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엘 백작의 품 안에서 유나는 여러 가지 이야기들을 두서없이 쏟아내었다.
자신은 본래 이 설산 출신이 아니라는 것.
훨씬 더 서쪽에서 태어났다는 것.
닷새 전 축제 때 설산 외의 곳에서 하룻밤을 보낸 것을 먼 곳의 오라버니가 눈치 챘다는 것.
자신을 다시 서쪽 저 먼 곳으로 데려가려 한다는 것.
유나의 이야기를 경청하며 바이엘 백작은 생각했다.
체이스 백작의 생각대로였다.
유나는 인외의 존재가 분명했다.
무엇이라고 정의 내리기는 어려웠지만, 마물도 천사도 아니었다. 다른 종류의 존재였다.
하지만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유나가 바이엘 백작 자신과 함께 하고 싶어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바이엘 백작 역시 마찬가지 마음이었다.
‘아더.’
바이엘 백작은 정면을 주시했지만 설산에 남은, 등 뒤에 자리한 체이스 백작을 생각했다.
유나가 자신의 품에 안겼을 때 멀리서 이쪽을 노려보던 시선.
설산에서 유나를 만날 때마다 어렴풋이 느껴지던 시선의 주인.
이번에도 있었다.
더욱이 이번에는 노골적인 적의까지 품고 있었다.
‘아더.’
바이엘 백작은 다시 한 번 체이스 백작의 이름을 속으로 읊조렸다.
친구의 얼굴을 떠올리며 다시 한 번 박차를 가했다.
&
바이엘 백작과 체이스 백작이 다시 만난 것은 다음날 저녁이었다.
체이스 백작은 설산에서 멀어진 탓인지, 아니면 긴장이 풀린 탓인지 일찌감치 깊은 잠에 빠진 유나를 바라보며 작게 말했다.
“하얗고 거대한 여우였다.”
유나와 바이엘 백작이 떠난 뒤 모습을 드러낸 존재.
어깨 높이만 5미터는 족히 될 것 같은 거대한 여우였다.
저렇게 거대한 존재가 어떻게 소리 하나 내지 않고 움직일 수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어쩌면 그것 또한 신비일지 몰랐다.
“싸웠나?”
“아니, 이쪽을 한참이나 노려보더니 ‘아가씨를 부탁한다’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설산의 수호신이라 해도 믿을 것 같은 거대하고 신비한 여우.
그런 여우에게 아가씨라 불린 유나.
훨씬 더 서쪽에서 태어났다는 그녀의 이야기.
그녀에게 돌아오라 말한 오라비의 존재.
무엇 하나 명확하지 않았지만 체이스 백작은 더 이상 파고들지 않았다.
유나를 품에 안은 채 침묵하고 있는 바이엘 백작의 얼굴을 본 순간 더 이상 그 어떠한 말도 의미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 달 뒤.
바이엘 백작과 체이스 백작은 세일룬 왕국의 북부.
고향인 바일룬에 돌아왔다.
&
바이엘 백작은 유나와 결혼식을 올렸다.
당대의 바이엘 백작은- 그러니까 알렉스 바이엘의 아버지는 두 사람의 관계를 처음에는 부정하고 결혼 또한 반대했지만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는 옛말을 따르듯 결국에는 뜻을 꺾고 말았다.
바이엘 백작과 유나 사이에 첫 아이가 태어났다.
이름은 게일.
바이엘 백작이 더 이상 바람은 자유 운운하지 않게 되었을 때 태어난 그 아이는 유나를 닮은 푸른 머리칼과 상냥한 성품을 타고났다.
다시 시간이 지났다.
10년.
결코 짧지 않은 시간.
하지만 그 시간의 흐름 속에서 유리되기라도 한듯 유나는 여전히 십대 후반의 소녀처럼 발랄하고 사랑스러웠다.
하지만 두 번째 아이가 태어났을 때.
바이엘 백작의 검은 머리칼과 유나의 신비한 녹색 눈동자를 이어받은 유더가 첫울음을 터트린 순간.
영원할 것만 같던 바이엘 백작가의 평온은 산산이 조각나고 말았다.
&
유더는 구음절맥을 타고났다.
사내아이임에도 불구하고 극한의 한기를 타고난 탓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게일을 낳았을 때만 해도 건강했던 유나의 몸이 급격히 망가지기 시작했다.
출산의 후유증이 아니었다.
유나의 몸은 그 전부터 이미 조금씩 망가지고 있었다.
부인이 곧 출산할 예정이었기에 본가에 머물고 있던 체이스 백작이 급히 유나를 진찰하였고, 그는 한 가지 결론을 내렸다.
“아더, 그녀는 돌아가야 한다.”
유더의 극한지기는 유나에게서 기인한 것이었다.
그녀는 이미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듯이 인외의 존재였고, 그녀에게는 설산에 버금가는 한기가 필요했다.
체이스 백작의 말에 바이엘 백작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그는 결심했다.
만류하는 사용인들을 뿌리치고 갓 태어난 유더와 유나를 품에 안은 뒤 북부를 향해 말을 달렸다.
체이스 백작이 그런 바이엘 백작의 뒤를 따랐다.
부인의 출산이 임박한 터라 잠시 망설인 그였지만 체이스 백작 부인이 오히려 그의 등을 밀어주었다.
“가요.”
가지 않으면 평생동안 괴로워할 게 분명하니까.
“그렇다고 늦지도 말고요.”
부인의 장난스러운, 그리고 고마운 엄포에 체이스 백작은 미소 지은 뒤 북부를 향해 말을 달렸다.
국경을 넘어 설산으로.
유나를 살리기 위해.
[아가씨는 받아들이겠다. 하지만 그 아이는 안 된다. 그 아이는 운명의 두 사람 가운데 하나이다.]
마치 올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 설산 초입에 모습을 드러낸 거대한 여우는 그렇게 말한 뒤 유나만을 데리고 사라졌다.
바이엘 백작에게는 애석하게도 이미 혼수상태에 빠져 있던 유나인 터라 제대로 된 이별의 말조차 나눌 수 없었다.
“돌아가세.”
왕국과 제국 사이의 전쟁이 임박한 시기였다.
바이엘 백작은 설산을 노려보았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고, 유더를 품에 안은 채 말 위에 올랐다.
그리고 1년 뒤.
왕국과 제국 사이의 전쟁 때문에 바이엘 백작은 설산에 돌아오지 못 했다.
3년 뒤 여름.
바이엘 백작은 설산을 찾았지만 그때는 이미 늦어 있었다.
아니, 어쩌면 3년 전 설산을 떠났을 때 모든 것이 결정되었을지도 몰랐다.
설산에는 더 이상 인외의 존재가 남아있지 않았다.
유나는 물론이고 여우마저 사라져 있었다.
19년이 지났다.
근 20년.
실로 오랜만에 설산의 초입에 도달한 바이엘 백작은 숨을 깊이 삼킨 뒤 다시 한 번 발걸음을 내디뎠다.
유나의 정체.
이제는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재앙전쟁 와중에 야만의 땅- 아니, 야생의 땅에서 온 이들을 마주하였을 때.
야생신이라 불리는 거친눈사태와 인사를 나누었을 때.
바이엘 백작은 알 수 있었다.
유나는 야생신이었다.
서쪽이라 말한 곳은 서쪽 국경 너머에 존재하는 야생의 땅이었다.
바이엘 백작은 거친눈사태에게 유나에 대해 물었지만 그는 유나를 알지 못 했다.
애당초 유나는 그저 가명일뿐 그녀의 진정한 이름도 아니었다.
어찌된 것일까.
혹여 악마의 눈의 야생신 사냥에 희생당한 것은 아닐까.
바이엘 백작은 애써 감정을 억눌렀다.
재앙 전쟁이 끝나고, 유더와 코델리아가 지옥으로의 여정을 떠났을 때.
그는 야생의 땅을 여행했다.
유나의 흔적을 찾기 위하여 노력했다.
하지만 반 년의 여정 가운데 그가 찾아낼 수 있었던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유나.”
바이엘 백작은 설산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녀의 이름을 불러보았다.
당연히 돌아오지 않는 대답에 절망하였지만, 그래도 다시 한 번 그 이름을 입에 담았다.
“유나.”
“알렉스.”
바람 따라 들려온 대답에 바이엘 백작은 눈을 부릅떴다. 미친듯이 뛰기 시작한 심장을 어찌하지도 못 한 채 뒤돌아섰다.
그리고 마주할 수 있었다.
20년의 세월이 지났지만 변함없는 그녀를.
언제나 그러했던 것처럼 수줍은 미소를 머금은 채 이쪽을 바라보는 여인을.
꿈이 아니었다.
환상도 아니었다.
바이엘 백작은 몸을 날렸다. 본능적으로 유나를 꼭 끌어안았고, 유나 역시 그런 바이엘 백작을 끌어안았다. 자연스럽게 서로의 입술을 탐하였다.
그리고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가슴을 탁탁 두드리는 유나의 손바닥에 퍼뜩 정신을 차린 바이엘 백작이 입술을 떼었고, 유나는 겨우 숨을 쉰다는 듯 콜록 거리다가 다시 바이엘 백작의 단단한 가슴을 두드렸다.
예전부터 손이 매운 그녀였다.
이번에도 몹시 아팠다.
그랬기에 바이엘 백작은 바보 같은 웃음을 흘렸다.
“수염.”
유나가 자기 입 근처를 매만지며 그리 말하자 바이엘 백작은 빨개진 얼굴로 어설픈 웃음을 흘렸다.
유나가 사라진 이후 기르기 시작한 수염이었으니까.
“당장 자르겠소.”
바이엘 백작답지 않은, 하지만 동시에 너무나 바이엘 백작다운 성급한 대답에 유나는 다시 까르르 웃었다.
그러지 않아도 된다는 듯 다시 한 번 바이엘 백작과 입술을 맞추었다.
어떻게 된 것일까.
그녀는 어떻게 악마의 눈의 공세를 피한 것일까.
왜 이제야 모습을 드러낸 것일까.
묻고 싶은 것들이 너무나 많았고, 그랬기에 뭐부터 입에 담아야 할지 알 수 없을 지경이었다.
유나는 그런 바이엘 백작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랬기에 바이엘 백작의 멋진 수염을 쓰다듬으며 하나하나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지난 20년 동안 깊은 잠에 빠져 있었던 이야기.
깨고 보니 잠들어 있던 성역이 완전히 엉망진창이 되어 있었다는 이야기.
“악마 추종자들의 소행이었소?”
“아뇨, 나중에 들었는데 야생의 땅의 수호자들이 야생의 땅을 지키기 위해 한 일 와중에 같이 터졌다나 봐요. 그래도 다행이에요, 그거 덕분에 좀 더 일찍 일어났거든요.”
유나의 해맑은 대답에 바이엘 백작은 어허허 어설픈 웃음을 흘렸다.
아내의 고향을 파괴한 유더와 코델리아에게 감사해야 하는 걸까 아니면 원망해야 하는 것일까.
“건강해져서 집에 돌아가려 했는데, 황금의 용왕님께서 그러셨어요. 설산으로 가라고.”
예언일까.
아니면 운명의 흐름을 읽어낸 것일까.
어느 쪽이든 좋았다.
바이엘 백작은 다시 한 번 유나를 꼭 끌어안았고, 20년 전 그때와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아니, 처음 만났던 30년 전과 똑같은 그녀의 모습에 기쁨과 난처함을 동시에 느꼈다.
바이엘 백작 자신만 너무 나이를 먹은 것 같았기 때문이다.
십대 후반처럼 보이는 유나와 나이를 잔뜩 먹어 이제 쉰을 바라보는 자신.
물론 겉모습만 보면 삼십 대 중반 정도로 밖에 보이지 않는 바이엘 백작이었지만 그것도 너무 큰 차이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유나는 웃었다.
그녀는 알 수 있었으니까.
눈빛만으로 상대의 마음을 아는 것은 유더만의 장기가 아니었으니까.
“여전히 잘생겼어요.”
유나의 말에 바이엘 백작은 얼굴을 붉혔다.
아무리 뻔뻔한 그라도 그럴 수밖에 없었다.
기쁨과 부끄러움, 유나에 대한 참을 수 없는 사랑.
결국 바이엘 백작은 오래 전에 봉인해버렸던 젊은 날의 자신을 소환하였다.
바람의 자유를 논하던 그날의 치기 어린 소년이 되어 사랑하는 이에게 속삭이듯 말하였다.
“레이디 유나, 당신에게 입맞춤할 영광을 주시겠습니까?”
유나는 정말로 크게 웃었다.
꺄르르 웃음을 터트린 그녀는 기꺼이 그리하겠다며 일부러 두 손을 함께 내밀었고, 바이엘 백작은 짓궂게 웃더니 그 손을 잡지 않았다. 대신 그녀의 입술에 입맞춤을 하였다.
사실 처음 만난 그때도 손등이 아닌 입술에 입맞춤을 하고 싶었으니까.
설산에 바람이 불었다.
너무나 자유로워 거칠 것이 없는 바람이었지만 그 바람은 언제나와 같았다.
항상 설산을 향하여.
천 년, 만 년이 지나도 변함이 없을 한결같은 바람.
서쪽 너머로 해가 지기 시작한 오늘도,
바람은 변함없이 자유롭게 내달렸다.
fin
< 엔딩메이커 SS #26 얼음과 바람과 (3)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