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딩메이커 395화
SS #35 바람은 언제나
알렉스 바이엘.
북북12가문 가운데 하나인 바이엘 백작가의 차기 당주.
유나.
과거도, 고향도, 정체도 알 수 없는 신비한 여인- 아니, 애당초 인간이 아닌 것이 분명한 존재.
신분과 입장은 물론이고 종족조차 다른 두 사람이었지만, 둘에게 있어 그러한 사실들은 딱히 문제가 되지 않았다.
알렉스는 유나를 사랑했고, 유나는 알렉스를 사랑했다.
이미 서로를 깊이 사랑하는 두 사람에게 있어 다른 부차적인 조건들은 애당초 고려의 대상 자체가 될 수 없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두 사람만의 이야기일 뿐이었다.
“밖을 싸돌아다니는 것 정도는 그래, 방랑벽이 좀 있구나 하고 넘어갈 수 있었다. 무사수행 운운하며 제국까지 간 것도 사내다운 기상이라 우기면- 아니, 생각하면 어떻게든 용납할 수 있었다.”
빈센트 바이엘.
당대의 바이엘 백작.
혈압이 오를 대로 오른 그는 시뻘게진 얼굴로 목소리를 이어나갔다.
“오랫동안 밖을 싸돌았으니 불장난 몇 번 정도는 눈감아줄 생각이었다. 애당초 기운이 넘쳐흐르는 놈이니 당연히 있을 법한 일이라 생각했고 말이다. 하지만, 하지만!”
쾅 소리가 나게 책상을 내려친 바이엘 백작은 더 이상 화를 억누를 수 없다는 듯 노호성을 터뜨렸다.
“여자를 데리고 와? 그것도 어디서 굴러먹다 왔는지 모를 신원 미상의 여자를?!”
“아버지, 유나는-”
“닥치고 내 말 들어! 아직 말 안 끝났다!”
알렉스의 항변을 단번에 끊어낸 바이엘 백작은 거친 숨을 몰아쉬더니 눈을 감고 심호흡을 시도했다.
화를 내는 것도 내는 것이었지만, 일단 본인의 혈압부터 낮추지 않으면 이대로 쓰러질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후우…… 후…….”
1분, 2분.
몇 번이나 숨을 고른 바이엘 백작은 미리 떠둔 냉수까지 한 잔 비운 뒤에야 다시 알렉스를 보며 말을 이었다.
“알렉스, 네 녀석은 우리 바이엘 백작가의 장손이다. 그것도 평범한 장손이 아닌, 오직 하나뿐인 내 자식이란 말이다.”
알렉스에게는 형제가 없었다.
즉, 알렉스 외에는 바이엘 백작가의 대를 이을 사람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는 소리였다.
“제대로 된 여자를 만나라. 신분도 명확하고- 아니, 신분이 어울리는, 우리 바이엘 백작가의 세를 회복하는 데 도움이 될 가문의 여자를 말이다.”
전대까지만 하더라도 북부12가문 가운데 맹주 자리에 있던 바이엘 백작가였다.
지금은 흐레스벨그 백작가의 차지가 된 변경백 자리 역시도 바이엘 백작가의 것이었고 말이다.
하지만 단 한 번의 전투로 인해 바이엘 백작가는 그 모든 영광을 손에서 놓아야만 했다.
연례행사처럼 이루어진 북부 야만인들의 공습과 전대 바이엘 백작의 응전.
전대 바이엘 백작은 그 전투에서 한쪽 팔을 잃는 큰 부상을 입었고, 그로 말미암아 십검호의 자리에서도 물러나야만 했다.
하지만 비극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지금이야말로 바이엘 백작가를 끌어내릴 기회라 판단한 북부12가문들의 음모로 인해 바이엘 백작가는 변경백 자리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고, 십검호의 영광과 변경백의 권력을 모두 빼앗긴 전대 바이엘 백작은 고향으로의 귀환을 결정할 수밖에 없었다.
빈센트 바이엘은, 당대의 바이엘 백작은 그 과정 전부를 몸소 경험해야만 했다.
북부에서도 발전이 덜 되어 변경도시라 불리는 바일룬에 틀어박힌 채 나날이 시들어가는 아버지의 모습 또한 지켜봐야 했고 말이다.
-반드시 가문을 다시 일으켜 세우리라.
하지만 안타깝게도 빈센트 바이엘에게는 검재가 부족했다.
뼈를 깎는 노력 끝에 바이엘 백작가의 고유검술인 바람의 검을 전수받는 데까지는 성공했지만 거기가 끝이었다.
빈센트 바이엘은 아버지처럼 십검호의 자리에 오를 수 없었고, 바이엘 백작가를 다시 변경백의 자리에 올리는 일 또한 해낼 수 없었다.
시련과 좌절.
울분과 설움.
전대 바이엘 백작이 병사하고 빈센트 바이엘이 백작위를 물려받았다.
그리고 같은 해에 알렉스 바이엘이 태어났다.
“너는…… 너는 나의 희망이다.”
알렉스는 빈센트 자신과 달랐다.
알렉스에게는 검재가 있었다.
그것도 평범한 재능이 아닌, 십검호의 자리에 오르셨던 아버지조차 능가하는 진짜배기 재능이 말이다.
“너는 십검호가 될 수 있다. 아니, 십검호가 될 것이다. 그러니 결혼만 제대로 하면 된다. 북부12가문 가운데 하나의 도움만 받아도 바이엘 백작가는 흐레스벨그 백작가로부터 다시 변경백 자리를 찾아올 수 있을 것이다.”
“아버지.”
“다 너를 생각해서 하는 말이다. 그 여자는…… 그래, 일단 메이드로 우리 집에 들인 다음에 네 혼처가 정해지면, 그래서 결혼하고 나면 첩으로 거두든지 하거라. 그러면 되지 않겠느냐.”
타이르듯 이어진 바이엘 백작의 목소리에 알렉스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아버지께서 어떤 심정으로 지금과 같은 말씀을 하시는지 잘 알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 하여 고개를 끄덕일 수 없었다.
아버지께서 내미신 ‘타협책’을 받아들이는 것은 알렉스에게 있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고 싶지 않습니다.”
“알렉스!”
바이엘 백작이 다시 노성을 토하자 알렉스는 감고 있던 눈을 떴다.
그대로 바이엘 백작의 푸른 눈동자를 직시한 채 입을 열었다.
“아버지, 바람은 언제나-”
“자유로운 법이라고 말하기만 해봐라! 어? 하기만 해봐!”
바이엘 백작의 선제타격에 입을 꾹 다문 알렉스는 입술을 한 번 깨물더니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나가보겠습니다. 다음에 다시 이야기하도록 하죠.”
빠르게 말을 마친 알렉스는 그대로 돌아서서 서재를 나섰다.
등 뒤로 아버지의 노성이 들려왔지만 알렉스는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그날 오후, 바일룬 교외의 한적한 언덕 위.
“알렉스.”
“유나.”
촉촉이 젖은 눈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유나에게 미소 지은 알렉스는 그녀의 손을 부드럽게 움켜쥐며 말을 이었다.
“걱정하지 말아요, 제가 방법을 찾아볼 테니까. 아버지께서도 곧 유나를 인정하실 겁니다.”
바이엘 백작의 완강한 거부로 인해 유나는 지금 바이엘 백작가의 저택이 아닌 바일룬 시내에 자리한 여관에 머무는 중이었다.
제국에서 왕국으로 귀환하는 와중에 몇 번이나 여관에 들른 터라 여관 자체에는 제법 익숙할 터였지만, 그래도 그녀를 혼자 방치해 두는 것이 늘 마음에 걸리는 알렉스였다.
“괜찮을 거예요. 저만 믿으세요. 아셨죠?”
“……알겠어요.”
유나는 짐짓 밝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알렉스는 그런 유나의 이마에 입술을 맞추었다.
자신을 안심시키기 위해 미소 짓는 유나의 모습이 너무나 사랑스러우면서도 가련했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허락을 어떻게 받아낼 것인가.
그녀를 바이엘 백작가의 정당한 안주인으로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다 잘될 거예요.”
유나가 조그맣게 말했고, 알렉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히려 자신을 위로해 주는 그녀를 조심스럽게 안으며 눈을 감았다.
* * *
-이번엔 나도 모르겠다. 방법이 딱히 생각나지 않는다.
오랜 친우이자, 언제나 어려운 문제에 해답을 제시해 주던 아더 체이스조차 이번에는 별다른 수가 없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바이엘 백작의 마음을 단번에 돌릴 명안이 정말로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미치겠군.”
거의 무너지듯 침대 위에 쓰러진 알렉스는 두 손으로 얼굴을 덮은 채 한숨을 토했다.
마법사인 친구조차 구하지 못한 해답을 칼잡이인 자신이 어찌 구한단 말인가.
‘일단, 일단 자자.’
한숨 푹 자고, 맑아진 머리로 다시 생각하자.
어깨를 늘어뜨린 알렉스는 두 손을 내린 뒤 그대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그날 밤.
달조차 구름에 숨어 어둠만이 가득한 자정 무렵.
문득 느낀 인기척에 번쩍하고 눈을 뜬 알렉스는 깜짝 놀라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아니, 일으켜 세우려다 멈추고 말았다.
“유, 유나 씨?!”
침대 위.
정확히는 자신의 다리 사이.
적당히 덮은 담요 속에서 불쑥 머리를 내밀고 있는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유나였다.
여긴 어떻게 온 것이냐고, 아니, 애당초 지금 무얼 하는 것이냐고 묻고 싶은 알렉스였지만 그럴 수 없었다.
유나가 쉿 하고 입술 사이에 검지를 세웠기 때문이다.
“알렉스, 저도 방법을 찾아봤어요.”
“바, 방법이요?”
“네, 방법.”
초롱초롱한 눈으로 답한 유나는 언제나처럼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사람들이 그러는데, 이럴 땐 ‘기정사실’을 만들면 된대요.”
“기, 기정사실이요?”
“네, 기정사실.”
유나는 다시 환하게 웃었고, 알렉스는 유나가 저런 이야기를 누구에게 들었는지- 아니, ‘기정사실’이 뭔지 과연 알기는 하는 건지 의문에 빠졌지만 잠깐뿐이었다.
유나의 작고 예쁜 손이 자신의 바지춤에 닿았기 때문이다.
“유, 유나 씨. 잠시만요. 잠-”
“쉿!”
엄한 얼굴로 다시 검지를 세운 유나는 계속해서 손을 놀렸고,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 저항할 수 없게 된 알렉스는 두 손으로 빨개진 얼굴을 덮었다.
그리고 며칠 뒤, 체이스 백작가의 손님방에 선 알렉스는 사나이의 얼굴로 말했다.
“바람은 언제나…… 재빠른 법이지.”
“……자네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는 건가.”
알렉스와 유나가 속도위반을 했다.
제국에서 왕국까지 오는 와중에 제대로 된 키스 한 번 안 했던 두 사람이 며칠 만에 애를 가지다니.
유나가 임신했다니.
“어지럽구만.”
“사실 나도 좀 그래. 그래도…… 도와줄 거지?”
간절함이 섞인 친구의 물음에- 아니, 애원에 아더 체이스는 한숨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 * *
“-그렇게 된 이야기란다.”
유나가 해맑게 웃으며 이야기를 마치자 아델리아와 코델리아는 멍한 얼굴로 눈을 깜박였다.
그도 그럴 것이 기대한 것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아버님이랑 어머님은 어떻게 결혼하셨어요?
시작은 나쁘지 않았다.
저 먼 제국의 변경에서 시작된 이야기는 참으로 바이엘 백작가다운 이야기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다음에 이어진 이야기.
지극한 정성으로 전대 바이엘 백작의 마음을 돌린 것이 아닌, 속도위반 우격다짐으로 밀어붙였다는 이야기.
그것도 무려 어머님이 아버님을 덮쳐서 일을 성사시켰을 줄이야.
‘이,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이, 일단 웃으면 되지 않을까?’
아무튼 어머님이 웃고 계시니까.
빠르게 눈빛을 교환한 아델리아와 코델리아는 아하하 어설픈 미소를 흘렸고, 유나는 언제나처럼 해맑게 웃었다.
그렇게 1분, 2분.
어색한 미소가 흐르는 침묵이 이어진 지 얼마나 되었을까.
“유나, 여기-”
방문을 열고 모습을 드러낸 바이엘 백작의 모습에 아델리아와 코델리아는 안도와 민망함을 동시에 느꼈다.
작금의 어색한 분위기가 환기된 것은 좋았지만, 유나의 이야기 속에 나온 청년 바이엘 백작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음, 나중에 다시 오도록 하지.”
십검호답게 위험을 감지한 바이엘 백작은 급히 회피기동을 하려 했지만 어림없는 일이었다.
유나는 어딜 가냐는 듯 재빨리 일어나 바이엘 백작의 팔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괜찮아요, 이야기는 다 끝났으니까. 전 왜 찾았던 거예요?”
“아니, 그 당신이 보고 싶…… 아니, 아니, 차나 한잔 마실까 해서.”
며느리들 앞이라는 사실을 자각한 바이엘 백작은 얼른 말을 고쳤고, 아델리아와 코델리아는 필사적으로 못 본 척을 하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이런 모두의 노력과는 무관한 한 사람, 유나 바이엘은 바이엘 백작의 팔을 끌어안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응, 나도 보고 싶었어요. 그런데 여보, 마침 왔으니까 해줬으면 하는 게 있어요.”
“흠흠, 무얼…… 말이오?”
유나의 애교에 절로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간신히 진정시킨 바이엘 백작이 되묻자 그녀는 아델리아와 코델리아 쪽을 돌아보며 말했다.
“애들한테 이야기를 해줬더니 오랜만에 그게 듣고 싶어요.”
“그, 그거라니?”
“그거 있잖아요, 그거. 당신이 옛날에는 매일같이 하던 거. 다시 만난 이후로는 한 번도 안 한 거 알아요?”
유나가 말하는 그거.
바이엘 백작은 단번에 알아차렸고, 아델리아와 코델리아 역시 동물적 육감으로 무엇인지를 간파했다.
“빨리요, 네?”
청년 시절의 바이엘 백작이 매일 같이 입에 달고 다니던 말.
하지만 나이가 든 이후로는 젊은 날의 과오라며 결코 입에 담지 않았던 말.
“유나.”
“빨리요. 빨리. 듣고 싶어요. 네?”
유나가 다시 팔을 끌어안으며 애교를 부렸고, 바이엘 백작은 식은땀을 흘리며 아델리아와 코델리아를 보았다.
어색한 미소를 짓고 있는 두 사람의 눈에 ‘다 이해해요, 아버님’을 의미하는 눈빛들이 떠오른 것은 오해가 아닐 터였다.
“아, 알겠소.”
헛기침을 토한 바이엘 백작은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멋지게 서더니 우수 어린 눈빛으로 먼 곳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바람은 언제나-”
한 번 끊고, 먼 곳으로 향했던 시선을 유나에게 돌리며-
“자유로운 법이지.”
바이엘 백작의 미소를 마주한 유나는 활짝 웃었고, 아델리아와 코델리아는 웃음을 참기 위해 허벅지를 힘껏 꼬집었다.
바이엘 백작은 새빨개진 얼굴로 입술을 깨물었고 말이다.
“여보? 어디 아프세요? 얼굴이 빨간데.”
“아, 아니. 아무것도 아니오.”
허허허 웃음을 흘린 바이엘 백작은 아델리아와 코델리아 쪽으로 고개는 돌리되 시선은 다른 곳으로 향하는 재주를 보이며 말했다.
“흠흠, 먼저 나가보겠다.”
대답을 들을 틈도 없다는 듯 빠르게 말한 바이엘 백작은 그대로 도망치듯 방을 빠져나가 버렸고, 유나는 고개를 몇 번 갸웃하더니 아델리아와 코델리아에게 짧게 인사하고는 그대로 바이엘 백작을 따라 방을 나섰다.
그리고 방에 남겨진 두 사람.
아델리아와 코델리아는 서로를 보았고,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말했다.
“누굴 닮았는지 알 것 같아.”
유더와 게일이.
아버님과 어머님으로부터 어떤 점들을 물려받은 건지.
“바람은 언제나…….”
“……자유로운 법이니까.”
각자 서로 다른 바이엘 백작가의 남자를 떠올린 아델리아와 코델리아는 작게 소리 내어 웃은 뒤 푸근한 미소를 머금었다.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