 아저씨 불러야지. 어, 그래. 열쇠 아저씨. 오실 때까지 시간도 걸릴 테고. 너 문도 열어줘야 하고.”
횡설수설하던 강진호가 문을 열자 홍유희는 웃음을 터트렸다.
“귀여워.”
아주 작게 말한 그녀는 다시 고개를 들더니 민망해하는 강진호를 보며 말했다.
“오빠.”
“어?”
“다음에, 다음에 또 같이 게임해요.”
그야말로 젖먹던 힘까지 끌어낸, 용기를 쥐어짜 만든 짧은 말에 강진호는 눈을 깜박이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어설프지만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그래. 또 하자. 게임.”
“헤헤헤.”
강진호의 대답에 빨개진 얼굴로 웃음을 흘린 홍유희는 그대로 부끄러워하더니 헛기침을 하며 돌아섰다.
“그럼 갈게요.”
“그래.”
두 사람은 함께 현관을 나섰다.
그리고 그랬기에 아까부터 두 사람의 모습을 지켜보던 이들을 발견하게 되었다.
“유희야?”
홍유희의 집앞에 서 있는 중년 부부 한 쌍과 처음 보지만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지 한 눈에 알 수 있는- 한 마디로 열쇠 아저씨.
“네가 왜 거기서 나오니?”
김은정.
즉, 어머니의 물음에 홍유희는 그대로 얼어붙어 답하지 못 했고, 강진호는 입을 뻐끔거렸다.
어느새 날카로워지기 시작한 홍유원의- 그러니까 홍유희의 아버지의 눈빛에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to be continued...?
< 엔딩메이커 SS #15 지구로 (8) (수정)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