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엔딩메이커-383화 (383/473)

< 엔딩메이커 SS #22 지구로 (15) >

엔딩메이커 SS #22 지구로 (15)

나타샤 몰로토프는 설원 위에 서 있었다.

아침과 정오 사이.

보통은 오전이라 하는 그때에 그녀는 가만히 서서 새하얀 세계를 바라보았다.

사실 시간이 그리 많지 않았다.

이미 많은 시간을 소모했기에, 그녀에게 남겨진 시간은 고작해야 몇 시간 남짓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녀는 서두르지 않았다.

꼿꼿이 서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설원을 바라보았다.

“알렉세이.”

나직한 부름에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돌아올 수 없음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다시 한 번 불러보았다.

어렸을 때 그러했던 것처럼, 막연한 마음을 담아 속삭이듯 말했다.

“도와줘요, 알렉세이.”

공허한 말이 흩어졌다.

차가운 공기가 폐부 깊이 파고들어 가슴을 차갑게 했다.

알렉세이는 이제 없었다.

그가 자신의 모든 것을 남긴 후계자는 아직 남아 있었지만, 그는 분명 존재하고 있었지만.

벨소리가 울렸다.

가사 없이 이어지는 카츄사의 멜로디에 나타샤는 새삼 숨을 길게 토했다.

화면에는 예상했던 이름이 표시되고 있었다.

아주 잠깐이지만, 아니, 마음 깊은 곳에서 바란 스스로의 소망이 어그러졌다는 사실에 나타샤는 쓴웃음을 지었다.

애당초 그런 바람을 가진 것 자체에 대한 자조였다.

[나타샤. 어떻게 됐어?]

통화 버튼을 누르자마자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최대한 억누르고 있지만 목소리 곳곳에 불안과 초조함이 묻어났다.

그래서 나타샤는 다시 한 번 숨을 골랐다.

최대한 차분한 어조로 말하였다.

“지노는 오지 않아.”

[이런 젠장. 나타샤. 설마 녀석이··· 아니, 그럴 리가 없지.]

베르트랑이 집어삼킨 말이 무엇인지는 쉬이 짐작할 수 있었다.

강진호가 겁을 낸 것은 아니냐.

6년이나 전에 헤어진 동료들을 위해 목숨을 거는 것은 싫다고 거절한 것이 아니냐.

그럴 리가 없었다.

그 사실은 나타샤 자신뿐만 아니라 베르트랑도 잘 알고 있었다.

[왜 그랬어.]

그렇기에 베르트랑의 의문은 나타샤를 향했다.

나타샤는 반사적으로 답했다.

“글쎄, 왜일까.”

[나타샤?]

나타샤는 바로 답하지 않았다.

다시 시선을 설원에 두었고, 하얀 설원 위에 기억들을 풀어놓기 시작했다.

“우리가 알던 지노는 이제 없어.”

[그게 무슨 말이야. 녀석이 어디 다치기라도 한 거야?]

“감이 죽어도 너무 죽었어. 완전히 녹슬어 버렸어. 자기 집에 누가 들어오는 것도 모를 정도로 말이야.”

강진호가 없을 때 들어간 것도 아니었다. 그가 집에 있을 때 시도한 잠입이었다.

“6년이야. 자그마치 6년. 녹이 슬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지.”

[···정말 그렇게 생각해?]

다른 누구도 아닌 지노인데?

알렉세이의 모든 것을 물려받은 남자인데?

나타샤는 숨을 삼켰다.

사실 그녀도 알고 있었다.

지노는 분명 예전과 같지 않았다.

전성기 시절의 그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기량이었다.

하지만 베르트랑의 말처럼 그는 알렉세이의 모든 것을 물려받은 남자였다.

아주 약간의 자극만으로도 그는 곧 과거의 자신으로 돌아갈 수 있을 터였다.

그래서 나타샤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베르트랑의 말에 동의하는 것이었다.

그의 말이 옳다는 것을 인정하는 행동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입에서 나온 것은 전혀 다른 말이었다.

“하지만 현실이 그런 걸.”

즉시전력감은 아니야.

지노는 우리와 함께 싸울 수 없어.

전장에서 나고 자란 아이가 이제야 겨우 평온을 찾았는데, 평범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데, 그걸 부수고 싶지 않아. 지노를 다시 이쪽으로 끌어들이고 싶지 않아.

“지노는 이제 물렁한 민간인이야.”

옆집 아이와 사랑에 빠진.

그것도 아마 그냥 사랑이 아닐 거야.

소설에나 나오는 운명적인 사랑.

그래, 그 정도는 되어야 10년이나 옆에서 공을 들였는데도 헛물만 삼킨 자신이 그나마 덜 비참해지지.

아니, 비참하다는 표현은 좀 너무 그런가.

용기를 내지 못 했던 건 자신도 마찬가지니까.

“아니면 함께한 시간이 너무 길었던지.”

[나타샤?]

“6년은 너무 길다는 이야기야.”

실언을 능청스럽게 넘긴 나타샤는 어깨를 한 번 으쓱이더니 가슴을 펴며 말했다.

“그러니 베르트랑. 지노는 이제 그만 포기해. 우리끼리 하는 거야. 애당초 우리가 저지른 일이니까.”

[하지만 나타샤. 애당초 이번 건은······.]

“그래, 나쁜 건 토레스지. 그 씹어먹을 새끼지. 하지만 애당초 그 녀석과 일을 한 건 우리니까.”

나타샤는 피로를 느꼈다.

더 이상은 토레스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다.

“준비하고 있어. 세 시간 뒤에 합류할게.”

[알았어. 이따 보자고.]

전화가 끊어졌다.

나타샤는 주머니에 휴대폰을 쑤셔 넣은 뒤 다시 설원을 바라보았다.

단순한 이야기였다.

A라는 조직과 함께 일을 했다.

A는 B라는 조직으로부터 무척이나 중요한 물건을 훔쳤다.

그런데 A는 중요한 물건을 손에 넣지 못한 척, 그 물건은 나타샤 자신과 동료들이 빼돌린 것처럼 사건을 조작했다.

물론 B도 병신들은 아니었다.

그들도 A의 수작에 끝까지 놀아나지는 않을 터였다.

하지만 그들은 A보다 나타샤 자신과 동료들을 먼저 집어삼킬 것이 분명했다.

억울함을 호소하는 것은 무의미했다.

B는 나타샤 자신과 동료들을 결코 믿지 않을 테니까.

결국 나타샤와 동료들에게 남은 수단은 하나뿐이었다.

A를 치는 것.

A가 빼돌린 물건을 다시 B에게 되돌려주는 것.

시간이 그리 넉넉하지 않았다.

더욱이 A는 나타샤 자신과 동료들이 최후의 발악으로 무엇을 선택할지 충분히 알 정도로 영악했다.

애당초 나타샤 자신과 동료들을 지난 1년 간 고용한 이유부터가 이번 일에 쓰고 버리기 위함이었으니 말이다.

그 정도의 물건.

그 물건 하나를 위해서라면 몇 년의 시간도, 수많은 이들의 목숨도 아깝지 않은 것.

참으로 엿 같은 이야기였다.

하지만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이기도 했다. 심지어 이쪽에서는 일상다반사라 해도 좋았고 말이다.

그리고 그랬기에 나타샤는 지노가 다시 이쪽에 발을 들이는 것을 원치 않았다.

나타샤는 웃음을 흘렸다.

시간이 부족했다.

애당초 여유가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고집을 부려가며 한국에 갔다.

굳이 지노를 만나보았다.

“미안 베르트랑.”

지노를 설득하러 간다는 말은 거짓말이었어.

어느 정도 기대는 하고 있었지만, 사실 이렇게 될 거란 것을 알고 있었어.

그저, 그래 그저 마지막 욕심이었겠지.

그래도 죽기 전에 지노 얼굴은 한 번 보고 싶다는.

지난 6년이나 참아왔으니까 마지막으로 한 번쯤은 억지를 부려도 되지 않겠냐는 그런 욕심.

“그래도 다행이야.”

지노가 잘 살고 있어서.

정말로 평범한 삶을 살아가고 있어서.

그 지노가 연애라니.

그것도 게임에서 만난 상대랑.

“진짜 운명적인 사랑인가.”

처음 한 게임에서 만난 사람.

6년이나 다투던 악우.

그런데 그 사람이 사실 옆집에 살던 사람이고 지난 6년동안 자신을 남몰래 동경하던 이이다?

우연도 이런 우연이 없었다.

정말 운명이란 것이 존재하는 게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 지경이었다.

“지노.”

다시 말한 나타샤는 숨을 깊이 삼켰다.

억지로 우울해지는 기분을 떨쳐낸 뒤 가슴을 활짝 펼쳤다.

그런 나타샤의 눈앞에 바람과 함께 편지 한 장이 날아들었다.

“어?”

반사적으로 편지를 낚아챈 나타샤는 멍한 목소리를 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갑자기 날아든 편지의 겉봉에 나타샤 자신의 이름이 쓰여 있었기 때문이다.

[나타샤 몰로토프에게]

동글동글하고 예쁜 글씨에 다시 한 번 눈을 깜박인 나타샤는 서둘러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설원 한복판에 서 있는 것은 나타샤 자신 뿐이었다.

화살에 매단 서신이라면 모를까, 그냥 봉투에 든 종이를 여기까지 날려보내는 기예 같은 것은 들어본 적도 없었다.

나타샤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하늘을 보았지만 구름 하나 없는 하늘에는 드론 역시 존재하지 않았다.

어떻게 된 일일까.

나타샤는 마른침을 삼킨 뒤 마음을 정했다. 몸에 항상 지니고 다니는 나이프를 꺼내 편지의 겉봉을 조심스럽게 잘라냈다.

가루는 날리지 않았다.

봉투 안에는 정말로 서신 한 장만 들어있었다.

나타샤는 가죽 장갑을 낀 손으로 서신을 펼쳤다.

[안녕, 나타샤.]

[일단 감사부터 할게. 유더를 잘 키워줘서 고마워.]

“유더?”

나타샤는 미간을 좁혔다.

기억에 없는 이름이었기 때문이다.

거기다 키웠다는 표현이 이상했다.

짧은 한 줄의 문장이었지만 어쩐지 모르게 선을 긋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마치 ‘넌 유더를 키워준 사람이야. 누나나 엄마 같은 가족.’이라고 말이다.

[곤란한 일은 우리가 잘 처리했어. 그러니까 이제 걱정하지 마. 그리고 너무 심한 오지랖일지도 모르지만 이번 기회에 은퇴하는 것도 생각해 봐. 유더 말로는 그냥 은퇴하고 싶다고 할 수 있는 게 아니라고는 하는데, 그래도 가능하면 노력해봐. 은퇴를 위해 필요한 것들도 대강이나마 준비해봤으니까. 베르트랑이라는 친구한테 맡겨둘게.]

나타샤는 다시 고개를 들어 주변을 보았다.

하지만 여전히 주변에는 작은 인기척 하나 느껴지지 않았다.

[한국에서 사는 건 어떨까. 솔직히 나타샤가 옆에서 산다는 사실 자체가 좀 불안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이미 도장 쾅쾅 찍었으니까 괜찮을 것 같거든. 다른 건 몰라도 우리 유더가 그런 거 하나는 확실하니까. 응, 맞아. 확실하지.]

읽으면 읽을수록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분명 영문을 알 수 없는 이야기였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알 것만 같다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유히?”

저도 모르게 옆집 소녀- 지노와 사랑에 빠진 귀여운 아이가 머릿속에 떠올랐지만 이내 고개를 가로저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정말 평범한 소녀였다.

이런 식의 접근이 가능할리 없었다.

[유더가 사랑한다고 전해달래. 노파심에 하는 말이지만 남녀 간의 사랑이 아니라 가족 간의 사랑이야. 응. 질투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사실이니까. 응응. 그렇고말고.]

[아무튼 나타샤. 다시 한 번 고마워. 앞으로 힘든 일이 있으면 알렉세이를 외치는 대신 유더와 코델리아를 불러봐. 유델리아도 괜찮고.]

[음, 그래. 이 정도로 할래. 잘 있어 나타샤. 나중에 기회가 되면 또 만나자.]

“코델리아··· 어거스트 체이스?”

마지막 줄에 쓰여 있는 이름을 소리 내어 읽은 나타샤는 귀신에 홀린 표정이 되어 다시 편지를 처음부터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치 때를 맞추듯 나타샤가 일회독을 마쳤을 때 휴대폰에서 다시 카츄사가 흘러나왔다.

[나, 나타샤?!]

“베르트랑?”

당황한 목소리에 이쪽도 반사적으로 목소리가 높아졌다.

하지만 베르트랑은 진정하기는커녕 더 다급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피, 핑크폭탄이 누군지 알아?]

“뭐?”

뭔 폭탄?

[핑크폭탄!]

“저기, 베르트랑. 지금······.”

[마약한 거 아냐! 내 머릿속은 클린하다고!]

“그럼 대체 어떻게 된 일인데. 내가 알아듣게 좀 설명을 해봐.”

[그러니까······.]

베르트랑은 침을 삼켜가며 정보를 쏟아냈고, 나타샤는 멍청한 얼굴로 눈을 깜박였다.

A가 하루아침에 궤멸했다.

아니, 하루아침도 아니고 고작 몇 시간 만에 본진이 제대로 털리고 말았다.

A의 수장은 폭발에 휩쓸려 죽었고, A가 빼돌렸던 B의 물건은 사라졌다.

그리고 베르트랑의 은신처에 막대한 양의 금괴와 서신 한 장이 도착했다.

[피, 핑크폭탄과 블랙망토라고 쓰여 있었어.]

참으로 끔찍하기 짝이 없는 닉네임에 미간을 좁힌 나타샤는 손에 들고 있던 편지로 시선을 돌렸다.

유더와 코델리아.

코델리아 어거스트 체이스.

[나타샤?]

“아···마도.”

[아마도?]

“우리 편일 거야.”

[나타샤? 뭔가 아는 게 있는 거야?]

“미안, 조금 이따 내가 다시 걸게.”

[나타······.]

베르트랑의 부름을 애써 무시하며 나타샤는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서신에 시선을 돌렸다.

“코델리아 어거스트 체이스.”

그리고 유더 바이엘.

나타샤는 서신을 접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 도저히 영문을 알 수 없었지만, 이상하게 안심이 되었다.

또 다른 함정은 아닐까하는 불안함도 들지 않았다.

“코델리아.”

다시 소리 내어 말해본 나타샤는 저도 모르게 빙긋 웃었다.

환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

“다 잘된 거 같지?”

“다 잘된 거 같아.”

나타샤가 정말로 한국에 온 것 빼고는.

그것도 강진호와 같은 아파트 같은 동으로.

“도장 쾅쾅 찍었으니 괜찮다며.”

“그래두.”

혹시의 혹시였으니까.

코델리아의 소심한 중얼거림에 유더는 미소지었다.

이런 작은 질투가 기꺼운 것은 유더 자신도 콩깍지가 단단히 쓰였기 때문이 아닐까.

“아무튼 이제 돌아갈까?”

“응, 돌아가자.”

부모님 앞에 나서지 못 한 것은 아쉬웠다.

그저 바라만 보고 떠나야 한다는 사실이 안타까웠다.

하지만 코델리아는 숨을 깊이 삼킨 뒤 시원한 미소를 지었다.

지구에는 홍유희의 삶이 있었고, 플레이아데스는 코델리아의 삶이 있었다.

“그래도 만족이야. 응, 만족. 여기서도 결국 이어졌으니까.”

강진호는 홍유희랑 사랑에 빠져야지 암.

둘이 아주 백년해로 해야하고 말고.

코델리아가 흥흥 거리며 좋아하자 다시 웃은 유더는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플레이아데스로 통하는 공간의 문 앞에 서서 과거의 일을 떠올렸다.

아우리엘을 쓰러트린 직후.

아스모데우스가 연 지옥의 문을 닫기 위해 기약 없는 여정에 나섰을 때.

“하지만 그때도 둘이었으니까. 무섭지 않았어.”

마치 유더의 머릿속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코델리아가 말했고, 유더는 고개를 끄덕였다.

전생에서도, 현생에서도, 그리고 앞으로 이어질 모든 미래에서도 유더 자신과 코델리아는 둘이서 하나일 테니까.

“가자.”

“응, 가자.”

서로를 보며 미소지은 두 사람은 사이좋게 발걸음을 내디뎠다.

언제나 그러했던 것처럼 둘이 함께 나아갔다.

fin

미간을 좁히며 모니터 화면을 바라보던 김혜은- 남만고양이는 타타탁 키보드를 두드렸다.

남만고양이 : [아바타 그거 뭐야?]

노란폭풍 : [바니걸 세트야. 귀엽지?]

하얀 토끼 귀 머리띠와 앙증맞은 꼬리를 장착한 검은 드레스 차림의 코델리아 체이스.

홍유희의 말처럼 귀엽기는 했다.

하지만 김혜은은 다시 한 번 미간을 좁혔다. 어째 아복이- 그러니까 강진호의 캐릭터인 유더 바이엘이 안절부절 못 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에라이, 파헤치지 말자.”

파헤쳐봐야 염장질에 당할 뿐이겠지.

끌끌끌 혀를 찬 김혜은은 미리 따놓은 맥주 캔에 손을 뻗었다.

정말 이상한 일이었지만, 오늘따라 짜게 느껴지는 맥주였다.

fin

< 엔딩메이커 SS #22 지구로 (15) > 끝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