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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딩메이커-378화 (378/473)

< 엔딩메이커 SS #17 지구로 (10) >

엔딩메이커 SS #17 지구로 (10)

닉네임 코와붕가.

26세.

프리랜서.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게임 원화 전문 일러스트레이터.

그는 타블릿 팬을 붙잡는 대신 열렬히 키보드를 두드리며 자신의 주장을 설파하고 있었다.

코와붕가 : [뭔가 냄새가 나지 않아?]

AAA : [무슨 냄새. 방구라도 꼈니?]

코와붕가 : [아씨. 아재개그 진짜 짜증나네. 그딴 개소리 말고. 아복이랑 노폭이 말이야]

사건의 발단은 이러했다.

지금으로부터 이틀 전.

벌써 몇 년이나 보아온 사이였지만 그 흔한 디코 보이스챗조차 해본 적이 없던 채팅방 멤버들이 무려 오프 모임을 갖기로 하였다.

사실 티를 별로 내지 않았지만 코와붕가도 오프 모임을 엄청나게 기대했다.

AAA는 뭐 그냥 아저씨일게 분명했지만 나머지 멤버들에 대해서는 제대로 된 추측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의외성!’

온라인에서 말투만 보고 남녀를 판단하는 것은 너무 성급한 짓이었다.

남자일지 여자일지, 나이가 많을지 적을지.

모두 실제로 만나보기 전에는 알 수 없는 일들이었다.

‘딱히 흑심이 있는 건 아니지만.’

어찌되었든 재미있지 않겠는가!

물론 걱정도 있었다.

현실의 모습을 알고 나면 온라인에서의 관계 역시 달라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정말정말 예를 들어,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AAA가 만약 여자라고 치자.

그것도 코와붕가 자신과 또래인.

그럼 이제까지처럼 같이 섹드립을 치며 놀 수 있을까?

물론 놀 수도 있겠지만 이전과 완전히 같을 수는 없을 터였다.

벌써 몇 년이나 인연을 이어온 채팅방 멤버들.

얼굴 한 번 본적 없지만 코와붕가에게는 꽤 소중한 인연들이었고, 그렇기에 기대되는 마음만큼이나 걱정되는 마음 역시 작지 않았다.

그리고 정모 당일.

운명의 장난인지 갑자기 밀려든 일감과 마감 조정으로 인해 정모에 나갈 수 없는 사태가 발생하고 말았다.

그 순간 코와붕가의 머릿속에는 세 가지 생각이 동시에 떠올랐다.

‘아, 진짜 나가고 싶었는데.’

‘어쩌면 그냥 이렇게 안 만나는 쪽이 더 좋을 수도 있어.’

‘나 빼고 다 같이 만나서 친해지면 어떡하지? 나만 왕따되나?’

하지만 이 세 가지 생각 중 어느 하나를 골라 심화하기도 전에 다른 소식들이 연달아 들려왔다.

AAA : [나도 갑자기 배달이 너무 들어와서 못 나갈 것 같아.]

남만고양이 : [진짜 미안,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겨서······.]

‘AAA네 뭐 배달 쪽 일 했나?’

아무튼 AAA와 남만고양이 두 사람이 정모에 나오지 못한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다섯 명 중에 셋이 빠진 상황.

AAA : [그런데 노폭이랑 아복이는 나왔다 이거지?]

코와붕가 : [바로 그거야. 거기다 우리가 못 나간다고 했을 때 둘 다 약속 장소라고 했잖아. 대체 얼마나 기대를 했던 거야 둘 다.]

약속 시간 30분 전이었을 텐데 분명.

남만고양이 : [아무튼 네 말은 그날 두 사람이 결국 만났을 거라는 말이지? 우리한테는 안 만났다고 거짓말하고.]

코와붕가 : [어! 그렇지 않아? 이미 약속 장소에 도착해 있던 두 사람이 다른 사람들 안 나온다고 그냥 그대로 돌아서서 가는 건 너무 이상하잖아.]

AAA : [나루호도.]

코와붕가 : [거기다 다들 봤잖아. 그날 하루종일 둘 다 영웅전기2 접속도 안 하고, 단톡방에서 말도 안 하고, 갠톡도 다 씹고. 뒤에 둘이야 뭐 그렇다 쳐. 하지만 그 둘이 영웅전기2에 하루라도 접속 안 했던 날이 있어? 어떻게 24시간 내내 접속을 안 할 수가 있어? 다른 사람도 아닌 그 두 사람이?]

AAA : [킹리적 갓심이 들 수밖에 없군.]

남만고양이 : [아니, 뭐··· 그런데 두 사람이 정말 만났으면 우리한테 속일 이유가 없···잖아?]

코와붕가 : [없긴 왜 없어! 둘이 만났는데! 어! 눈이! 착! 하고 맞았을 수도 있지!]

AAA : [오.]

남만고양이 : [누, 눈이 맞아?]

코와붕가 : [노폭이 걔 평소에 채팅하는 거 보면 귀엽잖아. 어쩌면 커여운 미소년이 아닐까. 미소녀라든가.]

AAA : [오... 거친남자 아복이와 커여운 미소년 노폭이의 BL인가······.]

코와붕가 : [아님 거친 남자 아복이와 커여운 소녀 노폭이의 아재밋걸이라든지. 아니다. 어쩌면 아복이가 여자일수도 있잖아.]

AAA : [아복이가 여자면··· 어쩐지 정장이 잘 어울리는 차가운 인상의 쿨뷰티일 거 같아.]

코와붕가 : [다른 사람들한테는 무관심한테 노폭이한테만 막 감정을 내비치는? 막 갭모에 넘치는?]

AAA : [크윽. 쥬지가 이상해져.]

남만고양이 : [변태 새끼들.]

코와붕가 : [아무튼 분명한 가능성! 거기다 이 채팅로그를 좀 보라구!]

코와붕가가 화면에 띄운 것은 어제, 그러니까 정모에서 실종되었던 두 사람이 게임에서 돌아왔을 때의 대화 기록이 나와 있었다.

노란폭풍 : [아복이 어서오고.]

아웃복서009 : [노하.]

남만고양이 : [저게 뭐?]

코와붕가 : [아니, 저 둘이 만났는데 저러고 끝나는 게 말이 돼?]

AAA : [말 안되지. 거기다 어제 순위 발표일이었잖아. 노폭이가 도발하고, 아복이가 맞도발하고 그래야지.]

코와붕가 : [바로 그거야! 그런데 그냥 저렇게 인사만 하고 말았다니까? 더 수상한 건 그 다음이야!]

코와붕가는 연속해서 다름 로그를 화면에 띄웠다.

아웃복서009 : [오, 내가 1등이네.]

노란폭풍 : [으으 분해.]

아웃복서009 : [좀 더 분발하라고.]

노란폭풍 : [다음엔 내가 꼭 1등할 거야.]

아웃복서009 : [열심히 하렴.]

이게 다였다.

정말로 이게 전부였단 말이다!

코와붕가 : [말이 돼? 저게 말이 되냐고!]

아복이가 노폭이를 저 정도로 놀리고 끝낸다?

아니, 저건 놀린 것도 아니었다.

거기다 노폭이도 그다지 분해하지 않았다.

코와붕가 : [냄새가 나··· 정말정말 수상한 냄새가 나······.]

코와붕가 : [두 사람은 정모일에 서로 만났던 거야.]

코와붕가 : [노폭이는 연하의 여대생이었고, 아복이는 나이가 좀 있는, 그래서 경제력이 있는 사회인이었던 거지.]

코와붕가 : [아복이가 같이 밥이나 먹자고 해서 밥을 먹고, 이왕 만남 김에 놀자면서 우리가 본래 계획했던 것들을 데이트 루트로 삼는 거야.]

AAA : [저녁 먹고 차로 데려다주고?]

코와붕가 : [바로 그거지! 그러다 트러블이 생기고··· 아복이가 그러는 거야. ‘잠시 쉬었다 가지 않을래?’]

AAA : [꺄아! 야한 건 안 되요!]

남만고양이 : [미친놈들이 친구들 대상으로 뭐하는 거야.]

코와붕가 : [하지만 분명한 가능성! 있을 수 있는 사태!]

신이 난 코와붕가는 계속해서 자신의 가설을 이어나갔다.

코와붕가 : [그리고 두 사람은 하룻밤을 함께 보내고, 다음날 점심 때가 되어서야 각자의 집으로 흩어진 거야. 이렇게 생각하면 모든 의문점이 해결돼.]

남만고양이 : [아니 대체 무슨 의문점이 해결되는 건데.]

AAA : [점심 때 이후로 갑자기 두 사람의 연락이 두절된 것. 밤새도록 게임에 접속하지 않은 것. 다음날 오후가 되어서야 접속한 것. 여기서 포인트는 둘이 사라진 시점과 다시 나타난 시점이 거의 겹친다는 것이겠지.]

코와붕가 : [바로 그거야 AAA! 참 잘했어요!]

남만고양이 : [난 여기서 나가야겠어.]

AAA : [그런데 역시 쿨뷰티 누님 아복이와 발랄짐승남 노폭이 쪽이 더 꼴리지 않아?]

코와붕가 : [한 번 고민해볼 문제군.]

그렇게 언제나처럼 코와붕가와 AAA가 헛소리를 늘어놓기 시작하자 남만고양이- 김혜은은 키보드에서 손을 떼고 대신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설마 진짜는 아니겠지?’

아복이는 몰라도 노폭이의 실제 모습은 알고 있는 김혜은이었다.

꾸미고 다니지 않아서 그렇지, 본바탕은 예쁘고 귀엽고 사랑스러운, 그야말로 원석 같은 아이가 바로 노폭이었으니 말이다.

‘확실히 좀 수상하기는 한데······.’

이번에도 1등을 못 했는데 딱히 분해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마치 다른 쪽으로 이미 그간의 원통함을 해소했다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아복이를··· 다른 걸로라도 이겨봤다든가?’

그리고 정말 아복이를 이겼다면, 두 사람이 만났다는 이야기가 되었다.

영웅전기2가 아닌 현실에서 말이다.

‘수상해.’

정말정말 수상해.

이틀 전 일에 대해서 물으면 자꾸 얼버무리기나 하고.

그런데 바로 그 순간이었다.

까톡!

갑작스러운 알림음에 깜짝 놀라 휴대폰을 놓칠 뻔 했던 김혜은은 허둥거리며 화면을 보았다.

익숙한 이름이 떠올라 있었다.

유희 : [언니, 언니. 이번 주말에 시간 돼?]

홍유희.

노폭이의 본명.

갑작스러운 물음에 김혜은은 눈을 가늘게 뜨더니 이내 휴대폰을 두드려 대답을 하기 시작했다.

혜은 : [갑자기 무슨 일?]

유희 : [아니, 그 쇼핑 좀 할까 해서.]

혜은 : [쇼핑? 또 후드티랑 운동화 살 거면 그냥 인터넷으로 사. 그쪽이 훨씬 싸니까.]

유희 : [아, 아니. 후드티 말구······.]

혜은 : [후드티가 아니야?]

유희 : [치마랑··· 아무튼 예쁜 옷 좀 사고 싶어서. 화장품도 좀 헤헤.]

김혜은은 잠시 휴대폰과 얼굴을 멀리하였다.

그리고 다시 한 번 홍유희가 보낸 메시지들을 읽어보았다.

얘가 지금 뭐라는 거야.

치마를 사고 싶어?

화장품을 사고 싶어?

한 마디로 예쁘게 꾸미고 싶어?

“언놈이야?”

다행히 육성으로만 나왔다.

그랬기에 김혜은은 바로 무어라 타이핑을 하기 전에 생각할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생각의 귀결점은 너무나 명료했다.

‘진짜 아복이야?’

정말로 아복이?

그런데 대체 뭐 얼마나 마음에 들었길래, 아니, 그날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겜순이에 히키코모리인 홍유희가 먼저 밖으로 나올 생각을 하지?

‘거기다.’

애당초 꾸민다는 것은 두 번째 만남을 홍유희가 생각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아복이 대체 어떻게 생긴 거지?’

아니, 생긴 걸 떠나서 대체 뭐하는 사람인 거지?

나이는?

성별은?

일단 남자 맞겠지?

유희 : [언니?]

혜은 : [어어, 응. 그래. 어··· 토요일 어때? 토요일 네 시 쯤에 홍대에서 만날까?“

유희 : [응응. 홍대에서 네 시. 고마워 언니.]

혜은 : [고마울 것 까지야.]

그리고 잠시 멈칫한 김혜은은 고민했다.

여기서 물어볼 것인가.

아복이에 대해서 캐물을 것인가.

‘아니, 지금은 때가 아니야.’

지금 섣불리 물어보면 홍유희가 어버버 거리다가 도망칠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니 토요일 오후에, 직접 얼굴을 마주했을 때 물어봐야만 했다.

‘노폭이와 아복이······.’

6년 동안 질리도록 싸워온 두 사람.

그런데 두 사람이 정모날 딱 만나자마자 서로에게 호감을 갖기 시작했다?

‘진짜 무슨 순정만화니?’

하지만 끌리는 조합인 것은 분명했다.

‘이번주 토요일이라······.’

김혜은의 얼굴에 제법 음흉한 미소가 번졌다.

그리고 같은 시각.

“흥흥, 토요일. 토요일.”

아이템이랑 골드 팔아서 모아둔 돈으로 예쁜 옷을 사야지.

홍유희는 침대 위에서 뒹굴뒹굴 구르며 실실 웃었고, 이내 머릿속으로 한 가지 망상을 떠올려 보았다.

예쁘게 꾸민 자신을 보고 깜짝 놀라는 옆집 오빠.

게임하면서 자기를 힐끔힐끔 돌아보는 아복이.

“헤헤헤.”

좀 바보 같은 망상이었지만 어차피 망상인데 뭐 어떻겠는가.

“아복이.”

오늘도 오빠랑 카톡해야지.

다시 까르르 웃은 홍유희는 아복이- 강진호의 프로필 사진을 보며 얼굴을 붉혔다.

그리고 다시 같은 시각.

홍유희의 이웃집.

그러니까 강진호의 집.

평소와 달리 무척이나 말끔한 차림으로 선 그는 옷장을 노려보고 있었다.

요 몇 년 편한 복장만을 추구하다보니 정장 두 벌과 전투복을 빼면 죄다 츄리닝과 반팔티, 거기에 후드티 정도밖에 들어있지 않은 옷장이었다.

‘옷··· 새로 사야하나?’

유희를 학교에 태워준다든지, 지나가다 마주친다든지- 그럴 때마다 똑같은 옷을 입고 있으면 이상했으니까.

홍유희와 달리 딱히 옷 사러 같이 가자고 할 사람도 없는 강진호는 일단 아이쇼핑을 위해 컴퓨터를 켰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어?”

작게 울린 알림음에 강진호의 표정이 바뀌었다.

평소에 쓰는 휴대폰이 아닌, 비상연락을 위해 구비해둔 군용 통신기에서 울린 소리였기 때문이다.

지난 6년간 작은 소리조차 내지 않던 통신기였다.

강진호는 다급히 통신기의 화면을 가동시켰고, 저도 모르게 눈을 크게 뜨고 말았다.

[조만간 만나러 갈게. 너의 나타샤가.]

짤막한 한 줄의 문장.

한글이 아닌 키릴문자로 된 문장에 강진호는 잠시 미동도 하지 않았다.

저도 모르게 나타샤라는 이름이 새겨진 부분을 손으로 어루만지며 마지막으로 보았던 그녀의 모습을 떠올렸다.

나타샤 몰로토프.

항상 아름답고 강인했던 그녀.

그리고 감상에 빠진 것은 모텔 침대에 누워 강진호와 시야를 공유하던 유더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미 오래 전에 둘로 갈라진 두 사람이었지만, 뿌리 자체는 같았기 때문이다.

‘나타샤가 갑자기 왜······.’

아니, 그보다 진짜 나타샤인가.

다행히 무사했구나.

여전히 잘 지내고 있는 모양이구나.

그리고-

‘키릴 문자라 다행이다.’

코델리아는 키릴 문자를 모를 테니까.

하지만 너무 빠른 판단이었다.

강진호가 감상에 빠지고, 유더 역시 잠시나마 나타샤의 얼굴을 떠올린 그때, 코델리아는 미간을 잔뜩 구기며 유더를 돌아보았고, 감상을 끝낸 유더에게 물었다.

“‘너의 나타샤’가 누구야?”

코델리아는 방금까지 인상을 구기고 있던 게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활짝 웃으며 물었고, 유더는 그녀가 신이기 이전에 해석 마법 쯤은 가볍게 사용 가능한 대마법사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어, 그러니까······.”

“응, 그러니까? 설마··· 나이트풀의 그녀?”

코델리아는 다시 하얗게 웃으며 물었고, 유더의 얼굴에선 식은땀이 줄줄 흐르기 시작했다.

to be continued

< 엔딩메이커 SS #17 지구로 (10)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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