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엔딩메이커 SS #19 지구로 (12) >
엔딩메이커 SS #19 지구로 (12)
&
‘알렉세이! 도와줘요 알렉세이!’
지난 6년 동안 몇 번 찾지 않았던 알렉세이였는데 요 며칠 들어 갑자기 찾는 빈도가 늘어났다.
어째서일까.
무엇 때문에 그런 것일까.
‘알렉세이!’
아무튼 중요한 것은 알렉세이의 가르침이 간절할 정도로 극한 상황에 처했다는 것이었다.
‘극한 상황?’
대체 무엇이.
강진호의 정신을 지탱하는 강한 이성이 의문을 제시했지만 잠깐뿐이었다.
격렬한 감정의 동요가 이성을 짓눌러 버렸다.
“대장! 대장! 긴급상황입니다! 후방에서 적들이 밀려들고 있습니다!”
막사 안.
그러니까 강진호의 머릿속.
통신병 강진호의 다급한 외침에 대장 강진호는 마른침을 삼키며 전장 지도를 바라보았다.
“역시 나타샤······.”
찌르는 솜씨가 장난이 아니었다.
단 한 수로 강진호 자신을 진퇴양난의 위기로 몰아넣었다.
“대장! 전방에서도 공세가!”
통신병 강진호가 외친 순간이었다.
“오···빠? 무슨 일 있으세요?”
문 너머에서 들리는 홍유희의 목소리.
문 앞에 서 있는 것이 분명했다.
즉, 손만 뻗으면 문을 열 수 있는 상황이라는 것이었다.
“아, 안 돼!”
대장 강진호가 다급히 외쳤다.
문이 열리고, 그래서 홍유희가 지금 이 상황을 목격하는 것만은 막아야 했다.
대부분의 강진호들이 대장 강진호와 동일한 생각을 했다.
하지만 냉철한 이성을 가진 체스 플레이어 강진호는 이 상황에서 한 가지 의문을 떠올렸다.
‘왜 안 되는데?’
문이 열리면 홍유희가 강진호 자신과 나타샤를 보게 된다.
반라에 가까운 차림으로 침대에 누워있는 나타샤와 자신을.
그게 왜 안 되는 것일까.
그 사실이 불러올 여러 가지 사건들을 강진호 자신이 어째서 두려워하는 것일까.
“시간을 끌어야 합니다! 어떻게든 해야 합니다!”
겜돌이 강진호가 소리치자 대장 강진호는 이를 악물고 전장지도를 바라보았다.
그 순간 다시 한 번 홍유희의 목소리가 들려왔고, 나타샤가 아름다운- 하지만 악마같은 미소를 머금었다.
“행동한다!”
더 이상 시간을 끄는 것은 하책이었다.
대장 강진호가 외친 그 순간 현실의 강진호가 움직임을 개시했다.
“이쪽으로!”
아주 낮은 목소리로 소리치듯 속삭인 강진호는 침대에서 나타샤를 번쩍 들듯이 일으켜 세운 뒤 옷장 안에 밀어넣었다.
“안에 있어. 은폐상태 유지하고. 알았지?”
일단 말은 했지만 과연 들어줄 것인가.
강진호는 필사적인 얼굴로 나타샤를 바라보았고, 나타샤는 고양이 같은 얼굴로 웃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누가 봐도 얌전히 있지 않겠다는 얼굴.
장난기가 가득한 악동의 미소.
하지만 도리가 없었다.
강진호는 다시 한 번 필사적인 표정으로 간절함을 전달한 뒤 옷장 문을 닫았다. 애써 호흡을 가다듬은 뒤 안방 문을 열었다.
“오빠?”
약간의 불안과 의아함을 품은 채 이쪽을 올려다보는 홍유희.
“어··· 무슨 일 있으세요?”
갑자기 안방 문을 쾅하고 닫아버렸으니까.
대체 안방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기에 그런 것일까.
더욱이-
‘얼굴이··· 빨개?’
이제 보니 호흡도 거칠었고 이마에는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홍유희가 재차 묻자 강진호는 일단 마른 침을 삼켰다.
그리고 그 한 순간 두뇌를 풀가동하여 변명거리를 만들어냈다.
“바퀴벌레.”
“네?”
“바, 바퀴벌레가 나왔어.”
강진호의 말에 홍유희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고, 강진호는 확신했다.
‘통한다!’
이건 통할 수 있다!
일단 물꼬가 트이자 강진호의 혀가 현란하게 가동하기 시작했다.
“아니, 안방에서 바퀴벌레가 갑자기 나와서 밖으로 나갈까봐 문을 닫은 거야.”
말이 된다.
현실적이다.
충분한 설득력을 가지고 있다!
더욱이 효과적인 단어 선택이었다.
바퀴벌레가 나왔다는 말을 들은 순간 홍유희는 혼란에 빠져 논리적인 사고를 이어갈 수 없었다.
“자, 잡았어요?”
“아니, 아직.”
반사적으로 답한 강진호는 남몰래 주먹을 움켜쥐었다. 이번 대답 역시 몹시도 성공적이었기 때문이다.
“아직 안방에 있을 거야. 그러니까 문을 닫자.”
“어, 으, 네.”
홍유희가 호다닥 안방 밖으로 나가자 강진호는 빠르게 따라나가며 문을 닫았다.
“유희야. 미안하지만 오늘은 이만 돌아갈래? 아무래도··· 잡기 전까지는······.”
“아, 알겠어요.”
바퀴벌레는 중대사항이었으니까.
더욱이 옆집이었다.
반드시 박멸해야만 했다.
“그래, 이해해줘서 고마워.”
강진호는 안도의 숨을 내쉬며 말했고, 머릿속의 대장 강진호는 박수를 치며 감탄했다.
“훈장이다. 훈장감이다!”
아이디어를 낸 것은 지난 6년 사이에 탄생한 집돌이 강진호였다.
강진호들이 다 같이 박수를 치며 감탄하자 집돌이 강진호의 얼굴에 수줍은 미소가 떠올랐고, 현실의 강진호 역시 티나지 않게 미소를 지었다.
“그, 그럼 갈게요. 오, 오빠 파이팅?”
“그래, 힘낼게.”
그런데 바로 그 순간이었다.
“미야옹.”
“어?”
안방 안에서 들려온 고양이 소리.
“미야옹.”
잘못 들은 것이 아니었다.
다시 들려왔다.
마치 어딘가에 갇혀 있는 고양이가 도와달라고 구조신호를 보내는 것 같은, 그런 애절한 울음이었다.
이게 무슨 일일까.
강진호가 고양이라도 키웠던 것일까?
홍유희의 얼굴에 물음표가 떠오르자 강진호는 순간 숨을 멈추었다.
그리고 필사적으로 생각했다.
작금의 위기를 타파하기 위해 사고를 가속화시켰고, 다시 한 번 하나의 답을 만들어내는데 성공했다.
“유, 유튜브.”
“네?”
“아니, 어. 너 오기 전에 유튜브로 귀, 귀여운 고양이 영상 보고 있었거든.”
강진호의 변명에 홍유희는 순간 눈을 깜박이더니 이내 작게 웃었다.
유튜브로 일부러 귀여운 고양이 영상을 찾아보는 강진호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귀여워.’
귀엽다.
옆집 오빠의, 아복이의 의외의 모습.
홍유희의 얼굴에 떠오른 미소에 강진호는 다시 한 번 안도했다.
이번에도 어찌어찌 사선을 넘는데 성공한 모양이었다.
“아무튼 유희야.”
“어, 네 오빠. 이만 가볼-.”
“왈왈! 왈왈!”
“어, 개도 나오네 보네? 자동으로 영상이 넘어갔나?”
바로 연이어 들려온 개소리에 강진호는 즉각적으로 변명을 지어냈고, 홍유희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그때였다.
“꼬끼오~ 꼬끼오~”
“히히힝. 히히힝.”
고양이와 강아지까지는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런데 닭? 마지막은 말?
강진호는 등 뒤에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지만 최대한 침착하기 위해 노력했다.
당혹스러운 상황들이 이어지고 있었지만 첫 번째 변명 안에서 해결될 수 있는 문제였다.
그 점을 잊어서는 안 되었다.
“도, 동물농장이라도 틀어졌나? 어쩌면 브레멘 음악대 같은 걸지도?”
되도 않는 변명이었지만 어찌어찌 통한 모양이었다.
홍유희는 의아해하면서도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유희야.”
“네, 오빠.”
무척이나 아쉬웠지만 바퀴벌레는 중요한 문제였으니까.
홍유희는 실망감을 감추며 현관을 나섰고, 강진호는 마찬가지로 아쉽다는 얼굴로 홍유희를 배웅한 뒤 현관문을 걸어잠갔다.
그리고 일단 안도의 한숨.
이마에 흐른 땀을 닦고, 부엌에 가서 물까지 한 모금 마신 뒤.
“나타샤!”
혹여나 들을까봐 이번에도 소리죽인 외침에 나타샤는 까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크크큭 방금 누구야? 그 아기고양이는. 아니, 아기 토끼인가?”
문이 닫혀있었지만 목소리로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사실 강진호는 몰랐지만, 홍유희를 데리고 현관으로 향할 때 슬쩍 안방 문을 열고 지켜본 나타샤였다.
“옆집 애 맞지? 어?”
정확했다.
하지만 강진호는 다른 것을 먼저 입에 담을 수밖에 없었다.
“그, 그보다 그건 뭐야 대체. 동물 소리도 그렇고.”
“왜. 너 이거 엄청 좋아하잖아. 토끼 귀. 아니, 바니걸인가?”
그랬다.
나타샤는 머리에 토끼 귀 머리띠를 낀 상태로 침대 위에 앉아 있었고, 그 모습이 다시 강진호의 가슴을 흔들어놓았다.
“귀여워라. 취향은 여전하구나?”
“취, 취향 아니거든?”
사실 맞았다.
하지만 그 사실을 드러내고 싶지는 않았다. 설사 나타샤가 이미 알고 있다 할지라도!
“정말 여전하네.”
킥킥 웃은 나타샤는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두 팔을 활짝 벌렸다. 엉거주춤한 자세로 서 있는 강진호에게 웃으며 말했다.
“이리 와. 오랜만에 봤는데 일단 한 번 안아봐야지?”
토끼 머리띠를 한 반라의 미녀.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눈앞의 여인이 나타샤라는 사실이었다.
강진호는 어깨를 늘어트리더니 저도 모르게 웃었다. 그대로 나타샤를 꼭 끌어안으며 말했다.
“보고 싶었어.”
“나도.”
6년 만의 해후.
두 사람의 포옹은 무척이나 길게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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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타샤 몰로토프.
연령 미상.
하지만 추정컨대 강진호 자신보다 한 살에서 두 살 정도 연상.
성인 기준으로는 거의 없다시피 한 나이 차이였지만, 어린 소년과 소녀에게는 달랐다.
본래 육체의 성장은 여성 쪽이 남성보다 조금 더 빠른 편이기도 했고 말이다.
‘아니, 그것만이 아니었어.’
나타샤는 어린 시절부터 무척이나 성숙한 정신의 소유자였다.
어른.
그래, 어른.
어린 시절의 강진호에게 있어 나타샤는 몇 없는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어른이었다.
“그랬는데.”
“왜? 뭐가?”
반라에 가까운 드레스 차림에서 반팔티와 반바지라는, 비교적 용인할 수 있는 복장으로 갈아입은 나타샤였지만 여전히 머리에는 토끼 머리띠를 하고 있었고, 그 사실이 강진호의 가슴을 수면 깊은 곳에서부터 뒤흔들고 있었다.
“바니걸 너무 좋아하는 거 아니야?”
“크흠.”
헛기침으로 부정도 긍정도 아닌 답을 내놓은 강진호는 다시 말했다.
“아무튼 나타샤. 그동안 잘 지냈어?”
자그마치 6년이었으니까.
더욱이 은퇴한 강진호 자신과 달리 나타샤는 여전히 현역에서 일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장난스러운 대화를 주고받고 있었지만, 그 정도는 마주하면 알 수 있었다.
“잘 지냈으니까 여기도 왔지. 너도 잘 지내는 거 같은데?”
나타샤 자신과는 조금 다른 의미였지만.
나타샤의 말에 강진호는 쓰게 웃었다.
지난 6년간의 시간.
방구석에 처박혀 게임만 한 시간이었지만 이상하게 미소가 지어졌다.
그 6년은 홍유희와 함께한 시간이었으니 말이다.
‘잠깐, 뭐라고?’
스스로의 생각에 강진호가 깜짝 놀란 그때, 나타샤는 강진호를 가만히 바라보더니 꽤나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안도와 안타까움. 기쁨과 동시에 떠오른 실망감.
하지만 잠깐뿐이었다.
나타샤는 순식간에 표정을 감춘 뒤 장난스럽고 야한 이웃집 누나가 되어 속삭이듯 물었다.
“아까 걔는 누구야? 옆집 애 맞지? 둘이 사귀는 거야? 응?”
“여, 옆집 애는 맞아. 하지만 아직 사귀는 사이는 아니야.”
강진호의 대답에 나타샤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아직?”
“어?”
“방금 아직이라고 했잖아. 아직.”
아직.
즉, 나중에는 사정이 바뀔 수 있다는 거.
사정을 바꿀 마음이 있다는 거.
나타샤의 지적에 강진호는 당황했다.
속마음을 들켜서가 아니었다.
자신의 속마음 자체에 놀란 것이었다.
‘사귀고 싶어 한다고? 내가?’
노폭이와, 옆집 소녀와, 홍유희와?
그러고 보면 참으로 기묘한 일이었다.
어째서 그렇게 필사적으로 나타샤를 숨긴 것일까.
변명을 쥐어짜내려 노력한 이유는 무엇일까.
홍유희를 알게 된 지 이제 겨우 며칠이나 되었다고.
아니, 분명 알고 지낸 건 6년이 넘었지만, 여자라는 것을 알았다고 이렇게까지 마음이 동요할 수 있는 것일까?
“가능합니다. 그것이 운명적인 사랑이니까요.”
강진호의 머릿속에서 시인 강진호가 우수에 찬 얼굴로 말했고, 대장 강진호는 얼빠진 얼굴로 그를 바라보다 말했다.
“이, 일단 끌어내.”
잘 모르겠으니까.
너무 당혹스러웠으니까.
“후후훗, 거부하지 말고 받아들이시죠. 세상은 러브 앤 피스입니다.”
질질질 끌려나가면서도 미소짓는 시인 강진호의 모습에 다시 한 번 넋이 나간 대장 강진호였지만 잠깐뿐이었다.
이내 다시 정신을 수습하고 나타샤를 바라보았다.
“나타샤,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야?
나타샤를 만난 것은 무척이나 반가웠다.
자그마치 6년 만의 해후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래서 이상했다.
6년 만에 모습을 드러낸 나타샤.
그녀는 왜 지금 자신 앞에 나타난 것일까.
“그냥.”
“어?”
“그냥. 너 보고 싶어서. 넌 나 안 보고 싶었어?”
나타샤가 고개를 살짝 기울이자 부드러운 백금발이 자연스럽게 나타샤의 어깨와 가슴 위로 길게 드리웠다.
촉촉하게 젖은 눈빛에 강진호는 다시 한 번 당황했다.
“얼굴 빨개졌네?”
나타샤가 입술을 살짝 핥으며 그리 말하자 강진호는 급히 고개를 돌린 뒤 심호흡을 했다.
‘나타샤야. 나타샤라고.’
저것도 다 장난치는 거야.
유혹에 넘어가면 안 돼.
장난이니까.
또 놀리려고 저러는 게 분명하니까.
“나도 보고 싶었어. 하지만 6년은······.”
“그래, 너무 길지. 하지만 그래서 더 보고 싶어진 거야.”
나직이 웃은 나타샤는 그대로 손을 뻗더니 강진호의 뺨을 어루만졌다.
그대로 야릇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지노. 오늘밤에 재워줄 거지?”
“어······?”
“침대, 빌려 줄 거지?”
나타샤의 물음에 강진호는 마른침을 삼켰다. 그리고 이내 씩하고 웃으며 말했다.
“이제 적응했어.”
“어?”
“6년만이라 나도 좀 당황했는데, 이젠 아니야.”
그런 식으로 놀리는 거.
훗하고 제법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은 강진호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안방을 써. 난 작은 방 쓸 테니까. 커피 마실래?”
유들유들한 회피기동에 나타샤는 김이 샌다는 듯 입술을 삐쭉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진하게.”
“알아. 블랙 말이지?”
어깨를 으쓱인 강진호는 부엌으로 향했고, 나타샤는 그런 강진호의 뒷모습에 복잡한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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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오후.
평소처럼 늦잠을 잔 홍유희는 콧노래를 부르며 샤워를 마친 뒤 나름 열심히 옷을 챙겨 입었다.
오늘은 옆집 오빠와 만날 예정이 없긴 했지만, 그래도 모처럼 밖에 놀러나가는 것이었으니까.
‘그것두 옷 사러.’
이게 바로 인싸들의 삶일까?
혼자서 쿡쿡 웃은 홍유희는 몇 없는 옷들과 이미 죽어버린 패션 센스로 나름 예쁘게- 그러니까 결국 정모날과 똑같은 옷을 챙겨 입고 집을 나섰다.
‘역시 옷 바리에이션을 늘려야 해.’
코델리아 드레스는 100벌도 넘는데 정작 홍유희 자신의 옷은 집에서 입는 티셔츠와 돌핀팬츠까지 하나하나 다 합쳐도 그 반의 반도 못 되었으니까.
주먹을 꽉 쥐며 새삼 다짐한 홍유희는 버스를 타고 홍대로 향했다.
그리고 반시간 남짓 뒤.
“여기야.”
“언니 오랜만.”
남만고양이.
그러니까 김혜은과 합류한 홍유희는 활짝 웃었고, 그 모습에 김혜은은 묘한 미소를 지었다.
“왜?”
“아니, 신기해서.”
그 노폭이가 먼저 옷을 사러 가자고 하다니.
더욱이 지금 모습을 보면 알 수 있었다.
홍유희에게 일어난 극적인 변화.
“유희야.”
“응, 언니.”
“너 좋아하는 사람 생겼지?”
“컥!”
순간 허를 찔린 홍유희는 컥컥 거리며 괴로워했고, 그런 홍유희의 모습에 김혜은은 다시 한 번 확신했다.
“진짜네.”
진짜 누구 좋아하나보네.
그 노폭이가, 겜순이 홍유희가 누구 좋아하나 보네.
남만고양이의 얼굴에 우흐흐 야릇한 미소가 번졌다.
“누군데? 맨날 말하던 그 옆집 오빠?”
홍유희의 인간 관계라고 해봐야 뻔했으니까.
김혜의의 지적에 홍유희는 잠시 몸을 비틀며 괴로워하더니 이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 으응.”
“오올, 어떻게 된 건데? 말이라도 걸었어? 아니지, 우리 노폭이가 그랬을 리가 없지. 그쪽에서 먼저 말이라도 건 거야?”
“그··· 어······ 비, 비슷해.”
“비슷하다니? 말 건 거?”
“어······ 응.”
홍유희가 새빨개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자 김혜은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아끼는 동생이 동경하던 사람이랑 접점을 가지게 된 것도 좋았지만, 그 대상이 코와붕가나 AAA의 말처럼 아복이가 아니라는 사실에서 묘한 안도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어떻게 된 건데? 어? 말좀 해봐.”
“그, 그러니까아.”
“그러니까?”
“아복이가······.”
“어?”
여기서 아복이가 왜 나오는데?
갑작스러운 난입을 김혜은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홍유희의 입에서는 아복이의 이야기가 계속해서 흘러나왔다.
“아, 아복이가······.”
“아복이가?”
“여, 옆집 오빠야.”
“어?”
뭐라고?
“아복이가 여, 옆집 오빠야.”
“응?”
“옆집 오빠라구······.”
“누가?”
“아복이가.”
“아복이가 누구라고?”
“아! 씨! 아복이가 옆집 오빠라구!”
성질이 난 홍유희가 빨개진 얼굴로 소리치듯 말했고, 덕분에 지나가던 사람들이 이쪽을 돌아보았지만 김혜은은 그런 것을 신경 쓸 수 없었다.
너무나 충격적인 사실 때문이었다.
“자, 잠깐. 잠깐. 그러니까 아복이가 사실 옆집 오빠였다? 홍유희가 동경하던 그 사람이 노폭이랑 6년 동안 치고받고 하던 아복이었다?”
“으응.”
“정모날 그 사실을 알았고, 그래서 정모날 정모가 아니라 데이트를 했고, 그래서 이제 사귀려고 각을 보고 있다?”
“사, 사귀려고 각까지 보는 건 아니구······.”
홍유희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부정했지만 얼굴을 보면 알 수 있었다.
아니긴 개뿔이
사귈 마음이 가득하구만.
“와, 미친. 그렇게 다투던 아복이랑?”
“아니 뭐··· 아복이랑 내가 싸운 건 아니잖아?”
“저기요, 매일 같이 쌍욕 날리던 사이거든요?”
“욕 아닌데··· 감탄사인데······.”
홍유희가 손가락을 꼼지락 거리며 다시 중얼거리자 김혜은은 다시 헛웃음을 터트렸다.
어이가 없었지만 반응을 보니 누구도 부정 못할 진짜였기 때문이다.
“와, 세상에. 진짜 세상에. 코와붕가랑 AAA가 알면 뭐라하려나.”
“마, 말하면 안 돼! 알았지? 어?!”
“알아. 말하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나도 아니까.”
정말로 진짜.
“와.”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였다.
세상에 이런 만화 같은 일이 실제로 일어날 줄이야.
“근데 뭔가 어울리긴 한다.”
“뭐가?”
“너랑 아복이. 그래, 사이가 좋으니까 6년이나 질리지 않고 그렇게 싸우지.”
“싸운 거 아닌데.”
“아휴, 말하는 거 봐. 벌써 홀라당 넘어갔네, 갔어.”
어쩐지 이번 순위 발표 때 어색하더라.
평소랑 달라도 너무 다르더라.
“그런데 유희야. 옆집 오빠면 몇 살 연상인 거야?”
“어?”
“아니, 아복이가 옆집 오빠라고 하니까 궁금해져서.”
“그, 글쎄?”
몇 살인 걸까.
연상이고, 어른인 건 알겠는데 정확한 나이는 짐작이 가지 않았다.
“다, 다섯 살 정도 연상 아닐까?”
“6년 전에도 혼자 살고 있었다며. 그런 그건 좀 무리 아닐까? 너보다 다섯 살 연상이면 너랑 처음 게임하기 시작했을 때 열아홉이었다는 거니··· 잠깐, 이거 완전 도둑놈 아냐?”
아무리 생각해도 나이차가 여섯 살- 아니, 일곱 살 이상은 날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같은 사실을 홍유희는 전혀 다르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일곱 살··· 역시 진짜 어른이었어.”
반짝반짝 빛나는 눈을 보니 그래서 더 좋다는 느낌이랄까.
아니, 그런 것이 아니었다.
이미 옆집 오빠면 뭐든 좋다는 태도가 분명했다.
‘뭔가 정신이 아찔하네.’
홍유희보다 일곱 살 연상이면 남만고양이 자신보다도 연상이었다.
그런데 그런 찐어른이 매번 순위 발표 때마다 그렇게 개초딩 짓을 했다고 생각하니-
‘이거 말려야 하는 거 아냐?’
아니, 물론 아복이가 나쁜 애-가 아니라 나쁜 사람?-은 아니지만.
김혜은이 그렇게 친한 언니로서 아끼는 동생의 미래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을 때였다.
“어, 옆집 오빠다.”
홍유희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에 퍼뜩 정신이 든 김혜은은 얼른 고개를 들었다.
홍유희가 바라보는 방향을 보니 과연 군중 사이에서도 눈에 확 띄는 키 크고 잘생긴 남자가 보였다.
확실히 잘생겼다.
문제의 옆집 오빠를 처음 보는 김혜은이었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옆집 오빠- 아복이의 옆에 찰싹 달라붙어 있는 금발 미녀의 존재.
영화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화려한 미녀.
누가 봐도 보통 이상으로 친밀해 보이는 두 사람.
깜짝 놀란 김혜은은 홍유희를 돌아보았고, 그대로 움찔하고 말았다.
“유, 유희야?”
표정이 사라진 홍유희의 얼굴.
김혜은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 말았다.
to be continued
< 엔딩메이커 SS #19 지구로 (1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