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엔딩메이커 SS #31 루카스 흐레스벨그 (1) >
엔딩메이커 SS #31 루카스 흐레스벨그 (1)
어린 시절, 처음으로 연습용 검이 아닌 진검을 쥐었을 때 생각했다.
‘빌트바인이 되고 싶어.’
빌트바인 영웅전의 주인공.
빛나고 멋지고 강한 무적의 영웅.
모두를 앞에서 이끄는, 모두의 희망이 될 수 있는 사람.
어린아이다운 생각이었다.
어린아이가 꿀법한 꿈이었다.
아이는 어른이 된다.
세상에 나가고, 차가운 현실을 마주한다.
성장통.
어느 순간 깨달을 수 있었다.
자신은 우물 안 개구리일 뿐이었다.
훨씬 더 대단한 재능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다.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는, 진정한 천재라 불릴만한 이들이 이 세상에는 존재했다.
저 하늘의 별처럼 빛나는 자들.
현실을 깨달았다.
깨닫고 싶지 않아도 그리할 수밖에 없었다.
나고 자라며 당연한 것처럼 받아오던 찬사들이 사그라졌다.
사람들의 시선도 더 이상 집중되지 않았다.
그들의 모든 관심과 찬사는 혜성처럼 나타난 진정한 천재들에게- 야생의 땅과 왕도를 구한 영웅들에게로 돌아갔다.
무대의 주역은 저들이었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그들이었다.
저들이 별이고 달이라면, 자신은 반딧불이 정도가 아닐까.
현실을 깨달았다.
현실을 목도했다.
어린아이의 치기어린 꿈은 역시나 그저 꿈에 불과했다.
하지만.
하지만 그래도 나는.
여전히 나는······.
빌트바인이 되고 싶다.
&
루카스는 눈을 떴다.
깜박 존 것이 아니라 아예 깊은 잠에 빠졌던 것인지 머리가 멍했다.
시야가 뿌연 것은 덤이었고 말이다.
“어어어?”
멍한 머리만큼이나 멍한 목소리를 낸 루카스는 입가를 따라 턱까지 흘러내린 침을 닦아낸 뒤 눈을 껌벅이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눈에 익고 몸에도 익숙한 자신의 침대.
베개 옆에 펼쳐져 있는 책이 한 권.
다시 한 번 눈을 크게 감았다 뜬 루카스는 상체를 일으켜 세운 뒤 기지개를 폈다.
뚜두둑 하는 소리와 함께 신음이 절로 새어나왔다.
“끄으윽.”
밤새 책을 보다가 자기도 모르게 잠든 모양이었다.
“윽, 구겨졌네.”
반쯤 펼친 상태로 베개 옆에 놓여있던 책은 페이지가 반쯤 접혀 있었다. 책의 무게도 무게였지만 그 상태로 방치된 지 몇 시간인 터라 접힌 자국이 선명했다. 더욱이 문제는 접힌 페이지가 한 두 장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적어도 열 장 이상이 제멋대로 구겨져 있었다.
‘후··· 어쩔 수 없지. 그래도 독서용이라 다행이다.’
루카스가 소장한 빌트바인 영웅전은 각 권마다 다섯 권씩이 준비되어 있었다.
소장용, 감상용(책꽂이에 꽂아두고 바라보는 용), 포교용, 독서용, 예비 독서용.
이번에 구겨진 것은 독서용이었으니 아직 예비 독서용이 있었다.
‘내일 이것도 새로 하나 사야지.’
독서용과 예비 독서용 세트를 갖춰야 하니까.
독서용은 정말 독서용이기 때문에 손상이 잦은 편이었다.
“내일.”
소리 내어 말해본 루카스는 므흐흐 웃음을 흘렸다.
세일룬 왕국이 자랑하는 십검호의 일원이자, 신성국 유델리아가 건립됨에 따라 사실상 왕국 최강의 검사라 불리는 그였지만, 그래도 그 본질에는 아직 소년다운 모습이 많이 남아 있었다.
내일.
내일은 정말 중요한 날이었다.
루카스 흐레스벨그 자신의 열아홉 번째 생일이었으니 말이다.
위에 나열했듯이 루카스는 더 이상 흐레스벨그 백작가의 후계자 정도가 아니었다.
물론 북부12가문 가운데서도 위명 높은, 변경백 가문의 후계자라는 것은 엄청나게 대단한 것이었지만 작금의 루카스는 몇 년 전보다 훨씬 더 위상이 높아진 상태였다.
세상에 단 둘 뿐인, 그리고 역사상으로도 둘 뿐인 십대 십검호 가운데 하나.
세일운 왕국 최강의 검사.
당연히 루카스의 생일 파티에 참가하고 싶어하는 이들은 엄청나게 많았고, 흐레스벨그 백작가는 무려 두 달 전부터 파티 준비에 매진하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루카스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내일이 중요한 이유.
루카스 자신의 생일도 생일이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
“신간이야, 신간.”
빌트바인 영웅전의 신간.
그것도 무려 3년 만에 나오는 신시리즈!
처음 이 소식을 접했을 때 너무 놀라서- 아니, 너무 기뻐서 기절할 뻔 했다는 건 과장이 아니었다.
빌트바인 영웅전의 신간이 나온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세상이 아름답게 보일 지경이었다.
‘3년.’
빌트바인 영웅전의 저자는 사누딜이라는 사람이었다.
연령미상에 성별미상.
당연히 저 사누딜이라는 이름도 진짜 이름이 아닌 필명이었다.
때문에 3년이나 신간이 나오지 않자 루카스를 비롯한 빌트바인 매니아들은 사누딜이 혹시 사고라도 난 것은 아닌지, 혹시 절필한 것은 아닌지 두려움과 공포에 떨었다.
연령은 물론이고 성별조차 모르니 온갖 이야기들이 다 나돌았고 말이다.
사실 기사였는데 재앙전쟁 때 목숨을 잃었다는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육아에 집중하느라 집필 활동을 중단했다는 이야기까지.
‘아, 사누딜 님. 어찌되었든 감사합니다. 돌아와 주셔서 감사해요.’
사누딜이 남자인지 여자인지, 대체 왜 3년이나 신간이 나오지 않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루카스는 단순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어찌되었든 신간이 나왔다는 건 사누딜이 책을 낼 정도로 정정하다는 것이었고, 그것은 모든 빌트바인 영웅전의 독자들에게 있어 축복과도 같은 일이었으니 말이다.
‘내일이야, 내일.’
내일 서점에 가서 신간을 사야지.
사실 흐레스벨그 백작가 정도 되면 굳이 루카스가 직접 사러갈 필요 따위 없었지만 그래도 루카스는 신간이 나올 때마다 직접 책을 사러 서점에 가고는 했다.
한시라도 빨리 신간을 손에 넣고 싶었기 때문이다.
물론 북부12가문 가운데 맹주 자리를 자처해도 될 정도로 강력한 흐레스벨그 백작가의 후계자였으니 마음만 먹으면 유통 단계에서 손에 넣는 방법도 얼마든지 있었지만 루카스는 그런 편법을 저지르지 않았다.
“후후후.”
신간을 위해 지난 이틀 동안 밤을 새가며 구간들을 정주행한 루카스는 다시 한 번 미소를 흘린 뒤 자리에서 일어섰다.
창문을 통해 내리 쬐는 햇볕이 오늘 따라 아름답고 찬란해 보였다.
&
“그래서 결국 둘 중 누구인 것이냐.”
“네?”
흐레스벨그 백작의 집무실.
보통 백작가가 아닌 북방의 썬더둠 요새에 머무는 흐레스벨그 백작이었지만 요 며칠 동안은 백작가에 돌아와 있었다.
루카스의 생일이 내일이었기 때문이다.
“둘 중 누구냐고 물었다.”
흐레스벨그 백작이 다시 묻자 루카스는 난처한 얼굴이 되어 무어라 답을 하지 못 했다.
흐레스벨그 백작의 물음.
둘 중 하나.
주어가 생략되었지만 누구를 말하는지는 불을 보듯 뻔하였다.
카이사 오펀드와 스칼렛 바이퍼.
남부6가문 가운데 사실상의 맹주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오펀드 후작가의 영애와 제국 출신의 아름다운 천재 여검사.
두 사람은 재앙전쟁 내내 루카스와 함께했을 뿐만 아니라 전쟁 이후에도 셋이서 함께 대륙 곳곳을 주유했다.
그리고 그랬기에, 한창 때의 남녀들이 함께 뭉쳐 다니는 것을 본 사람들은 생각했다.
“둘 중 누구인 거지?”
누가 차기 흐레스벨그 백작 부인이 되는 거지?
신분적으로만 본다면 카이사 오펀드가 맞았다.
그녀는 남부6가문의 하나인 오펀드 후작가의 영애였으니까.
흐레스벨그 백작가가 북부12가문 가운데 하나라는 것을 생각한다면, 가문적으로 격이 맞는 것은 카이사 오펀드였다.
하지만 사람들은 섣불리 판단을 내리지 않았다.
“북부와 남부는 너무 멀거든.”
북부 끝에 자리한 흐레스벨그 백작가와 남부 끝에 자리한 오펀드 후작가가 손을 잡아봐야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정략혼을 하기에는 그리 의미있는 상대들이 아니었다.
“거기다 그 스칼렛이라는 처자도 일단은 귀족이라는 것 같고.”
남부12가문처럼 위세가 대단한 것은 아니었지만 어찌되었든 귀족은 귀족이었다.
그리고 여기에 스칼렛이 경쟁력을 가지는 이유가 하나 더 있었으니,
“엄청난 검의 천재라더군.”
흐레스벨그 백작가는 무가- 그 중에서도 성왕십자검을 대대로 이어받은 검술명가라 할 수 있었다.
때문에 가문 내에는 검술천재라 불리는 스칼렛에게 호감을 가진 이들이 많았다.
“오펀드 후작가의 영애는 강하긴 강하지만··· 막싸움에 가까우니까.”
검술이 아닌 막싸움.
거기에 카이사가 남부에서 쌓은 여러 악명들이 이래저래 감점 요소로 작용을 했다.
해적선을 털어먹고 다니던 사략선의 선장이었다는 건 아무래도 바다를 모르는 북부의 감성으로 보면 썩 좋은 모양새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물론 스칼렛이라고 무조건 강점만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일단 제국의 귀족이라는 것이 문제였고, 이러나저러나 카이사보다 가문의 격이 낮다는 것이 문제였다.
그리고 아직 알려지지 않았지만 로그마스터라는 사실까지 더해지면 오히려 카이사보다 위태로워질 수 있는 건 스칼렛이었다.
어찌되었든 두 사람.
루카스 흐레스벨그의 아내가 될 가능성이 가장 높은 그녀들.
“루카스.”
“예, 아버지.”
“둘 다라는 파렴치한 대답을 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흐레스벨그 백작의 엄중한 시선에 루카스는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입술을 움츠렸다.
&
몇 시간 뒤.
스칼렛과 카이사는 테이블 하나를 두고 마주 앉아 한쪽은 커피를, 다른 한쪽은 과실주를 마시고 있었다.
“내일이네.”
“내일이지.”
빌트바인 영웅전의 신간 출시일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었다.
루카스 흐레스벨그의 생일 파티가 열리는 날.
흐레스벨그 백작가에서 열리는 무척이나 큰 의미를 가진 공식적인 행사의 날.
“내일 첫 춤은 내가 출 거야.”
“웃기시네. 내가 출 거거든?”
“야, 루카스가 처음으로 춤을 춘 건 나거든?”
“그건 그때 이야기고, 나랑 사귈 때는 나랑 제일 먼저 췄거든?”
전생의 이야기들이었다.
언제나 유더의 편이었던 루카스와 달리 스칼렛과 카이사는 때로는 유더의 편이었고, 때로는 악마 추종자들의 편이었던 적이 있었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유더의 편이었을 때는 늘 루카스의 연인이 되었고, 반대로 적이 되었을 때는 루카스와 라이벌이 되었다.
‘물론 둘 다 적이었던 적도 있지만.’
그리고 그때는 둘도 없는 친구사이였던 스칼렛과 카이사였다.
“아무튼 내일 루카스한테 맡기는 거야. 괜히 수 쓰지 말고. 알았지?”
“너야말로 수 쓰지 말고.”
사실 현생 기준으로만 보자면 꽤 친한 사이인 두 사람이었다.
전생의 기억들을 제한다 해도 같이 여행한 기간만 근 3년에 달했다.
미운정이고 고운정이고 잔뜩 쌓이다보니 양쪽 모두 서로가 제일 친한 친구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문제는 역시 루카스였다.
스칼렛도, 카이사도 루카스를 도저히 포기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루카스에게 빨리 선택하라고 압박을 가할 수도 없었다.
“서, 선택할 수 없어요. 그럴 바에는 차라리 두 사람 모두와 만나지 않을 거예요.”
실로 루카스다운 말이었고, 실제로 한 말이기도 하였다.
대놓고 양다리를 걸치고 싶다는 게 아니라, 정말로 선택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어느 한 쪽을 선택하면 다른 한 쪽이 상처받을 테니까.
세 사람의 관계는 실로 복잡했다.
현생만이 아닌, 삶과 죽음을 함께할 정도로 깊은 사랑을 나누었던 전생의 일들이 엮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 바보는 그냥 우리 둘 다 안 만나는 게 아니라 아예 평생 혼자 산다고 할 수도 있으니까.’
스칼렛의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루카스 흐레스벨그는 그런 사람이었으니까.
그리고 카이사 역시 그렇게 생각했기 때문에 세 사람은 지금껏 묘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보다, 알지?”
“알지.”
중요한 문장은 다 빠졌지만 두 사람은 서로의 눈만 봐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었다.
“실비아 크로스벨.”
왕도에서 페어리들을 불러내기 위한 도전을 하고 있을 때 루카스가 입에 담은 여자 이름.
북부12가문 가운데 하나인 크로스벨 백작가의 영애답게 그녀 역시 내일 있을 파티에 참가할 예정이었다.
“적어도 걔한테는 지지 마.”
“너야말로.”
이건 우리 둘의 레이스니까.
굳이 예쁘게 포장하자면 선의의 경쟁이라고 해야 할까.
전생의 기억에 현생의 인연까지 더해져 무어라 표현하기 어려운, 하지만 일단 끈끈한 것은 분명한 관계가 된 두 사람은 가볍게 주먹을 맞부딪힌 뒤 창밖을 돌아보았다.
해가 지고 있었다.
&
“진짜 어마어마하네요.”
용병출신의 여기사 실리온 경이 흐레스벨그 백작가를 에워싸고 있는 마차의 줄을 창문 너머로 보며 말하자 세오른 경은 낄낄 웃으며 말했다.
“이번 생일 파티는 특별하니까.”
흐레스벨그 백작가의 후계자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한 파티였으니 손님이 많이 모이는 것은 당연했지만 올해는 예년보다 거의 두 배 가까이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이유는 몇 가지가 있었는데, 그 중 세오른 경의 마음을 가장 사로잡는 이유는 하나였다.
“이번 파티에서 도련님의 반려되실 분이 결정된다는 이야기가 있다는 건 알지?”
“그 소문은 저도 듣긴 했지만······ 진짜인가요?”
“진짜는 아냐. 하지만 사람들을 불타오르게 할 만한 이유이기는 하지. 개인적으로는 좀 진짜가 되었으면 하기도 하고.”
“동감입니다.”
흐레스벨그 백작가의 기사들 대부분이 그러하듯이 세오른 경과 실리온 경은 루카스를 좋아했다.
옆집(?) 사는 바이엘 백작가랑 체이스 백작가 자식들은 벌써 2년 전에 맺어져서 세기의 커플이라 불리는데 우리 도련님도 짝을 좀 찾으셔야지.
도련님을 꼭 닮음 같은 후계자도 낳으시고.
“그래서 대장은 둘 중 누가 백작 부인이 될 것 같나요?”
용병 시절의 호칭이자 애칭이 나오자 세오른 경은 빙긋 웃으며 무어라 말하려 했지만 바로 그때 커다란 외침이 이야기를 끊어 놓았다.
“크로스벨 백작가의 실비아 크로스벨 양이십니다!”
순간 연회장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입구로 집중되었다.
그리고 그 무수한 시선의 홍수 속에서도 우아함을 유지한 하늘색 머리칼의 여인- 실비아 크로스벨은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은 채 연회장 안으로 들어섰다.
새하얀 엠파이어 드레스를 입고 있었는데, 등이 깊게 파여 희고 깨끗한 피부가 더욱 눈에 띄었다.
“오오오.”
“역시 아름답군요.”
코델리아가 세기의 커플로 부각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북부제일 미녀로 추앙받던 실비아였다.
마치 이야기 책 속에서 금방이라도 튀어나온 것처럼 아름다운 그 모습은 실로 마법과도 같았다.
하지만 그런 실비아를 삐딱하게 바라보는 이가 둘 있었으니.
“쟤구나.”
“쟤네.”
도발적인 붉은 드레스를 입은 스칼렛과 몸을 꽉 조여 몸매가 도드라지는 검은 드레스를 입은 카이사였다.
“칫, 진짜 예쁘긴 하네.”
카이사가 잇소리를 내자 스칼렛은 미간을 살짝 좁히더니 이내 어깨를 활짝 펴며 말했다.
“너도 충분히 예뻐.”
“맞아, 스칼렛도 예뻐. 우리 둘 다 예쁘단 말이지.”
코델리아가 들었다면 주변에 사과하며 ‘부끄러움은 왜 내 몫인 건데!’라고 외칠 것 같은 상황이었지만 스칼렛과 카이사는 진지했다.
새삼 다시 서로의 옷매무새와 머리를 다듬어준 뒤 두 사람은 결전의 장- 그러니까 실비아 곁으로 다가섰다.
‘뭐야, 얘네.’
실비아는 자신에게 다가서는 스칼렛과 카이사에 당황했다.
단지 그 둘이 다가왔기 때문만이 아니었다.
두 사람에게서 느껴지는 묘한 적의- 아니, 경쟁심 때문이었다.
‘아, 설마?’
영민한 아가씨답게 실비아는 금방 두 사람이 이렇게 나오는 이유를 깨달았다.
잠시 후, 그러니까 5분 뒤에는 음악이 바뀌게 되어 있었고, 그때부터 댄스 타임이 시작되었다.
오늘의 주인공인 루카스 역시 당연히 춤을 출 터였고 말이다.
‘첫 춤이 누구냐 이건가?’
루카스와 스칼렛과 카이사.
이 세 사람의 이야기는 실비아도 잘 알고 있었으니까.
‘루카스가 내 이야기라도 했나 보지?’
아니면 북부제일미녀라는 이야기를 들은 두 사람이 괜히 견제하는 거라든가.
순간 실비아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요사이 억누르기는 했지만 사실 장난기가 많은 그녀였다.
더욱이 그녀도 이제 스무 살이 넘었으니, 아무리 늦어도 내년에는 구체적인 결혼 대상이 잡힐 가능성이 높았다. 실제로 타진 중인 가문도 많았고.
‘장난 좀 쳐볼까?’
속으로는 키득, 겉으로는 우아한 미소를 지은 실비아는 얼른 루카스에게 눈짓을 보냈다.
그리고 눈치 없는 루카스가 다가오자 친근하게 말을 붙였다.
“루카스, 오랜만이야.”
“네, 실비아 양. 오랜만입니다.”
“생일 축하해.”
“감사합니다.”
“정말?”
“네?”
“정말 감사해?”
실비아의 되물음에 루카스는 순간 고개를 갸웃했지만 이내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정말 감사합니다.”
“그럼 보답을 해야겠지?”
“뭔가 받고 싶으신 거라도······?”
“첫 춤은 어때?”
그 순간 불꽃이 작렬했다.
진짜 불꽃은 아니고, 투기- 그러니까 전의의 불꽃이라고 해야 할까.
스칼렛과 카이사.
스칼렛은 가만히 루카스를 바라보았고, 카이사는 주먹을 꼭 움켜쥔 채 루카스를 보았다.
이쯤 되니 아무리 눈치 없는 루카스라도 알 수밖에 없었다.
스칼렛과 카이사.
여기에 실비아까지.
‘잘못 선택하면 안 돼.’
잘못 선택했다가는 그 후폭풍을 감당할 수 없을 테니까.
실비아를 고르면 스칼렛과 카이사가 폭발한다.
스칼렛을 고르면 카이사가, 카이사를 고르면 스칼렛이.
“루카스?”
실비아가 우아함 속에 숨긴 악동 같은 목소리로 루카스를 불렀고, 스칼렛의 그윽한, 카이사의 초조한 시선이 루카스의 뺨에 닿았다.
‘둘 중에 누구인 것이냐.’
여기에 더해진 것은 어제 들었던 흐레스벨그 백작의 목소리.
루카스는 식은땀을 흘렸다.
그리고 때를 맞추듯 연회장의 음악이 바뀌었다.
댄스 타임의 시작- 즉, 죽이 되든 밥이 되든 한 명을 선택해야만 하는 순간.
루카스는 고뇌했다.
영원처럼 느껴지는 순간 속에서 극한의 괴로움을 느꼈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루카스?”
하늘에서 구원의 손길이 내려왔다.
&
“유더가 삐진 거 같아. 아까부터 엄청 노려보고 있어.”
“달게 받겠습니다.”
루카스의 대답에 코델리아는 쿡쿡 웃었다.
“그렇게 곤란했어?”
저 질투쟁이 유더의 질투를 감내할 만큼?
코델리아의 물음에 루카스는 쓴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아무튼 정말 다행입니다. 그때 코델리아 양이 나타나서요. 정말 제게는 구원의 천사 같았습니다.”
“뭘 구원까지야.”
“아니요, 정말입니다. 코델리아 양 덕분에 오늘을 넘길 수 있었으니··· 정말 다행입니다. 정말 고마워요.”
실비아를 택하면 스칼렛과 카이사가 함께 폭발했겠지만 코델리아라면 이야기가 달랐으니까.
그리고 그건 실비아 역시 마찬가지였다.
루카스가 다시 감사하자 코델리아는 잠시 미간을 좁히더니 이내 안쓰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저기, 루카스, 루카스는 바보야?”
“네?”
“두 번째 춤은 누구랑 출 건데?”
“에?”
“에는 무슨 에야. 설마 자기 생일날 춤을 한 번만 추고 끝낼 생각이었어?”
거기다 스칼렛이랑 카이사가 저렇게 예쁘게 꾸미고 나왔는데?
설마 그냥 돌려보내지는 않을 거지?
그럼 나도 화낸다?
약간의 추궁까지 어린 코델리아의 시선에 루카스를 마른 침을 꿀꺽 삼킨 뒤 시선을 돌렸다.
무수한 춤 신청을 단호히 거절한 뒤 나란히 서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스칼렛과 카이사. 그리고 그 옆에서 재미있다는 듯 우아함 속에 짓궂음을 감춘 실비아.
“아, 음악 끝났다.”
첫 번째 춤이 끝났으니 이제 두 번째 춤으로.
“데려가겠다.”
“꺄.”
음악이 끝나자마자 신뢰십이보도 아닌 무려 천둔구보로 공간을 뛰어넘은 유더가 휙 하고 낚아채듯 코델리아를 데려가 버렸고, 홀로 남은 루카스는 다시 마른 침을 삼켰다.
자신을 보는 스칼렛과 카이사를 마주하였다.
to be continued
< 엔딩메이커 SS #31 루카스 흐레스벨그 (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