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엔딩메이커 SS #20 지구로 (13) >
엔딩메이커 SS #20 지구로 (13)
전날 밤.
홍유희가 내일 옷 살 생각에- 정확히는 새로 산 옷들로 예쁘게 꾸며서 옆집 오빠 만날 생각에 들떠 있을 때 강진호는 반라의 미녀를 마주하고 있었다.
“마셔마셔. 술 너무 약해진 거 아니야?”
“마실 일이 없었으니까.”
“예전부터 생각했는데 삶이 너무 삭막해. 불쌍한 우리 지노.”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른 채 헤실거리던 나타샤는 우는 시늉을 했고, 유더는 가슴골이 다 드러나는 늘어진 탱크탑에서 가능한 시선을 돌리기 위해 고개를 돌렸고, 자연스럽게 테이블 위에 잔뜩 쌓인 빈 병들을 보았다.
‘차라리 맥주 캔이면 몰라.’
올라가 있는 게 죄다 보드카 병들이라니.
“아무튼 지노. 우리 지노. 다행이야.”
“뭐가.”
“건강하게 잘 지내서. 거기다··· 크큭. 큭. 6년이나 크크큭.”
강진호는 나타샤가 왜 저렇게 웃는지 알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모두 솔직하게 이야기했으니 말이다.
“와, 진짜. 아무도 안 믿을 거야. 그 지노가 6년이나 옆집 여자애랑 게임에서 1등 하려고 경쟁했다니. 거기다 걔 놀리는 맛에 지난 6년을 살았다니.”
“···아까도 말했지만······.”
“말했지만?”
“옆집··· 애인 거 안 건 최근이야.”
강진호가 소리 죽여 말하자 나타샤는 더욱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와, 세상에. 지노 민망해하는 거 봐. 크큭. 그래, 민망하지. 민망한 건 너도 알지? 응? 우리 지노.”
배를 잡고 웃다 못해 이젠 아주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기 시작했다.
“하아, 하. 진짜 웃기다. 웃겨. 지노 토라진 얼굴도 보고 간만에 오길 정말 잘했어.”
“안 토라졌거든?”
“응, 그래.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나타샤가 다시 히히히 웃자 강진호는 묵묵히 술잔을 채웠다.
빨리 더 먹여서 재우는 게 정답 같았다.
“얼마나 더 머물 거야?”
“내일.”
“어?”
“내일 돌아갈 거야.”
짤막하게 답한 나타샤는 다시 의자 위로 기어 올라간 뒤 무릎을 안고 앉았다.
“내일?”
“어, 내일. 나도 나름 바쁜 몸이거든.”
다시 히히 웃은 나타샤는 유리잔 안에 든 보드카를 꼴깍꼴깍 마시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강진호는 눈을 깜박이다 말했다.
“정말 내일이야?”
“어, 내일이야. 내일. 응, 내일. 내일 돌아가야 해. 너 무사하고, 잘 지내는 거 봤으니까 이제 괜찮아. 알렉세이도 분명 안심할 거야. 잘했다고 내 머리를 쓰다듬어 줄 게 분명해.”
술기운 때문인지, 아니면 그리움 때문인지 나타샤는 눈시울을 살짝 붉히며 그리 말했다.
“나타샤······.”
“그래도 내일 아침은 아니야. 밤에 갈 거니까, 낮에는 오랜만에 데이트하자. 응?”
나타샤가 애교를 부리듯 고개를 기울이며 말하자 강진호는 고개를 끄덕이는 대신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저기요, 예전에도 데이트한 적 없거든요?”
“어머나, 그날 일은 잊은 거야? 그 왜 나이트풀에서 지노가 내 알몸을 훔쳐본 날······.”
“잠깐! 훔쳐봤다니! 그건 사고였다고!”
“그래,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그렇게 생각해줄게.”
“아니! 뭘 그렇게 생각해! 정말이라니까?”
“응, 그래. 지노 말이 다 맞아.”
나타샤의 미소는 자애로운 성녀 그 자체였지만 강진호는 답답해 속이 터질 것만 같았다.
“에이, 토라지지 말구.”
히히 웃으며 다시 애교를 부린 나타샤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을 이었다.
“아무튼 내일이야. 내일 마지막으로 재미나게 놀자. 알았지, 지노?”
“나타샤?”
강진호는 저도 모르게 되묻고 말았다.
평범하기 짝이 없는 말이었지만, 어쩐지 위화감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내일.
마지막.
하지만 생각이 길게 이어지진 않았다.
나타샤가 바로 다시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걸어왔기 때문이다.
“흥흥, 아무튼 그런걸로 알고 난 그럼 이만 자러 갈게. 방문은 열어둘테니까··· 땡기면 알지? 누나는 지노라면 언제든지 ok야.”
“아, 네. 푹 주무시죠 누님.”
“흥, 나중에 후회할라구.”
다시 히히 웃은 나타샤는 요염하게 손을 흔든 뒤 안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다음날 오후.
홍대 거리.
“어, 옆집 소녀다. 홍유희.”
나타샤의 발언에 깜짝 놀란 강진호는 급히 시선을 돌렸고, 그랬기에 딱하고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이쪽을 바라보는 홍유희와 낯선 여자.
그리고 저쪽을 바라보는 강진호 자신과 나타샤.
홍대 거리에서, 아무런 약속도 없이 이렇게 마주치는 게 가능한 것일까?
하지만 이 확률에 대해 고민할 시간도 없었다.
강진호 자신이 무어라 입을 열기도 전에 나타샤가 행동을 개시했기 때문이다.
“안녕! 옆집 소녀 맞지? 난 나타샤야.”
붙임성 있게 말하며 성큼성큼 걸어가니 낯선 여자가 흠칫하며 안절부절 못 했고, 그 옆에 서 있던 홍유희가 당황한- 그러면서도 어쩐지 모르게 표정 없는 얼굴로 나타샤를 마주했다.
“옆집··· 소녀요?”
“응, 옆집 소녀. 홍유희. 어젯밤에 지노한테 이야기 정말 많이 들었어.”
그리 말한 나타샤는 서둘러 달려온 강진호가 곤란해하든 말든 홍유희를 덥썩 끌어안았고, 홍유희는 그 와중에 생각했다.
‘옆집 소녀?’
오빠가 날 그렇게 소개했나?
소녀.
옆집 소녀.
순간 복잡한 기분이 들었지만 이 또한 길게 이어질 수 없었다.
어찌되었든 길거리에서 처음 보는 사람과 포옹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뭐, 뭐야.’
크고 부드럽고 아무튼 대단하다.
‘여, 역시 외국인?’
거기다 키도 커서 170은 가볍게 넘길 것 같았다.
“나타샤!”
“응, 지노. 먼저 인사했어. 네가 말한 것처럼 정말 귀엽고 사랑스럽네.”
나타샤가 그대로 홍유희를 꼭 끌어안고 말하자 이번에는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당황했다.
누가 봐도 외국인인 나타샤가 조금 어눌한 발음이나마 유창하게 한국어를 구사해서가 아니었다.
그 내용.
방금 나타샤가 언급한 것.
‘귀, 귀엽고 사랑스러워?’
나타샤의 가슴에 파묻힌 채 홍유희는 입술을 움츠리며 얼굴을 붉혔고, 남만고양이- 그러니까 김혜은은 저도 모르게 미소가 그려진 입가를 가리며 강진호를 보았다.
그리고 강진호는 새빨개진 얼굴로 당황하다 소리쳤다.
“내, 내가 언제 그랬어!”
한국어가 아닌 러시아어였다.
그리고 그 대응에 나타샤는 악마처럼 웃더니 똑같이 러시아어로 응수했다.
“어제 그렇게 떠들어놓고 이제 와서 오리발이야? 그리고 왜. 정말 아니면 한국어로 부정하지 굳이 러시아어로 부정하는 이유가 뭐야? 응? 이유가 뭔데 그래?”
사실 알고 있었다.
그 이유야 너무 뻔한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강진호는 차마 그것을 인정할 수 없었다.
“크윽······.”
“우리 지노 얼굴 빨개진 거 봐. 이제 정말 민간인 다 됐네.”
다시 킥킥 웃은 나타샤는 자신의 가슴에 묻힌 채 꼼짝도 못하는, 그러니까 빨개진 얼굴로 입술을 움츠리고 있는 홍유희를 내려다보았다.
얼굴만 봐도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오, 오빠가 나보고 귀엽고 사랑스럽다고······.’
꺄. 어쩌면 좋아.
머릿속으로 홍유희의 목소리를 재생시킨 나타샤는 아주 자연스럽게 홍유희의 뺨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지노가 칭찬을 정말 많이 해서 보고 싶었는데 이렇게 만나네. 나는 나타샤 몰로토프라고 해. 지노의 누나야.”
“누···나요?”
홍유희가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묻자 나타샤는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응, 당연히 친누나는 아니지만 친누나 같은 사람이야. 우리 지노랑··· 지난 6년 동안 함께해줘서 정말 고마워.”
가볍게 시작한 이야기는 마지막에 가서는 무척이나 진지해졌다.
애정이 듬뿍 묻어나는 나타샤의 표정에 저도 모르게 얼굴을 붉힌 홍유희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상한 기분이었지만, 이렇게 표현하는 것이 맞는지 모르겠지만, 무언가 인정받은 기분이 들어서였다.
나타샤는 그런 홍유희의 머리를 다시 한 번 쓰다듬더니 이내 그 옆에 서 있던, 그러니까 흥미진진한 얼굴로 이쪽을 쳐다보고 있는 김혜은에게 물었다.
“그쪽은 그런데 누구?”
“어, 그··· 유희 친한 언니에요. 지노··· 그러니까 강진호 씨···랑도 좀 아는 사이고요.”
김혜은의 대답에 나타샤는 강진호를 돌아보았고, 강진호는 순간 미간을 좁혔다.
그리고 이내 눈을 번쩍 뜨며 물었다.
“설마 남만고양이?!”
“어, 맞아. 아니, 맞아요.”
마주한 순간 알 수 있었다.
김혜은 자신보다 연상이 분명했다.
“세상에, 나는······.”
“아웃복서009지? 아니, 맞죠?”
김혜은이 제법 의기양양하게 말하자 강진호는 홍유희를 돌아보았고, 홍유희는 어설프게 웃었다.
채팅방 멤버들에게 비밀로 하자고 했던 건 홍유희 자신이었으니 말이다.
“흐흥, 돌아가는 이야기를 보아하니 그쪽도 인터넷 게임 친구인가 보네? 영웅전기2?”
“네, 맞아요.”
겨우 페이스를 회복한 김혜은이 여유있게 답했다.
사실 이 자리가 난처하고 어색하고 아무튼 견디기 어려운 것은 홍유희와 강진호였지 제3자인 자신은 아니었으니까.
아니, 오히려 꿀잼직관각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나타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럼 이왕 이렇게 만나 거 같이 다닐까?”
“나타샤?”
“네?”
강진호와 홍유희가 동시에 말했고, 김혜은은 손으로 짝짝짝 박수를 쳤다.
그런 김혜은의 호응을 느꼈는지 나타샤가 다시 활짝 웃으며 말했다.
“왜, 재미있잖아? 떠나기 전에 우리 지노 마음을 휘어잡은 아가씨에 대해 조금이라도 더 알고 싶기도 하고.”
“휘, 휘어잡아······.”
홍유희가 다시 빨개진 얼굴로 작게 중얼거렸고, 강진호는 계속된 폭로(?)에 고통스러워했다.
“자, 그럼 그렇게 정해진 거야. 같이 가자. 언니가 옷이랑 구두 사줄게.”
발랄하게 말한 나타샤는 그대로 홍유희의 어깨를 안더니 정말로 앞장서기 시작했다.
그리고 남겨진 두 사람.
“뭔가··· 폭풍 같은 분이네요.”
김혜은의 말에 강진호는 대답하는 대신 어깨를 늘어트렸고, 민망함에 몸부림치며 발걸음을 내디뎠다.
&
나타샤의 행동력은 정말로 대단했다.
겨우 1시간 밖에 지나지 않았거늘, 엄청나게 지친 강진호는 수많은 종이 가방을 손에 든 채 옷가게 탈의실 앞에 서서 어깨를 늘어트렸다.
물론 강진호의 머릿속에서는 강진호들의 열띤 토론이 이어졌고 말이다.
“접시 물에 코 박고 죽는 건 어떨까.”
“대장, 접시 물에 코 박는 걸로는 죽을 수가 없습니다. 넥타이 졸라서 자살하기와 마찬가지입니다.”
내일부터 홍유희 얼굴을 어떻게 본단 말인가.
대장 강진호는 새빨개진 얼굴로 괴로워했고, 다른 강진호들 역시 그러했다.
“하지만 대장. 어떻게 보면 잘 된 일이지 않겠습니까? 위기는 곧 기회! 어쩌면 진도가 확 나갈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지, 진도?!”
“진도?!”
욕구불만 강진호의 외침에 다른 강진호들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확실히 민망하긴 했지만, 나타샤 덕분에 이래저래 숨겨왔던 마음을 잔뜩 드러낼 수 있었으니 말이다.
더욱이 홍유희의 반응도 나쁘지 않은 것 같았다.
“그러니 대장! 오늘 아주 그냥 확하고! 예?! 확! 하고! 남자답게!”
욕구불만 강진호가 다시 으흐흐 웃으며 주장하자 강진호들 가운데 일부가 마른 침들을 꿀꺽꿀꺽 삼켰지만 대장 강진호는 아니었다.
이미 빨개진 얼굴을 더욱 붉히더니 한숨과 함께 명령했다.
“야, 끌어내.”
명령과 동시에 군인 강진호들이 우르르 달려나와 욕구불만 강진호를 포박했다.
하지만 욕구불만 강진호는 그냥 끌려 나가지 않았다.
“이 위선자들! 니들이 속으로 무슨 생각하는지 내가 다 알··· 읍읍!”
하지만 역시 혼자서 군인 강진호들을 모두 당해내는 것은 무리였는지 욕구불만 강진호는 ‘내가 얼마나 참아왔는데! 어제도 어!’라는 말을 끝으로 막사 밖으로 끌려 나가고 말았다.
그리고 잠깐의 침묵.
대장 강진호가 일단 대기를 명하려고 한 그때 현실 쪽에서 변화가 일어났다.
“지노, 어때? 예쁘지? 사랑스럽지? 어?”
탈의실 문을 열고 나타난 것은 나타샤와 아까 전부터 그녀의 인형놀이 장난감이 되어 있던 홍유희였다.
“평가 좀 해봐. 어차피 제일 중요한 건 네 감상이니까. 그렇지 유히야?”
“아, 아니··· 우으······.”
나타샤가 까르르 웃으며 말하자 홍유희는 부정하려다 말고 고개를 푹 숙였다.
그리고 그 모습에 강진호는 저도 모르게 가슴을 움켜쥐었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기 시작한 탓이었다.
‘하, 진짜 잘 노네. 그냥 갈까.’
그리고 그걸 지켜보는 김혜은.
처음에는 재미있었는데, 어째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염장질에 스플래시 대미지가 들어오기 시작한 탓이었다.
“유히야 빨리 물어봐. 응? 어서.”
나타샤가 채근하자 홍유희는 입술을 한 번 깨물더니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오, 오빠.”
“으응.”
“어, 어때요?”
귀여워. 예뻐. 사랑스러워.
유더라면 바로 그렇게 말했겠지만 안타깝게도 강진호는 아직 유더처럼 얼굴이 뻔뻔하지 못 했다.
그랬기에 어버버 거리다가 겨우 한 마디를 쥐어짜낼 따름이었다.
“어, 어울리네.”
칭찬이라고 하기에는 약간 미묘했지만 그것으로 충분한지 홍유희는 손가락을 꼼지락 거리며 웃었고, 나타샤는 필사적으로 웃음을 억눌렀다.
그리고 다시 시간이 흘렀다.
한 시간, 두 시간, 세 시간.
저녁까지 먹고 나니 정말로 캄캄한 밤이 되고 말았다.
“하아, 아쉽지만 이제 슬슬 돌아가야 할 시간이네.”
계속된 하이텐션으로 일행을 이끌던 나타샤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그녀에게 모였다.
“10시에 약속이 있거든. 약속 장소 들렀다가, 출국해야 해. 새벽 비행기라.”
담담한 사실의 나열에 홍유희와 김혜은은 아쉬운 얼굴로나마 고개를 끄덕였지만 강진호는 아니었다.
“정말로 가는 거야?”
“그럼 정말 가지 가짜로 가겠어?”
“그럼······.”
“아니, 공항까지 배웅하지 않아도 돼.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만날 사람도 있으니까. 지노 네가 모르는 사람이야.”
러시아어로 빠르게 말한 나타샤는 여전히 미련이 남은 것 같은 강진호의 가슴을 가볍게 밀어내더니 그대로 홍유희에게 돌아서서 말했다.
“유히. 오늘 정말 즐거웠어. 그리고 지노의 누나로서 감사할게. 지난 6년 동안 정말 고마웠어. 앞으로도 지노를 잘 부탁할게.”
“저, 저도 즐거웠어요.”
뒤에 이어진 말들에는 무어라 답해야 할지도 알 수 없었기에 홍유희는 수줍게 웃으며 앞의 말에만 대답했고, 나타샤는 다시 웃었다.
정말로 마지막이라는 듯 홍유희를 꼭 끌어안더니 귀에 대고 무어라 작게 속삭였다.
‘뭐, 뭐지? 무슨 말을 하는 거지?’
나타샤의 표정이 딱 나쁜 짓을 저지를 때의- 그러니까 소악마 같은 미소였던 터라 불안해진 강진호였지만 그렇다고 딱히 알아낼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나타샤는 계속해서 말했고, 홍유희는 빨개진 얼굴로 마른 침을 꿀꺽 삼키더니 강진호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뭐지.’
대체 뭐지.
대체 무슨 이야기를 했길래 저런 거지?
하지만 홍유희는 말하지 않았고, 나타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홍유희의 뺨에 쪽하고 입술을 맞추더니 강진호에게도 포옹으로 작별을 고했다.
“안녕, 지노. 잘 지내야 해. 알았지?”
“정말··· 그냥 가는 거야?”
“오늘만 날이 아니니까. 나중에 또 보면 되잖아?”
그녀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사실이었다.
하지만 왜일까.
6년만에 마주했기 때문일까?
이대로 그녀를 떠나보내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기분만으로 나타샤를 붙잡을 순 없었다.
애당초 나타샤가 단지 그런 이유만으로 발을 멈출 리도 없었고 말이다.
“그럼 정말 안녕. 다음에 또 봐. 유희도 내가 말한 거 잊지 말고. 알았지?”
“···네.”
홍유희가 소심하게 답하자 만족한 나타샤는 그대로 돌아섰다.
그리고 정말로 뒤 한 번 돌아보지 않고 자기 갈 길을 가기 시작했다.
폭풍 같은 등장과 폭풍 같은 퇴장.
그에 반해 김혜은의 퇴장은 참으로 조용하고 자연스러웠다.
“그럼 나중에 게임에서 봐.”
김혜은은 그렇게 말한 뒤 제 갈 길을 가기 시작했고, 이번에도 남은 것은 두 사람이었다.
“어··· 그럼 우리도 갈까?”
“네, 오빠.”
가는 길이 같은 수준을 넘어 그냥 옆집에 사는 두 사람이었으니까.
지난 번 정모 때와 마찬가지로 함께 차에 탔고, 그대로 집을 향해 출발했다.
그리고 몇 분이나 지났을까.
신호에 걸려 멈췄을 때, 강진호는 마른 침을 한 번 삼키더니 최대한 자연스럽게 입을 열어 말했다.
“저기··· 그런데 유희야.”
“네?”
“아니, 그··· 아까 말이야.”
“아까요?”
“어, 아까. 그, 나타샤가······.”
“나타샤 언니가?”
“그··· 뭐라고··· 한 거야?”
헤어지기 직전에 나타샤가 귓속말로 속삭인 이야기.
사실 이런 프라이버시에 해당하는 이야기는 잘 입에 담지 않는 강진호였지만 이번에는 결국 예외로 둘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나타샤의 이야기를 들으며 이쪽을 빤히 바라보던 홍유희의 표정이 너무나 신경 쓰였기 때문이다.
뭐지.
대체 뭐지.
대체 무슨 말을 한 거지?
강진호가 애써 초조함을 누르며 정면을 바라보자 홍유희는 입술을 움츠리더니 작게 웃었다.
“유희야?”
“아뇨, 그, 나타샤 언니가 그랬거든요. 나중에 분명 둘이 있을 때 물어볼 거라구.”
홍유희의 말에 강진호는 실로 참담한 기분이 되었다.
역시 나타샤.
과연 나타샤.
강진호 자신이 홍유희 놀리기의 달인이라면 그녀는 강진호 놀리기의 달인이었으니 말이다.
“그, 그래서 뭐라고 했는데?”
어차피 이미 버린 몸이었다.
강진호가 민망함을 무릅쓰고 재차 묻자 홍유희는 다시 입술을 움츠리더니 슬쩍 시선을 돌렸다. 창 밖을 바라보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니걸.”
“어?”
“오빠가 바니걸··· 좋아하다구··· 그것두 엄청······.”
띄엄띄엄 꺼내진 말에 강진호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아니, 마음속으로 비명을 질러댔다.
‘알렉세이! 알렉세이!’
도와줘요! 제발! 제바아알!
하지만 언제나 그랬듯이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고, 강진호는 계속 민망해 했으며, 홍유희는 소리죽인 웃음을 흘려댔다.
그리고 반 시간 남짓.
지옥 같은 시간을 견디며 주차장에 도착한 강진호는 만신창이가 되어 차에서 내렸다.
나타샤가 홍유희 몫으로 사준 종이 가방 수십 개를 재주 좋게 챙겨든 뒤 스프링클러를 노려보며 말했다.
“가자.”
“네, 오빸”
마지막에 ㅋ가 섞인 건 기분 탓이겠지.
애써 스스로를 진정시킨 강진호는 홍유희와 함께 엘리베이터 위에 올랐다.
그리고 잠시 후.
나란히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뒤 홍유희의 집 앞에 종이 가방들을 내려놓은 강진호는 괜한 변명을 늘어놓는 대신 짤막하게 말했다.
“그럼 잘 가렴.”
“네, 오빠. 겜에서 봐욬.”
이번에도 기분 탓이겠지.
스스로를 세뇌한 강진호는 대문의 전자도어를 작동시켰다.
삑삑삑.
이제 철컥 소리가 나며 열리면 되었는데,
“어?”
열리지 않았다.
고장이라도 났는지 나중에는 삑삑삑 소리조차 나지 않았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설마 나타샤가?
‘그, 그럴 리가.’
설마 그럴 리가.
어, 그럴 리가.
그리고 설사 그렇다 해도 저번과는 상황이 달랐다.
지금 유희네 집에는 유희의 부모님이-
“문··· 안 열려요?”
바로 그 때 뒤에서 들여온 목소리에 흠칫한 강진호는 최대한 침착하게 답했다.
“어, 응. 고장난··· 모양이네.”
하지만 괜찮았다.
까짓 전자도어 쯤이야 그냥 부수고 들어갈 수 있었고, 여차하면 벽을 타서 창문으로 들어가는 방법도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바로 직후.
등 뒤에서 다시 들려온 목소리에 강진호는 그 모든 계획들을 폐기처분했다.
“우리 집에··· 오늘 아무도 없는데.”
혼잣말에 가까운, 하지만 어쩐지 모르게 남한테 들으라고 하는 것 같은 작은 중얼거림.
“갑자기 또 여행권이랑 복권 당첨돼서 오늘 아침에 출발했는데.”
강진호의 귀가 쫑긋거렸다.
불가항력이었다.
그리고 이어진 마지막 한 마디.
“오빠, 우리 집에서··· 넷플릭스··· 볼래요?”
강진호는 돌아섰다.
그리고 그 순간 강진호의 머릿속 막사에서는 쿠데타가 일어나고 있었다.
“놔! 놔! 이거 놓으라고! 이거 반란이야! 반란! 쿠데타라고!”
“하지만 대장, 이것이 모든 강진호들의 뜻입니다.”
어느새 막사 안으로 재진입한 욕구불만 강진호의 발언에 대장 강진호는 무어라 소리치려 했지만 이내 그 마음을 버렸다.
막사 안의 강진호들이 적극적으로 욕구불만 강진호에게 호응하고 있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반대도 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냥 잠시만, 잠시만 모른 척 하시면 됩니다.”
욕구불만 강진호의 말에 대장 강진호는 결국 한숨과 함께 어깨를 늘어트리더니 자신의 자리를 욕구불만 강진호에게 내어주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어떻게 하긴. 진행해!”
욕구불만 강진호의 시원한 대답에 막사 안의 강진호들이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현실의 강진호가 대답했다.
“라면도··· 먹을까?”
“네, 라면. 저 라면 엄청 잘 끓여요. 먹으면 막 반할 걸요?”
넷플릭스 뭐고 라면은 또 무엇인가.
여기서 라면 이야기는 대체 왜 나온단 말인가.
합리적인 이성의 화신 강진호였다면 당연히 떠올렸을 의문이었지만 이번에는 그렇지 않았다.
막사 안을 장악한 욕구불만 강진호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지휘봉을 휘둘렀고, 현실의 강진호는 홍유희를 따라 그녀의 집안에 들어섰다.
to be continued
< 엔딩메이커 SS #20 지구로 (13)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