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딩메이커 406화
제4장 - 채팅방
코와붕가.
26세, 남.
일러스트레이터.
단톡방에 메시지를 올린 그는 팔짱을 낀 채 진지한 눈으로 휴대폰 화면을 주시하였다.
[코와붕가 : 그래서, 우리 이번엔 진짜 정모하는 거지?]
[AAA : 하면 되겠지?]
[남만고양이 : ㅇㅇ 하기로 했으니까.]
AAA와 남만고양이에게서 긍정적인 대답들이 나왔지만 코와붕가는 화면을 주시 중인 눈에서 힘을 풀지 않았다.
가장 중요한 두 사람이 묵묵부답이었기 때문이다.
아웃복서009와 노란폭풍.
예기치 않은 사건으로 폭파된 지난 정모에서 둘만의 만남을 가진 두 사람.
코와붕가는 손가락으로 상완을 두드리며 대답을 기다렸고, 약 3분의 기다림 끝에 답을 얻을 수 있었다.
[노란폭풍 : ㅇㅇ 하자.]
[아웃복서009 : ㅇㅇ]
두 사람의 대답.
그것도 거의 논스톱으로 이어진 대답에 코와붕가는 눈을 가늘게 떴다.
“역시 수상해.”
수상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수상하다.
역시 자신의 추리대로 두 사람은 이미 연인이 된 것이 아닐까.
그것도 무척이나 가까운 곳에 살아서- 이를테면 옆집 같은 곳에서 살아서 사실상 반동거에 가까운 생활을 하는 것이 아닐까.
지금도 같이 있는 것이 아닐까.
[코와붕가 : 좋아, 그럼 정모 날 보자.]
계약서에 도장이라도 찍듯이 확정 멘트를 남긴 코와붕가는 휴대폰을 내려놓고 숨을 크게 골랐다.
폭파된 지난 정모로부터 벌써 약 5개월.
보통 예기치 않은 사태로 정모가 깨지면, 그래서 사실상 정모가 이루어지지 못하면 2차 정모가 기획되어야 정상이었다.
단순한 정모가 아닌 몇 년 만에 처음으로 얼굴을 보자!-며 기획된 야심 찬 기획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생각 이상으로 멤버들의-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특정 멤버들의 호응이 없다시피 했기 때문이다.
“아복이와 노폭이.”
유일하게 폭파된 정모에서 만남을 가진 두 사람이 일단 시들시들한 반응을 보였다.
뭐라고 해야 할까, ‘이미 맛있는 부분 다 먹었는데 굳이 더 먹을 필요 있어?’ 같은 반응이라고 해야 할까?
저들끼리 봤으니 되었다는 분위기.
사실 코와붕가도 어느 정도는 동의했다.
애당초 코와붕가를 비롯한 채팅방 멤버들이 가장 주목한 것은 아웃복서009와 노란폭풍의 만남이었으니 말이다.
“거기에 남만이도 수상해.”
남만고양이.
노란폭풍의 또 다른 단짝.
채팅방 멤버들 사이에서 사실상의 리더 역할-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중재인과 상식인의 포지션을 수행 중인 인물.
그러니 본래대로라면 리더인 남만고양이가 2차 정모를 적극적으로 기획했어야 정상이었다.
그런데 남만고양이도 시들시들한 반응을 보였다.
“봤어. 남만고양이도 두 사람을 본 게 분명해.”
아마 이렇게 된 것이 아닐까?
둘만의 정모를 가진 아복이와 노폭이가 서로에게 연심을 품게 되고, 선머슴 같던 노폭이가 아복이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스스로를 꾸미고 싶어 한다.
그런데 아뿔싸.
선머슴 같은 노폭이인 터라 평소에 후드티에 청바지만 입고 다니던 그녀는 뭘 어떻게 꾸며야 하는지도 모르고…… 결국 노폭이는 친한 언니인 남만고양이에게 SOS를 친다.
‘노폭이는 버튜버 덕분에 여자인 게 밝혀졌고…… 남만이는 누가 봐도 여자니까.’
남만고양이가 사실 남자면 그거야말로 역대급 반전이리라.
어찌 되었든 노폭이의 구조 요청을 수락한 남만고양이.
그녀는 노폭이를 데리고 홍대에 나가고…… 거기서 우연히 지나가던 아복이를 발견하게 된다.
“그래, 그래서 아복이를 보게 되는 거야. 아복이 앞에서 부끄러워하는 노폭이도 보고, 마찬가지로 민망해하는 아복이도 보고. 어쩌면 노폭이 방송에 나오는 타냐 누나도 봤을지 몰라.”
어찌 되었든 이미 노폭이의 SOS를 받았을 때부터 대충 상황을 짐작하고 있던 남만이는 눈을 가늘게 뜨며 ‘흐으응, 흐흐응’을 연타하고, 노폭이와 아복이는 더더욱 민망함에 몸부림치고.
“그렇게 노폭이와 아복이도 보고 둘이 사귄다는 사실도 알게 된 남만이는 정모에 대한 의욕을 잃는 거지.”
이미 정모라는 이름의 케이크의 알맹이를 쏙 빼먹은 상황이니까.
‘괘씸한 녀석들…….’
자기들끼리만 재미를 보다니.
지들끼리 재미 봤다고 자신을 따돌리다니.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AAA : 너님아, 왤케 정모에 집착하심?]
디스코드로 날아온 AAA의 메시지에 코와붕가는 얼른 키보드 위에 손을 올렸다.
[코와붕가 : 아니, 괘씸하잖아. 지들끼리 봤으면 다야?]
[AAA : 그건 좀 그렇긴 하지.]
[코와붕가 : 우리도 노폭이랑 아복이를 본 다음에 현실에서 놀려줄 권리가 있다고.]
[AAA : 그건 잘 모르겠지만 궁금한 건 사실이니까.]
[AAA : 근데 말하고 나니까 진짜 궁금하네. 노폭이는 목소리만 들어서 더 궁금한 거 같기도 하고.]
[코와붕가 : 목소리로 추론해 봤을 때 키 160 전후의 귀엽고 발랄한 소녀가 아닐까.]
[AAA : 목소리만 듣고 그걸 어떻게 알아지만 뭔가 그럴싸하긴 하네.]
[코와붕가 : 아복이가 관건이야, 아복이가. 둘이 같이 랭킹 경쟁 그만둔 것도 그렇고, 노폭이가 갑자기 버튜버 데뷔한 것도 그렇고, 아무리 봐도 수상해.]
[AAA : 그냥 둘이 사귀는 거긴 할 텐데…… 어떤 커플일지 궁금하네. 어쩌면 차도녀 아복이와 커여운 소녀 노폭이의 조합일 수도 있지 않을까?]
[코와붕가 : 차도녀가 뭐니 차도녀가. 여기서 연식 드러나네.]
[AAA : 같이 늙어가는 처지에 따지기는. 아무튼 이번엔 진짜 정모하는 것 같으니까 그때 보자.]
[코와붕가 : 그래, 그때 보자고.]
언제나와 같은 대화를 마친 코와붕가는 잠시 키보드 위에 손을 올려놓고 생각에 잠겼다.
‘사실 궁금한 건 노폭이랑 아복이만이 아니야.’
버튜버 데뷔를 통해 여자임이 드러난 노폭이.
차도녀 운운했지만 정황상 남자일 것이 분명한 아복이.
정황증거상 여자일 확률이 99%인 남만이.
물론 성별 외에는 여전히 미궁 속인 터라 다들 궁금하기는 했다.
실제로 정모를 하는 주된 이유도 ‘연애질하는 노폭이와 아복이를 실물로 보고 싶다’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둘만이 아니었다.
‘AAA도 궁금해.’
아복이에게 노폭이가 있다면 코와붕가 자신에게는 AAA가 있었다.
물론 관계가 다르긴 했지만, 아무튼 채팅방 멤버들 가운데서 가장 죽이 잘 맞는 녀석은 AAA였으니 말이다.
‘진짜 궁금하단 말이지.’
게임에서의 모습은 그야말로 십덕변태아저씨인데 과연 실물은 어떨 것인가.
사실 알고 보니 트래쉬 토크를 즐기는 유쾌한 누나일 수도 있지 않을까?
‘내가 생각해도 십덕 망상이군.’
아무래도 아복이와 노폭이 사건의 영향을 세게 받은 모양이었다.
AAA가 여자라니.
그럴 리가 없지.
‘남만이는 그냥 뭔가 진짜로 평범할 것 같은 느낌이고.’
직업은 웹디자이너 정도가 아닐까.
“뭐…… 자세한 건 실제로 만나보면 알겠지.”
작게 중얼거린 코와붕가는 가볍게 들어 올린 오른손을 바라보았다.
사실 지금까지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지만 코와붕가에게도 숨겨진 비밀이 하나 있었다.
사이코메트리.
접촉을 통해 기억이나 감각을 읽어내는 초능력.
그랬다.
코와붕가는 사실 초능력자였다.
* * *
[아니, 이게 무슨 개연성 밥 말아 먹는 소리야.]
코와붕가가 초능력자라고?
어이가 없다는 코델리아의 말에 유더는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은 뒤 말했다.
[저기요, 지금 우린 마법으로 세상 간 이동도 한 상황이거든요? 그쪽은 천상의 대천사고요?]
[아, 아니. 그렇긴 한데.]
사실 초능력자 나부랭이(?)보다는 천상의 대천사나 플레이아데스를 수호하는 준신 같은 게 더 터무니없는 이야기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였다.
[가, 갑자기 너무 뜬금없잖아!]
초능력자라니.
코와붕가가 초능력자라니.
이 세상에 초능력이 실존한다고?
[저기, 다시 말하지만 너 일단은 마법사거든? 그리고 이쪽 세상에도 마법사들은 있어. 플레이아데스랑 달리 숨어 있어서 그렇지.]
[뭐라고? 진짜? 성전기사단이 실존했던 거야? 암살단이랑?]
[무슨 게임 이야기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비밀결사 같은 형태로 마법사들이 실존하기는 해. 초능력자도 있고.]
[그, 그럼 캡틴 아메리카도?]
[초인병이라면…… 용병 시절에 싸워본 적도 있긴 해.]
“뭐라고?!”
플레이아데스만 판타지인 게 아니었다고?
[그, 그럼 여긴 현대 판타지 뭐 그런 건가?]
[아까부터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지만…… 어찌 되었든 코와붕가는 초능력자일 가능성이 높아. 어떤 초능력인지까지는 확인하지 않았지만 ESP 능력이 있는 것 같았어.]
1차 정모를 강진호와 홍유희 두 사람만의 만남으로 조작하기 위해 몇 가지 공작 활동을 했을 때 알게 된 사실이었다.
유더의 말에 여전히 당혹스럽다는 듯 눈을 깜박인 코델리아는 떠듬떠듬 메시지 마법을 이었다.
[그럼 AAA는? 걔도 뭐 있어? 아니, 일단 뭐 하는 사람이야?]
[그건 비밀.]
[뭐?]
[비밀. 정모 날까지의 즐거움으로 남겨두는 건 어때?]
[넌 알잖아.]
[나는 알지.]
[우씨. 오랜만에 막 때려주고 싶어졌어.]
[얼마든지 때리시지요. 달게 맞겠습니다.]
어차피 하나도 안 아팠으니까.
유더가 유들유들거리며 능청을 떨자 코델리아는 미워 죽겠다는 듯 괜히 찰싹찰싹 팔만 몇 번 때려보았다.
그리고 같은 시간, 같은 장소.
마치 서로의 눈빛만 봐도 무슨 말을 하는지 안다는 듯 마주한 채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저 눈빛만 교환하는- 그러다가 돌연 꽁냥거리기 시작한 유더와 코델리아의 모습에 깊은 빡침과 허탈함, 거기에 약간의 박탈감까지 느낀 나탸사는 시베리아 벌판의 한기를 연상시키는 차가운 눈으로 말했다.
“아무튼 그쯤하고 이쪽도 해결 좀 해주지?”
유더와 코델리아가 강진호와 홍유희와 어떻게 동일 인물일 수 있는가에 대한 이야기.
강진호와 홍유희를 돌려보냈기에 나타샤의 집에 자리한 것은 유더와 코델리아, 집주인인 나타샤 이렇게 셋뿐이었다.
턱을 괸 채 잔뜩 삐진 표정을 한 나타샤의 얼굴에 유더와 코델리아는 어색하게 웃었고, 이내 코델리아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알았어, 이게 어떻게 된 거냐면…….”
그리고 이어진 장구한 이야기들.
코델리아는 정말로 단행본 17권에 달하는 이야기들을 생으로 늘어놓을 기세였지만 다행히 유더가 개입한 덕분에 적절한 요약하에 사정을 전달할 수 있었다.
천상과 지옥에 유린당한 플레이아데스.
몇 번의 회귀 끝에도 끝내 플레이아데스와 코델리아를 구할 수 없었던 유더.
완전한 멸망으로 치닫는 가운데 어린 신 아탈리아가 내린 결단.
그리고 그로 인해 일어난 일들.
“그래서…… 결국 우린 돌아올 수 있었고…… 플레이아데스에도 해피 엔딩을 맞이했어.”
코델리아의 이야기가 끝나자 나타샤는 잠시 눈을 감고 숨을 골랐다.
솔직히 믿기 어려운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타샤 역시 알렉세이에게 교육을 받은 인물이었다.
이미 눈앞에 유더와 코델리아가 있는 마당에 현실을 부정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라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물론 유더와 코델리아의 존재가 저 이야기의 진실성을 무조건 증명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 또한 괜한 의심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강진호와 홍유희였으니까.
유더와 코델리아가 굳이 자신에게 거짓말을 늘어놓을 것 같지 않았으니까.
마음속 깊이 두 사람의 이야기를 받아들인 나타샤는 가볍게 어깨를 늘어뜨렸고, 옅은 미소와 함께 말했다.
“마이아를 한번 만나보고 싶군.”
유더의 나타샤.
플레이아데스의 자신과 비슷한 역할을 수행한 여인.
“정말 착하고 진짜 엄청 예뻐.”
코델리아의 칭찬에 나타샤는 빙긋 웃으며 유더를 보았고, 수줍음 때문인지 살짝 달아오른 유더의 뺨에 다시 미소를 머금었다.
“그래, 우리 지노 잘 보살펴 줘서 고맙다는 말도 하고 싶고.”
그쪽 마이아도 자기처럼 고백도 하기 전에 실연당하는 아픔을 당했는지도 좀 궁금하고.
‘어쩌면 동병상련의 아픔을 나눌지도?’
물론 마이아 쪽은 유더에게 그런 감정을 품지 않았을지도 모르지만.
어찌 되었든 정말로 한번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이아는 물론이고 달리아와 체이스 백작과도.
“아무튼 그럼 오늘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자. 잠은 우리 집에서 잘래?”
“음…… 그래도 되지만 호텔 갈래.”
이러나저러나 불청객이라 불편할 수도 있을 테니까.
나타샤를 생각해서 말한 코델리아였지만, 묘한 오해라도 했는지 나타샤는 다시 꽤나 복잡한 표정을 짓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럼 내일 보자.”
“응, 내일 봐.”
“내일 봐, 나타샤. 다시 한번 생일 축하해.”
유더의 진심 어린 목소리에 나타샤는 고개를 끄덕인 뒤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이십여 분 뒤.
호텔 방에 들어서던 코델리아는 돌연 유더의 팔을 꼭 끌어안으며 애교를 부리기 시작했다.
“저기, 저기. 유더야.”
“응, 안 돼. 정모 날까지는 비밀이야.”
코와붕가와 AAA에 대한 이야기들.
단호한 대답에 코델리아는 바로 입술을 삐쭉였지만 어림없는 일이었다.
지금 이렇게 삐진 척을 하는 코델리아가 세상 무엇보다 귀엽고 사랑스럽다고 느끼는 유더였으니 말이다.
“아무튼 정모 기대되긴 하지?”
“응응, 진짜 기대돼.”
코와붕가와 AAA의 정체도 정체였지만, 모두 한자리에 모인 채팅방 멤버들의 모습이.
“그럼 씻고 잘까?”
“응, 그러자. 같이 씻을까?”
약간의 수줍음이 담긴 코델리아의 물음에 유더는 은근한 미소로 화답했고, 행동을 개시했다.
그리고 이틀 뒤 오후.
채팅방 멤버들의 2차 정모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