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딩메이커 411화
제6장 - 침공 #2
플레이아데스가 외신들에게 침공받고 있다.
상상도 못 한 소식에 코델리아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을 느꼈다.
“달리아.”
반사적으로 떠오른 이름은 달리아만이 아니었다.
아버지와 언니, 오빠, 엠버와 에이든.
소중한 이들의 이름이 순식간에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그들이 위험하다.
그들 모두가 미증유의 위기에 처했다.
“진정해 코델리아.”
유더가 말했다.
플레이아데스가, 그 안에 사는 모든 이들이 위험에 처했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은 것은 유더 역시 마찬가지였지만 스스로를 다스렸다.
-항상 냉정을 유지해라. 승리 조건을 잊지 마라.
알렉세이의 가르침은 지금도 유효했다.
유더는 코델리아를 꼭 끌어안았다.
불안함과 초조함으로 요동치던 코델리아의 심장박동을 고스란히 느끼며 그녀에게 체온을 나눠주었다.
“괜찮을 거야.”
지구에 가 있던 시간은 고작해야 닷새 정도에 불과했다.
아무리 시간의 흐름이 다르다고는 하나 길게 잡아도 열흘 정도의 시간밖에 지나지 않았을 터였다.
자신들이 떠나자마자 외신들이 쳐들어온 것은 아닐 터이니 실질적인 침공이 이루어진 것은 길게 잡아도 일주일 남짓.
그러니 괜찮았다.
일주일 만에 무너질 플레이아데스가 아니었다.
“괜찮아, 괜찮을 거야.”
유더는 코델리아와 스스로에게 말했다.
동시에 스스로의 말을 지탱하기 위해 여러 가지 근거들을 떠올렸다.
“외신들 하나하나가 모두 대군주나 대천사에 필적하는 것은 아니야.”
악마 무리를 집어삼키던 거대한 고래 괴물 역시 외신이었다.
하지만 신성을 가졌을 뿐, 놈의 강함이 대군주에 필적하는 것은 아니었다.
데몬프린스보다 아래.
신의 이름을 가지고 있지만, 분명 강대한 존재들인 것은 분명하지만 절대적이진 않은 자들.
“아탈리아가 있어. 더욱이 그녀만이 아니야. 알고 있잖아? 순환의 연쇄가 끝난 이후 다시 깨어나기 시작한 플레이아데스의 옛 신들을.”
비밀과 베일의 신 바루나를 비롯한 플레이아데스의 옛 신들.
코델리아의 호흡과 심박이 점점 안정을 찾아갔다.
유더는 그런 코델리아를 한 번 더 꼭 끌어안은 뒤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스승님이 계시잖아?”
태양의 영웅이.
언제 어디서나 믿고 의지할 수 있는 무적의 용사가.
“항상 근육이 함께하기를.”
코델리아가 주문처럼 외웠고, 놀랍게도 상당한 효과를 볼 수 있었다.
“그래, 맞아. 란디우스가 있어.”
그 이름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마음을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란디우스가 있다.
파라곤의 다섯 영웅들이 있다.
코델리아는 어깨를 늘어뜨린 채 유더에게 몸을 기댔고, 유더는 그런 코델리아의 등을 가볍게 쓸어주었다.
“이제 좀 진정됐어?”
“진정됐어, 고마워.”
작게 말한 코델리아는 몸을 바로 한 뒤 힘껏 미소를 지었다.
태양의 소녀.
플레이아데스를 밝게 비추는 태양의 신.
유더는 그런 코델리아의 이마에 키스한 뒤 바로 말을 이어나갔다.
“일단 정보를 좀 더 모아야 해.”
자신과 코델리아가 이야기하는 사이 슬금슬금 도망칠 각을 재고 있던 악마를 향해 흑룡의 기운을 마치 촉수처럼 내뻗어 붙잡은 유더였지만, 사실 악마에게는 더 이상 기대하는 바가 없었다.
코델리아도 그런 유더의 심산을 눈치챈 듯 붙잡혀 쓰러진 악마에게 항마력 저하 마법을 건 뒤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말을 하는지 알겠어.”
단순히 정보가 필요하다는 말을 알겠다는 것이 아니었다.
정보의 출처.
지금 당장 유더와 코델리아 자신이 만나야 하는 사람.
악마로 가득 찬 지옥에서 믿고 의지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이들 가운데 하나.
“끼에엑!”
흑룡을 타고 흐른 기운에 한바탕 비명을 지른 악마가 축 늘어지는 가운데 유더는 빙긋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오랜만에 만나러 가자.”
“응.”
아스모데우스와의 격전에서 든든한 우군이 되어주었던 이.
대군주와의 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지옥에 남는 것을 선택했던 사람.
“마녀님.”
깊은 숲의 마녀.
그녀를 만나야 했다.
* * *
깊은 숲의 마녀를 찾는 일은 생각보다 쉬운 편이었다.
애당초 아스모데우스의 영역에 자리를 잡은 그녀였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녀는 혼자가 아니었다.
“마녀의 영역?! 거길 내가 왜 끄악!”
반항적인 태도를 보이던 악마였지만 유더와 코델리아가 번갈아가며 몇 번 쓰다듬어 주자 무척이나 순종적인 안내인이 되어 묻지도 않은 말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깊은 숲의 마녀가 이끄는 세력은 건재합니다. 아스모데우스의 영역에 강림한 외신들은 다른 영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약하거나 짐승에 가까운 존재들이 많아 마녀의 결계를 간파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외신들을 피해 마녀의 세력에 몸을 의탁하는 악마들도 적지 않은 것으로 압니다.”
과거 유더와 코델리아가 아스모데우스와 전쟁을 벌였을 때, 두 사람은 단둘만의 전쟁을 벌인 것이 아니었다.
깊은 숲의 마녀와 그녀의 친우인 악마명공 카시우스.
단신으로 지옥을 헤매며 혼자만의 전쟁을 지속하던 치천사 마나엘.
아스모데우스에게 반기를 들고 유더와 코델리아에게 충성을 맹세한 악마의 노예들까지.
유더와 코델리아는 세력을 이끌고 아스모데우스와 맞섰고, 그 세력은 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건재했다.
-내게 맡기렴.
플레이아데스로 돌아가야 하는 유더와 코델리아와 달리 깊은 숲의 마녀는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다.
그녀는 이미 반쯤은 악마라 해도 과언이 아닌 마녀였기 때문이다.
“더 커진 거 같지 않아?”
“그런 것도 같네.”
넓게 펼쳐진 숲을 보며 유더는 미간을 살짝 좁혔다.
코델리아의 말처럼 정말 숲이 커졌기 때문이다.
마녀의 힘이 강해진 덕분일까, 아니면 자신들이 떠나 있는 사이에 주인 없는 땅을 차지한 마녀의 세력이 더 커진 것일까.
어느 쪽이든 나쁠 것은 없었기에 유더와 코델리아는 이제 그만 놓아달라는 악마를 숲의 수문장인 트리언트들에게 던져준 뒤 발걸음을 서둘렀다.
“길이 열리고 있어.”
유더의 말대로였다.
마치 페어리들의 거처에 들어온 것처럼 한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주변의 풍경이 빠르게 바뀌었다.
깊은 숲의 마녀가 자신들을 불러들이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리고 어느 한순간.
빠르게 변하던 주변의 풍경이 정지했다.
서로 엉켜 하늘을 가리는 가지들과 키가 무척이나 큰 나무들.
그 아래 자리한 이끼들과 어디선가 불어오는 물 냄새 가득한 바람.
그리고 눈앞에 자리한 거대한 옥좌.
“오랜만이구나.”
깎거나 잘라 만든 것이 아닌, 스스로 자라 옥좌의 형태를 취하고 있는 나무 위에 아름다운 여인이 앉아 있었다.
비단처럼 흘러내려 전신을 감싸는 검고 긴 머리칼과 그 사이에 자리한 새하얀 나신.
나른한 표정 사이에 자리한 물기 어린 보랏빛 눈동자.
“어…… 마녀님. 혹시 뭐 전직 같은 거 하신 거 아니죠?”
서큐버스 퀸이라든가?
이전에 만났을 때보다 퇴폐미가 훨씬 더 강해진 마녀의 모습에 코델리아는 유더의 눈을 가리며 물었고, 마녀는 언제나처럼 나른한 미소를 흘리며 답했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니구나.”
“에, 진짜요?”
“그래, 하지만 지금 나눌 이야기는 아니겠지. 훨씬 더 중요한 일이 있잖니?”
마녀의 얼굴에는 여전히 미소가 걸려 있었지만 코델리아는 느낄 수 있었다.
마녀의 상태는 정상이 아니었다.
영육의 손상이 적지 않은 것 같았다.
“외신들의 침공이 시작된 지 닷새가 지났단다. 그 닷새 사이에 많은 일들이 있었어. 하지만 이야기에는 우선순위가 있는 법이란다. 우선은 너희에게 가장 필요한 이야기들을 해주고 싶구나.”
유더와 코델리아의 발치에서 새싹이 돋아나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굵직한 나무로 자라 멋들어진 의자의 형상을 갖추었다.
유더는 눈을 가리고 있던 코델리아의 손을 살며시 밀어낸 뒤 마녀를 보았다.
굳이 구천구문의 투시력을 발휘하지 않아도 알 수 있을 정도로 마녀의 상태가 좋아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숲을 지키기 위해 이미 외신들과 한바탕 격전을 펼친 것일지도 몰랐다.
‘카시우스와 마나엘이 보이지 않는 것도 신경 쓰여.’
하지만 마녀의 말마따나 모든 일에는 우선순위가 있는 법이었다.
유더는 무어라 말을 꺼내는 대신 경청하는 자세를 취했고, 마녀는 여전하다는 듯 새삼 다시 나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지옥에 외신들이 나타난 것은 앞서 말한 것처럼 닷새 전이란다. 하지만 플레이아데스에 나타난 것은 조금 더 이른 시기가 아닐까 하구나. 플레이아데스가 봉인된 직후, 갈 곳을 잃은 외신들이 지옥과 천상에 강림하였으니 말이다.”
악마에게 들은 이야기와 같은 맥락이었다.
하지만 지옥에 이어 천상에까지 외신들이 강림했다니.
도대체 얼마나 많은 외신들이 플레이아데스에 몰려들었기에 이런 일들이 생겼단 말인가.
“우선 너희에게 외신에 대해 설명해 주어야겠구나.”
외신.
이름 그대로 외계의 신.
우리 세계가 아닌 다른 세계에서 온 신적 존재들.
“신들에게도 여러 종류가 있듯이, 외신들 또한 여러 종류가 있단다.”
주변의 풍경이 다시 변하였다.
검고 어두운 보랏빛 우주에 작은 별빛들이 애처로운 빛을 발하고 있었다.
“세계는 정원, 신은 정원을 관리하는 정원사. 그렇기에 신의 힘은 세계 그 자체로부터 나온단다.”
원론적인 이야기였고, 이미 유더와 코델리아가 체득하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렇기에 신들은 여간해서는 자신들의 세계를 떠나지 않는단다. 특별한 용무가 있지 않다면 말이야. 그렇기에 플레이아데스와 지옥, 천상처럼 서로 이웃한 세계의 신이 아니라면 외신을 목격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란다.”
사실 저 세 개의 세계에 속한 신들 또한 대부분 자신들의 세계에 머물 뿐이지 직접 다른 세계에 모습을 드러내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신들이 있단다. 외신들. 자신들의 세계를 잃은 자들. 자신들을 믿고 받들어줄 신도들을 잃고 만 가엾은 자들.”
육신을 잃은 원혼들이 산 자의 육신을 갈망하고 탐하듯 외신들은 세계를 원했다. 다시 한번 자신들에게 믿음을 바칠 신도들을 갈망했다.
“근거를 잃은 그들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쇠약해지고 잊힐 수밖에 없단다. 그렇기에 그들은 잊히지 않기 위해, 고갈되는 영혼을 채우기 위해 여러 세계를 떠돌며 힘을 모은단다.”
마치 악마처럼 영혼을 대가로 한 계약을 맺거나, 악마 무리를 향해 달려들던 고래 괴물처럼 직접 영혼을 포식하거나.
“외신들은 무리를 이루는 경우가 거의 없단다. 하지만 이번에는 이례적일 정도로 무리를 이루었어. 더욱이 일반적이지 않은, 세계 하나를 봉인할 정도의 힘을 가진 외신까지 개입했단다.”
어째서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일까.
이 모든 일을 초래한 자는 대체 누구이고 어떤 목적을 가진 것일까.
“그 외신이 누구인지는 아직 알 수 없단다. 하지만 그 외신이 다른 모든 외신들을 플레이아데스로 불러들인 것과 플레이아데스를 봉인해 새로운 외부로부터의 개입을 차단한 것만은 분명하단다.”
유더는 마녀의 이야기에서 맥락을 짚어냈다.
결국 궁극적인 적은 하나라는 뜻이었다.
세계를 봉인할 정도의 힘을 가진 외신.
“플레이아데스에 진입할 방법이 있을까요?”
유더의 물음에 마녀는 깊은숨을 내쉬었고, 천천히 눈을 감으며 새로운 이야기를 시작했다.
* * *
모든 외신들이 실체를 지닌 것은 아니었다.
모든 외신들이 세계를 봉할 정도로 강한 힘을 지닌 것은 아니었다.
플레이아데스에 강림한 외신들 대부분은 그저 제멋대로 날뛰며 굶주림을 채우고 싶어 했지만 그렇지 않은 자들도 있었다.
부서진 세계의 여신 아이리아와 뜻을 같이하기로 한 외신들은 그녀를 돕기 위해 저마다의 행동을 개시했다.
실체를 가진 자들은 직접 세계에 강림하였고, 실체를 가지지 않은 자들은 자신들의 힘과 의지를 대행할 자를 플레이아데스에서 찾고자 하였다.
그리고 외신 가운데 하나가 어떤 영혼을 찾아냈다.
혼탁함 속에서 너무나 아름다운 빛을 발하는 영혼을.
이미 죽어 사라져야 했지만 강한 갈망으로 말미암아 순리를 거스르고 있는 영혼을.
외신 하나가 영혼에 다가섰다.
너무나 탐스러운 영혼에 다른 외신들 역시 모여들었다.
외신이 말하였다.
너에게 다시 한번 육신을 주겠다.
너에게 다시 한번 거짓된 삶이나마 생을 부여해 주겠다.
영혼이 반응을 보였다.
갈망뿐이던 혼탁함에 이지가 어리기 시작했다.
상상 이상으로 뒤틀리고 추악한, 하지만 거대한 순수를 간직한 기묘한 영혼이었다.
그렇기에 외신들은 눈앞의 영혼에 더욱 탐심을 보였다.
모여든 외신들이 달콤한 계약들을 늘어놓았다.
-너에게 하늘을 부술 힘을 주겠다.
-너에게 결코 쇠하지 않는 육신을 주겠다.
-너에게 강대한 마력을 주겠다.
-너에게…….
수많은 권능과 이능들.
하나만 손에 넣어도 세상을 혼란에 빠뜨릴 수 있는 외신의 힘들.
누구나 탐할 만한 것이었다.
누구나 마다하지 않을 제안들이었다.
하지만 이지를 얻고 존재를 자각한 영혼은 의외의 반응을 보였다.
“그런 것은 필요하지 않다.”
권능과 이능은 눈을 흐릴 뿐이다.
그런 것은 지평으로 길을 어지럽힐 따름이다.
경험이 있기에 알 수 있었다.
몇 번이나 주어진 기회 속에서 매번 같은 선택을 해 길을 잃고 만 어리석은 자신을 보았기에 단언할 수 있었다.
악마의 힘에 취하고, 독에 의존하고, 강대한 마력에 빠져 정작 나아가야 할 길을 잃은 어리석은 자.
모든 권능과 이능을 거부하였다.
그저 죽음에서 일어나 한 자루 검을 거머쥐었다.
그리고 남자는 보았다.
자신이 지나온 길을.
누구보다 곧고 아름답게 뻗은, 하지만 중간에 끊어지고 만 길을.
그리고 남자는 다시 보았다.
끊어진 길 너머를.
검을 쥔 이후 언제나 갈망해 온 검의 지평을.
“그런 것은 필요하지 않다.”
필요한 것은 그저 나아가고자 하는 의지.
우직하기 짝이 없는 성왕의 계승자가 보여주었던 것과 같은.
남자는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발걸음을 내디뎠다.
지평을 향해.
잃어버렸던 곧은 길을 따라.
룬 프라우드.
제일검.
그가 다시 검을 들어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