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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딩메이커-419화 (419/473)

엔딩메이커 418화

제10장 - 황금빛 태양

아이리아는 정지된 시간 속에서 생각했다.

머리 위에서 쏟아지는 태양의 빛과 부서져 흩어지는 결계의 조각들 사이에 자리한 두 사람.

검은 늑대- 아니, 그보다는 훈련된 군견을 연상시키는 칠흑의 짐승과 그 위에 올라탄 태양의 소녀.

상상도 못 한 개입에 아이리아의 사고는 일순 정지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지만 그녀는 지금 혼자가 아니었다.

그녀에게 힘을 보태주고 있는 수많은 외신들 가운데 일부가 작금의 상황을 명확히 인지했다.

두 사람은 공간 도약을 사용하지 않았다.

세상과 세상 사이를 직접 이동한다는, 일견 무식해 보이는 방식을 사용해 플레이아데스로의 귀환을 성공시켰다.

하지만 어떻게.

신성을 사용하여.

코델리아에게서는 강한 신성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의 몸은 지천사의 것 그대로였다.

하지만 유더가 달랐다.

세상 간 이동에 많은 힘을 소모한 탓인지 굉장히 약해져 있었지만 지금의 유더는 신성의 결정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단순히 신성의 순수성만을 논한다면 평범하게 구문을 열어 초월지신- 플레이아데스의 수호자로 각성했을 때보다 우위에 있었다.

‘구천구문.’

아이리아는 떠올렸다.

애당초 유더가 신성을 손에 넣을 수 있었던 이유.

아이리아 자신이 플레이아데스의 존재를 인지할 수 있었던 이유.

그렇기에 아이리아는 배신감을 느꼈다.

일방적인 감정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아미타.’

아미타 네가, 아미타 네가!

다시 시간이 흘렀다.

아이리아는 정면을 보았다.

외신의 검과 맞물린 솔라 블레이드 너머로 란디우스의 얼굴이 보였다.

창천의 용이 떠올랐다.

우수에 찬 그의 얼굴과 목소리가 생각났다.

복수를 마친 뒤 딸의 이름을 부르며 울부짖던 그를 보듬던 순간들이 기억났다.

창천의 용은 말했다.

소망을 꼭 이루길 바란다고.

복원한 세계에서 그리운 이들을 다시 만나길 기원한다고.

“으아아아아아아아!”

아이리아는 비명처럼 외치며 힘을 발산했다.

솔라 블레이드와 란디우스를 단번에 날려 버린 뒤 눈물 섞인 눈으로 유더와 코델리아를 노려보았다.

예상치 못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망설일 때가 아니었다.

창천의 용의 희생을 개죽음으로 만들 순 없었다.

외신들 가운데 하나가 말했다.

지금이라면 기회가 있다고.

외신의 말대로였다.

유더는 세상 간 이동에 신성을 거의 다 소모했다.

본신이 아닌 아바타에 깃든 지금의 코델리아는 고작해야 지천사에 불과했다.

그러니 할 수 있다.

지금이라면 두 사람을 소멸시킬 수 있다.

쾅!

생각과 동시에 육신이 움직였다.

외신의 날개를 펼치며 솟구쳐 오른 아이리아가 순식간에 유더와 코델리아 앞에 자리했다.

유더가 다시 신성을 발하며 그런 아이리아를 공격하려 했지만 늦었다.

아이리아가 휘두른 외신의 검이 유더의 목과 가슴을 단번에 갈라 버렸다.

비명이 터질 새도 없었다.

아이리아는 바로 눈을 들어 코델리아를 보았고, 코델리아는 빛의 날개를 활짝 펴며 지천사의 힘을 발했다.

고작 지천사의 힘을 말이다.

아이리아가 외신의 날개를 펼쳤다.

하나의 세계를 떠받드는 주신- 세계신에 준하는 힘을 폭발하듯 방출시켰다.

무지막지한 신성을 뒤집어쓴 코델리아가 비명을 질렀다.

지천사의 헤일로와 날개 따위는 주신의 힘에 비하자면 하찮기 그지없었다.

코델리아의 헤일로가 깨졌다.

날개가 부서졌고, 코델리아의 하얗고 아름다운 육신 전체에 균열이 일었다.

“너흰 여기로 바로 오면 안 됐어.”

아이리아가 외신의 검을 휘둘렀다.

코델리아의 목을 갈랐다.

* * *

제일검은 다시 정면을 보았다.

제도를 공격하던 외신들이 왕도를 향해 떠나가고 있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그에게 중요한 것은 제도의 함락 따위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가 바라는 것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그리고 그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앞으로 몇 걸음이나 남은 것일까.

어쩌면 결국 닿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제일검은 부드럽게 웃으며 검을 들었다.

루카스가 보였다.

눈부신 지평 앞에 선 그의 모습은 엘프들의 게이트 앞에서 보았을 때와 같았다.

언제나처럼 우직한 발걸음으로 지평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제일검은 그런 루카스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한때 빛의 검성이란 이름을 주었던 쾌검에 루카스는 언제나처럼 단단하고 정직한 성왕의 검을 펼쳤다.

검과 검이 맞물린다.

서로 어울렸다 흩어진다.

제일검은 한 걸음을 내디뎠다.

지평에 한 발 더 다가섰다.

* * *

바이엘 백작은 검을 거두었다.

분명 처음 싸움을 시작했을 때는 왕궁의 지하였지만 지금 자리한 곳은 왕궁 밖이었다.

전투 중에 무신이 무너뜨린 천장을 통해 밖으로 이동한 탓이었다.

“왕도인가.”

무신이 향한 방향을 잠시 노려본 바이엘 백작은 숨을 한 번 토하며 어깨를 늘어뜨렸다.

무신만이 아니었다.

신성국을 공격하던 외신들 대부분이 왕도를 향해 날아가고 있는 와중이었다.

왕도.

자신과 체이스 백작은 물론이고 게일과 아델리아를 신성국으로 보내준 어린 신 아탈리아는 말했다.

왕도에는 란디우스와 파라곤의 영웅들이 갈 것이라고.

‘태양의 전사인가.’

세계를 구한 무적의 대영웅.

무신을 비롯한 외신들이 왕도로 향한 것을 보면 그가 무언가를 해낸 것이 분명했다.

바이엘 백작은 다시 눈을 감고 숨을 골랐다.

사실 지금 바이엘 백작은 무척이나 흥분한 상태였다.

진정한 바람의 검.

금방이라도 닿을 수 있을 것처럼 눈앞에 다가온 검의 지평.

하지만 가라앉혀야 했다.

지금은 전시였다.

검사인 자신과 백작인 자신을 동시에 떠올려야 했다.

“아더, 그쪽은 어떤가.”

귀에 차고 있던 통신기를 작동시키며 말하자 바로 대답이 돌아왔다.

[거의 정리되었다. 달리아와 마이아에게는 아델리아가 갔다.]

[생각보다 두 사람의 부상이 심한 모양이다.]

바이엘 백작은 미간을 좁혔다.

마이아를 베려는 무신의 검을 쳐낼 때 잠깐 밖에 확인하지 못한 데다가 마이아가 달리아를 끌어안고 있어 정확히 볼 수 없었지만 그래도 알 수 있는 것이 있었다.

마이아의 하반신을 적실 정도의 피 웅덩이를 떠올린 바이엘 백작은 외신들이 풀어놓은 괴물들이 있는 방향을 향해 달리며 물었다.

“둘 다 생명에는 지장이 없겠지?”

[마이아는 괜찮다. 하지만 달리아는 피를 너무 많이 흘렸어. 경과를 지켜볼 필요가 있다.]

체이스 백작의 무거운 목소리에 바이엘 백작은 마른침을 삼켰다.

이를 악문 채 시야에 들어온 괴물들을 향해 돌진했다.

* * *

짐승의 이빨과도 같은 검격에 코델리아의 목이 찢어지듯 갈라졌다.

머리를 잃은 몸에서 피가 솟구쳐 올랐고, 하얗고 아름다운 얼굴이 분홍빛 머리칼과 함께 허공을 맴돌았다.

아이리아는 다시 검을 휘둘렀다.

푸른 눈을 크게 뜬 코델리아의 머리를 통으로 소멸시킨 뒤 지면을 향해 추락하는 유더와 코델리아의 몸뚱이를 향해 왼손을 내밀었다.

가볍게 주먹을 움켜쥐자 신성력에 짓눌린 두 사람의 육신이 순식간에 압착되어 한 줌의 핏물이 되었다.

“하아.”

아이리아는 숨을 토했고, 이내 미소 지었다.

지면에 떨어진 핏물을 보며 통쾌한 웃음을 터뜨렸다.

쓰러뜨렸다.

최대의 위협 요소를.

플레이아데스의 수호신들을.

이제 아이리아 자신을 방해할 자는 없었다.

이 자리에서 란디우스를 참하기만 하면 그 이후는 더 이상 생각할 필요조차 없었다.

아이리아는 지상을 돌아보았다.

란디우스가 우뚝 선 채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발치에는 피투성이가 된 레나와 카마엘이 반쯤 의식을 잃은 상태로 쓰러져 있었다.

“란디우스.”

절망적인 상황임에도 그는 두려워하지 않고 있었다.

그의 표표한 두 눈에는 여전히 강한 의지가 어려 있었다.

아이리아는 다시 창천의 용을 떠올렸다.

그를 떠올리자 이상하게 눈물이 나왔다.

마침내 소망을 이룰 순간이 다가왔음에도 불구하고 미소를 그릴 수 없었다.

그래서 아이리아는 눈앞의 상황에 집중하였다.

란디우스를 쓰러뜨린다.

창천의 용을 꺾은 그를 전력을 다해 제거한다.

아이리아가 외신의 검을 높이 들었다.

뒤늦게 당도한 외신들이 그런 아이리아에게 모여들었다.

이제는 여섯 쌍으로 늘어난 외신의 날개가 활짝 펴지자 이적이 일어났다.

왕도의 하늘이 다시 검은 구름으로 가득 찼다.

낮이었지만 밤과 같았고, 무거운 공기가 왕도 전체를 짓눌렀다.

다프네 왕세녀는 바닥에 주저앉아 숨을 헐떡였다.

그나마 강인한 영혼을 가진 그녀였기에 이 정도로 그친 것이었다.

왕도의 백성들은 외신의 기운에 짓눌려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다.

벌레처럼 꿈틀거리며 괴로워하는 것이 그들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끝내자, 아탈리아.”

작게 말한 아이리아는 외신의 검 끝에 힘을 모았다.

왕도째로 란디우스를 소멸시키기 위함이었다.

란디우스가 솔라 블레이드를 들었다.

아이리아는 조소하며 외신의 검을 휘둘렀다.

검은 재앙이 왕도를 강타했다.

* * *

아탈리아는 두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왕도에서 일어날 참극을 차마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란디우스라 한들 지금 상태로는 외신의 힘을 막아낼 수 없을 터였다.

그리고-

그리고-

아탈리아의 작은 뺨을 따라 눈물이 쉼 없이 흘러내렸다.

유더와 코델리아.

둘이서 하나인 두 사람.

머리가 돌아가지 않았다. 생각을 잇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눈앞에서 유더와 코델리아가 살해당하는 광경을 보았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랬기에 황금의 용왕은 아탈리아를 탓하지 않았다.

이름 그대로 어린 신인 그녀에게 다정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서쪽을 보렴.]

아탈리아는 고개를 들어 서쪽을 보았다.

눈을 깜박였고, 이내 미소 지었다.

바보 같은 웃음을 터뜨렸다.

* * *

검은 재앙은 왕도를 파하지 못했다.

란디우스가 아니었다.

검은 재앙과 솔라 블레이드가 맞닿는 일 자체가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검은 번개였다.

소리를 앞선 칠흑의 번개가 검은 재앙을 꿰뚫어 파괴했다.

서쪽에서 밀려온 황금빛 태양의 빛이 왕도를 뒤덮은 새카만 구름들을 단숨에 밀어냈다.

외신의 기운에 짓눌려 헐떡이던 다프네 왕세녀는 자신을 비추는 태양의 빛에 고개를 들었다.

빛이 밀려오고 있는 서쪽을 바라보았다.

란디우스도 그랬다.

그의 얼굴에 시원한 미소가 번졌다.

“항상 근육이 함께하기를.”

[항상 근육이 함께하기를.]

발랄하고 다정한 목소리에 란디우스는 솔라 블레이드를 내려놓았다.

레나와 카마엘은 물론이고 왕도의 모든 상처 입은 이들을 치유하는 생명의 빛에 제도에서의 싸움을 떠올렸다.

아이리아는 이를 악문 채 서쪽을 보았다.

눈부시게 빛나는 태양의 헤일로와 열 장의 날개.

플레이아데스의 태양.

희망의 소녀.

새하얀 요정의 드레스를 입은 코델리아가 허공에 서 있었다.

그리고 그런 코델리아의 곁에는 언제나처럼 유더가 서 있었다.

아이리아도 이제는 알 수 있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자신이 제거한 것이 무엇이었는지.

“아바타.”

애당초 가짜였다.

아이리아 자신이 속은 것이었다.

아바타를 소멸시킨 일 자체는 거짓이 아니었다.

아무리 강력한 신이라 한들 아바타에 영혼을 담아둔 상태로 아바타를 잃으면 영혼에 막대한 타격이 오거나 아예 소멸해 버리는 것이 정상이었다.

유더와 코델리아가 속인 것은 다른 것이 아니었다.

애당초 모습을 드러냈을 때.

유더와 코델리아의 아바타에는 유더와 코델리아의 영혼이 담겨 있지 않았다.

플레이아데스에 진입한 순간 두 사람이 제일 먼저 한 것은 본체로 영혼을 옮기는 것이었다.

왕도에 나타난 유더와 코델리아는 그저 시간 벌이를 위한 디코이에 불과했다.

[후대, 오랜만에 전력을 다해볼까요?]

벨렌시아의 속삭임에 유더는 웃으며 구문을 열었다.

벨렌시아의 영혼 그 자체라 할 수 있을 플레이아데스 최강의 검- 요정검 벨렌시아를 움켜쥐었다.

“아이리아, 부서진 세계의 여신이여.”

문라이트를 꼭 움켜쥔 코델리아가 송곳니를 드러내며 사납게 웃었다.

플레이아데스를 지키는 태양의 신으로서 선언했다.

“이제, 혼날 시간이야.”

서쪽에서 떠오른 태양이 왕도의 어둠을 모조리 걷어냈다.

검은 달과 황금빛 태양의 신성이 외신들을 향해 몰아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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