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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딩메이커-417화 (417/473)

엔딩메이커 416화

제8장 - 격화 #3

하늘에서 별이 내린다.

불꽃의 비가 왕도의 하늘을 뒤덮는다.

뺨을 때리는 빗줄기에 다프네 왕세녀는 눈을 떴다.

멍한 머리와 흐릿한 시야에 검고 어두운 하늘이 들어왔다.

새카만 구름들이 뒤덮은 하늘에선 차가운 폭우가 쏟아지고 있었다.

별.

불꽃의 비.

“아…….”

멍한 목소리와 하얀 입김이 동시에 나왔고, 차게 젖은 육신에 조금씩 감각이 돌아왔다.

“읏…….”

제일 먼저 찾아든 것은 통증이었다.

차갑고 딱딱한 돌바닥 위.

다프네 왕세녀는 잔해 사이에 파묻혀 있었다.

머리칼 사이로 비와 뒤섞인 피가 흘렀고, 팔과 다리를 뒤덮은 잔해 아래 파랗게 멍이 든 육신은 이곳저곳이 부러져 발갛게 부어올라 있었다.

“하아……. 하…….”

파랗게 질린 입술 사이로 얕은 숨을 토한 다프네 왕세녀는 폭우의 막 너머에서 들려오는 비명과 울부짖음에 이를 악물었다.

기억이 이어졌다.

하늘에서 별이 쏟아졌고, 부서진 별의 조각들이 왕도를 덮쳤다.

왕도의 방어막이 급히 가동되었지만 하늘의 재앙을 온전히 막아내는 것은 무리였다.

비명과 굉음.

무너지는 왕궁과 불타는 왕도.

“아윽……. 윽…….”

다프네 왕세녀는 잔해 사이로 몸을 일으켜 세웠다.

여기저기 찢어지고 젖어 방해가 되는 드레스 자락을 아예 뜯어버린 뒤 주변을 돌아보았다.

잔해 사이사이로 시체가 가득했다.

성벽 저 너머에는 폭우 속에서도 피어오르는 불꽃이 하늘에 닿고 있었다.

그리고 외신들.

왕도를 짓밟고 있는 거대한 짐승의 형태를 한 괴수들.

“디온…….”

다프네 왕세녀는 자신의 발치에 쓰러져 있는 디온 왕자를 발견했다.

머리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지만 다행히 숨을 쉬고 있었다.

아마도 왕궁이 무너지던 순간 디온이 펼친 방어 마법 덕분에 목숨을 건진 모양이었다.

다프네 왕세녀는 의식을 잃은 디온의 곁에 앉은 채로 다시 정면을 보았다.

별의 습격에 부서지고 망가졌지만 여전히 건재한 왕궁의 성벽이 보였다.

하지만 다프네 왕세녀는 두려움에 떨었다.

떨리는 손을 주체하지 못했고, 저도 모르게 어린아이 같은 울음을 흘렸다.

별의 습격이 무서운 것이 아니었다.

왕도를 짓밟고 있는 거대한 외신들 때문이 아니었다.

성벽 너머에 자리한 존재.

이곳을 향해 똑바로 다가오고 있는 자.

성벽에 균열이 일었다.

폭우가 만들어낸 무거운 침묵 속에서 300년의 시간 동안 건재했던 성벽이 최후의 단말마를 내지르고 있었다.

부서진다.

성벽이 무너진다.

너무나 거대한 힘에 밀려.

인간이 내디딘 발걸음에 개미집이 무너지듯이.

폭우가 내렸다.

하늘을 뒤덮는 뇌성 아래 무너진 성벽 너머에서 거대한 존재가 모습을 드러냈다.

남자였다.

상처투성이 몸을 가진 거인이었다.

“창천의…… 용…….”

다프네 왕세녀는 남자를 처음 보았다.

하지만 남자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그야말로 모든 두려움의 근원이었다.

콰가강!

뇌성 속에서 그가 발걸음을 내디뎠다.

비와 번개를 부리는 그는 진정 신과 같은 존재였다.

다프네 왕세녀는 몸을 떨었다.

다가오고 있는 그를 저지하기 위해 무엇이든 행동에 나서야 했지만 할 수 없었다.

억지로 벌린 입에서는 쥐어짜 낸 목소리조차 새어 나오지 못했다.

그리고 그건 다른 이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잔해 속에서 몸을 일으킨 기사들과 병사들은 본분을 다하지 못했다.

담이 약한 자들은 울음을 터뜨렸고, 그렇지 않은 자들조차도 벌벌 떨 뿐 움직일 수 없었다.

창천의 용은 계속해서 발걸음을 내디뎠다.

다프네 왕세녀는 이를 악물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참지 못한 울음을 흘리는 와중에도 끝끝내 지면을 딛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창천의 용이 그런 다프네 왕세녀를 보았다.

아직 상당한 거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피처럼 붉은 용의 눈이 다프네 왕세녀의 푸른 눈과 마주했다.

다프네 왕세녀는 오줌을 지렸다.

용의 눈을 마주한 대가를 치르라는 듯 숨 막히는 압박감이 그녀의 가슴과 목을 거칠게 조여왔다.

하지만 다프네 왕세녀는 주저앉지 않았다.

벌벌 떨리는 다리로나마 서서 창천의 용을 마주하였다.

의미 없는 저항이었다.

그저 마주하는 것만으로는 창천의 용을 몰아낼 수 없었다.

하지만 다프네 왕세녀는 물러나지 않았고, 창천의 용은 잠시나마 발걸음을 멈추었다.

“사자의 여왕인가.”

아직은 어리고 약하지만 그렇다 해도 왕임에 분명한 자.

창천의 용은 그녀가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그녀의 용기를 가상히 여겨 돌아간다는 선택지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부서진 세계의 여신 아이리아의 염원은 창천의 용은 물론이고 그의 백성들의 바람과도 이어져 있었다.

세계석은 반드시 손에 넣어야만 했다.

창천의 용이 다시 발걸음을 내디뎠다.

다프네 왕세녀가 거친 숨을 토하며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을 뽑아 들었다.

번개가 쳤다.

하늘이 번쩍였고, 뒤늦게 울린 뇌성이 왕도를 뒤흔들었다.

그리고 그랬기에 볼 수 있었다.

하얗게 번쩍인 하늘 아래 자리한 외신들의 모습을.

냉기를 휘감은 새하얀 검기가 거대한 외신의 목을 가르는 광경을.

창천의 용이 발걸음을 멈추었다.

다프네 왕세녀 또한 목을 잃고 무너지는 외신을 보았다.

폭우가 쏟아졌다.

그리고 다시 한번 소리 없는 빛의 폭격이 외신의 머리 위에 작렬했다.

어둠 속에서도 명확히 볼 수 있는 새하얀 빛의 날개가 왕도의 밤하늘에 별과 같이 떠올랐다.

다프네 왕세녀는 저들이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외신의 목을 가르는 극한의 검기와 빛의 검을 부리는 순백의 천사.

그렇기에 다시 눈물을 보였다.

두려움과 공포가 아닌 희망을 떠올리며 눈물을 흘렸다.

저들의 등장은 그의 등장 역시 의미하였으니까.

그가 오고 있다.

창천의 용에 맞서고자.

아니, 왕도를 뒤덮은 검은 하늘을 걷어내고자.

“강철의 마음, 불굴의 의지, 천하무쌍의 육체.”

창천의 용 역시 그를 알고 있었다.

유더와 코델리아가 사라진 플레이아데스에서 아이리아가 두려워한 유일한 남자.

몇 번이나 기적을 일으켜 온 무적의 영웅.

“란디우스.”

태양의 전사.

밤을 몰아내는 아침의 영광이 그와 함께할지니.

란디우스가 하늘을 향해 솔라 블레이드를 휘둘렀다.

황금빛 섬광이 왕도의 어둠을 참하였다.

* * *

검고 거대한 신성이 갈무리되었다.

코델리아와 마녀 앞에서 하나의 형상을 갖추었다.

고고하고 아름다운 검은 달의 짐승.

사냥개와 같았고 늑대와도 같았다.

어깨높이만 3미터는 족히 되어 보이는 검은 짐승은 유더와 같은 초록빛 눈동자를 갖고 있었다.

코델리아는 고개를 들어 짐승과 눈을 마주하였다.

잡티 하나 없는 칠흑 속에 자리한 녹색 눈동자가 코델리아의 파란 눈동자를 비추었다.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유더였다.

형태가 바뀌었어도 코델리아는 알 수 있었다.

“진짜 짐승이었네?”

맨날 나보고 짐승짐승하더니.

코델리아가 장난처럼 말하자 검은 짐승은- 유더는 장난스럽게 웃더니 커다란 혀로 코델리아의 뺨을 핥았다.

덩치 차이가 워낙 크다 보니 코델리아의 작은 얼굴이 순식간에 침으로 범벅이 되었지만 코델리아는 화를 내는 대신 웃음을 터뜨렸다.

“강아지 같아.”

코델리아의 단평에 유더는 한 번 더 재롱을 부리는 대신 조용히 자세를 낮추었다.

코델리아와 웃고 떠드는 것은 언제나 즐거운 일이었지만 지금은 서둘러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 가자.”

코델리아는 바닥에 엎드린 유더의 등 위에 올라탔다.

새카만 털은 너무나 부드러웠고, 단단한 근육으로 가득 찬 육신은 역시 유더라는 생각을 들게 했다.

“어떻게 해야 할지는 말해주지 않아도 알 것 같구나.”

마녀의 말에 코델리아는 고개를 끄덕였고, 유더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신성을 개방한 유더는 알 수 있었다.

플레이아데스가 있는 방향은 물론이고 얼마나 떨어져 있는가까지.

[단단히 잡아, 코델리아.]

머릿속에 직접 울리는 유더의 목소리에 코델리아는 조금 더 자세를 낮춰 유더의 목을 꼭 끌어안더니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짐승합체 유델리아?”

유더는 다시 웃었다.

어떤 위기라 할지라도 자신의 태양과 함께라면 헤쳐 나갈 수 있을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가자.]

“응, 가자.”

플레이아데스를 향해.

마녀에게 눈으로 인사한 유더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세상 너머를 노려보았다.

짐승의 형상을 한 채로 구천구문의 힘을 발동시켰다.

천지를 요동케 하는 뇌성과 함께, 칠흑의 번개가 솟구쳐 올랐다.

* * *

아이리아는 초조함 속에 왕도를 노려보았다.

란디우스.

태양의 전사.

무적의 영웅.

플레아데스가 탄생시킨 기적의 존재.

인간의 괴물.

그는 진정 태양과 같은 자였다.

깊고 어두운 절망 속에서도 몇 번이나 기적을 일으킨 존재였다.

그랬기에 그의 등장은 두 여신에게 상반된 감정을 일으켰다.

어린 신 아탈리아는 두 손을 모아 쥔 채 울음 섞인 미소를 지었다.

아이리아는 이를 악문 채 거친 숨을 내쉬었다.

란디우스와 창천의 용이 서로를 향해 나아갔다.

인간의 영웅과 사이한 외신이 정면에서 충돌했다.

아이리아는 생각했다.

여기까지는 계산대로다.

란디우스의 존재는 놓칠 수 없는 변수였다.

그랬기에 아이리아가 세운 모든 계획의 중심에는 란디우스가 존재했다.

그러니 진정할 수 있었다.

왕도는 물론이고 플레이아데스 전체의 어둠을 걷어낼 기세로 빛나는 태양의 영웅 앞에서도 애써 평정을 유지할 수 있었다.

계획대로다.

모든 것은 처음 생각한 대로이다.

아이리아 자신의 염원은 이루어질 것이다.

아이리아의 생각은 크게 잘못되지 않았다.

실제로 왕도에서의 싸움은 이제 막 시작했을 뿐이지만 아이리아가 그린 청사진과 거의 동일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제도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외신들이 찾아낸 제일검의 영혼은 생각 이상의 역할을 해주고 있었다.

지평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그는 지금 이 순간에도 빠르게 강해지고 있었다.

유델리아 신성국 역시 괜찮을 터였다.

그곳으로 향한 것은 무신이었다.

란디우스라면 모를까, 필멸자 따위는 결코 그의 검에 맞서지 못할 터였다.

그래서 아이리아는 미소를 지었다.

스스로를 조금 더 진정시키기 위해, 마음을 놓기 위해 왕도로 향했던 의식의 일부를 유델리아 신성국으로 돌렸다.

그리고 아이리아는 멍한 목소리를 내었다.

상상조차 하지 못한 광경에 경악을 터뜨렸다.

* * *

체이스 백작은 알고 있었다.

자신의 친우가 지금 누구와 맞서고 있는 것인지.

어떤 존재와 싸우고 있는 것인지.

하지만 걱정하지 않았다.

합류해서 함께 싸운다는 생각 역시 하지 않았다.

체이스 백작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유나가 돌아왔기에 완성된 것.

유나가 돌아왔기에 깨닫게 된 것.

그러니 체이스 백작 자신의 역할은 바이엘 백작과 함께 싸우는 것이 아니었다.

자신의 친우가 마음껏 싸울 수 있도록 모든 방해를 차단하는 것이었다.

“뒷수습은 언제나 나의 몫이지.”

불만 섞인 목소리였지만 얼굴은 웃고 있었다.

그리고 바이엘 백작 역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의 검이 신성이 깃든 무신의 검을 밀어붙이고 있었다.

간단한 이유였다.

유나를 다시 마주했을 때, 그녀를 통해 지난 과거를 돌이켰을 때.

바이엘 백작은 자신이 무엇을 잊고 있었는지 깨달았다.

지평을 향한 한 걸음을 다시 한번 내딛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바람의 검.

정해진 것은 없었다.

한계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거친 바람이 불었다.

바이엘 백작의 검이 다시 한번 무신의 검을 밀어붙였고, 외팔이 신은 뒤로 크게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마이아가 바이엘 백작을 보았다.

바이엘 백작은 마이아의 시선을 느꼈지만 개의치 않았다.

유나의 얼굴을 떠올리며 힘찬 발걸음을 내디뎠다.

“바람은 언제나- 자유로운 법이니까.”

부끄러움은 없었다.

뻔뻔한 미소와 함께 검을 휘둘렀다.

눈앞에 다가온 지평을 향해.

바람의 검이 질주했다.

폭풍이 휘몰아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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