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엔딩메이커 SS #21 지구로 (14) >
엔딩메이커 SS #21 지구로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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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문이 열렸다.
홍유희가 먼저 들어섰고, 강진호가 천천히 그 뒤를 따라 들어섰다.
대문과 현관 사이에 자리한 중간문.
천천히 열고, 다시 안으로 들어가서 신발을 벗고.
일련의 과정을 거치는 와중에 홍유희는 연신 비명을 질러댔다.
물론 마음속에서 말이다.
‘꺄아아아아아아아아!’
뭐야뭐야.
지금 상황 뭐야.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야 대체.
오늘 집에 아무도 없다구?
부모님 안 계신다구?
넷플릭스 보고 가라구?
라면도 잘 끓인다구?
‘아으, 아. 으, 아아악!’
무슨 생각이야 홍유희.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거야.
오빠가 흥분해서.
어, 막 흥분해서.
‘꺄!’
아무 것도 안 했는데 얼굴이 급속도로 빨개졌다.
심장은 미친 듯이 뛰었고, 호흡은 계속 거칠어져만 갔다.
그리고 이 와중에 떠오르는 것.
자꾸만 생각나는 것.
‘으으으.’
어젯밤에 꾼 꿈.
꿈답게 흐릿하지만, 그래도 그 느낌만은 강하게 남은, 야하고 야하고 또 야한 꿈.
그리고 사실 지금 이 순간 당황과 흥분과 충동과 아무튼 온갖 감정과 싸우고 있는 것은 강진호 역시 마찬가지였다.
‘진정하자, 진정하자 강진호.’
침착해라.
항상 침착해라.
언제나 승리조건을 생각해라 지노.
알렉세이의 가르침이었다.
그의 가르침은 언제 어느 때나 강진호 자신에게 큰 힘이 되어주었다.
‘하지만 알렉세이. 그럼 지금 상황에서 승리조건은 무엇이죠?’
순간 떠오른 것이 있었다.
그래서 강진호는 얼굴을 붉혔고, 순간 저도 모르게 다리를 꼬고 말았다.
‘차, 착한 생각! 착한 생각!’
강진호는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아련히 떠오르는 홍유희의 뒷모습을 머릿속에서 지워버리고 다른 것들을 생각하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아니, 다른 것이 떠오르긴 했는데, 그 떠오른 것이 더 심각했다.
‘아니, 왜!’
어젯밤에 꾼 꿈.
오랜만에 술을 진탕 마신 탓인지 평소에는 꾸지도 않던, 살면서 몇 번 꿔보지도 않은 야한 꿈.
그런데 평소와 달랐다.
야한 꿈에는 항상 붉은 머리칼의 여인이 나왔었는데··· 어제는 달랐다.
어제는 달라지고 말았다.
‘으으윽.’
토끼 머리띠.
토끼 꼬리.
바니걸 차림을 하고 등장한 유희.
‘강진호, 불경을 외는 거다. 불경을.’
마음을 가라앉히는데 효과가 있다며 베르트랑 녀석이 가르쳐주었던 불경.
‘색즉시공 공즉시색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
새색.
세섹.
‘미친놈이 뭐라는 거야!’
스스로에게 욕지거리를 퍼부은 강진호는 다시 한 번 스스로를 진정시키기 위해 노력했지만 무리였다.
눈을 감고 있기 때문인지 자꾸 어제 꿈에서 본 바니걸 유희가 아른아른 떠오른 탓이었다.
‘알렉세이, 왜인거죠. 왜 그런 꿈을 꾼 거죠?’
꿈의 재료는 결국 제 머릿속에서 나온 것일 텐데.
제 심층심리에서 그런 것들을 원하고 있다는 말인가요?
[아주 틀린 건 아니지.]
투명화 마법을 쓴 채 이미 홍유희의 집 안 거실에 자리를 잡고 있던 유더가 메시지로 말했고, 마찬가지로 투명화 상태인 코델리아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응응, 하지만 진짜 범인은 따로 있징.]
어젯밤.
홍유희가 옷 사러 갈 생각에- 정확히는 강진호에게 보여줄 옷 사러 갈 생각에 두근두근 쿵쿵하며 잠들고, 강진호가 술에 떡이 된 상태로 침대 위에 쓰러졌을 때.
유더와 코델리아는 나란히 앉아 열띤 토론을 이어갔다.
[아니이, 그러니까 한 방이 필요하다니까? 한 방이?]
[여기서 뭘 더 어떻게 하려고?]
진짜 무슨 최면 마법이라도 걸 거야?
마인드 컨트롤?
유더의 물음에 코델리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건 좀 그렇구. 다른 거. 응? 그냥 바람잡이 할 수 있는 정도로? 등을 살짝 떠민다거나?]
[암시나 강화··· 같은 거 말인가?]
[암시? 강화?]
[어, 무의식중에 홍유희에 대한 생각이나 갈망이 더 커지도록 꿈이나 잠재의식에 홍유희에 관한 할 심어 넣는 거지.]
[나한테는 강진호 심어 넣는 거고?]
[너가 아니라 홍유희.]
[그게 그거잖아.]
[다르거든?]
유더가 정색하며 말하자 코델리아는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알았어. 달라. 아무튼 그럼 꿈에서 암시를 넣자는 거지?]
[그게 좋겠지.]
[흠, 그럼 꿈에서 그냥 진도 확확 나가버릴까? 막 꿈에서··· 흐흐흐?]
코델리아가 음흉한 얼굴로 웃자 유더는 흠흠 헛기침을 토했다.
[너랑 나는 서큐버스까지는 아니니까. 거기다 아바타로 만든 몸이라 마법에도 어느 정도 제한이 있고, 완벽한 꿈을 만드는 것 까진 무리지만··· 강진호와 홍유희가 서로를 원하고 있는 건 사실이니까. 잠재의식을 좀 부추기면 가능은 할 거야.]
[그냥 너랑 내가 또 꿈에 들어가면 되는 거 아냐?]
[어?]
[아니, 내가 강진호 꿈에 들어가고, 네가 홍유희 꿈에 들어가서······ 흐흐흐?]
코델리아가 다시 음흉한 표정을 짓자 유더는 눈을 부릅떴다.
[야, 잠깐. 지금 나보고 홍유희 꼬시라는 거야? 넌 강진호 꼬시고?]
[응응, 내가 홍유희고 네가 강진호잖아?]
[안 돼.]
[뭐가.]
[절대로 안 돼. 절대로. 절.대.로.]
유더 자신이 강진호로 화해 홍유희를 꼬시는 것조차 거부감이 드는 마당이거늘, 코델리아가 홍유희로 화해서 강진호를 꼬신다?
절대로 용납할 수 없었다.
하지만 코델리아는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뭐가 그렇게 안 돼. 어차피 우리잖아?]
[아니, 달라. 갈라졌어. 우리이되 우리가 아니야. 절대로 안 돼.]
[하여간 질투만 많아요.]
[어, 많아. 엄청나게 많아. 그러니까 절대로 안 돼.]
유더가 다시 강하게 말하자 코델리아는 어이가 없다는 듯- 하지만 묘하게 기쁘다는 듯 웃음을 흘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알았어. 그럼 부추기기만 하자. 어련히 알아서 잘 꾸겠지?]
[그래.]
얼른 답한 유더는 서둘러 마법진을 그리기 시작했고, 코델리아는 그런 유더의 모습에 다시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지금.
바니걸 차림의 홍유희와 그렇고 그런 일을 하는 꿈을 꾼 강진호와 정장 차림의 강진호와 그렇고 그런 일을 하는 꿈을 꾼 홍유희는 각자 흐릿한 꿈속의 일들을 떠올리며 안전부절하지 못 하고 있었다.
“오, 오빠?”
“어, 어. 유희야.”
“소, 소파 앉아요.”
“그, 그래.”
거실.
강진호가 커다란 벽걸이 TV를 마주하고 앉자 홍유희는 부엌에서 이것저것 먹을 것들을 챙기기 시작했다.
라면 운운했지만 라면을 끓일 정신은 없었고, 그냥 과자랑 음료수 정도만 챙겨서-
‘수, 술 먹을까?’
갑작스러운 충동에 음료수 대신 아빠가 쟁여놓은 맥주 캔들을 집어든 홍유희는 쟁반 가득 먹을 것을 채운 뒤 어색한 발걸음을 떼었다.
그리고 다시 소파.
쟁반을 내려놓은 홍유희는 짧게 고민했다.
강진호 옆에 앉기는 앉는데 얼마나 가까이 앉아야 하는 걸까.
‘우으으.’
홍유희는 결국 15cm라는 거리를- 거리가 있다면 있고, 없다면 없는 그 거리를 선택해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리모컨.
TV를 켜고, 정말로 넷플릭스를 틀고, 영화가 시작.
하지만 영화 내용이 머리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영화는 재생되고 있었지만, 홍유희의 머릿속에서는 영화가 아닌 다른 안건을 주제로 회의가 이뤄지고 있었다.
“어, 어떡하지? 이제부터 어떡하지?”
공대장 홍유희가 머리를 쥐어뜯으며 주변에 묻자 홍유희 하나가 손을 번쩍하고 들었다.
“오오, 뭔가 의견이 있는 거야?”
공대장 홍유희의 물음에 손을 들고 일어선 홍유희는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섹스.”
“어?”
“파워섹스. 슈퍼파워섹스!”
“끄, 끌어내!”
실수였다.
섹무새 홍유희라니.
게임에서 섹드립 칠 때만 나오는 애가 지금 왜 나왔단 말인가.
화끈 달아오른 얼굴에 손부채질을 한 공대장 홍유희는 다시 주변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당황하고 말았다.
“뭐, 뭐야 그건?”
“바니걸. 오빠의 취향이죠.”
새로이 탄생한 바니걸 홍유희가 그리 말하며 시선을 돌릴 것을 요구했고, 공대장 홍유희는 현실의 홍유희와 함께 소파 옆을 돌아보았다.
‘이, 이게 왜 나와 있지?’
토끼 귀 머리띠. 바니걸의 상징중 하나인 그것.
나타샤 언니가 나중에 쓸 일이 생길 거라며 오늘 사준 거긴 한데, 가방에 있지 않았나? 이게 왜 나와 있지? 그것도 손만 뻗으면 닿을 거리에?
“착용하는 겁니다.”
“합체.”
“변신!”
공대원 홍유희들이 연달아 외치자 공대장 홍유희는 패닉 속에 손을 뻗었고, 현실의 홍유희는 더 이상 빨개지는 게 무리일 것 같은, 그러니까 톡 건드리며 터질 것 같은 얼굴로 손을 뻗어 토끼 귀 머리띠를 머리에 장착했다.
그리고 강진호.
마찬가지로 머릿속에서 열띤 토론을 펼치던 그는 옆에서 난 부스럭 거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고, 저도 모르게 얼어붙고 말았다.
아니, 심장의 격통을 느껴 순간 마비된 것에 가까웠다.
바니걸 홍유희가 눈앞에 있었다.
꿈속에서 보았던 그 바니걸 홍유희가!
수줍음인지 수치심인지 모를 부끄러움으로 빨개진 얼굴.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로 새어나오는 달뜬 호흡 소리.
들릴 리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선명하게 들려오는 심장의 고동소리.
인기척을 느낀 것인지 홍유희도 강진호를 돌아보았다.
붉어진 얼굴과 마찬가지로 거칠어진 호흡. 쿵쾅거리는 심장, 안 그래도 잘생겼는데 콩깍지 때문에 더더욱 미화된 얼굴. 보이지 않지만 상상할 수 있는 탄탄한 복근과 가슴.
홍유희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강진호의 호흡이 점점 더 거칠어졌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이었다.
“하읏- 하-.”
갑자기 들려온 야한 신음소리에 화들짝 놀란 강진호와 홍유희는 정면을 보았고, 다시 얼어붙고 말았다.
화면 속에서 반라의 남녀가 열정적인 입맞춤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뭐, 뭐야. 이런 영화였어?’
키스 씬이 예사롭지 않았다.
그냥 잠깐 나오는 키스 씬 정도가 아니었다.
배드 씬으로 들어가기 위한 인트로가 분명했다.
그리고 강진호는 더 많은 것들을 파악할 수 있었다.
‘영화가 바뀌었다?’
제대로 보지는 않았지만 분명 처음 틀었던 영화와 아예 다른 영화가 분명했다.
어떻게 된 일일까.
언제 영화가 바뀐 것일까.
“하아. 하.”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다시 들린 신음소리와, 연달아 들려오는- 그러니까 츕츕 츠읍 등등 온갖 효과음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리고 하나 더.
목이 말랐다.
갑자기 느껴진 갈증에 강진호와 홍유희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맥주 캔을 땄고, 입 안에 털어 넣기 시작했다.
시원했다.
하지만 갈증은 여전했다.
그리고 뭔가 맥주의 맛? 효능? 그런 것이 강화된 기분이었다.
알딸딸한 알콜 특유의 감각이 순식간에 전신을 지배했다.
그리고 이제는 살색으로 뒤덮인 화면.
계속해서 들려오는 효과음.
머릿속에 떠오르는 어젯밤의 꿈.
이성을 마비시키는 알콜의 힘.
꿀꺽.
바로 그때 침 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강진호의 것인지 홍유희의 것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소리에 둘은 서로를 돌아보고 말았다.
강진호가 홍유희를 보았다.
홍유희가 강진호를 보았다.
일부러 침 삼키는 소리를 냈던 유더와 코델리아가 만족스러운 얼굴로- 그러니까 으흐흐 웃는 얼굴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성능 확실하구만.]
그리고 역사는 이루어졌다.
강진호와 홍유희가 입술을 맞추었다.
강진호의 손이 자연스럽게 홍유희의 허리 위에 안착했고, 조금씩 위를 향해 움직였다.
홍유희의 손 역시 너무나 자연스럽게 강진호를 끌어안았다.
[꺄아!]
손가락을 다 벌린 손으로 얼굴을 가린 코델리아가 기뻐했고, 유더는 흠흠 헛기침을 토했다.
아무리 자신들이라 해도 더 이상 지켜보는 것은 이래저래 무리였다.
더욱이-
‘못 참겠다.’
그랬다.
강진호와 홍유희를 자극시키기 위한 일련의 과정은 유더에게도 미미하게나마 영향을 끼쳤다.
그리고 여기에 한 사람이 더.
입술을 살짝 깨문 코델리아가 유더의 소매를 잡아당겼고, 유더는 그 뜻을 모르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코델리아의 허리를 안더니 그대로 번쩍 안아들었다.
그러자 코델리아는 유더의 목을 끌어안으며 작게 웃었다.
[야간합체?]
유더는 대답 대신 씩 웃더니 그대로 홍유희의 집을 빠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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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새벽.
유더와 코델리아는 강진호와 홍유희를 엿보는 대신 옥상 난간 위에 섰다.
공항이 있는 방향을 바라보며 말했다.
“역시 뭔가 있었네.”
코델리아의 말에 유더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 6년의 세월로 말미암아 전장의 감을 잃어버린 강진호였다.
하지만 유더와 코델리아는 달랐다.
나타샤가 인사하며 떠나갔을 때.
아니, 애당초 그녀가 6년 만에 갑자기 모습을 드러냈을 때.
코델리아는 짐승의 감으로 무언가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유더는 나타샤가 사용한 단어들 사이에 숨겨져 있던 그녀의 심리와 상황을 읽어냈다.
나타샤가 찾아온 이유.
그리고 끝내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떠나간 이유.
“슬슬 이쪽 일도 처리하러 가볼까?”
코델리아의 말에 유더는 빙긋 웃더니 그대로 코델리아의 이마에 입술을 맞추었다.
“고마워.”
“뭐, 마이아 같은 사람이니까?”
나로 따지면 달리아고.
씩하고 멋지게 웃은 코델리아는 그대로 폴짝 뛰어 유더의 등에 업혔고, 유더는 그런 코델리아를 단단히 업은 뒤 검은 질풍과 황금빛 선풍을 일으켰다.
“가자.”
나타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쪽 세상에서도 완벽한 해피엔딩을 위해.
유더와 코델리아는 같은 곳을 보았다.
시원한 미소와 함께 어둠을 박차 올랐다.
to be continued
< 엔딩메이커 SS #21 지구로 (14)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