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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딩메이커-414화 (414/473)

엔딩메이커 413화

제7장 - 강습 #2

아탈리아는 숨을 골랐다.

세계 각지에서 일어나고 있는 참극이, 사람들의 비명이 머릿속에서 울려 퍼지고 있었지만 애써 침착함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어려운 일이었다.

어린 신의 작고 가냘픈 육체는 순식간에 식은땀으로 젖어 범벅이 되었고, 눈에서는 어찌하지 못한 눈물이 샘물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아탈리아는 스스로를 진정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이를 악물고 고개를 쳐들었다.

“92개체.”

플레이아데스에 강림한 외신들의 숫자였다.

그들 모두가 강대한 존재들인 것은 아니었다.

세계를 잃고 신도를 잃고 신성의 껍데기만을 유지하고 있는 자들의 숫자가 적지 않았다.

아탈리아는 그들을 다시 분류하였다.

동시에 다시 깨어나기 시작한 옛 신들은 물론이고 저 먼 북부에 자리한 황금의 용왕과도 소통을 시도했다.

황금의 용왕은 싸우고 있었다.

야생의 땅에 강림한 외신들이 야생신들과 뒤섞여 전쟁을 하고 있었다.

이제 막 시작된 싸움이었지만 그 격렬함이 상상을 초월했다.

비록 영락하고 쇠약했다고는 하나 신성을 가진 자들 간의 싸움이었다.

“북부에 32개체.”

외신들 가운데 3분의 1가량이 야생의 땅에 강림했다.

마구잡이로 보이는 강림이었지만 아탈리아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외신들의 강림에는 아이리아의 의도가 담겨 있었다.

‘황금의 용왕을 차단한다.’

유더와 코델리아가 없는 지금, 아탈리아 자신이 유명무실한 주신임을 고려한다면 플레이아데스에서 가장 강한 힘을 가진 신적 존재는 황금의 용왕이었다.

비록 그가 야생의 땅에 묶인 존재라고는 하나 아이리아에게 있어서는 최대의 위협 요소이니 지금처럼 다른 곳에 신경을 못 쓰게 만드는 것은 꽤나 합리적인 판단이었다.

그리고 아탈리아는 확신할 수 있었다.

‘알고 있어.’

아이리아는 단순히 세계석의 존재만을 알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세계석이- 아탈리아가 셋으로 나눈 세계석들이 어디에 위치하고 있는지 알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세일룬 왕국와 아르곤 제국.

서방에는 열 개도 넘는 나라들이 있었지만 외신들이 강림한 곳은 오직 두 나라뿐이었다.

저 둘이 차지하고 있는 영토가 나머지 나라들 전부를 합친 것보다 넓기 때문만이 아니었다.

‘의도적이야.’

세계석이 없는 땅에는 외신들을 배치하지 않는다.

애당초 외신들의 존재는 각지에 분란을 일으켜 혼란을 야기하는 것일 터이니.

아탈리아는 눈을 감고 의식을 집중하였다.

서방과 동방의 경계지대에 나가 있던 성십자 수호단의 눈을 통해 전장을 보았다.

수십만을 우습게 헤아리는 창천의 용의 대군이 물밀듯이 서쪽을 향해 진군하고 있었다.

단순한 인간의 군대가 아니었다.

외신들은 물론이고 과거 악마추종자들이 부렸던 마수들까지도 포함된 인외의 군단이었다.

‘단숨에 돌파하는 것은 무리다.’

세일룬 왕국군과 아르곤 제국군이 있었다.

서로 적대 관계인 두 나라였지만 창천의 용의 군대 앞에서는 힘을 합칠 터였다.

더욱이 벨키안과 프란이 국경 지대에 자리하고 있었다.

창천의 용의 군대가 아무리 강맹하다 한들 단숨에 국경을 넘어 왕도와 제도를 향해 진군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렇다면 왜일까.

저 군대는 무슨 의미를 가질까.

‘야생의 땅과 같아.’

지킬 곳을 늘리는 것이었다.

수십만 대군이 밀려드는 와중이니 왕국군과 제국군은 국경을 막지 않을 수 없었다.

창천의 용에 대한 소문 때문에 국경 지대에 나가 있던 이들 역시 왕도와 제도로 부르지 못할 터였다.

‘역시 알고 있어.’

세계석들의 위치.

세일룬 왕국의 왕도와 아르곤 제국의 제도, 그리고 유델리아 신성국의 수도.

서방 대륙에서 가장 안전한 동시에 가장 방비가 잘되어 있는 세 곳이었다.

아탈리아는 잠시 눈을 감고 숨을 토했다.

마른침을 삼킨 뒤 다시 이를 악물고 신의 눈으로 정면을 보았다.

예상했던, 하지만 가장 바라지 않았던 현실이 펼쳐지고 있었다.

* * *

“전격전이야.”

흐드러지게 많은 별빛 아래에 선 아이리아는 기분 좋게 웃으며 말했다.

그녀가 플레이아데스를 발견한 것은 최근의 일이 아니었다.

그녀는 무척이나 오래전부터 플레이아데스에 대해 알고 있었다.

부서진 세계의 여신.

부서진 세계의 마지막 생존자.

자신의 세계와 종족과 사랑하는 모든 이들을 잃어버린 채 혼자 남은 외톨이.

그녀가 플레이아데스를 발견한 것은 우연이 아닌 필연이었다.

부서진 세계에 얼마 남지 않은 인연의 끈을 추적한 결과.

오래전 승천하여 세계를 떠났던 이가 남긴 흔적.

처음에는 그저 지켜만 보았다.

반복된 시련 속에서도 끝끝내 포기하지 않고 일어서는 아탈리아와 유더를 응원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아이리아는 유더와 코델리아를 보며 생각했다.

자신 역시도 행복한 결말을 바란다고.

행복을 쟁취하기 위해 자신 역시도 일어서야 한다고.

“세계를 되찾을 거야.”

부서진 세계를 다시 온전한 세계로 만들 거야.

세계를 다시금 생명으로 가득 채울 거야.

오래전 사라진 자신의 종족을 떠올린 아이리아는 눈물 섞인 미소를 지으며 정면을 보았다.

계획대로 일이 돌아가고 있었다.

세계 각지에 강림한 외신들 앞에 플레이아데스는 혼란에 빠졌고, 동방에서 출병한 대군의 존재를 감지하고 있던 왕국군과 제국군은 국경 지대에 다수의 병력과 무장들을 배치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여기에 결정타를 날리자.

속도전으로 몰고 가 아탈리아가 대응할 방법 자체를 짜내지 못하게 만들자.

“세계석은 모두 셋.”

아탈리아가 반복한 무리한 세계의 이어붙임으로 드러나고 만 세계의 골조.

세계의 근원.

아이리아는 가늘고 긴 손가락을 앞을 향해 뻗었다.

승리를 쟁취하기 위해 준비해 온 수들을 아낌없이 내놓았다.

* * *

분명 언제나와 같은 날이었다.

아침과 밤이 뒤섞인 어둑어둑한 하늘을 보며 일어나 수련을 하고, 씻고, 의복을 정돈한 뒤 햇살을 받으며 왕궁으로 향한다.

“좋은 아침이야.”

“응, 좋은 아침.”

본궁에서 마주한 마이아와 아침 인사를 나눈 뒤 기사단장의 집무실로 이동한다.

자잘한 서류 작업을 마치고 나면 어느새 정오가 되고, 식사를 위해 본궁으로 향한다.

본래 기사단 내에서 부하들과 함께 해결하던 식사였지만 끼니를 자주 거르는 마이아의 식사를 챙기다 보니 점심은 늘 본궁에서 먹게 된 탓이다.

마이아도 달리아 자신이 같이 먹자고 하면 못 이긴 척 식사를 했으니까.

그렇게 점심을 먹은 뒤에는 왕궁 내부를 한 차례 점검한 뒤 왕궁 밖으로 순찰을 나간다.

사실상 도시국가라 해도 과언이 아닐 유델리아 신성국이었지만 꼼꼼히 국경 전체를 순찰하려면 하루 이상이 필요했다.

마이아의 배웅을 받으며 순찰을 나선다.

오늘은 국경 전체가 아니라 북부 국경 일대만 돌아보고 올 예정이니 저녁 식사 전에는 돌아올 수 있을 거다.

-오늘 저녁에는 달리아 좋아하는 돼지구이랑 벌꿀에 절인 복숭아를 준비해 둘게.

출발하기 직전에 마이아가 귓가에 속삭인 이야기를 떠올리니 얼굴에 미소가 그려진다.

딱히 먹보인 것은 아니지만- 마이아의 요리는 정말 맛있으니까. 벌꿀에 절인 복숭아는 너무 달고.

아가씨도 같이 드시면 참 좋을 텐데. 언제쯤 돌아오시려나. 빨리 오시면 좋겠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순찰을 하다 보면 어느새 북부 국경에 도착한다.

높은 성벽과 병사들.

교황 성하- 유더 도련님께서 방위에 무척이나 신경을 쓰신 터라 유델리아 신성국은 국경 전체를 무려 세 겹이나 되는 성벽들로 감싸고 있다.

좀 과한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지만, 그만큼 아가씨나 마이아- 그리고 유델리아 신성국의 사람들이 안전하겠거니 하면 마음이 든든해진다.

“예쁘다.”

길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핀 하얀 꽃 한 송이에 눈이 간다.

청초하면서도 우아한 게 마이아를 닮은 것 같다.

‘마이아는 정말 예쁘니까.’

같은 여자가 봐도 감탄이 나온다고 해야 하나.

문득 작년 겨울에 있었던 일이 떠오른다.

벽난로 앞에 마이아랑 나란히 앉아서 담소를 나누었는데…… 벽난로의 불빛이 비친 마이아의 얼굴이 너무 예뻐서 나도 모르게 넋 놓고 바라보고 말았다.

발갛게 달아오른 뺨과 가늘고 긴 속눈썹이 정말로 인형 같았다.

“가져가면 좋아하려나.”

마이아가 웃는 모습을 떠올리니 결정도 하기 전에 몸이 움직인다.

조심스럽게 꽃을 뿌리까지 따고, 마이아가 직접 수를 놓아준 손수건으로 감싸고-

순간 고개를 번쩍하고 들었다.

온몸에 전율이 일 정도의 불길함.

동시에 등 뒤에서 터진 부하들의 비명과 울부짖음.

“단장-”

돌아볼 수 없었다.

거대한 폭발과 충격에 치여 바닥을 뒹굴었다.

“하악…… 읏…… 하…….”

달리아는 억지로 눈을 떴다.

꿈인지, 아니면 스스로 한 생각인지 모를 생각과 기억들이 현재와 억지로 이어졌다.

“윽…… 아…….”

지릿한 통증에 인상을 찡그렸다.

온몸이 아픈 가운데 다리 아래쪽의 감각이 둔했다.

억지로 고개를 들어 살펴보니 파편 같은 것이 허벅지에 박혀 있었고, 하반신이 피투성이였다.

“끄윽…….”

파편을 뽑아낸 뒤 손바닥으로 허벅지를 짓누르며 상체를 온전히 일으켜 세웠다.

끔찍한 광경이었다.

검게 그을린 지면과 문자 그대로 녹아내린 말과 부하들, 곳곳에서 피어오르는 화마.

달리아는 상비하고 있는 포션을 상처에 부은 뒤 신음과 함께 몸을 일으켜 세웠다.

하늘이 잿빛이었다.

하지만 아직 낮이었고, 달리아는 자신이 의식을 잃은 시간이 그리 길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국경 지대의 성벽은 이전과 달랐다.

무너진 성벽에 시선을 두는 대신 달리아는 왕궁이 있는 방향을 돌아보았다.

연기가 치솟고 있었다.

어둡고 불길한 검은 연기가.

* * *

세일룬 왕국의 십검호가 있다면 제국에는 열두 소드 마스터가 있었다.

사라 카노트.

제국이 자랑하는 소드 마스터들 가운데 하나인 그녀는 잘려 나간 손목을 붙잡은 채 눈앞의 남자를 바라보았다.

처음 보는 남자였다.

하지만 사라는 남자가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그랬기에 그녀는 지금의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피로 물든 길 위에서 남자가 검을 휘두른다.

막지 못한다.

사라 자신은 물론이고 길가에 쓰러진 수십 명의 기사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남자의 검 앞에 무참히 쓰러져 간다.

“제일…… 검.”

남자의 별칭.

제국 최강을 논하던 그랜드 소드 마스터 갤러헤드를 참수한 왕국의- 아니, 악마의 주구가 된 타락한 검성.

그는 죽었다.

유더 바이엘이 그를 참하였다.

하지만 그런 그가 지금 눈앞에 있었다.

그저 검을 휘두르며 제도로 들어서고 있었다.

막아야 한다.

하지만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단순히 손목이 잘리고 가슴을 베였기 때문만이 아니었다.

눈앞의 남자가 무섭다.

두렵다.

다시 앞에 서고 싶지 않다.

사라 카노트는 울면서 일어섰다. 벌벌 떨면서도 어떻게든 남자의 앞을 막아서기 위해 발걸음을 떼었다.

제일검은 그런 사라를 돌아보았다.

옅은 미소를 그리며 검을 휘둘렀다.

저항할 틈도 없이 배를 깊게 베인 사라가 피를 왈칵 쏟으며 쓰러졌다.

검격이 닿지 않는 거리에 있는 사라였지만, 지금의 제일검에게 그런 거리 따위는 그리 큰 의미를 갖지 못했다.

단지 벤다는 동작만이 중요할 따름이었다.

“지평인가.”

제일검은 낮게 읊조리며 정면을 보았다.

제도로 이어지는 길 앞에 가로놓인 거대한 성문이 보였다.

높이가 얼마나 되는 것일까.

어림짐작으로 보아도 십 미터 이상은 될 것 같은데.

제일검은 성문을 향해 나아갔다.

소드 마스터까지 포함된 임페리얼 나이트들이 학살당하는 것을 보고 도망친 겁쟁이들이 성문을 굳게 봉한 지 오래였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일검.

검을 휘둘렀고, 성문이 갈라졌다.

아니, 베인 것은 성문만이 아니었다.

성벽 전체가 둘로 갈라졌다.

성문이 쓰러진다.

제일검의 앞을 가로막던 벽이 사라진다.

제일검은 곧게 뻗은 길 너머를 바라보았다.

제도의 중심에 자리한 황궁과 지평 너머를 겹쳐 보았다.

제일검의 얼굴에 다시 미소가 번졌다.

곧게 뻗은 길을 따라, 제일검은 발걸음을 내디뎠다.

앞을 향해 나아갔다.

* * *

왕도에 비상이 걸렸다.

악마 추종자들의 왕도 공습을 경험했던 왕도는 더 이상 과거와 같지 않았다.

비상계엄이 발표되고 한 시간도 되지 않아 완벽한 요새도시로 변모하였다.

“적이 온다.”

다프네 왕세녀는 주먹을 꼭 쥐고 성벽 너머를 노려보았다.

대천사 라구엘의 목소리가 끊기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탈리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서 미리 준비를 갖출 수 있었다.

디온 왕자가 이끄는 근위 마법 병단이 성벽 위에 도열했다.

왕도에 체류 중이던 검호들 역시 전투태세를 갖추었다.

상당한 방비였다.

지금의 왕도를 무너뜨리는 것은 수만- 아니, 십만의 군세로도 어려울 것 같았다.

하지만 남자는 그런 것을 신경 쓰지 않았다.

거대한 남자였다.

상처투성이인 몸과 용의 눈을 가진 그의 곁에는 네 마리 짐승의 형태를 갖춘 외신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창천의 용.

수많은 외신들의 힘을 받아들여 스스로가 인신이 된 자.

“새로운 세계를 위해.”

부서진 세계의 여신인 아이리아가 약속한 세계.

창천의 용은 힘을 개방하였다.

왕도를 향해 별을 떨어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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