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엔딩메이커 SS #26 얼음과 바람과 (3) >
엔딩메이커 SS #26 얼음과 바람과 (3)
“알렉스.”
“오, 아더. 유나, 이쪽은 제 가장 친한 친구인 아더 체이스입니다.”
체이스 백작이 성큼성큼 다가오자 바이엘 백작은 반사적으로 유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러자 유나는 낯을 가리는지, 아니면 무섭기 짝이 없는 얼굴로 다가오는 체이스 백작 때문에 겁이라도 먹은 것인지 움찔하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 안녕하세요. 유나에요.”
꾸벅 고개를 숙여 보이는 그녀의 모습은 마치 작은 초식동물을 연상케 했다.
때문에 저도 모르게 기세가 수그러든 체이스 백작이었지만 그래도 중요한 것을 잊지 않았다.
딱딱한 어조로나마 자신을 소개해 예를 갖춘 뒤 바이엘 백작의 손목을 거칠게 낚아채듯 잡았다.
“아더?”
“알렉스를 잠시만 빌리겠습니다.”
딱딱한 얼굴로 유나에게 선포하듯 말한 체이스 백작은 그대로 바이엘 백작을 끌고 열 걸음 이상 이동했고, 졸지에 혼자가 된 유나는 겁먹은 얼굴로 재차 몸을 움츠렸다.
“알렉스.”
“아더, 이게 무슨 짓이지?”
바이엘 백작이 화가 난 얼굴로 말하자 체이스 백작 역시 울컥 화가 치밀었지만 그는 괜히 마법사가 아니었다.
이성의 힘으로 감정을 억누른 뒤 낮고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알렉스, 그녀는 인간이- 아니, 사람이 아니다.”
단호한 어조에 바이엘 백작이 움찔했다.
하지만 잠깐 뿐이었다.
“그래서?”
“다시 말하지만 인간이 아니라는 말을 하는 게 아니다. 그녀는 엘프도 드워프도 아니다.”
“알고 있어.”
“알고 있다고? 진짜로 알고서 하는 말인가? 그녀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하는 소리냐는 말이다.”
체이스 백작의 얼굴이 무척이나 흉흉해졌다.
바이엘 백작도 장신이었지만 체이스 백작은 그런 바이엘 백작보다도 더 컸다.
더욱이 단순히 큰 것만 아니라 여간한 기사 뺨칠 정도로 단련된 육체를 가진 체이스 백작이었다.
그런 그가 마력까지 끌어올리며 노한 목소리를 내니 그 위압감이 실로 엄청났다.
하지만 바이엘 백작 역시 만만찮은 기량의 소유자였다.
체이스 백작의 푸른 눈을 똑바로 마주하며 말했다.
“알고 있다.”
인간도 아니고 엘프도 아니다.
일반적으로 사람이 부르는 부류에 속하지 않는 존재이다.
바이엘 백작의 두 눈에는 미혹이 없었다. 스스로에 대한 혼란 역시 없었다.
칼과 같은 단호함.
그 단호함에 체이스 백작은 오히려 냉정을 되찾았다. 마주 기세를 더 끌어올리는 대신 조금은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했다.
“알렉스. 그녀는 마물일지도 모른다.”
“마물이 아니다. 그건 날 검사해본 네가 제일 잘 알고 있겠지.”
“널 속이기 위해 일부러 해를 끼치지 않은 걸지도 모른다.”
“무엇 때문에. 옛날이야기처럼 날 잡아먹기 위해서라면 여기까지 올 필요도 없었을 거다. 기회는 많고 많았으니.”
“하지만 알렉스······.”
“아더, 너도 알고 있겠지. 그녀가 마물일 가능성은 무척이나 낮다는 것을.”
바이엘 백작이 체이스 백작의 말을 자르고 말했다.
그리고 그 말에 체이스 백작은 무어라 반박할 수 없는 자신을 느꼈다.
바이엘 백작의 말대로였다.
인간도 아닌, 인외의 존재가 제국을 유랑 중이던 바이엘 백작을 속이기 위해 설산에 잠입해 있다가 우연을 가장해 만났고, 근 한 달 가까이 만남을 이어간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음모론이었다.
설사 저런 일이 가능하다 할지라도 냉정히 말해 바이엘 백작은 물론이고 바이엘 백작가에는 그 정도의 가치가 없었다.
바이엘 백작가는 더 이상 북부의 변경백이 아니었다.
그저 북부에 자리한 여러 가문들 가운데 하나에 불과했다.
제국도 아닌 왕국 북부의.
“이제 머리가 돌아가지?”
바이엘 백작이 씩 웃으며 조금은 장난스럽게 묻자 체이스 백작은 다시 얼굴을 굳혔다. 저도 모르게 붉어지려는 얼굴을 억제하기 위해 흥하고 코웃음을 친 뒤 아무말이나 일단 입에 담고 보았다.
“아무튼 그녀가 인외의 존재인 것만은 분명하다.”
“그래, 어쩌면 천사일지도 모르지.”
바이엘 백작의 태평한 대답에 체이스 백작은 다시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바이엘 백작은 여전히 뻔뻔한 얼굴로 계속해서 말했다.
“하지만 아더. 그녀를 봐. 정말 천사 같지 않아?”
홀려도 단단히 홀렸구나.
속으로 탄식하며 체이스 백작은 유나를 돌아보았고, 두려움과 호기심이 반씩 섞인 눈으로 조심스럽게 주변을 둘러보는 유나의 모습에 재차 미간을 좁혔다.
“오, 너 방금 심쿵했지? 반하지 마라.”
“미친놈.”
허를 찔린 탓인지 반사적으로 욕지거리를 토한 체이스 백작은 결국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바이엘 백작의 말대로였다.
그녀는 분명 인외의 존재였지만 해로운 존재가 아니었다.
“나도 더는 모르겠다.”
젊은 날의 체이스 백작은 이러나저러나 아직 십대 청소년에 불과했다.
더 이상은 귀찮다는 듯, 던지듯이 말하자 바이엘 백작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래, 인정한다 이거구나. 잘 생각했어.”
“다시 봐도 미친놈.”
“그래그래. 아, 그런데 아더. 너한테 하나 묻고 싶은 게 있다.”
바이엘 백작이 돌연 진지한 표정을 짓자 인상을 찌푸리며 한숨을 쉬던 체이스 백작은 바로 자세를 바로 했다.
“뭐지?”
“그러니까······ 후훗, 우리 유나 씨 예쁘지? 어?”
기껏 진지한 얼굴이 된다했더니 꺼낸 말이 그거냐.
“미친놈.”
체이스 백작은 다시 욕지거리를 뱉었지만 얼굴에는 작게나마 미소가 어려 있었다.
그랬기에 바이엘 백작은 만족했고, 이번에는 반대로 체이스 백작의 손목을 낚아채듯 잡았다.
“가자, 유나 씨가 기다린다. 널 무척이나 만나고 싶어 했다고.”
“어째서지?”
“그야 내가 네 이야기를 많이 해서? 내 제일 친한 친구가 너잖아.”
“흥.”
부끄러운 소리를 뻔뻔한 얼굴로 하는 건 여전하구나-라는 뜻을 담은 코웃음을 치자 바이엘 백작은 유쾌하게 웃었다. 체이스 백작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기 때문이다.
“가자고.”
어느새 이쪽을 빤히 바라보기 시작한 유나를 향해 바이엘 백작은 손을 흔들며 전진했고, 자포자기한 체이스 백작은 질질질 그런 바이엘 백작의 손에 이끌려 유나에게 다가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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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제는 재미있었다.
사람들 모아놓고 온천 발견에 얽힌 어설픈 연극 하나 상영한 뒤에 그냥 노래하고 춤추는 게 전부인, 그야말로 시골 축제다운 시시한 축제였지만 재미있었다.
애당초 축제는 그 내용보다 누구와 함께 즐기는 지가 중요했으니 말이다.
“아더, 내 친우여. 연주 좀 해다오.”
술기운이 오른 탓에 얼굴이 발개진 바이엘 백작이 재촉하자 옆에 있던 유나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연주 하실 수 있어요?”
그녀 역시 술기운 탓인이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리고 얼굴이 빨갛기는 마찬가지인 체이스 백작이 앞머리를 쓸어 올리더니 훗 하고 웃으며 답했다.
“기타를 조금.”
“조금 수준이 아니라 엄청 잘해. 여자 꼬시겠다고 연습 엄청 했다니까?”
“흥, 그런 적 없다.”
하지만 체이스 백작이 이런 반응을 보일 때 으레 그러하듯이 사실이었다.
체이스 백작에게도 순수했던 어린 시절이 있었으니 말이다.
물론 지금의 체이스 백작 역시 아직 스무살도 채 되지 않은 어린 나이이기는 했지만 말이다.
“자, 음유시인한테 돈 주고 빌린 거야. 한 곡조 뽑아봐.”
“흥, 사양하지 않겠다.”
거침 없이 기타를 받아든 체이스 백작은 잠깐 조율하듯 기타 현을 몇 번 건드려 보더니 이내 본격적인 연주를 시작했다.
체이스 백작의 평소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경쾌하고 신나는 곡이었다.
자연 사람들의 시선이 모였고, 여기에 바이엘 백작의 부추김이 더해지자 체이스 백작은 아예 노래까지 하기 시작했다.
신나는 곡조에 어울리는 발랄한 사랑 노래였다.
“푸흐흣.”
아더 체이스에게 신나는 사랑 노래라니.
바이엘 백작은 유나와 함께 나란히 웃음을 터트리더니 그대로 손을 잡고 춤추기 시작했다.
빙글 빙글 돌 뿐인 기교 없는 춤이었지만 웃고 떠드는 자리에서는 그것으로 충분했다.
체이스 백작이 기타 치며 노래하고 바이엘 백작이 바보처럼 웃으며 춤을 추는 밤.
그리고 축제가 끝나고 자정이 되었을 때.
유나는 설산으로 돌아가지 않았고, 체이스 백작은 눈치 빠른 마법사답게 숙소에 남는 대신 심야의 산책을 나섰다.
새벽이 지나 아침이 밝아올 때까지.
바이엘 백작은 유나와 함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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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계속해서 지났다.
축제로부터 닷새가 지나자 체이스 백작은 혼자서라도 귀국해야 겠다는 생각을 품었다.
이미 정해둔 일정을 며칠이나 초과한 상황이었다.
“돌아가려고?”
“돌아가야지. 그리고 너도 언젠가는 돌아가야만 한다.”
체이스 백작의 차분한 대답에 바이엘 백작은 미간을 좁혔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체이스 백작의 말대로였기 때문이다.
알렉스 바이엘 자신은 바이엘 백작가의 하나뿐인 후계자였으니 왕국으로 돌아가 가문을 이어야만 했다.
“이제 더 이상 불장난으로 치부하지 않으마. 그녀와 계속 함께하고 싶다면 정식으로 청혼을 해라. 이곳 설산을 떠나 바이엘 백작가로 갈 수 있는지도 물어보고.”
유나는 사람이 아니었다.
아직도 그 정체를 명확히 알 수는 없지만, 어쩌면 설산에 묶인 존재일지도 몰랐다.
“알겠다.”
“그래.”
“아더.”
“왜 그러지?”
“오늘 떠날 거면··· 같이 설산에 가지 않겠어? 유나와 작별 인사는 해야지.”
“···알겠다.”
유나와 만나는 장소는 언제나 설산의 초입이었다. 시간을 그리 잡아먹지는 않을 터였다.
바이엘 백작과 체이스 백작은 말을 타고 천천히 설산의 초입으로 향했다.
하지만 거의 도착했을 때, 두 사람은 말의 박차를 가할 수밖에 없었다. 항상 기다리던 곳에서 얌전히 서 있던 유나가 오늘은 이쪽을 향해 달려왔기 때문이다.
“유나?”
서둘러 말에서 뛰어내린 바이엘 백작은 일단 유나를 품에 안고 보았다. 그녀의 얼굴이 너무나 불안해 보였기 때문이다.
“유나, 괜찮아요? 유나?”
바이엘 백작이 다시 묻자 유나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입술을 깨물었다. 그대로 미간을 좁힌 채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체이스 백작과 등 뒤를- 거대한 설산을 돌아보더니 숨을 깊이 삼켰다.
몇 번이나 심호흡을 한 끝에 겨우 바이엘 백작을 마주하며 말했다.
“알렉스.”
“예, 유나.”
“절 납치해 주세요. 아, 아니. 저랑 같이 떠나 주세요.”
너무나 당혹스러운 단어들의 나열이었지만 바이엘 백작은 되묻는 대신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네?”
너무 빠른, 그리고 단호한 대답이었던 터라 말을 꺼낸 유나가 오히려 당황하고 말았다.
하지만 바이엘 백작은 여전했다. 그는 유나를 다시 한 번 꼭 끌어안더니 순식간에 말 위에 올라탔다.
“유나, 바로 출발해도 될까요?”
“네? 아, 네!”
유나가 당혹과 두려움, 무어라 표현하기 힘든 기쁨이 섞인 얼굴로 답하자 바이엘 백작은 바로 다시 체이스 백작을 돌아보았다.
“아더, 부탁한다.”
“가라.”
체이스 백작은 가타부타 사정을 묻지 않고 짧게 답한 뒤 돌아섰다.
유나를 품에 안은 바이엘 백작이 서둘러 말을 달리는 모습을 바라보는 대신 그대로 설산을 노려보며 아주 작게 말했다.
“뒷정리는 언제나 내 몫이군.”
언제나와 같은 새하얀 설산.
하지만 달라진 것이 분명 존재했다.
체이스 백작은 마력을 끌어올리며 정면을 주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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