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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딩메이커-421화 (421/473)

엔딩메이커 420화

제12장 - 전후

아이리아가 소멸했다.

아이리아와 뜻을 같이했던 외신들 대부분이 소멸했고, 살아남은 자들도 모두 플레이아데스를 이탈했다.

“하아…….”

어린 신 아탈리아는 제자리에 주저앉아 어깨를 늘어뜨렸다.

긴장이 풀린 탓인지 다리는 물론이고 온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이겼구나…….”

아이리아의 침공은 겨우 몇 시간 동안의 일에 불과했다.

가장 상황이 길게 이어진 곳을 따져도 열 시간이 되지 않는, 극히 짧은 시간 동안 진행된 위기.

하지만 그 위기의 정도는 과거 아우리엘이 직접 제도에 강림했을 때에 뒤지지 않았다.

유더와 코델리아의 귀환이 조금만 늦었더라면 플레이아데스 전체가 붕괴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세계석이 위협받는 일이 있을 거라고는 아예 상상을 못 했어.’

애당초 붙여넣기를 반복한 플레이아데스 같은 세상이 아니라면 드러날 일이 없는 세계석이었다.

더욱이 아이리아 같은 경우가 아니라면 애당초 다른 세계의 세계석을 탐낼 일도 없었고 말이다.

천상과 지옥의 존재들이 단 한 번도 세계석을 원하지 않은 것이 그 증거였다.

‘좀 더…… 방비를 강화해야겠어.’

한 번 일어난 일은 두 번 일어날 수 있는 법이었다.

붙여넣기로 말미암아 드러나게 된 세계석이 다시 세계에 녹아들기 위해서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으니, 그 시간 동안 세계석을 보다 안전하게 지킬 방안을 강구해야 할 터였다.

“하아…….”

한숨을 한 번 더 쉰 아탈리아는 아예 그냥 자리에 드러누워 버렸다.

마음 같아서는 아예 주신의 공간에서도 벗어나고 싶었지만 그건 무리였다.

아직 해야 할 일들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조금만 더 힘을 내자.’

유더와 코델리아가 돌아와 아이리아를 격퇴했지만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외신들의 강림에 편승해 몸을 일으킨 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일단…… 동방의 군대는 자리를 지키는 건가.’

창천의 용은 사라졌지만 그가 세운 제국은 아직 건재했다.

더욱이 창천의 용의 정복 사업은 고작해야 1년 남짓한 시간 동안 이뤄진 일이었다.

창천의 용에게 굴복하긴 했지만 여전히 야심을 품고 있는 왕과 장수들이 많았으니, 저들이 이왕 시작한 정복 전쟁을 지속하려 할 가능성도 있었다.

‘그리고…… 그건 내가 관여해서는 안 될 일이기도 하고.’

외신의 개입이 있다면 모를까, 플레이아데스의 인간들끼리 하는 전쟁에 주신인 자신이 개입하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물론 이번 전쟁의 발단 자체가 외신들이었으니 일단 이번 싸움 자체를 멈추게 하는 것이 옳을 수도 있긴 했다.

하지만 아탈리아는 이내 생각을 거두었다.

아이리아에게 대응하기 위해 이미 상당한 신력을 소모해 심신이 모두 지친 것도 있었지만, 새삼 이번 전쟁 자체가 제대로 이어질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자기들끼리 엄청 싸우겠지.’

처음 생각한 것처럼 정복 전쟁을 지속하려는 무리도 있겠지만, 그보다 많은 숫자의 무리들이 창천의 왕이 사라진 동방의 패권을 노릴 가능성이 높았다.

창천의 용이 고작 1년 만에 동방을 일통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외신의 힘을 가진 인신임에 앞서 인세에 난 영웅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창천의 용이라는 카리스마에 의해 유지되던 제국이니, 앞으로 한 달도 되지 않아 제국이 분열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더욱이 지금 전장에는 제국와 왕국의 여러 강자들뿐만 아니라 프란과 벨키안이 자리하고 있었다.

두 사람이라면 단발적인 제국의 공세를 잘 막아줄 터였다.

‘동방에서 눈을 돌린다면…… 문제가 되는 것은 재앙들과 악마 추종자들.’

재앙 전쟁에서 도망쳤던 재앙들과 악마 추종자들이 플레이아데스의 혼란을 틈타 다시 몸을 일으켰다.

애당초 외신들과 무관한 놈들이었으니 외신들이 사라진 지금도 전력을 온존했는데, 아탈리아는 오히려 잘되었다는 생각을 했다.

‘이번 기회에 박멸하자.’

애당초 숨어 있는 탓에 어찌하지 못했던 자들이었다.

외신들이 사라진 것을 눈치채고 발 빠르게 도망치고 있는 자들도 있었지만 뭣 모르고 파괴와 살육에 취해 있는 자들 역시 있었다.

‘다들 부탁할게.’

코델리아 교도 기사단으로 거듭난 성십자 수호단이 아탈리아가 지목한 지점을 향해 진군했다.

스칼렛과 카이사 같은 강자들 역시 움직이고 있었으니, 이번 기회에 플레이아데스의 위협 자체를 크게 줄여놓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거의 끝났어.’

머리에 오른 열기를 식히듯 서늘하게 만든 손바닥을 이마에 얹은 아탈리아는 마지막으로 싸움이 끝난 제도와 왕도, 신성국을 돌아보았다.

제도의 인명 피해는 생각 이상으로 컸다.

제일검을 막기 위해 투입한 병력이 상당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행히도 루카스가 투입된 이후에는 새로운 사상자가 거의 없다시피 했기에 사태의 수습 자체는 꽤 빠르게 진행되고 있었다.

‘고마워, 루카스.’

마지막 순간이긴 했지만 제일검은 분명 검리에 닿았다.

유더를 제한다면 그는 분명 플레이아데스가 낳은 최고의 검사였다.

‘루카스니까 막을 수 있었어.’

제일검과의 싸움에서 깨달음을 얻은 것은 루카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깨달음을 체화하듯 눈을 감고 명상에 잠겨 있는 루카스를 잠시 바라보던 아탈리아는 신성국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유더와 코델리아의 집.

두 사람의 가족들이 있는 땅.

신성국을 살펴보던 아탈리아의 얼굴에 깊은 시름이 어렸다.

* * *

벨렌시아는 미간을 좁혔다.

아이리아를 격퇴한 것을 기념하듯 달콤한 입맞춤을 나누기 시작한 유더와 코델리아를 훈훈한 눈으로 바라보던 그녀였지만 그건 대략 5분 전의 이야기였다.

[대체 언제까지 할 생각인 거죠.]

[뭐…… 흔히 있는 일 아닌가요.]

멜리사의 말에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인 벨렌시아였지만 잠깐뿐이었다.

이내 도리질을 세게 친 그녀는 엄한 얼굴이 되더니 열심히 헛기침을 시작했다.

[흠! 흠! 흠!]

[그냥 말로 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그럴 것 같네요. 후대! 진짜 짐승이라도 된 건가요!]

벨렌시아가 버럭 소리를 지르자 둘만의 세계에 빠져 있던 유더와 코델리아가 움찔하더니 동작을 멈추었다.

그러자 벨렌시아는 기세를 몰듯 계속해서 소리쳤다.

[일단 수습부터 하도록 하죠.]

[란디우스도 저기서 기다리고 있고요.]

[보이죠? 다소 뻘쭘한 표정으로 서 있는 거.]

벨렌시아의 말대로였다.

연이은 전투로 인해 평탄화 작업이 이루어진 왕도 중심에는 란디우스가 허허허 웃으며 서 있었고, 그의 품에는 레나가 쏙 하고 안겨 있었다.

“란디, 그러지 말고 우리도 하는 건 어때요?”

귓속말에 가까운 목소리였지만 감각을 극대화시킨 유더와 코델리아인 터라 바로 옆에서 듣는 것처럼 들을 수 있었다.

물론 홀로 몸을 일으키며 “때와 장소를 가려라”라 훈계하는 카마엘의 목소리도 말이다.

‘우리가 아니라 일단 레나랑 란디우스한테 한 거긴 하지만.’

그래도 민망한 것은 마찬가지였기에 코델리아는 입술을 움츠리며 뒤로 한 걸음 물러섰고, 유더는 그런 코델리아의 허리를 단단히 안은 채 왕도를 돌아보았다.

“코델리아, 한 번 더 부탁할게.”

“어? 어어. 알겠어.”

순간 키스 이야기인 줄 알고 눈을 동그랗게 뜬 코델리아였지만 잠깐뿐이었다.

유더의 부탁이 무엇인지 이해한 그녀는 빛의 날개를 활짝 펴고 왕도의 하늘 위로 날아올랐다.

생명을 치유하는 태양의 빛.

이미 아이리아와의 결전 직전에 한 번 빛을 발해 왕도의 부상자들을 치유했지만 완전한 것은 아니었다.

더욱이 효과도 작았고 말이다.

[효과가 작았다고요? 치료 효과를 말하는 건가요?]

“광고효과요.”

[네?]

벨렌시아의 되물음에 유더는 언제나처럼 속이 까만 미소를 지으며 설명했다.

“첫 번째 빛이 내려올 때는 의식을 잃거나 숨어 있는 사람들이 많아서 코델리아가 태양의 은총을 내리는 걸 본 사람이 적잖아요? 하지만 두 번째는 다르겠죠.”

의식을 회복한 자들도 많고 싸움이 끝난 것을 알고 밖을 내다보는 자들도 많았으니까.

“성녀 코델리아의 기적을 목격한 자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겠죠.”

그래야 신도도 늘고 헌금도 늘고 신성도 강해질 테니까.

유더의 상큼한 미소를 마주한 벨렌시아는 어설픈 웃음을 흘렸고, 멜리사는 하루 이틀 일이냐며 해탈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튼 이동하죠.”

반자동 아티팩트들을 가동해 태양의 은총을 내리는 코델리아를 여러 방향에서 동시에 촬영하기 시작한 유더는 란디우스와 레나가 있는 곳을 향해 발걸음을 떼었다.

“스승님.”

“왔구나, 제자야.”

란디우스의 외양은 언제나와 같이 건장함 그 자체였지만 정말로 외양에 불과했다.

유더는 지금의 란디우스에게는 조금의 여력도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을 바로 눈치챌 수 있었다.

“잠깐, 설마 구문을 여신 건가요?!”

창천의 용과의 격전 때문만이 아니었다.

이미 구문을 연 유더였기에 알 수 있었다.

란디우스에게서 신성의 잔흔이 느껴졌다.

란디우스 또한 구문을 열고 초월자의 영역에 들어선 것이 분명했다.

“하핫. 눈치챘구나 제자야.”

란디우스가 흐뭇한 얼굴로 말하자 품에 안겨 있던 레나와 옆에 서 있던 카마엘이 동시에 자랑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우리의 태양도 이제 구문을 연다.

란디우스도 구문에 도달했다.

순간 우쭐해하는 파라곤의 영웅들이 ‘귀엽다’는 생각을 한 유더는 손으로 입을 가린 채 미소를 지었다.

“축하드립니다, 스승님.”

“그래, 제자야. 이제 겨우 같은 높이에 올라섰구나.”

란디우스도 사람이었다.

제자인 유더가 자신을 추월해 구문에 도달한 것이 은근히 신경 쓰이던 그였다.

치졸한 질투와는 거리가 먼, 스승으로서 제자를 인도해야 한다는 책임감과 체통, 무인으로서의 호승심에 가까운 감정이었지만 말이다.

이제 같은 구문이다.

똑같은 위치에 섰다.

뿌듯함이 가득 느껴지는 란디우스의 말에 유더는 어색한 미소를 지었고, 란디우스는 오래지 않아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위에 또 위가 있었던 것이냐.”

“음…… 네.”

구문의 너머에 위치한 신성의 영역.

“넌 이미 도달했고?”

“네.”

“씨발.”

란디우스의 입에서 욕지거리가 나왔지만 얼굴은 웃고 있었다.

아직 더 올라갈 곳이 남아 있다는 사실이 그의 도전 정신을 자극했기 때문이다.

“어쩐지, 이전과 다른 신성이더구나. 축하한다, 제자야.”

“감사합니다, 스승님.”

[사제 간에 덕담을 나누는 모습이 훈훈하군요.]

벨렌시아가 우아한 미소를 지으며 말한 그때였다.

“내려오는군.”

태양의 은총 덕분에 기운을 많이 회복한 카마엘의 말대로였다.

왕도의 하늘 위에서 태양의 신성을 발하던 코델리아가 천천히 빛을 뿌리며 하강했고, 왕도의 백성들이 그런 코델리아를 보며 두 손 모아 기도하기 시작했다.

“제 아내입니다.”

“……알고 있다.”

새삼스러운 유더의 자랑에 카마엘은 누가 그걸 모르냐고 답하고 싶었지만 애써 점잖은 답을 내놓았다.

“왕과 왕세녀를 만날 건가?”

“그래도 좋긴 하지만…… 일단 신성국에 가볼 생각입니다.”

유더의 대답에 카마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왕세녀는 무사했고, 애당초 왕궁 지하에 숨어 있던 국왕 또한 무사했으니 굳이 만남을 서두를 필요는 없었다.

예전처럼 유더와 코델리아가 세일룬 왕가의 귀족인 것도 아니었으니 말이다.

“알겠다, 왕도의 수습은 우리가 맡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유더가 답한 직후였다.

지면에 착지한 코델리아는 란디우스와 레나, 카마엘에게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한 후 유더에게 다가가 말했다.

“유더야, 일단 신성국으로 가자.”

새삼 달리아와 마이아가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왕도도 이 정도로 피해를 입었으니 신성국 역시 상당한 피해를 입었으리라.

“그래, 서두르자.”

고개를 끄덕인 유더는 이미 이야기가 끝난 란디우스 일행과 눈인사를 나눈 뒤 코델리아를 번쩍 안아 들었다.

검은 짐승으로 화해 하늘을 가로질렀다.

그리고 삼십여 분 뒤.

달리아와 마이아 앞에 선 코델리아는 울음을 터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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