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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딩메이커-393화 (393/473)

< 엔딩메이커 SS #32 루카스 흐레스벨그 (2) >

엔딩메이커 SS #32 루카스 흐레스벨그 (2)

루카스는 두 번째 춤을 카이사와 췄다.

마치 처음부터 그러기로 한 것처럼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루카스가 카이사와 두 번째 춤을 출 때 스칼렛은 흐레스벨그 백작과 춤을 추었고, 세 번째 춤의 곡이 시작되었을 때 루카스는 스칼렛과 마주하게 되었다.

“그래도 내가 언니니까.”

한 살 밖에 차이가 나지 않지만 아무튼.

어깨를 으쓱이며 지나가듯 말한 스칼렛은 루카스의 손을 잡았다.

“그때 거절하지 말걸.”

루카스는 무슨 말인지 바로 알아듣지 못 해 순간 멈칫했지만 잠시뿐이었다.

건국 기념일 무도회를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철부지 도련님이 이렇게 멋지게 자랄 줄은 몰랐으니까.”

들으라는 듯, 하지만 혼잣말처럼 말한 스칼렛은 슬쩍 스텝을 밟기 시작했고, 루카스는 뺨을 살짝 붉힌 채 세 번째 춤을 시작했다.

&

파티는 밤늦게까지 이어졌다.

그리고 이런 종류의 파티가 으레 그러하듯이 중간부터는 생일 축하보다는, 생일 축하를 명목으로 모인 귀족들의 교류회가 되었다.

때문에 루카스는 연회장을 슬쩍 빠져나가는 것에 대해 그리 큰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다.

“그렇다고 여기야?”

“왜, 좋지 않아? 여기라면 아무도 안 올 거 같고.”

스칼렛은 빙긋 웃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루카스와 카이사와 스칼렛.

세 사람이 자리한 곳은 흐레스벨그 백작가의 직계들만이 사용하는 실내 연무장이었다.

“흐으음. 북부의 연무장은 이런 식이구나.”

바이엘 백작가와 흐레스벨그 백작가뿐만 아니라 제법 많은 북부의 가문들에 이미 초대를 받아본 카이사였지만 이렇게 실내 연무장까지 들어와본 것은 처음이었다.

“남부랑 많이 달라?”

“어, 일단. 남부는 연무장이 실내에 있는 경우가 거의 없거든.”

스칼렛의 물음에 답한 카이사는 적당한 곳에 들고온 물건들을 주섬주섬 내려놓기 시작했다.

“루카스, 거기에 펴줘.”

“어, 거기가 좋겠네.”

“예.”

두 여인의 지령을 받은 루카스는 달빛이 비치는 연무장 바닥에 들고 온 자리를 펼쳤고, 카이사와 스칼렛은 그 위에 바구니에 담아온 술과 음식들을 늘어놓았다.

“그리고 이게 빠질 수 없지.”

다른 것들은 전부 연회장에서 집어온 것들이었지만 이것만은 아니었다.

스칼렛은 씩 웃으며 동그랗고 작은 초콜릿 케이크를 꺼냈고, 카이사는 어디서 꺼냈는지 모를 초를 케이크 위에 꽂았다.

지난 3년 동안 하도 같이 다니다 보니 손발이 척척 맞는 두 사람이었다.

“생일 축하해.”

“축하해, 루카스.”

“감사합니다.”

작은 케이크에 꽂은 초를 후-하고 불자 카이사와 스칼렛이 짝짝짝 손뼉을 치며 다시 한 번 생일을 축하해주었다.

어린애 소꿉장난 같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아니, 소꿉장난이 맞을테지만 그래도 루카스의 얼굴엔 환한 미소가 그려졌다.

‘죄송합니다.’

오늘 파티에 참석해주신 모든 분들.

하지만 지금의 이 소박한 축하 쪽에 좀 더 마음이 기우네요.

그래도 참석해주셔서 모두들 정말 감사합니다.

짧게 사과와 감사를 마친 루카스는 다시 스칼렛과 카이사를 보았고, 두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서로의 잔을 채우고 있었다.

물론 루카스의 잔도 채워주는 것을 잊지 않았고 말이다.

“마셔, 마셔. 오늘은 아주 끝까지 가는 거야.”

“만날 제일 먼저 뻗는 주제에.”

스칼렛이 피식 웃자 카이사가 얼굴을 붉히며 항변했다.

“날 술로 이기는 너희가 이상한 거거든?”

이러나저러나 신수의 피가 흐르는 카이사였으니까.

해독 능력 역시 탁월한 그녀는 고향에 있을 때 술내기에서 져본 적이 없었다.

“루카스야 지평에 닿았다고 쳐도 스칼렛은 뭔가 이상해.”

“이상하긴. 그냥 술이 센 거지. 그리고 지평에 닿은 거랑 술이 센 게 무슨 상관인데?”

스칼렛의 타당한 지적에 말문이 막힌 카이사는 입술을 삐쭉이더니 늘 그랬던 것처럼 먼저 술잔을 들어올렸다.

“아무튼 건배.”

“건배.”

들어 올린 술잔이 무안하지 않도록 루카스와 스칼렛이 얼른 술잔을 들어올렸다.

“캬, 좋아. 맛있다 이거.”

“그래그래, 그럼 취하기 전에 빨리 선물부터 꺼내자.”

어린애 달래듯 카이사의 등을 토닥인 스칼렛은 바구니에서 미리 준비해둔 물건을 두 개 꺼냈다.

하나는 스칼렛 자신의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카이사의 것이었다.

“자, 생일선물.”

“나도.”

포장지의 색은 각각 빨강과 파랑으로 달랐지만 크기는 물론이고 무게까지 똑같았다.

“감사합니다.”

루카스가 일단 넙죽 감사부터 표하자 카이사는 악동같이 웃으며 말했다.

“빨리 열어봐.”

“그래도 될까요?”

“당연하지.”

서두를 연 것은 카이사였는데 끝을 맺은 것은 스칼렛이었다.

두 여인의 허락에 루카스는 아이처럼 기대에 찬 얼굴로 포장지를 뜯었고, 스칼렛과 카이사가 기대했던 것을 보여주었다.

해맑은 미소 말이다.

“빌트바인 영웅전의 신간!”

그랬다.

3년 만에 나온 빌트바인 영웅전의 신간.

본래 오늘 서점에 가서 사올 예정이었지만 아버지께 붙잡히느라 내일로 미뤄야만 했던 그것!

카이사와 스칼렛의 선물은 둘 모두 빌트바인 영웅전의 신간이었다.

결국 둘 다 똑같은 선물을 한 셈이었지만 선물을 한 쪽도, 받은 쪽도 얼굴에는 미소만이 가득했다.

“내꺼는 감상용이야.”

“내꺼는 독서용이고.”

루카스가 같은 책을 다섯 권씩 산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는 두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해요.”

루카스가 책을 꼭 품에 안으며 기뻐하자 카이사와 스칼렛의 얼굴에도 다시 미소가 번졌다.

“자자, 그럼 선물도 교환했으니까 다시 마시자. 오늘이야말로 내가 둘 다 눕혀주겠어.”

“퍽이나 그러겠다.”

킥킥 웃은 스칼렛은 카이사와 루카스의 잔에 술을 채워주었고, 세 사람만의 술잔지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몇 시간이나 지났을까.

새벽.

달과 해가 모두 없는 시간.

그렇기에 세상이 오로지 하나의 색으로만 물드는 때.

카이사는 빈 술병을 끌어안은 채 스칼렛의 허벅지를 베고 곤히 잠들었다.

스칼렛은 그런 카이사의 머리를 쓰다듬었고 말이다.

“루카스.”

“네, 스칼렛.”

“그 이야기가 그렇게 좋아?”

“네, 무척 좋아합니다.”

카이사처럼 완전히 뻗지는 않았지만 루카스도 스칼렛도 얼굴에 취기가 올라 있었다.

그리고 그랬기에 루카스의 얼굴에는 평소보다 좀 더 솔직한 미소가 어렸다.

평소에는 하지 않을 말 역시 입에 담았고 말이다.

“무척 좋아하지만··· 이번 권은 특히 특별해요.”

“3년 만의 신간이라서?”

“그것도 있지만······.”

말끝을 흐린 루카스는 바로 정답을 내놓는 대신 책의 표지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스칼렛은 어느 순간 깨달을 수 있었다.

루카스가 말한 특히 특별하다는 말의 의미를.

“스칼렛은 역시 똑똑해요.”

유더와 코델리아처런 눈빛만으로 의사소통이 가능한 수준은 아니었지만 정답을 떠올렸는지 아닌지 정도는 알아볼 수 있었다.

루카스는 책을 열어 첫 번째 페이지의 글귀를 어루만지며 말했다.

“예, 전생에서는 단 한 번도 출간된 적이 없는··· 진정한 의미의 신간입니다.”

3년 전.

북부12가문 자제들의 납치로 시작되는 재앙 앞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졌던 수많은 전생들.

“저자도 환란에 휩쓸렸던 거겠죠. 아니, 무사했다 하더라도 이런 영웅 이야기를 책으로 만들고, 그걸 다시 유통할 수 있을 정도로··· 평화로운 세상은 아니었으니까요.”

하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세일룬 왕국은 멸망하지 않았고, 제국 역시 건재했다.

플레이아데스의 운명은 다시 미래로 이어졌다.

그랬기에 나온 신간.

유더와 코델리아가 세상을 구했다는 증거 가운데 하나.

루카스는 고개를 들어 스칼렛을 보았다.

술기운 때문인지, 평소라면 입에 담지 않을 말을 조금 더 꺼내보았다.

“저는··· 빌트바인이··· 되고 싶었어요.”

어린 시절의 꿈.

아니, 사실은 지금도 꾸고 있는 꿈.

강하고 멋진 절대무적의 영웅.

언제 어디서나 믿고 의지할 수 있는 희망과도 같은 존재.

어둠 속에서도 사람들을 이끄는 한 줄기 빛.

루카스는 그런 사람들을 알고 있었다.

유더와 코델리아.

야생의 땅과 세일룬 왕국에 이어 플레이아데스 전체를 구원한 진정한 영웅들.

루카스 자신은 아니었다.

루카스 자신은 두 사람과 달랐다.

란디우스가 유더를 제자로 삼았을 때 속이 상했다.

야생의 땅을 여행하는 와중에 몰라보게 강해진 유더와 대련을 했을 때.

압도적인 격차로 패배했을 때 유더 앞에서는 태연히 승부를 받아들인 척을 하였다. 아버지 앞에서도 더욱 열심히 하겠다며 의지를 다졌었다.

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그날 밤, 이불을 뒤집어 쓴 채 엉엉 울음을 터트렸으니까.

터무니없는 격차에 놀라고 당황하고, 갑자기 자기 자신이 너무 초라하게 느껴져서, 그래서 어찌할 바를 몰라, 속이 상해서, 어린아이처럼 엉엉 울었으니까.

열등감.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그것.

왕도에서 검의 연회에 참석했다.

예상대로 유더와 코델리아가 나타났다.

그리고 유더는 검의 연회의 주인공이 되었다.

루카스 자신은 제일검의 검격을 받아내지 못 해 널브러졌는데, 유더는 막아냈다. 잠깐이지만 제일검이 진심을 발휘하게 만들었다.

유더를 축하해주었다.

하지만 속으로는 울음을 터트렸다.

루카스 자신은 주인공이 아니었다.

영웅도 아니었다.

들러리.

주인공을 빛내기 위해 존재하는 조연.

티를 내지 않았다.

받아들이기 위해 노력했다.

유더와 코델리아가 건국 기념회의 음모를 막아내는 것을 보며 생각했다.

애당초 가는 길이 다른 사람들이라고.

일일이 열등감을 느낄 필요 없다고.

그건 인정이 아니었다.

지독한 패배의 변명이었다.

무투회에서 유더가 영웅담에나 나올 것 같은 활약을 펼치는 것을 보며 감탄했다. 박수 치며 찬사를 보냈다.

그것이 조연의 역할이었으니까.

모든 것이 허무해졌다.

그냥 유더와 코델리아를- 유더를 미워하면 어떨까.

그럼 마음이 조금 편해지지 않을까.

하지만 결국 그러지 못 했다.

유더와 코델리아는 정말로 좋은 사람들이었으니까.

유더는 계속 자신을 호적수라 불러주었다.

그건 조롱이 아니었다. 그는 루카스 자신보다도 더 루카스라는 검사를 믿어주었다.

검의 연회가 있던 밤 던전북에 들어갈 거라며 자신을 불러내었다.

그때만이 아니었다.

무언가 함께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루카스 자신을 성장시킬 기회가 있다면 두 사람은 대가조차 바라지 않고 자신에게 손을 내밀어 주었다.

그런 이들을 어찌 미워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그래서 그냥 검을 휘둘렀어요.”

묵묵히 앞을 향해.

보이지 않는 저 지평을 향해.

루카스의 자기고백을 가만히 경청하던 스칼렛은 빙긋이 미소를 지었다.

“뭐야, 그럼 벌써 꿈을 이뤘네.”

“네?”

“빌트바인이 되었잖아.”

스칼렛의 말에 루카스는 고개를 갸웃했다.

스칼렛은 그런 루카스의 옆으로 자리를 옮긴 뒤 바구니 안에 있던 구간을 꺼내 페이지를 넘겼다.

“나도 읽어봤어. 빌트바인 영웅전.”

네가 정말 좋아하는 작품이니까.

어떤 작품인지 궁금했거든.

네가 좋아하는 작품이니 같이 좋아하고 싶었고.

뒷말을 뭉텅이로 생략한 스칼렛은 다시 조곤조곤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언제나 포기하지 않고 나아가는 자. 사람을 미워하지 않는 자. 정말로 선하고 맑은, 태양과도 같은 존재.”

스칼렛이 한 마디씩을 이어갈 때마다 루카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과는 거리가 멀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래서 스칼렛은 웃었다.

“레드 게이트에서의 싸움 기억해?”

“기억합니다.”

유더가 제일검을 쓰러트렸던 전투.

하지만 스칼렛의 기억은 달랐다.

“네가 엘룬을 구한 날이야.”

그녀만이 아니었다.

스칼렛 자신은 물론이고 카이사까지. 그날 레드 게이트에 있던 모두.

“하지만 그건 유더가-.”

“그래, 유더가 제일검을 쓰러트렸지. 하지만 네가 없었다면, 네가 제일검을 막아내지 못 했다면··· 유더가 왔을 때 우린 이미 모두 죽어 있었을 거야.”

스칼렛은 다시 웃었다.

촤르륵 페이지를 넘기더니 삽화 한 장을 가리켰다.

빌트바인이 검 한 자루를 들고 거대한 용에 맞서는 장면이었다.

“이길 수 없는 싸움이야. 객관적인 전력은 비교조차 할 수 없지. 하지만 빌트바인은 앞으로 나섰어. 사람들을 지켜야 했으니까. 제일검에 맞섰던 너처럼.”

루카스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스칼렛은 다시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 날만이 아니야.”

건국 기념회가 있던 날.

루카스는 무도회에 참석한 사람들을 구했다.

제대로 된 무기도 없이 괴물들에 맞섰다.

야생의 땅으로의 여정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곳의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지옥의 마물들이 들끓는 곳으로 기꺼이 달려나갔다.

루카스가 없었다면.

그 자리에 루카스가 없었다면.

“하지만 진짜 대단하다고 생각하는 건 따로 있어.”

루카스는 유더를 미워하지 않았다.

열등감에 사로잡혀 추한 질투를 하지 않았다.

망가져 주변에 행패를 부리는 대신 스스로를 연마했다.

유더와 코델리아의 선의를 곡해하지 않고 선의로 받아들였다. 순수한 선의를 돌려주었다.

“그리고 앞을 향해 나아갔어.”

빛 하나 없는 어둠 속에서도 묵묵히, 그리고 분명하게, 자신의 길을.

“전생에서도 항상 생각했어.”

이 녀석은 뭐지?

왜 좌절하지 않는 거지?

왜 포기하지 않는 거야?

왜 타락하지 않는 거지?

강제로 그 영혼에 악마를 쑤셔박지 않는 한 루카스는 결코 타락하지 않았다.

아니, 그렇게 마인으로 만들어도 끝에 가서는 언제나 인간으로서의 마음을 되찾았다.

‘그래서 끌린 걸지도 몰라.’

저 맑은 영혼에.

어둠 속에 하얗게 빛나는 한줄기 빛에.

루카스의 얼굴은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눈에는 어느새 그렁그렁 눈물이 매달려 있었다.

“그리고 말이야. 이건 제일 중요한 이유인데······.”

말끝을 흐리던 스칼렛은 얼굴을 붉히더니 피식 웃었다. 루카스의 귓가에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주인공이 아닐 리가 없잖아?”

스칼렛 바이퍼의 이야기의 주인공은 스칼렛이었다.

그리고 스칼렛이 사랑하는 멋지고 잘생긴 남자 주인공은 언제나 루카스였다.

‘취하긴 취했나보다.’

스스로의 말에 부끄러움을 느낀 스칼렛은 흠흠 헛기침을 토한 뒤 루카스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대로 잠시 망설이는가 싶더니 루카스의 뺨에 수줍게 입술을 맞추었다.

“다시 한 번 생일 축하해.”

나의 빌트바인.

나의 영웅.

그리고 바로 그때였다.

저 멀리서 거짓말처럼 태양이 솟구쳐 올랐다.

아침의 영광이 창문을 타고 들어와 루카스의 몸을 환하게 비추었다.

“와우.”

작게 감탄한 스칼렛은 거보라는 듯이 웃었고, 루카스는 해맑은 웃음을 터트렸다.

&

다음날 아침.

카이사가 여전히 쿨쿨 깊은 잠에 빠져 있고, 스칼렛이 뒤늦은 단잠에 빠졌을 때.

루카스는 빌트바인 영웅전의 신간을 펼쳤다.

한 면 가득 그려져 있는 빌트바인의 삽화를 쓰다듬으며 생각했다.

빌트바인.

절대무적의 영웅.

언제 어디서나 포기하지 않고 희망의 빛을 이끄는 자.

스칼렛은 루카스 자신을 빌트바인이라 불러주었지만 아니었다.

루카스 자신은 빌트바인 같은 영웅은 될 수 없었다.

하지만, 설사 그렇다 할지라도.

루카스의 얼굴에는 미소가 번졌다.

페이지를 넘기며, 3년 만에 돌아온 빌트바인을 마주하며 루카스는 생각했다.

‘빌트바인이 되고 싶어.’

당장은 무리더라도 언젠가, 저 지평에 닿았던 것처럼.

루카스는 페이지를 넘겼다.

언제나 그러했던 것처럼 묵묵히 앞을 향해 나아갔다.

fin

“신간 판매량 보셨습니까? 키야! 완전 대박입니다! 대박!”

출판사 직원의 찬사에도 남자는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아니, 사실 반응을 보였다한들 출판사 직원으로서는 알아볼 방도가 없었다.

남자는 얼굴 전체를 가리는 검은색 가면을 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면무도회도 아닌데 미팅 때마다 꼬박꼬박 가면을 쓰고 나타나는 작가.

미친놈이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지만 본래 이 바닥에는 정신 나간 작자들이 많았다.

때문에 출판사 직원은 그런 사소한 것에 신경쓰는 대신 정말 중요한 것을 입에 담았다.

“작가님, 그래서 말인데······ 다음 권은 혹시 언제쯤인지······.”

무려 3년만의 신간이었다.

여기서 다시 3년 후에를 외치는 것은 너무한 처사였다. 다음 권이 팍팍 붙어줘야 빌트바인 영웅전의 인기도 다시 치솟지 않겠는가.

출판사 직원이 간절한 눈빛을 보내오자 검은 가면의 남자는 낮은 목소리로 답했다.

“조만간이다.”

“오오오······.”

조만간.

설마 저 조만간이 3년은 아니겠지.

조만간이니까 몇 달이 아닐까?

아니, 1년 정도만 되어도 충분한데.

“그럼 오늘은 이쯤 하도록 하지.”

검은 가면의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출판사 직원은 서둘러 따라 일어선 뒤 꾸벅 허리를 숙였다.

“살펴가십시오.”

검은 가면의 남자는 대답 대신 손을 한 번 들어 보인 뒤 가게를 나서자마자 가면을 벗었다.

간단한 인식장해 마법을 사용한 터라 남자가 가면을 벗는 모습을 목격한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다시 십여 분 정도 걸었을까.

“여, 카마엘.”

약속 장소에 앉아 있던 거대한 남자와 그 옆에 찰싹 붙어 있는 미모의 여인, 그리고 그런 두 사람을 신기하다는 듯 쳐다보는 사람들 사이에서 카마엘은 작게 미소지었다.

“빌트바인.”

“어? 무슨 바인?”

이크. 저도 모르게 중얼거린 것인데 들렸던 걸까.

하지만 카마엘은 당황하는 대신 태연한 얼굴로 말했다.

“란디우스라고 했다.”

“아무튼 빨리 앉아요. 여기 케이크가 정말 맛있으니까.”

레나의 채근에 카마엘은 못이긴 척 발걸음을 서둘렀고, 란디우스는- 카마엘은 물론이고 파라곤의 다섯 영웅들 모두의 빌트바인은 다시 사람 좋은 웃음을 터트렸다.

fin

< 엔딩메이커 SS #32 루카스 흐레스벨그 (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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