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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딩메이커-418화 (418/473)

엔딩메이커 417화

제9장 - 강림

세 곳에서의 싸움이 격화되었다.

유델리아 신성국에서는 바이엘 백작이 무신에게 우위를 보였지만 제도에서는 반대의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지평을 향해 급속도로 나아가고 있는 제일검의 검이 루카스를 쉼 없이 몰아붙였다.

상반된 진행.

그랬기에 맞춰지는 균형.

하지만 아직이었다.

양쪽 모두의 균형을 깨뜨릴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싸움이 이제 막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창천의 용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별이 떨어지며 만들어진 지독한 암운을 단번에 가르고 푸른 하늘을 드러나게 한 황금빛 섬광을 보며 생각했다.

미래가 아닌 과거의 일이었다.

-아빠, 무서워요. 무서워요. 아빠.

다섯 살 난 어린아이가 도저히 채울 수 없는 할당량을 부과한 정복자 놈들.

놈들은 벌이라며 딸의 팔을 잘랐다.

아니, 사실 딸만의 일이 아니었다.

창천의 용 자신은 물론이고 놈들의 지배하에 있는 형제자매들 모두가 팔이나 다리를 하나씩 잃었다.

하나밖에 없는 팔로 엉엉 우는 딸을 안아주었다.

놈들은 어째서 이토록 지독한 짓을 하는 것일까.

반항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

팔이나 다리를 자르는 것이 재미있어서?

자신들을 같은 인간으로도 보지 않아서?

[창천의 용!]

머릿속에 아이리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창천의 용은 정면을 보았다.

솔라 블레이드를 길게 늘어뜨린 란디우스가 다가오고 있었다.

창천의 용은 그런 란디우스에게 맞서듯이 한 자루 태도를 꺼내 들었다.

잘린 팔 대신 아이리아가 준 용의 팔이었다.

-아빠.

반항했어야 했다.

비루한 목숨을 잇겠다며 웅크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일어났어야 했다.

개죽음을 당할지언정 맞서 싸웠어야만 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명분도 있었다.

딸을 지켜야 하니까.

이길 수 없는 싸움으로 창천의 용 자신뿐만 아니라 동료들을, 가족들을, 딸을 개죽음당하게 할 수 없었으니까.

헛된 명분이었다.

딸은 일곱 살이 되지 못했다.

할당량을 채우지 못했다며 정복자 놈들에게 처형당했다.

일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딸이라며 놈들이 건네준 작은 손이 지금도 눈을 감으면 선명히 떠올랐다.

[란디우스가 오고 있다.]

비가 오는 날이었다.

지금처럼 폭우가 쏟아지는 밤이었다.

작고 더러운 집에 웅크려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딸의 생일날 주겠다며 하나뿐인 손으로 조금씩 만들고 있던 짚신과 딸의 손을 보며 하염없이 울고 또 울 뿐이었다.

바로 그때 아이리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도 나와 같구나.

부서진 세계의 여신.

소중한 것들을 모두 잃어버려 껍데기만 남은 자.

아이리아는 약속했다.

부서진 세계를 다시 수복하면 창천의 용과 백성들을 자신들의 세계로 이주시켜 주겠다고.

정복자 놈들의 세계 따위 부숴주겠다고.

“아이리아, 나의 여신이시여. 감사하오.”

아이리아는 힘을 주었다.

그녀가 불러온 외신들이 하나둘 깃들 때마다 창천의 용은 자신이 인간이 아닌 존재가 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그대가 내려준 은혜에 보답하겠소.”

마을을 지배하고 있던 정복자 놈들을 모조리 죽였다.

놈들의 본국에 쳐들어가 왕과 관리들의 사지를 모조리 잘랐다.

어째서 이토록 잔인한 짓을 하는 것이냐며 울부짖는 왕과 왕비 앞에 딸아이의 손을 보여주었다.

상황을 이해한 왕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지만 왕비는 그렇지 않았다.

잘린 딸의 손이 누구 것인지도 모르는 그녀는 어떻게 저토록 작은 아이의 손마저 자를 수 있냐며, 인간의 탈을 쓴 악귀냐며 악을 쓰며 저주를 퍼부어댔다.

웃음이 나왔다.

쓰고 비린 웃음이.

창천의 용은 다시 정면을 보았다.

태양의 전사.

미쳐 버린 신으로부터 세계를 구한 구세의 대영웅.

말 그대로였다.

마주한 순간 알 수 있었다.

저자야말로 진정한 영웅이라는 것을.

그가 자신과 딸의 사정을 알았더라면 누구보다 앞장서서 정복자들을 격퇴했으리라.

하지만 그는 알지 못했고, 지금 이렇게 자신의 길 앞에 가로놓여 있었다.

창천의 용은 다시 발걸음을 내디뎠다.

마지막을 생각하며 외신들의 계약으로 손에 넣은 힘들을 모조리 개방하였다.

“아이리아, 나의 여신이시여. 그대의 바람이 꼭 이루어지기를 바라겠소.”

마지막 인사였다.

아이리아는 이를 악문 채 억지로라도 미소를 지었다.

약속을 이행하기 위해 모든 것을 내려놓은 자신의 영웅에게 눈물 섞인 미소로 작별을 고했다.

창천의 용이 지면을 박차 솟구쳐 올랐다.

검고 거대한 용으로 화해 하늘을 뒤덮었고, 천둥과 번개를 부르며 란디우스를 향해 돌진했다.

신의 힘이었다.

카마엘과 레나는 각자의 싸움터에서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고, 란디우스는 각오를 굳혔다.

눈앞의 남자를 막기 위해서는 자신 역시도 전력을 다해야만 했다.

구천구문의 문이 하나씩 열렸다.

제일문.

제이문.

제삼문.

란디우스의 힘이 급속도로 거대해졌다.

창천의 용은 그런 란디우스를 향해 번개를 뿌렸지만 소용없었다.

번개가 일그러졌다.

사문을 넘어 칠문에 도달한 구천구문의 힘이 주변의 공간 자체를 일그러뜨리고 있었다.

제팔문.

창천의 용이 다시 한번 신의 힘을 발했다.

인신의 신격 그 자체로 란디우스를 찍어 누르고자 했다.

거대한 힘이 란디우스의 머리 위로 쏟아졌다.

란디우스를 중심으로 반경 수십 미터에 자리한 모든 것들이 압착될 정도로 무지막지한 힘이었지만 란디우스는 주저앉지 않았다.

오히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열어, 란디우스.”

카마엘이 말했다.

레나가 두 손을 모아 기도했다.

란디우스가 하늘을 보았다.

창천의 용을 마주한 채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본래는 도달할 수 없는 힘이었다.

오직 선택받은 자들에게만 허락된 힘이었다.

하지만 란디우스는 무수한 역경을 이겨낸 끝에 도달할 수 있었다.

지평을 넘어, 한계를 넘어.

구천구문 제구문.

초월지신.

압도적인 힘의 방출에 왕도가- 아니, 세상 전체가 진감했다.

마치 수평 너머에서 태양이 떠오르듯 왕도를 뒤덮고 있던 어둠이 단번에 걷혀 푸른 하늘을 드러냈다.

창천의 용은 란디우스가 보인 압도적인 힘 앞에 미소 지었다.

통쾌한 웃음을 터뜨리며 전심전력을 다해 돌진했다.

이것이 그의 마지막 싸움이었다.

란디우스가 그런 창천의 용을 향해 솔라 블레이드를 들어 올렸다.

다시 한번 신의 힘을 폭발시켰다.

* * *

“창천의 용은 이길 수 없어.”

알고 있었다.

란디우스가 예상대로 구문에 도달했다면 외신들의 힘을 빌려 인신에 도달한 창천의 용은 결코 그의 상대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진짜 신과 가짜 신의 차이였다.

아니, 애당초 타고난 역량 자체가 너무나 달랐다.

창천의 용 역시 영웅이었지만 란디우스는 격을 달리했다.

대영웅.

수백 수천 년을 넘어, 세계에 단 한 개체가 존재할 수 있을지조차 의문인 기적의 존재.

솔라 블레이드의 황금빛 섬광 아래 소멸해 가는 창천의 용을 보며 아이리아는 눈물을 흘렸다.

예정된 패배 속에서 두려워하거나 원망하는 대신 아이리아 자신의 승리를 기원한 그에게 진심으로 감사했다.

“개죽음이 아니야.”

창천의 용은 자신의 역할을 다했다.

란디우스에게 구문을 열게 만들었다.

구문은 본래 란디우스에게 허락되지 않은 경지.

대영웅의 힘으로 불가능을 가능케 했지만 오래 유지할 수 없었다.

하물며 오늘 다시 문을 여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창천의 용이 아니었다면 란디우스는 결코 구문을 열지 않았을 터였다.

하지만 창천의 용이 그로 하여금 구문을 열게 만들었다.

“창천의 용.”

솔라 블레이드를 통해 만들어진 개벽의 검이 창천의 용을 휩쓸었다.

창천의 용은 마지막까지 비와 번개를 부르며 저항했지만 애당초 이길 수 없는 싸움이었다.

창천의 용이 소멸했다.

왕도에 쏟아지던 폭우가 그쳤고, 란디우스의 전신에서 발산되던 태양의 기운이 잦아들었다.

지금이었다.

유더와 코델리아가 사라진 플레이아데스에서 아이리아 자신에게 위해를 가할 수 있는 유일한 남자가 단 한 번만 쓸 수 있는 카드를 사용하였다.

그러니 되었다.

계획은 성공했다.

이제 아이리아 자신을 막을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왕도의 하늘이 다시 어둠에 뒤덮였다.

산산이 조각난 창천의 용의 잔해 위에 순백의 여신이 강림했다.

“창천의 용.”

나의 영웅.

이 세계에서 만난 나의 소중한 사람.

약속은 지키겠어.

너의 백성들은 모두 나의 세계에서 살아갈 거야.

발치에 놓여 있던 피투성이 용의 팔을 소중히 끌어안은 아이리아는 그대로 일어나 란디우스를 보았다.

구문을 연 부작용으로 말미암아 모든 힘이 사라진 그였지만 그래도 무시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아이리아는 미소 지었다.

세계 각지에서 싸우고 있던 모든 외신들을 왕도로 불러들였다.

“끼아아아아아아아아!”

멀리서부터 외신들의 음산한 괴성이 들려왔다.

왕도에서 싸우고 있던 외신들이 가장 먼저 날아와 아이리아에게 깃들었다.

영락을 거듭한 결과 이지조차 사라진 외신들조차도 본능을 좇아 아이리아에게 모여들었다.

새로운 세계.

다시 한번 시작할 수 있는 약속의 땅.

외신들이 계속해서 모여들었다.

세계를 가진 신들에 비하면 미약한 힘들이었지만 수십이 넘는 숫자가 모이니 그 힘은 결코 무시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아이리아가 외신들로 이루어진 날개를 펼쳤다.

오래전 잃었던 주신의 힘과 동등한 신의 힘을 만끽하며 눈물과 함께 선언했다.

“세계를 부활시키겠어.”

애당초 세 곳으로 병력을 나눈 것도 모두 지금의 순간을 위해서였다.

란디우스와 창천의 용이 정면에서 대결하게 하고, 란디우스가 구문을 열게 만든다.

구문을 연 부작용으로 힘을 잃은 란디우스를 참하고 나면 더 이상 적은 존재하지 않았다.

왕도에 이어 제도와 신성국의 세계석을 유유히 빼앗으면 되는 일이었다.

아이리아는 하얗고 아름다웠다.

외신들로 이루어진 그녀의 날개는 새카만 색이었지만 마치 별들로 가득한 밤하늘을 보는 것 같았다.

왕도 전역에 다시 한번 신의 힘이 강림했다.

외신들로 이루어진 검을 든 아이리아는 란디우스를 향해 돌진했다.

어느새 달려온 카마엘과 레나가 그 앞을 막아섰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둘이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약간의 시간을 버는 것뿐이었다.

피투성이가 된 카마엘과 레나가 바닥을 뒹굴었다.

두 사람의 목숨을 빼앗기 위해 아이리아가 휘두른 검을 란디우스가 솔라 블레이드로 막아섰다.

하지만 그것뿐이었다.

솔라 블레이드를 쥔 란디우스의 팔이 꺾였다.

끝끝내 검을 놓지는 않았지만 균형을 잃은 란디우스가 비틀거리며 주저앉았다.

“란디!”

레나가 피로 물든 날개를 펼치며 힘을 발산했고, 카마엘이 아이리아를 향해 돌진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시간 벌이에 불과했다.

아이리아가 발산한 신성을 정면에서 뒤집어쓴 레나는 뒤로 크게 밀려나는가 싶더니 왈칵 피를 쏟으며 쓰러졌고, 란디우스를 덮치려는 외신의 기운을 정면에서 받아낸 카마엘은 기운 자체를 파하는 것에는 성공했지만 한계를 맞이하였다.

레나가 일어서지 못했다.

카마엘이 늘어뜨린 검을 따라 피가 멈추지 않았다.

아이리아는 그런 둘 너머에 자리한 란디우스를 보며 외신의 검을 들어 올렸다.

쓰러지는 카마엘을 뒤에서 지탱하며 몸을 일으켜 세우고 있는 대영웅의 영혼을 불사르고자 외신의 힘을 집중시켰다.

“안 돼.”

더 이상 수가 없었다.

아탈리아는 얼마 없는 힘을 그러모아 왕도로의 강림을 선택했다.

그리고 그 순간.

제일검이 문득 하늘을 돌아보았다.

바이엘 백작과 무신 또한 그러했다.

의식을 잃은 달리아를 꼭 끌어안은 채 눈물짓던 마이아는 하늘이 있는 방향을 향해 고개를 들어 올렸다.

하늘에 균열이 생겼다.

세계를 뒤덮고 있던 결계의 한끝이 부서지기 시작했다.

아탈리아가 웃었다.

제일검이 재미있다는 듯 웃었고, 마이아가 달리아를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도련님.”

빛이 번졌다.

균열이 커졌다.

아이리아의 하얗게 질린 얼굴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폭발.

하늘에 난 구멍 너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씨발 쾅!”

유리 조각처럼 부서져 쏟아지는 결계 사이로 칠흑의 짐승이 질주했다.

세계를 뒤덮은 어둠을 걷어내기 위해-

플레이아데스의 태양이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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