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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딩메이커-396화 (396/473)

엔딩메이커 396화

제1장 - 건국의 날 #1

플레이아데스라는 세계가 있다.

하나의 태양과 두 개의 달을 가진 이 세계에는 거대한 두 개의 대륙이 존재했고, 각각을 지리적 위치에 따라 서방 대륙과 동방 대륙으로 구분하였다.

고도로 발전된 문명이었던 하이 엘프들의 마도왕국과 고대 드워프들의 철왕국이 무너진 이후 서방 대륙에는 수많은 인간의 나라들이 흥망성쇠를 거듭하였다.

그리고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매일같이 전쟁이 이어지던 서방 대륙은 거대한 두 세력에 의해 안정을 찾게 되었다.

대륙의 북부를 지배하는 아르곤 제국과 남부를 지배하는 세일룬 왕국.

대륙양강이라 불리는 두 세력은 삼백 년이 넘는 시간 동안 팽팽한 힘겨루기를 이어나갔고, 대륙 곳곳에 자리한 십여 개의 소국들은 때에 따라 편을 바꿔가며 자신들의 안위를 지켜 나갔다.

그리고 지금.

서방 대륙에 또 하나의 나라가 세워지려 하고 있었다.

아르곤 제국이나 세일룬 왕국은 물론이고 십여 개에 달하는 중소 국가들에게조차 미치지 못할 만치 작은, 국가라 부르기에도 민망한 수준의 작고 작은 나라.

하지만 그 누구도 그 나라를 무시할 수 없었다.

아니, 무시하지 않는 수준을 넘어 대륙양강이라 불리는 아르곤 제국과 세일룬 왕국조차도 새로이 태어나는 나라의 눈치를 살필 지경이었다.

나라의 이름은 신성국 유델리아.

문자 그대로의 의미로 신들이 거하는 땅이었다.

* * *

세일룬 왕국의 중앙과 남부 사이에 위치한 상업 도시.

도시 정중앙에 위치한 하얗고 아름다운 성 깊은 곳에는 멋지게 꾸며진 커다란 방이 하나 있었는데, 그림으로 그린 듯한- 아니, 그림으로도 묘사하지 못할 정도로 아름다운 여인이 입술을 삐쭉 내민 채 눈앞의 책을 노려보고 있었다.

“야.”

“응?”

여인의 부름에 옆에 서 있던 무척이나 잘생긴 남자가 무슨 일이냐는 듯 산뜻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고, 분홍빛 머리칼의 여인은 의심과 분노와 노여움이 가득한 눈으로 말했다.

“너, 나 멕이려는 거지?”

마치 성난 짐승이 으르렁거리는 것 같은 물음이었지만 잘생긴 흑발 청년은 잘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할 따름이었다.

“멕이다니? 무슨 말이야?”

능청스럽기 짝이 없는 미소에 여인은 일단 숨을 골랐고, 이내 눈앞의 책을 청년에게 들이대며 소리쳤다.

“이거 말이야! 이거!”

적당한 크기와 두께를 가진 검은색 표지의 책.

흔히 성경이라 부르는 책들과 흡사하게 생긴 책에는 멋진 삽화와 아름다운 서체로 쓰인 글귀들이 빽빽이 들이차 있었다.

“누가 만들었는지 참 잘 만들었네.”

청년- 유더의 말에 분홍빛 머리칼의 여인- 코델리아는 다시 한번 분노했다.

유더가 틀린 말을 한 것은 아니었다.

정말로 잘 만들어진 성경이었다.

삽화는 그 자체로 예술 작품이라 해도 좋을 만치 아름다웠고, 금속활자로 찍어낸 글귀는 네모반듯하니 작은 흠결조차 보이지 않았다.

종이는 당연히 최고등급의 특상품이었고, 표지를 담당하는 가죽은 드워프 무두장이의 손을 거친 에인션트 드래곤의 가죽이라는- 실로 말도 안 될 정도의 특특특상품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코델리아는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애당초 눈앞의 성경이 얼마나 고급품인지 따위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으니 말이다.

중요한 문제는 오직 하나.

성경의 주인공이 다른 누구도 아닌 코델리아 자신이라는 사실이었다.

“이게 뭐야! 이게! 어?!”

노성을 터뜨린 코델리아는 읽고 있던 페이지를 크게 펼친 뒤 유더의 눈앞에 들이밀었다.

‘여신의 화신’인 코델리아의 탄생을 다룬 페이지였다.

[여신의 화신이신 코델리아 님께서 태어나시매, 하늘에서 일곱 천사들이 내려와 나팔을 불며 화신의 탄생을 축복하노라.]

아름다운 글귀 옆에는 아름다운 삽화가 떡하니 자리하고 있었다.

환하게 웃고 있는 붉은 머리 아기와 그 주위를 맴돌며 나팔을 부는 일곱 천사들의 삽화가 말이다.

코델리아는 똑똑히 보라는 듯 검지로 삽화를 몇 번이나 두드렸지만 유더는 여전히 모르겠다는 얼굴로 능청을 떨 뿐이었다.

“응? 뭐가? 태어날 때 천사들이 내려와 축복해 준 거 아니었어? 난 그런 줄 알았는데?”

“그럴 리가 있겠냐!”

천사들이 내려와서 축복을 하기는 개뿔이!

“그리고 갓난아기가 어떻게 이렇게 머리가 긴데?”

“오, 그런 디테일한 면을 지적할 줄이야. 코델리아, 성장했구나.”

“자꾸 장난칠래? 어?”

답답해 죽겠다는 듯 가슴을 탕탕 두드린 코델리아는 다시 성경의 페이지를 촤르륵 넘겼다.

그러자 이번에도 아름다운 삽화와 황당한 글귀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코델리아가 정원에 앉아 노래하니 온갖 새들이 모여들어 그녀의 노래를 경청하더라.]

[코델리아가 숲에 들어가니 사나운 멧돼지가 스스로를 봉양하고자 달려와 엎드리더라.]

[코델리아가-]

“야! 이, 이게 대체 뭐야! 어?! 내가 화장실을 안 간다고? 안 가긴 왜 안가! 오늘 아침에도 갔거든?!”

“어, 음. 그래.”

유더가 헛기침을 토하자 새삼 민망함을 느낀 코델리아는 얼굴을 붉히는가 싶더니- 사실 이미 화가 나서 너무 붉어진 터라 티가 나지 않았지만- 다시 가슴을 탕탕 두드리며 답답함을 토로했다.

“진짜 나 멕이려는 게 아니면 이게 뭐야? 어?”

이걸 보면 사람들이 코델리아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특히 코델리아 자신을 잘 아는- 이를테면 스칼렛이나 카이사나 아델리아가 본다면-

“으으으…… 상상만 해도 창피해.”

두 손으로 얼굴을 덮은 코델리아는 결국 다리에 힘이 풀려 풀썩하니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정말로 민망했기 때문이다.

유더는 그런 코델리아의 앞에 쪼그려 앉더니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 코델리아. 그냥 면전에서 배를 잡고 뒹굴며 웃는 게 전부일 테니까. 그걸 보며 부끄러워하는 코델리아는 아마 세상에서 제일 귀엽고 사랑스럽- 아야! 야! 아파! 아프다고!”

“아프라고 때리는 거야 이 나쁜 놈아!”

마력을 가득 실은 손바닥으로 찰싹찰싹 유더의 팔을 때린 코델리아는 한숨과 함께 어깨를 늘어뜨렸다.

코델리아 자신이 주인공인 성경.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새로운 태양의 여신인 ‘코델리아’를 모시는 ‘코델리아 교단’의 성경.

“코델리아, 그래도 이해는 하지? 성경이 필요하다는 건.”

유더의 말에 코델리아는 울상이 된 채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지금도 이게 왜 필요하냐고 반박하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애당초 유더를 말로 이기는 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분명 온갖 궤변을 늘어놔서라도 합리화를 시키겠지.’

그리고 사실 유더의 말마따나 코델리아 자신도 성경의 필요성을 어느 정도는 인지하고 있었다.

이러나저러나 새로운 종교가 만들어졌으니, 종교의 각종 가르침과 율법을 담은 성경이 필요하기는 했다.

“코델리아 너는 일단 태양의 여신 코델리아의 화신체야. 쉽게 보면 태양신의 지상 대행자- 성녀 같은 존재지. 그러니 아예 특별한 존재라고 부각시키는 게 나아. 실제로 특별하기도 하고.”

유더는 코델리아 교를 세우기에 앞서 천상의 대천사이자 태양의 여신인 코델리아와 코델리아의 화신인 인간 코델리아를 구분하였는데, 이유는 단순했다.

‘신이 지상을 거하면 하루 온종일 추종자들에게 시달릴 테니까.’

병을 낫게 해달라, 소원을 들어달라, 부자가 되게 해달라 등등.

맹목적으로 달려드는 사람들 앞에서 코델리아의 정신은 조금씩 지쳐가다 끝내는 망가질 것이 분명했다.

그 옛날 지상에 강림했던 천상의 대천사들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유더는 처음부터 여신 코델리아와 화신 코델리아를 분리했다.

신의 권능을 부릴 수 있는 것은 여신 코델리아다.

화신 코델리아에게는 신의 권능 같은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여신 코델리아께서 허락하실 때만 화신 코델리아는 신의 권능을 부릴 수 있다.

물론 이렇게 분리한다 할지라도 모여들 추종자들은 모여들 터이고, 코델리아를 통해 자신의 소망을 이루지 못한 자들이 코델리아에게 애꿎은 원망과 저주를 보낼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렇다 할지라도 여신 코델리아보다는 화신 코델리아 쪽이 훨씬 더 모여드는 이도 적고 원망 역시 적을 터였다.

유더의 설명에 코델리아는 머리로는 알겠지만 여전히 가슴으로는 받아들이기 힘들다는 표정이 되더니 끙끙 앓는 소리를 내며 말했다.

“아니, 그래두…… 이건 미화가 좀 지나치지 않아?”

“그래도 화신인데 이 정도 미화는 해줘야지. 안 그래?”

“으으으…… 좋아. 이건 그렇다 쳐. 그럼 이건 또 뭔데?”

다시 성경을 촤르륵 넘긴 코델리아는 분홍색 하트를 가슴에 안고 있는 여신 코델리아를 가리키며 물었다.

태양과 ‘사랑’의 여신인 코델리아의 삽화였다.

“내가 언제 또 사랑의 여신이 된 건데? 어?”

백번 양보해 태양의 여신까지는 그렇다 칠 수 있었다.

정말로 태양의 대천사 솔라리의 뒤를 이은, 새로운 태양의 대천사 코델리아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사랑의 대천사?

사랑의 여신?

명백한 날조를 지적한 코델리아는 눈매를 날카로이 했지만 애석하게도 상대는 바로 그 유더였다.

이미 준비된 답이 있다는 듯 속이 까만 미소를 지은 유더는 유들유들한 목소리로 말했다.

“코델리아야.”

“왜.”

“너랑 내가 뭐지?”

“어?”

“너랑 나를 사람들이 뭐라 부르지?”

이건 함정이었다.

산뜻하기 짝이 없는 유더의 표정을 보면 알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코델리아는 유더의 말을 듣는 순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세, 세기의 커플?”

그랬다.

유더와 코델리아.

세일룬 왕국을 뒤흔든 세기의 커플.

“그리고?”

“비, 비익연리의 대명사?”

둘이서 하나인 연인.

대륙의 모두가 인정하는 두 사람.

코델리아의 얼굴이 다시 붉어졌다.

아니, 이제는 얼굴을 넘어 목까지 발갛게 달아오른 코델리아였다.

“우리 첫날밤 장소도 기억나지?”

기억났다.

사랑의 대천사 에로스의 신전

그곳에서 있었던 그날 밤의- 아니, 자그마치 사흘 밤낮 동안 이어졌던 일들.

코델리아는 결국 두 손으로 다시 얼굴을 덮었고, 유더는 환히 웃으며 말했다.

“이미 태양의 여신의 화신인데 이쯤 되면 그냥 사랑의 여신의 화신도 하는 쪽이 편하지 않을까?”

“으으으…….”

이미 부끄러움으로 뇌가 달아오른 코델리아로서는 그게 편리함으로 결정할 일이냐는 반박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사실 유더가 굳이 사랑의 여신 자리까지 챙긴 것은 단순히 코델리아가 부끄러워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는 사적인 이유만이 아니었다.

‘신성력을 수집할 수 있을 거야.’

플레이아데스에는 신과 마법이 실존하는 세계였다.

믿음은 그 자체로 힘이 될 수 있었고, 인류의 집단 무의식 속에서 코델리아가 ‘사랑의 여신’으로 자리 잡게 된다면 적잖은 힘을 획득할 수 있을 터였다.

‘혹시 모르는 일이니까.’

플레이아데스에 몇 번이나 멸망을 야기했던 심판의 대천사 아우리엘과 대군주 아스모데우스는 소멸했다.

천상과 지옥은 더 이상 플레이아데스와 이어져 있지 않았고, 세계는 마침내 약속된 멸망에서 벗어나 새로운 미래를 향해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그렇다 하여 안심할 수 없었다.

지옥의 대군주는 아직 여섯이나 남아 있었고, 동방에는 적잖은 수의 악마 추종자들이 여전히 대륙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러니 만약의 사태를 대비한 힘을 확보한다.

경계의 끈을 놓지 않고 플레이아데스와 코델리아를 수호할 힘을 기른다.

유더는 다시 코델리아를 보았다.

입술을 살짝 깨문 채 울상을 짓고 있는 모습이 너무나 아름답고 사랑스러웠다.

그래서 유더는 미소를 지었다.

장난스럽게 코델리아의 뺨을 꼬집은 뒤 반발하듯 볼을 부풀리는 코델리아의 이마에 입술을 맞추었다.

“이제 슬슬 일어나자. 주인공이 늦을 수는 없잖아?”

“나만 주인공인 거 아니거든?”

코델리아 자신이 여신의 화신이라면 유더는 여신을 받들어 모시는 코델리아 교단의 교황이었으니까.

그래서 유더는 코델리아의 손을 들어 올린 뒤 그 손등에 다시 입술을 맞추었다.

코델리아의 연인인 동시에 그녀를 모시는 교황으로서 부드럽게 속삭였다.

“지상에 강림하신 여신의 화신이시여, 함께할 영광을 주시겠습니까?”

정중한- 그것도 화려하면서도 단정한 교황의 예복을 걸친 유더의 요청에 코델리아는 새삼 두근거린 마음을 감추고자 새침한 표정을 지었지만 잠깐뿐이었다.

이내 미소를 살짝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플레이아데스의 운명을 건 제도의 결전으로부터 1년하고도 수개월.

유델리아 신성국의 건국을 공식적으로 선포하는 건국의 날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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