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딩메이커 410화
제6장 - 침공
악마들의 종류는 다양했다.
사실상 지성이 없는 짐승과 같은 최하급 악마들이 주를 이루긴 했지만 개중에는 상당한 마력을 지닌 중급 이상의 악마들도 수십이나 섞여 있었다.
“고위 악마도 있어!”
최소 상급 이상으로 분류될 정도의 마력이었다.
악마 무리 사이에 자리하고 있어 그 모습을 제대로 확인할 순 없었지만 존재하고 있는 것만은 분명했다.
어찌할 것인가.
본체였다면 주저할 것도 없이 맞서 싸웠을 터였다.
하지만 이 자리에 있는 것은 본체가 아닌 아바타, 세상 간 이동을 위해 준비한 간이 육체였다.
자연 전투력 역시 본체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하지만 아주 싸우지 못할 것은 또 아니었다.
아바타라고는 하나 코델리아의 힘은 지천사에 준했고, 유더 자신도 구천구문의 사용 자체는 가능했다.
상대가 데몬프린스 이상의 강자만 아니라면 어떻게든 대응이 가능할 터였다.
유더는 다시 정면을 보았다.
코델리아는 이미 대단위 전투마법을 준비 중이었다.
강력한 범위 마법으로 선공을 가할 생각이 분명했다.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유더는 관찰을 통해, 코델리아는 직감을 통해 몰려오는 악마들에게서 위화감을 읽어냈고, 동일한 결론에 도달했다.
“공격해 오는 게 아냐.”
놈들의 목적은 유더 자신과 코델리아가 아니었다.
공격하기 위해 돌진해 오고 있는 것 역시 아니었다.
“도망치고 있는 거야.”
코델리아가 말했고, 유더는 동의했다.
놈들은 지금 도망치고 있었고, 놈들의 경로 상에 우연히 유더 자신과 코델리아가 위치한 것뿐이었다.
그렇다면 무엇일까.
수백에 달하는, 그것도 고위 악마까지 낀 무리가 무엇으로부터 도망치고 있는 것일까.
-고오오오오오오오!
멀리서부터 고래 울음 같은 거대한 소리가 밀려왔다.
하늘과 땅을 진감시키는 그것이 울린 순간 악마들은 공포와 두려움을 토해냈고, 개중에는 비명을 지르는 놈들까지 있었다.
코델리아는 반사적으로 마법을 취소한 뒤 마력을 가라앉혔다.
유더 또한 기를 끌어올리는 대신 낮춰 인기척을 지워 버렸다.
그리고 땅이 부서졌다.
도주하는 악마 무리의 후열 쪽 땅이 갈라지며 하얗고 거대한 무언가가 솟구쳐 올랐다.
-가아아아아아아아!
거대한 입을 벌렸다.
고래를 연상시키는 하얗고 거대한 몸체 가운데 3분의 1에 해당하는 거대한 입이 사방으로 크게 벌어지더니 그대로 악마 무리의 후열을 집어삼켜 버렸다.
마치 공간이 지워진 것 같았다.
수백 미터에 달하는 존재가 입을 벌려 악마들을 집어삼키는 모습은 공포 그 자체라 해도 좋았다.
대지를 부수며 솟구쳐 오른 고래.
백 미터에 달할 것 같은 거대한 길이와 몸 곳곳에 자리한 수많은 안구들.
지느러미 사이에 돋아난 크고 날카로운 뿔들.
“악마?”
작게 중얼거린 코델리아는 바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악마가 아니었다.
대천사의 영혼을 가진 그녀는 알 수 있었다.
종류는 달랐지만 저 괴물에게서는 일반적인 악마들에게서는 느낄 수 없는 힘이 존재하고 있었다.
“신성이 느껴져.”
신성.
신으로서의 성질.
신적 존재가 가진 존재의 증명.
악마들의 신이라 할 수 있을 대군주들에게도 신성이 존재하긴 했지만 종류가 달랐다.
대군주들이 가진 것은 신성이라기보다는 마성, 거대하고 강력한 마력의 덩어리에 가까웠으니 말이다.
신성을 가진 존재.
천상의 존재는 아니었다.
유더와 코델리아는 천상의 대천사들을 모두 알고 있었다.
눈앞의 고래 같은 괴물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무엇일까.
저 괴물의 정체는 대체-
그 순간이었다.
괴물의 몸에 달린 수많은 눈들 가운데 하나가 움직였다.
도주하는 괴물들의 경로에서 조금 벗어난 곳에 자리한 유더와 코델리아를 보았다.
유더의 녹색 눈동자와 코델리아의 파란 눈동자를 똑바로 마주하였다.
유더와 코델리아도 알았다.
눈이 마주쳤다.
괴물이 자신들을 인지했다.
-파파팟!
괴물의 몸에 달린 수백 개에 달할 눈동자들이 유더와 코델리아를 주시했다.
다시 한번 하늘과 땅을 울리는 고음이 터져 나왔고, 괴물이 몸을 틀어 진행 경로를 바꾸었다.
“이쪽으로 온다!”
“일단 튀어!”
코델리아를 단숨에 안아 든 유더가 벼락처럼 지면을 박찼다.
그리고 그런 유더를 향해 돌진하기 시작한 괴물의 전신에서부터 수백 개에 달하는 촉수들이 솟구쳐 올랐다.
유더는 살기를 감지했다.
그 순간 솟구쳐 오른 촉수들의 끝에서부터 새하얀 빛의 칼날들이 마치 총탄처럼 분사되었다.
칼날의 비였다.
단순히 뒤를 덮치는 수준이 아니라 유더의 경로 앞까지 덮치는, 그렇기에 도망칠 곳이 없는 회피 불능의 공격이었다.
하지만 유더에게는 아니었다.
천둔구보.
아홉 걸음이면 하늘로부터도 숨을 수 있나니.
빛의 칼날들은 유더와 코델리아를 해할 수 없었다.
유더는 마치 환영처럼 칼날의 비를 지나쳤고, 괴물은 성난 노성을 토하며 다시 한번 빛의 칼날을 분사했다.
하지만 이번엔 유더의 대응이 달랐다.
유더는 구천구문을 펼치는 대신 코델리아를 더욱 세게 끌어안았고, 코델리아는 유더의 품 안에서 완성한 마법을 시전했다.
“텔레포트!”
장거리 공간 도약.
유더와 코델리아가 빛이 되어 사라졌다.
빛의 칼날들이 지면을 뒤덮었지만 그때는 이미 두 사람의 모습이 사라진 뒤였다.
* * *
“하아.”
공격지점으로부터 약 2킬로미터 가량 떨어진 장소.
지면에 발을 디디자마자 자세를 낮춘 유더는 안도의 숨을 토했고, 코델리아 역시 그러했다.
유더의 품 안에서 빠져나온 그녀는 커다란 바위에 몸을 기댄 채 도망쳐온 방향을 바라보았다.
괴물이 신경질적인 비명을 지르며 악마들을 포식하고 있었다.
“일단 도망은 친 것 같아.”
본래라면 훨씬 더 먼 곳까지도 갈 수 있는 장거리 공간도약이었지만 준비한 시간이 짧았고, 무엇보다 제대로 된 좌푯값을 구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때문에 코델리아는 일단 시야가 닿는 위치로의 공간도약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저 괴물은 대체 뭐지? 애당초 왜 지옥에 오게 된 거고.”
공간의 문에 사용된 좌푯값은 틀리지 않았다.
그런데도 플레이아데스가 아닌 지옥에 도달했다면, 생각할 수 있는 경우의 수는 둘뿐이었다.
하나는 플레아이데스라는 세계 자체가 크게 움직여 좌푯값 자체가 달라졌을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공간의 문을 통한 이동 자체에 문제가 생긴 경우였다.
전자의 경우는 가능성이 거의 없으니 후자로 봐야 할 터인데, 후자의 이유를 떠올릴 수 없었다.
“코델리아, 우선은 저 괴물의 정체를 알아내야 할 것 같아.”
신성을 가진 존재가 지옥에서 날뛰고 있다.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면 유더 자신과 코델리아가 플레이아데스가 아닌 지옥에 불시착한 것은 저 괴물에 의해서일 가능성이 있었다.
“일단 중급 이상의 악마를 하나 잡아서 정보를 알아내자.”
유더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코델리아는 바로 손을 뻗어 염동력을 발동시켰다.
그러자 저만치 구석에서 악마 하나가 숨죽인 비명을 지르며 공중으로 솟구쳐 올랐다.
괴물을 피해 몸을 숨기고 있던 악마인 것 같았다.
“어, 어떻게?!”
“그냥 감으로.”
유더 외에는 누구도 납득하기 어려운 대답을 내놓은 코델리아는 염동력을 조금 더 강하게 가한 뒤 붙잡은 악마를 자신들 쪽으로 끌어당겼다.
“너, 우리 알지?”
반응을 보면 알 수 있었다.
애당초 텔레포트로 나타난 자신들을 보자마자 바로 기척을 죽이고 몸을 숨긴 것도 그래서일 가능성이 높았고 말이다.
“모, 모를 리가 있겠냐! 환장의 커플을!”
키가 3미터는 될 것 같은 건장한 악마가 눈물을 쫙쫙 쏟으며 하는 말이라 그런지 무척이나 진정성이 있어 보였다.
“그럼 이야기가 빠르겠네. 저 괴물은 대체 뭐지? 지옥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거고. 여기 숨어 있던 건 너도 저 괴물을 피하기 위해 그런 거 같은데.”
유더의 물음에 악마는 숨길 것도 없다는 듯 바로 입을 열어 말했다.
“외신(外神)들이다. 외신들이 지옥에 쳐들어온 거다.”
“외신?”
“그래, 외신. 이계의 신놈들이 지옥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있다.”
하나가 아닌 여럿이란 소리였다.
외신.
이계의 신.
악마들 입장에서는 유더와 코델리아 역시 외신일 터였다.
유더는 준신이라고는 하나 플레이아데스의 수호신이었고, 코델리아는 천상의 대천사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저 괴물은 플레이아데스도, 천상에도 속하지 않은 존재였다.
플레이아데스도 천상도 아닌 다른 세계의 신들.
“외신들이 왜 지옥에 쳐들어온 거야? 아니, 애당초 대군주들은 뭐하는 거지? 자기네 영역이 쑥대밭이 되고 있는데.”
대군주들은 굳이 따지면 지옥의 신들이었다.
그런 대군주들이 저런 괴물들이 마음껏 날뛰는 것을 그냥 지켜만 보고 있단 말인가?
코델리아의 물음에 악마는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느냐는 듯한 얼굴이 되더니 악에 받친 목소리로 외쳤다.
“네놈들이 조졌잖아! 네놈들이!”
외신들에 맞설 대군주가 있었는데 사라졌다.
눈앞의 둘- 플레이아데스의 외신들에 의해.
“아, 여기 아스모데우스 영역이었구나.”
어쩐지 모르게 민망해진 코델리아는 에헤헤 웃었고, 악마는 분함을 못 참겠는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유더는 그런 악마에게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지옥 전체가 공격받고 있는 건가?”
“그래, 다른 구역은 대군주님들이 방어에 나서고 계시지만…… 대군주님들이 안 계신 지역은 외신들에 의해 유린당하고 있는 실정이다.”
악마가 이 참상을 대체 어찌하느냐는 듯 안타까운 얼굴로 말하자 코델리아는 미간을 좁혔다.
“아니, 왜 선량한 시민인 척하는데. 너희 악마잖아. 니들도 평소에 하는 짓이잖아.”
“크윽.”
얼굴을 보니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라는 말을 하고 싶은 것 같았지만 악마들 사이에 악명이 자자한 환장의 커플 앞이라 입이 떨어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외신들이 어디에서 왔는지는 모르나?”
“정확히는 모르지만, 놈들이 온 경로 자체는 알고 있다.”
다소 이상한 대답에 코델리아는 고개를 갸웃했고, 유더는 눈을 가늘게 떴다.
두려움과 희열이 뒤섞인 악마의 표정을 본 순간 놈의 입에서 나올 말을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설마-”
“그래, 놈들은 플레이아데스에 가지 못한 놈들이다.”
한발 늦은 자들.
플레이아데스에 가지 못해 이웃한 지옥으로 발길을 돌린 자들.
“외신들에게 침공 받고 있는 건 지옥만이 아니다. 아니, 지옥은 오히려 덤에 불과하다.”
악마는 음산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유더는 놈의 말을 기억했다.
플레이아데스에 가지 못한 자들.
그렇기에 발길을 돌린 자들.
좌푯값이 틀리지 않음에도 갈 수 없었던 플레이아데스.
외신들이 더 이상 들어갈 수 없게 된 플레이아데스.
어린 신 아탈리아가 외신들의 침공을 막기 위해 플레이아데스를 봉인한 것이라면 그나마 다행이었다.
하지만 만약 그것이 아니라면.
외신들에 의해 플레이아데스가 침공받는 와중에 다른 이유로 세계 자체가 봉인된 것이라면.
그리고 외신들.
한발 늦지 않아 이미 플레이아데스에 도착한 외계의 신들은-
유더와 코델리아는 서로를 보았다.
그리고 이해했다.
플레이아데스는 외신들에 의해 침공받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플레이아데스의 수호신인 유더 자신과 코델리아는 플레이아데스가 아닌 지옥에 발이 묶이고 말았다.
* * *
외신들이 내려왔다.
숨죽이고 있던 재앙들이 다시 일어섰다.
그 모든 것을 지켜보는 이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플레이아데스에 발을 디딘 첫 번째 외신.
다른 모든 외신들을 이 땅에 불러온 자.
그녀는 웃으며 속삭였다.
품 안에 자리한 부서진 세계를 끌어안으며 아름답게 읊조렸다.
“시작하자.”
재생을 위한 발걸음을.
다시 한번 더 사랑하는 모두와 만나기 위해.
외신 아이리아.
부서진 세계의 여신은 새하얀 미소를 머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