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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딩메이커-420화 (420/473)

엔딩메이커 419화

제11장 - 태양과 달

아이리아는 무척이나 오래전부터 플레이아데스를 지켜봐 왔다.

그렇기에 그녀는 방심하지 않았다.

그녀의 계획은 즉흥적이지 않았고, 반드시 성공하기 위해 큰 희생까지 감수하였다.

그리고 실제로 지금까지는- 아니, 직전까지는 모든 것이 아이리아의 계획대로 진행되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유더와 코델리아가 돌아왔다.

애당초 계획의 전제가 유더와 코델리아의 부재를 이용한다는 것이었으니, 근간부터 뒤집어진 계획은 포기하는 것이 맞았다.

하지만 아이리아는 생각했다.

여기서 포기하면 끝이었다.

창천의 용의 죽음은 그저 개죽음이 될 따름이었다.

아니, 애당초 포기한다 한들 유더와 코델리아가 자신을 그냥 보내줄 가능성은 낮았다.

아미타가 저쪽에 붙은 이상 부서진 세계의 위치가 알려지는 것은 시간문제에 불과했다.

아이리아는 웃었다.

만감이 뒤섞인 미소를 지은 채 눈매를 날카로이 했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그야말로 생명의 빛 그 자체인 서쪽의 태양을 노려보며 외신들의 동의를 구하였다.

외신들이 응답했다.

그들도 같은 생각이었다.

이미 자신들의 세계를 잃어버린 그들은 구차한 생을 이어가는 대신 목숨을 건 도박을 선택했다.

[아이리아.]

무신이 속삭였다.

검리에 닿았다고는 하나 한낱 필멸자의 검에 밀린 그는 더 이상의 수모를 원하지 않았다.

무신이 아이리아에게 힘을 주었다.

외신들이 얼마 남지 않은 신성을 아낌없이 불살랐다.

황금의 용왕과 맞서던 외신들이 합류하기 위해 날아왔다.

이미 존재 의의를 상실한 대결계를 유지하던 외신들 역시 가진 바 모든 힘을 아이리아에게 전달했다.

아이리아가 거친 숨을 토했다.

그녀의 전신이 검게 물들었다.

영락한 신들의 탁한 힘이 그녀의 순수성을 망가뜨렸다.

하지만 개의치 않았다.

지금 중요한 것은 오직 힘이었다.

아이리아는 외신의 날개를 펼치며 외신의 검을 들어 올렸다.

왕도의 하늘이 다시 검은 구름에 뒤덮이기 시작했다.

하늘의 절반은 푸르고 절반은 새카만 왕도의 하늘 아래에서 왕도의 주민들은 두려움에 떨었다.

“란디…….”

가냘픈 목소리에 란디우스는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채로 얕은 숨을 토하는 레나가 그의 품에 안겨 있었다.

란디우스는 레나가 무엇을 느꼈는지 알 수 있었다.

아이리아가 발하는 외신들의 신성은 실로 거대했다.

죽음을 불사하고 피어오른 외신들의 신성에는 필살의 각오까지 어려 있었다.

‘아우리엘보다 강하다.’

제도에 강림했던 심판의 대천사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지금의 아이리아라면 천상에서조차 대천사들을 압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물론 오래 지속될 힘은 아니었다.

외신들이 스스로의 신성을 불태워 만들어낸 순간의 불꽃이었으니 저 거대한 신성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고작해야 몇 시간 남짓일 것이 분명했다.

검은 구름의 영역이 점점 더 넓어졌다.

왕도를 비추던 태양의 빛 대신 검은 그림자가 세상을 뒤덮었다.

하지만 레나는 두려움에 떨지 않았다.

그녀는 공포에 찬 얼굴로 울먹이는 대신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

란디우스의 품 안에 있기 때문이 아니었다.

아니, 그것도 이유였지만 그녀에게는 두렵지 않은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

란디우스는 레나에게 마주 미소 지었다.

그녀의 이마에 입맞춤한 뒤 고개를 들어 서쪽 하늘을 우러렀다.

“강철의 마음, 불굴의 의지, 천하무쌍의 육체.”

습관처럼 읊조린 말에 레나는 다시 작게 웃었다.

란디우스의 크고 단단한 가슴에 머리를 기대며 조용히 눈을 감았다.

란디우스는 그런 레나를 보듬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주변이 어둠으로 가득하기에 더욱 밝게 빛나는 서쪽의 태양을 바라보았다.

* * *

구천구문의 여신- 아미타는 유더에게 많은 것들을 알려주었다.

그녀의 정체, 그녀의 고향.

아이리아가 플레이아데스에 올 수 있었던 이유.

아미타는 아이리아의 세계에서 태어난 여인이었다.

총명하고 아름다웠지만 신은 아니었다.

그저 평범한 인간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녀는 구천구문에 힘입어 인간을 초월하였다.

구천구문의 시조 이후 처음으로 탄생한 초월자.

인간으로 태어나 불멸의 신성을 손에 넣은 입지전적인 존재.

[아이리아는 저를 많이 좋아했어요.]

아이리아는 인간의 신이었고, 그녀는 자신의 종족을 사랑했다.

그랬기에 아이리아는 인간들 사이에서 자신과 대등한 신격이 태어난 것을 무척이나 기뻐했다.

자신의 종족이 신으로 거듭날 가능성을 품고 있다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아미타도 종족의 어머니인 아이리아를 사랑했다.

하지만 그녀는 더 큰 세계를 돌아보기 위해 세계를 떠났다.

애당초 스스로 신성을 손에 넣은 그녀는 세계에 예속된 존재가 아니었다.

아이리아는 많이 아쉬워했지만 아미타의 뜻을 존중해 주었다.

언제든 다시 돌아오라 말하며 아미타를 송별했다.

그리고 많은 시간이 흘렀다.

아미타는 여러 세계에 구천구문을 전파하였고, 플레이아데스에서 유더를 만났다.

[아미타는 저를 통해 플레이아데스를 알았을 거예요.]

부서진 세계에 홀로 남은 아이리아는 오랜 옛날 자신의 세계를 떠났던 초월자를 기억해 냈다.

외로움에 지쳐가던 그녀는 초월자의 행적을 추적했고, 마침내 그녀가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세계 하나를 찾아낼 수 있었다.

그 이후는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이제는 유더와 코델리아도 외신이 어떤 존재들인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잃어버린 세계와 종족을 그리워하다 미쳐 버린 자들.

결코 채워질 수 없는 갈망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자들.

유더와 코델리아는 고개를 들어 정면을 보았다.

아이리아와 외신들이 발하는 신성은 실로 무시무시했다.

저 힘은 왕도에 강림한 아우리엘은 물론이고 자신의 본거지에서 힘을 발했던 대군주 아스모데우스를 능가할 것 같았다.

하지만 유더는 밀려오는 어둠을 보며 두려워하는 대신 눈을 감고 다시 한번 신성을 발하였다.

검은 달의 짐승.

아무도 없는 밤하늘에 홀로 자리한 외로운 자.

하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코델리아가 유더의 손을 잡았다.

검은 세상을 환한 빛으로 가득 채웠다.

그리고 변화가 일어났다.

둘이서 하나인 신성.

본래는 존재할 수 없지만, 유더와 코델리아이기에 가능한 기적.

검은 달의 세계에 황금빛 태양이 떠올랐다.

태양의 소녀가 검은 달의 짐승을 부드럽게 끌어안았다.

태양이 달을 누른 것이 아니었다.

태양과 달이 함께하는 것이었다.

왕도의 하늘에 다시 한번 기적이 일어났다.

서쪽 하늘에 태양과 달이 동시에 자리했다.

낮과 밤이 하나 되어 검은 하늘을 밀어냈다.

그리고 그 아래에 자리한 두 사람.

둘이서 하나인 그들.

태양의 여왕과 달의 왕이 서로를 보며 미소 지었다.

둘 중 하나만으로는 부족했다.

둘이 함께할 때야 비로소 진정한 힘을 발할 수 있는 두 사람이었다.

“가자, 유더.”

“그래, 코델리아.”

언제나 그러했던 것처럼 둘이서 함께.

아이리아가 괴성을 토하며 돌진해 왔다.

유더와 코델리아가 그런 아이리아를 향해 마주 발걸음을 내디뎠다.

두 개의 신성이 정면에서 충돌했다.

* * *

제일검은 검을 휘둘렀다.

온몸이 피투성이였지만 그의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했다.

너무나 즐거웠다.

검을 휘두르는 것이, 지평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제일검은 정면을 보았다.

지평이 보였다.

루카스가 보였다.

검과 검이 얽혔고, 다시 헤어졌다.

서로를 그리워하듯 금방 다시 서로를 향했다.

눈부신 공방은 겉에서 보는 것 이상이었다.

하나의 검격에는 수백, 수천에 달하는 가능성이 담겨 있었다.

한 번의 교차에서 파생되는 새로운 검로 역시 무궁무진하였다.

제일검은 그중에서 답을 찾았다.

자신의 답을.

제일검의 길을.

지평으로 이어질 단 하나의 검로를.

하늘에 노을이 지기 시작했다.

주황과 보랏빛이 뒤섞이며 어둠이 밀려오는 하늘을 제일검은 돌아보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느낄 수 있었다.

무척이나 먼 거리에 있었지만 왕도에서의 싸움이 끝나간다는 것을,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이 이제 정말 조금뿐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하지만 그는 조급해하지 않았다.

다시 루카스를 보았고, 검을 휘둘렀다.

루카스가 내놓은 답 앞에 자신의 답을 내놓았다.

제일검은 악인이었다.

잔인한 자였고, 타인의 생명을 우습게 여겼다.

하지만 그는 분명 타고난 검사였다.

제일검은 몇 번이나 반복된 자신의 삶을 기억했다.

독에 의존하고, 악마의 힘에 기대고, 지평을 향하기는커녕 제자리걸음만 반복하던 시절을.

그랬기에 지금 이 순간 검을 휘두를 수 있었다.

미혹에 빠지지 않고 다시 한번 지평을 마주할 수 있었다.

파앗!

검과 검이 교차했다.

하지만 지금까지와는 달랐다.

제일검이 한 걸음을 내디뎠다.

그의 검이 성왕의 검을 갈랐다.

그리고 그 순간 제일검은 알 수 있었다.

그의 눈에 비친 것은 제도가 아닌 빛으로 가득 찬 세계였다.

검의 지평.

어린 시절부터 끝없이 갈망해 온 검의 이상향.

이치의 경지.

제일검은 미소 지었다.

웃는 것 외에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루카스가 다시 검을 휘둘렀다.

제일검은 그런 루카스의 검을 보았다.

검리에 도달한 그의 눈에는 이제까지 보이지 않던 새로운 길이 보였다.

제일검이 검을 휘둘렀다.

검리가 담긴 검이었다.

루카스의 검이 거짓말처럼 쉽게 파훼되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제일검은 재차 검을 휘두르지 않았다.

지평에 선 채로 잠시 왕도가 있는 방향을 돌아보았다.

시간이 되었다.

아쉽지만 여기까지였다.

죽은 육신을 움직여 주던 외신의 기운이 사라지고 있었다.

제일검은 검을 늘어뜨린 채 다시 정면을 보았다.

지평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지금까지와 달랐다.

끝이라 생각했는데 지평 너머가 또 자리하고 있었다.

“멋지구나, 지평이라는 것은.”

작게 읊조린 제일검은 지평 속에서 현실을 보았다.

루카스 흐레스벨그.

자신에게 다시 한번 지평으로 나아갈 길을 제시해 준 자.

“너도 언젠가는 도달할 수 있을 거다.”

검리가 담긴 검을 목도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금 검을 들어 올린 너라면.

절대 굴하지 않는 성왕의 의지를 가진 너라면.

제일검은 마지막으로 지평을 바라보았다.

아쉬움이 남았지만 미련을 떠는 대신 커다란 웃음을 터뜨렸다.

외신의 힘이 사라졌다.

제일검의 영혼이 소멸했다.

* * *

제도의 싸움이 끝이 났다.

신성국을 공격하던 괴물들이 힘을 잃고 쓰러졌다.

왕도의 하늘을 뒤덮었던 검은 구름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왕도.

기적이 내린 땅.

함께했던 외신들을 모두 잃은 아이리아가 바닥에 주저앉아 숨을 헐떡였다.

조금씩 부서지고 있는 그녀의 영혼이 빛과 함께 흩어지고 있었다.

유더와 코델리아가 그런 아이리아 앞에 섰다.

달의 왕과 태양의 여왕.

둘이서 하나인 신성.

플레이아데스를 지키는 수호자들.

아이리아는 눈물을 흘렸다.

아이리아는 두 사람처럼 되고 싶었다.

멸망한 세계를 부활시키고, 다시 한번 별을 생명으로 가득 채워서 예전처럼 행복하게 살아가고 싶었다.

하지만 할 수 없었다.

무도한 방법이었으니까.

도움을 청하는 대신 플레이아데스를 멸망시키려 했으니까.

아미타의 말대로였다.

미쳐 버렸기에 망가졌을 뿐, 아이리아는 본래 순수하고 착한 여신이었다.

소멸을 목전에 둔 그녀는 짧은 시간이나마 영락하기 이전의 자신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랬기에 그녀는 눈물을 흘렸다.

자신이 저지른 잘못으로 인해 목숨을 잃은 플레이아데스의 생명들에 대한 참회의 뜻도 있었지만, 그녀의 가슴을 가장 아프게 한 것은 창천의 용의 존재였다.

가장 가능성 높은 계획이라며 희생을 강요했을 때 그는 거부하지 않았다.

죽음을 눈앞에 둔 순간에도 그는 아이리아 자신을 원망하기는커녕 바람을 이루기를 소망하였다.

어째서 그랬을까.

남겨진 백성들이 아이리아의 세계에서 살아가기를 바라서 그런 것일까?

세계 그 자체에 복수하고자 그런 것일까?

모두 틀리지 않았다.

이유들 가운데 하나였다.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다른 것에 있었다.

“그의 이름은 무휼이야.”

플레이아데스를 파하는 대신 그와 함께 부서진 세계로 갔으면 어땠을까.

아탈리아의 도움을 받아가며 조금씩 조금씩 세계를 수복했다면 어땠을까.

아이리아는 잠시 이룰 수 없는 미래를 꿈꾸었고, 부서진 마음을 끌어안은 채 목소리를 쥐어짜 냈다.

“염치없는…… 부탁 하나만 해도 될까?”

소멸해 가는 여신의 간청에 유더는 침묵했고, 코델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리아는 자애로운 태양의 여신에게 감사하며 마지막 소망을 입에 담았다.

“무휼의 백성들을 보살펴 줘.”

그들의 복수는 정당했지만, 복수의 과정에서 너무 많은 피가 흘렀어.

외신의 힘이 사라진 지금, 그들은 다시 동방을 점령하려는 무리들에게 제물이 되어 사라질 거야.

그들이 동방에서 지금의 권세를 유지하게 해달라는 것이 아니야.

조용한 곳에서 삶을 이어가게 해줘.

가엾은 아이들이야.

코델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플레이아데스의 많은 위해를 끼친 여신의 부탁이었지만 애당초 창천의 용의 백성들은 플레이아데스의 주민들이었다.

“그렇게 할게.”

“고마워. 정말 고마워. 그리고…… 정말 미안해.”

아이리아의 신성이 소멸했다.

부서진 세계의 여신은 창천의 용의 이름을 마지막으로 읊조리며 최후를 맞이하였다.

코델리아는 잠시 앉아 아이리아가 사라진 자리를 바라보았다.

유더가 그런 코델리아의 어깨를 안아주었고, 코델리아는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런데 유더야.”

“응, 코델리아.”

“너, 나 너무 좋아하는 거 아냐?”

신성도 어떻게 둘이서 하나일 수가 있어.

외신들과의 전투에서 발현한 태양의 여왕과 달의 왕은 엄밀히 말하면 ‘유더의 신성’에 보다 가까웠다.

구천구문으로 이끌어낸 유더의 온전한 신성이 바로 둘이서 함께인 형태였기 때문이다.

코델리아가 의기양양한 얼굴로 묻자 유더는 민망해하거나 부끄러워하는 대신 언제나처럼 대응했다.

뻔뻔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는 말이다.

“너무 좋아해. 그러는 넌 아니야?”

부끄러움은 언제나 왜 자신의 몫인 걸까.

코델리아는 잠시 심술궂은 얼굴로 ‘응, 아니야’라고 말하는 자신을 상상해 보았지만 역시 무리였다.

그랬기에 코델리아는 유더의 귀를 살짝 잡아당겼고,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정말정말 좋아해.”

아니, 정말정말 사랑해.

기대했던 대답에 만족스럽게 웃은 유더는 단숨에 코델리아를 안아 들었고, 코델리아는 꺅 소리를 냈지만 얼굴 가득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그런 둘을 언제나처럼 미적지근한 눈으로 지켜보는 두 사람.

[뭐…… 언제나와 같으니 좋은 거겠죠?]

[그렇게 생각하도록 하죠.]

벨렌시아와 멜리사는 서로를 보며 쓰게 웃었고, 유더와 코델리아는 입술을 맞추었다.

둘이서 하나인 태양과 달 아래에서 환한 미소를 머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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