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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딩메이커-415화 (415/473)

엔딩메이커 414화

제8장 - 격화

아탈리아가 세계 각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감지하며 괴로워할 때 아이리아는 빙글빙글 하얗고 아름다운 미소를 머금었다.

각지에 혼란을 야기한 뒤 세계석이 위치한 곳들에 가장 강한 기물들을 배치한다.

단숨에 세계석들을 빼앗아 일을 마무리 짓는다.

유더와 코델리아가 돌아왔을 때는 이미 모든 일이 끝나 있으리라.

“서두르는 게 좋을 거야, 아탈리아.”

부서지는 세계를 그저 바라만 보는 것은 정말로 끔찍한 일이니까.

아이리아는 하늘 높이 들어 올린 손을 지면을 향해 내리며 기다란 선을 그렸다.

왕도에 쏟아진 별과 같이.

아이리아는 다시 화사한 미소를 지었다.

부서진 세계의 모두를 추억하며 스스로를 끌어안았다.

* * *

달리아가 생각한 것처럼 유더의 방비는 과도한 수준이었다.

유델리아 신성국은 세 겹의 성벽으로 보호받고 있었고, 각각의 성벽에는 강력한 결계 마법이 형성되어 있었다.

왕궁도 같았다.

성벽을 수호하는 결계 마법들 전체를 합친 것보다 더 많은 수의 결계들이 왕궁을 지키고 있었다.

외골격 강화장갑복을 입은 정예 기사들과 9급 천사들 또한 왕궁에 머물고 있으니, 단순한 방어력만을 논한다면 왕도나 제도에도 결코 꿀리지 않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그렇다 하여 절대적인 것은 아니었다.

더 강한 힘에는 부서질 수밖에 없는 방벽이었다.

“살려주세요!”

“꺄악!”

“엄마!”

비명과 울부짖음 속에서 외신들이 잔혹한 웃음을 터뜨리며 영혼을 수집했다.

기계로 만들어진 괴수들과 정예 기사들이 그런 외신들을 막기 위해 분투했지만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세 겹으로 세운 성벽과 수십 겹의 결계도 신성의 폭발 앞에서는 종잇장과 별반 차이가 없었다.

이지가 없는 외신 몇을 자폭시켜 성벽과 결계를 무너뜨린 뒤 활짝 열린 문을 통해 병력을 진입시킨다.

그다음부터는 어렵지 않았다.

유델리아 신성국은 순식간에 혼란에 빠졌고, 국토 전역에서 일어나는 참극에 제대로 된 대응을 하지 못했다.

외신.

부서진 세계 아이리아와 뜻을 같이하는 자.

한때 자신의 세계를 갖고 있었고, 그 세계에서 수많은 생명들에게 떠받듦을 받았던, 하지만 지금은 영락하고 만 주신.

암청색 머리칼을 가진 그는 외팔이였고, 하나뿐인 팔에는 한 자루 검이 쥐어져 있었다.

이제는 조각밖에 남지 않은 세계의 파편.

그것을 한 자루 검으로 벼린 결과 만들어낸 무구.

스스로의 이름을 잃어버려, 그저 무신이라 불리는 외신은 참극 속에서 유델리아 신성국의 왕궁을 향해 나아갔다.

아이리아는 약속했다.

세계를 수복하면 무신을 받아주겠다고.

새로운 세계에서 다시 한번 신으로서의 삶을 살게 해주겠다고.

무신은 세계석을 향해 나아가며 지금은 사라진 자신의 세계를 떠올렸다.

그리고 그런 그의 눈에 여인 하나가 들어왔다.

직접 눈에 들어온 것이 아닌, 신의 권능이 깃든 투시안에 들어온 것이었다.

잿빛 머리칼을 길게 기른 젊고 아름다운 여인.

미색이 무척이나 뛰어났지만 그래서 눈에 들어온 것이 아니었다.

여인이 자리한 위치 때문이었다.

“너무 늦었다, 아탈리아.”

세계석을 다른 곳으로 빼돌리기에는.

왕궁의 지하 깊은 곳.

무신은 검을 들어 여인- 마이아가 자리한 곳을 가리켰다.

성벽을 무너뜨렸던 신의 힘을 발하였다.

* * *

[마이아, 세계석을 지켜야 한다.]

목소리는 갑자기 들려왔다.

왕궁의 주방장이 돼지통구이를 준비하는 동안 마이아는 부엌의 구석을 빌려 파이를 굽고 있었다.

달리아가 제일 좋아하는 사과파이였다.

달리아는 애써 아닌 척하고는 했지만 단맛을 무척 좋아했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무작정 달기만 한 것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었다.

달리아가 가장 좋아하는 정도의 단맛.

그 맛을 누구보다 잘 아는 마이아는 웃으며 돌아올 달리아의 얼굴을 생각하며 파이를 굽고 있었다.

도련님이랑 아가씨는 언제 돌아오실까.

지난번에 새로 산 로맨스 소설은 언제쯤 도착할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오븐을 바라보던 마이아는 머릿속에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고, 그 순간 무지막지한 충격이 왕궁 전체를 강타했다.

“꺄악!”

마치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바닥은 물론이고 건물 전체가 요동쳤다.

요리사들과 시녀들이 바닥에 나자빠졌고, 접시들이 깨져 나가며 시끄러운 소리가 났다.

하지만 겨우 시작에 불과했다.

어렵사리 자리에서 일어난 마이아가 모두에게 괜찮으냐고 물으려던 그 순간 두 번째 충격이, 이번에는 조금 더 가까운 곳에서의 충격이 왕궁을 뒤덮었다.

쾅! 쾅! 쾅!

분명한 폭발음이었다.

지진의 굉음 같은 것이 아니었다.

[마이아, 세계석을 옮겨야 한다.]

머릿속에 다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린 티가 묻어나는 소녀의 목소리였다.

그리고 기사들의 고함 소리가 다시 귓가를 채웠다.

“도망치십시오! 적습입니다!”

“꺄아악!”

시녀들과 요리사들이 비명을 지르며 도망쳤다.

마이아는 흘러내린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침착함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멀리서 소리친 기사가 그런 마이아를 알아보고 외쳤다.

“시종장님! 피하십시오!”

맞는 말이었다.

적이 쳐들어왔다면 피해야 했다.

유더 도련님께서 만들어두신 대피 계획이 있었다.

왕궁 지하에 자리한 방공호에 잠시 숨어 있으면 곧 괜찮아지리라.

억지로 마음을 다스린 마이아는 발걸음을 떼었다.

기사는 그런 마이아를 돌볼 여유도 없다는 듯 다시 달려 나간 뒤였다.

대체 무슨 일인 것일까.

누가 쳐들어온 것일까.

달리아는 무사할까?

국경으로 순찰을 나갔었는데.

달리아는 왕궁의 기사단장이니 지금 싸우고 있는 것일까?

가슴이 계속해서 두근거렸다.

두려움과 걱정에 손이 자꾸만 떨려왔다.

[마이아!]

소녀의 목소리가 다시 머릿속을 채웠다.

그리고 마이아는 이해할 수 있었다.

어린 신 아탈리아.

언젠가 도련님과 아가씨게서 말씀하신 적이 있는 존재였다.

우리 세계의 주신.

몇 번이나 반복된 비극을 끊어낼 단초를 마련하신 고마운 분.

마이아는 두 손을 모아쥔 뒤 제자리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자세를 취하려 했다.

하지만 아탈리아가 그런 마이아의 행동을 제지했다.

지금은 그런 것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유더와 코델리아를 제한다면 유델리아 신성국에서 세계석에 접근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너와 달리아뿐이다.]

[유더가 그렇게 만들었다.]

[마이아, 세계석을 옮겨야 한다.]

[세계석이 보관된 곳 옆에 전송 장치 역시 준비되어 있을 터이니 세계석을 옮기도록 해라.]

다급히 쏟아진 목소리에 마이아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무섭고 두려운 일이었지만 주신께서 명하신 일이었다.

서둘러 이행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할 터였다.

하지만 그래도 묻지 않을 수 있는 것이 있었다.

아탈리아는 유사시에 세계석에 접근할 수 있는 것이 마이아 자신과 달리아뿐이라 말했다.

그런데 어째서 마이아 자신에게 명한 것일까.

달리아는-

“달리아는, 달리아는 괜찮나요?”

[아직 살아 있다. 서둘러라 마이아!]

콰가강!

다시 굉음과 폭발음이 터졌다.

비명을 삼킨 마이아는 벽을 짚고 버텨선 뒤 숨을 골랐다.

아직이란 표현이 붙긴 했지만 달리아가 살아 있다는 말을 들었다.

그러니 괜찮았다.

지금 당장 생각할 것은 오직 주신의 명뿐이었다.

마이아는 달렸다.

바삐 움직이던 기사들 가운데 몇을 시종장의 이름으로 불러 세운 뒤 자신을 따르게 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도 일단은 생각하지 않았다.

굉음과 폭음.

멀리서부터 환청처럼 들려오는 비명 소리.

“도련님. 도련님. 도련님.”

마이아는 유더를 부르며 금방이라도 깨져 버릴 것 같은 정신을 유지했다.

지하로 달리고 달려 세계석이 숨겨진 방으로 향했다.

유더가 일전에 알려준 방이었다.

이제 안에 들어가면 된다.

문을 열고, 주신의 명을 수행하면-

---------------------!

소리가 소리를 지워 버렸다.

너무나 큰 굉음이 터진 그때 마이아는 순간적으로 의식을 잃었다.

폭발.

아니, 폭발이란 말로 부족한 어떤 힘의 작용.

“아읏…… 윽…….”

잔해 속에서 간신히 눈을 떴을 때 마이아는 저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다리 쪽에서 어마어마한 통증이 느껴졌다.

벽에서 떨어진 잔해.

왼쪽 다리가 짓뭉개졌다.

온몸에 파편이 튀며 난 상처가 가득했다.

“아흑…… 흑…….”

눈물을 삼키며 마이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두려움을 몰아내고 정신을 차리기 위해 노력했지만 통증과 상황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세계석이 숨겨진 방 근처였다.

벽면 쪽에 본래는 존재하지 않던 거대한 구멍이 생겨났다.

지하인데도 빛이 들어왔다.

바깥과 연결된 것일까?

저런 구멍이 갑자기 어떻게 생긴-

“시종장님, 괜찮으십니까?”

귀에 익은 기사의 목소리에 마이아는 억지로 고개를 끄덕였다.

랄프.

왕궁을 지키는 코델리아 교단의 성기사 가운데 하나.

그와 함께 다른 기사 셋 가운데 둘은 몸을 일으키고 있었지만 다른 하나는 아예 모습조차 보이지 않았다.

“흐윽. 흑.”

마이아는 눈물을 삼키며 억지로라도 몸을 일으켜 세우려 했다.

주신의 명을 수행해야 했다.

랄프가 그런 마이아를 부축하기 위해 다가왔고, 겨우 일어선 기사 둘이 갑자기 생겨난 구멍 쪽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두 사람의 목이 잘려 나갔다.

정확히는 구멍에서 튀어나온 검푸른 무언가가 두 사람 사이를 지나쳤고, 연이어 두 사람의 머리가 바닥에 떨어졌다.

괴물이었다.

태어나서 처음 보는, 팔이 넷이나 달린 괴물.

사람처럼 생겼지만 네 개의 팔 모두가 검이었고, 마치 벌레 같은 갑각이 온몸을 뒤덮고 있었다.

랄프가 괴물을 향해 돌아서며 검을 뽑았다.

괴물이 랄프를 향해 돌진했다.

마이아는 이후에 일어난 일을 보았다.

랄프의 허리가 끊어졌다.

괴물이 휘두른 거대한 칼에 팔과 허리가 동시에 잘린 랄프가 두 동강이 나서 벽에 처박혔다.

마이아는 다시 바닥에 주저앉았다.

괴물이 그런 마이아를 보았다.

표정조차 알 수 없는 얼굴로 마이아를 향해 발걸음을 내디뎠다.

* * *

구천구문의 여신은 말했다.

[코델리아는 신성의 힘을 온전히 발휘할 수 없어요. 그녀의 영혼은 이곳에 있지만 진정한 영육의 결정체는 플레이아데스에 있기 때문이에요.]

유더도 이해했다.

코델리아를 비롯한 대천사들은 영과 육이 결합된 존재들이었다.

그렇기에 온전한 신성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진정한 영육의 결정체인 대천사의 육체가 필요했다.

[하지만 유더 당신은 그렇지 않아요.]

플레이아데스에 본체를 두고 온 것은 유더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구천구문의 여신은 둘의 경우를 다르게 보았다.

애당초 신의 영역에 도달한 경로 자체가 달랐기 때문이다.

“구천구문.”

단순한 무공이 아닌, 존재의 승격을 위해 준비된 영혼의 수양법.

승천으로의 길.

구천구문의 경지를 높이기 위해서는 영혼의 성장뿐만 아니라 이를 뒷받침해 줄 육체의 성장 역시 필요했다.

하지만 이는 구천구문의 수행자가 아직 육신에 예속된 존재이기 때문이었다.

진정한 구천구문의 최고 경지는 영혼의 승천으로 말미암아 초월자가 되는 것이었으니, 구천구문의 여신과 같은 경지에 도달한다면 오직 영혼만으로도 온전한 신성을 발휘하는 것이 가능했다.

더욱이 구천구문은 세계에도 예속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신들의 근원은 결국 신들이 속한 세계였다.

신들이 정원사라면 세계는 정원사들이 머무는 정원이었으니 말이다.

그렇기에 신들의 힘은 세계와의 연결이 끊어지는 순간 급격히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외신들이 그러한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구천구문은 그렇지 않아.’

구천구문을 통해 초월자가 된 존재들의 신성은 애당초 특정한 세계를 기반으로 한 것이 아니었다.

구천구문을 수행하는 자의 영혼 그 자체를 세계로 삼으니, 구천구문을 통해 신성을 획득한 자는 세계에 구애받지 않고 신성을 발휘할 수 있었다.

하지만 유더는 바로 반색하며 여신의 말을 반길 수 없었다.

유더 자신은 구문을 열긴 했지만, 딱 그 정도에 그쳤기 때문이다.

‘구문 이후가 존재해.’

단순히 구문을 연다고 해서 끝이 아니었다.

지금까지 나열한 구천구문의 이점을 취하기 위해서는 보다 높은 경지에 도달해야만 했다.

애당초 현재의 유더가 진정한 신이 아닌 준신에 그친 것이 그 증거였다.

[당신의 생각대로예요, 지금 당신의 경지로는 무리한 일이죠.]

[하지만 제가 도와줄게요. 제 도움이 있으면, 해낼 수 있을 거예요.]

여신의 제안에 유더는 반가움과 당혹스러움을 함께 느꼈다.

구천구문의 여신은 이전부터 유더 자신에게 무척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고는 했지만, 그래도 선이라는 것이 존재하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이번 조력은 그 선을 넘어섰다.

구천구문의 여신이 직접 자신의 신성을 발휘해야 하는 일이었으니 말이다.

어째서일까.

그녀가 갑자기 적극적으로 나서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궁금했지만 지금은 따져 물을 때가 아니었다.

도움을 가려 받을 처지 역시 아니었고 말이다.

“알겠습니다. 여신의 뜻을 받들겠습니다.”

공손히 답한 유더는 무슨 일인지 몰라 아까부터 안절부절못하고 있던 코델리아와 마녀에게 구천구문의 여신의 이야기를 전달하였다.

“과연, 무슨 말인지 알겠구나. 유더 네가 신성을 발휘할 수 있다면- 그리고 출발할 때 적절한 가속을 가해줄 수 있다면 시간 내에 플레이아데스에 닿을 수 있을 것 같구나.”

쉽게 생각하자면 유더의 신성을 연료 삼아 날아가는 로켓을 만든다는 것이었다.

고개를 끄덕인 유더는 코델리아를 보았고, 코델리아는 유더의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부탁할게. 그래도 무리는 하지 말구. 알았지?”

“그래.”

일부러 장난스럽게 웃은 유더는 코델리아에게 키스한 뒤 눈을 감았다.

목욕재계하며 의식을 준비할 시간은 없었다.

다소 급하더라도 지금 당장 신성을 발휘해야만 했다.

“시작하겠습니다.”

나직이 말한 유더는 구천구문의 문을 하나씩 열기 시작했다.

제일문.

제이문.

제삼문.

제사문-

문을 하나씩 열 때마다 유더의 전신에서 칠흑의 기운이 솟구쳐 올랐다.

유더의 본질인 ‘검은 달’의 힘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유더가 구문을 열었을 때.

구천구문의 여신이 신성을 발하였다.

유더가 아직은 도달할 수 없는 저 높은 경지로 유더의 영혼을 이끌었다.

유더는 볼 수 있었다.

별 하나 없는 밤하늘에 외로이 자리한 칠흑의 달을.

그리고 그 안에 자리하고 있는 유더 자신의 진정한 신성을.

존재의 본질.

유더 자신의 영혼.

유더는 검은 달을 향해 손을 뻗었다.

검은 달에 자리하고 있던 유더의 본질이 그런 유더에게 마주 손을 뻗어왔다.

진정한 신성의 개방.

폭발하듯 솟구친 칠흑의 기운이 마녀의 숲을 집어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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