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딩메이커 421화
제12장 - 전후 #2
무신을 비롯한 외신들의 침공은 고작해야 몇 시간에 그쳤지만 신성국이 입은 피해는 실로 막대했다.
신성국의 수도를 감싼 성벽은 절반 이상이 무너져 있었고, 왕궁 또한 이전의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붕괴한 상태였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신속한 대피가 이뤄진 덕에 인명 피해가 비교적 적다는 것이었지만, 어디까지나 수도의 피해 규모에 비해 적다는 것이지 경미한 수준인 것은 절대로 아니었다.
“그나마 수비대가 기계들로 구성되어 있어서 다행이야.”
수도를 지키는 병력은 크게 둘로 나눌 수 있었다.
코델리아 교단의 성기사들로 구성된 교도기사단과 드워프들이 만든 기계들로 구성된 수비대.
수비대는 전력의 5할을 잃을 정도로 큰 피해를 입었지만 애당초 전력의 대부분이 기계들이었던 터라 인명 피해는 거의 없다시피 했다.
기사단 역시 위급한 순간에 나타난 체이스 백작과 바람의 늑대 게일, 황금야차 아델리아의 지원 덕분에 생각 이상으로 병력을 온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야기를 꺼내는 아델리아는 물론이고 수도의 상황을 돌아보고 있는 유더 역시도 표정이 좋지 못했다.
이러나저러나 결국 신성국이 큰 피해를 입은 것은 사실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여기에 더해진 하나.
왕궁 지하에 위치한 대피소의 치료실에 들어선 코델리아는 왈칵 울음을 터뜨렸다.
나란히 놓인 침대 위에는 마이아와 달리아가 의식을 잃은 채 누워 있었다.
두 사람 모두 온몸에 붕대를 두르다시피 한데다가, 각종 치료 도구를 온몸에 달고 있어 척 보기에도 상태가 위중해 보였다.
하지만 문제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달리아, 달리아 다리가…….”
코델리아는 채 말을 잇지도 못했다.
유더 역시 이를 악문 채 마이아를 돌아보았다.
마이아 역시 한쪽 다리가 완전히 짓뭉개져 차라리 잘라내는 것이 나은 상황이었다.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아탈리아에게 이미 전해 들은 유더였다.
바이엘 백작이 적절한 순간에 나타나 주지 않았다면 두 사람은 다리를 잃는 수준에 그치지 않고 아예 목숨을 잃었을 터였다.
유더는 눈을 질끈 감고 스스로를 진정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코델리아를 제외한다면 신성국 내에서 가장 믿을 수 있는 두 사람이기에 세계석에 접근할 권한을 준 것이었지만 실수였다.
애당초 그런 권한을 주지 않았다면 마이아는 수도 밖으로 도망쳤을 터였고, 달리아도 무신 같은 존재와 대적할 이유가 없었을 터였다.
“괜찮아, 괜찮을 거야.”
이전의 자신들이 아니었다.
목숨이 붙어 있다면, 그다음은 어떻게든 해낼 방법이 있었다.
그러니 괜찮았다.
지금은 오히려 두 사람이 살아남았다는 사실에 감사할 때였다.
스스로와 코델리아 모두에게 나직이 말한 유더는 억지로나마 웃어 보였고, 코델리아는 눈물 가득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 * *
달리아는 천천히 눈을 떴다.
흐릿한 시야에 옅은 빛이 반사된 하얀 천장이 보였다.
“아…….”
작고 갈라진 목소리를 흘린 달리아는 눈을 감았다 떴다.
머리가 무겁고 몸이 나른했지만 그래도 조금씩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살았구나.’
막연한 안도감에 새삼 어깨를 늘어뜨린 달리아는 상체를 벌떡 일으켜 세웠다.
아니, 세우고자 했다.
의식을 잃기 직전의 상황이 번쩍하고 떠올랐기 때문이다.
“아윽?!”
상체를 일으키려던 달리아는 그대로 침대에서 굴러떨어질 뻔했다.
간신히 균형을 잡고 다시 자리에 누운 달리아는 그 이유를 바로 알 수 있었다.
하반신에 감각이 없었다.
마비된 것이 아니었다.
상체를 일으키다 침대에서 굴러떨어질 뻔한 것은 다리 쪽에 무게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달리아의 숨이 순식간에 거칠어졌다.
달리아는 이를 악문 채 가슴께까지 덮고 있던 담요를 걷어보았다.
허벅지 아래쪽이 비어 있었다.
무릎이 보이지 않았다.
“하아…… 하…….”
양쪽 다리가 모두 잘려 나갔다.
꿈이 아닌 현실이었다.
달리아는 계속 숨을 몰아쉬며 두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비명을 지르진 않았지만 새어 나오는 눈물까지는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괜찮아, 괜찮아 달리아.’
두 다리를 잃었지만 죽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리고-
다급히 손을 내린 달리아는 옆을 돌아보았다.
바로 옆자리.
곤히 잠든 채 침대에 누워 있는 마이아가 보였다.
지친 기색이 완연했지만 평온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하아…….”
마이아가 살았다.
마이아가 살아 있다.
달리아는 저도 모르게 울면서 웃었다.
두 다리가 잘려 나갔지만 마이아가 살았으니 되었다.
둘 다 죽을 수 있었는데 둘 다 살아 있으니 만족해야 했다.
어떻게 된 것일까.
아가씨나 도련님이 구하러 와주신 걸까?
달리아는 계속해서 생각했다.
정말로 궁금해서 그런 것도 있었지만 두 다리가 잘려 나갔다는 현실을 외면하기 위함이기도 하였다.
“마이아…….”
조금 더 가까이서 보고 싶었다.
뺨을 어루만지며 따뜻한 체온을 느끼고 싶었다.
하지만 할 수 없었다.
침대에서 내려서는 것은 이제 불가능했다.
다시 왈칵 눈물을 쏟은 달리아는 입술을 깨물어 목소리를 죽였다.
울고 싶었지만 참아야 했다.
달리아 자신은 기사였다.
이런 날이 언젠가는 올지도 모른다고 각오하지 않았던가.
더욱이 지금 울면 마이아가 깰 수도 있었다.
달리아는 소리 죽인 흐느낌을 삼키며 다시 생각을 이어나갔다.
아가씨와 도련님은 어떻게 되신 걸까.
잘려 나간 다리 대신 의족을 붙이면 되는 걸까?
에드워드 도련님의 의족이라면 다시 걸을 수 있을까?
그래도 만약 더 이상 싸울 수 없다면- 기사 일을 그만둬야 한다면 그때부터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행정 일이라도 배워야 할까?
아니면 마이아 밑에서 시종 일을 배우는 건 어떨까.
그건 좀 즐거울지도.
정말로 오만 가지 생각이 다 떠올랐다.
하지만 결국엔 다시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지독한 상실감에 가슴이 무너질 것만 같았다.
그리고 다시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울다 지쳐 잠들었던 달리아는 조금은 멍한 얼굴로 눈을 떴다.
실컷 울어서 그런지 묘하게 개운한 가운데 더없이 반가운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달리아!”
“아가씨?”
“응응, 나야.”
평소보다 훨씬 더 기운찬 미소를 지은 코델리아는 그대로 몸을 낮춰 달리아를 꼭 끌어안았다.
“아가씨.”
“응, 달리아.”
“아가씨.”
달리아는 결국 다시 울음을 터뜨렸다.
본래 눈물이 많지 않은 그녀였지만 일련의 사태로 마음이 너무 약해진 탓이었다.
코델리아는 그런 달리아를 꼭 끌어안은 채 체온을 나눠주었고, 달리아가 어느 정도 진정하자 바로 옆을 가리켰다.
“마이아도 있어.”
정말이었다.
바로 옆에 바싹 붙인 침대 위에 마이아가 있었다.
언제나의 그녀처럼 얼핏 무표정해 보이는 은은한 미소를 그린 채 말이다.
“마이아.”
마이아는 부드럽게 웃으며 달리아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평소 손이 차가운 편인 마이아인 터라 따뜻하진 않았지만, 오히려 서늘함이 기분 좋게 느껴졌다.
“고마워, 달리아.”
많은 것들이 함축된 그 한 마디에 달리아는 입술을 깨문 채 고개를 끄덕였다.
금방 다시 눈물이 나올 것 같았기 때문이다.
‘역시 괜찮아.’
두 다리를 잃었지만 마이아를 구했으니까.
이 손으로 마이아를 지켜냈으니까.
달리아는 두 팔을 벌렸고, 마이아는 작게 웃더니 상체를 숙여 달리아를 꼭 하고 안아주었다.
코델리아는 그런 둘을 웃으며 바라보았고 말이다.
그리고 한 사람.
이제까지 잠자코 있던 유더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달리아 경, 저도 감사합니다.”
“아, 아닙니다. 본분을 다한 것뿐입니다.”
마이아를 품에 안은 채로 달리아가 조금 딱딱하게 답했다.
이러나저러나 기사인 그녀에게 있어 유더는 상관인 동시에 주군이었기 때문이다.
“음, 역시 안 되겠다. 이다음부터는 내가 혼자 할 테니까 유더 넌 잠깐 나가 있어.”
달리아가 어려워하니까.
지금부터 하는 이야기는 애당초 네가 없어야 달리아도 마이아도 더 편히 이야기할 테고.
코델리아의 축객령에 유더는 서운한 표정을 지었지만 잠깐뿐이었다.
달리아와 마이아에게 눈인사를 한 그는 그대로 방을 빠져나갔고, 코델리아는 문이 잘 닫힌 걸 확인한 뒤 달리아와 마이아를 돌아보며 말했다.
“두 사람을 천사로 만들 거야.”
“……네?”
반사적으로 되물은 것은 달리아였다.
마이아는 바로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커다란 눈을 깜박이기만 하였고 말이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천사의 육신을 새로 만든 다음에 두 사람의 영혼을 이식할 거야.”
“네???”
달리아는 다시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뭘 만들어서 뭘 이식한다고?
“부상이 심한 것도 있고, 이미 부상을 당한 지 오래되기도 했으니까. 이게 제일 확실하고 깔끔한 방법이야. 더 안심되기도 하고.”
천사가 되면 인간보다 훨씬 더 강해질 테니까.
사실 천사의 육신을 만든 뒤 영혼을 이식하는 것은 코델리아에게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코델리아 자신과 유더의 경우에는 애당초 신성을 가질 정도로 영혼의 힘이 강한 존재들이었던 터라 아바타를 부리는 게 쉬웠지만, 달리아나 마이아는 평범한 인간이었다.
더욱이 아바타를 부리는 것은 결국 임시 육체를 조종하는 것에 그쳤지만, 두 사람은 아예 새로운 몸으로 영혼을 옮겨야 하는 상황이었다.
‘거기다 그냥 일반 천사로 만들 생각은 조금도 없으니까.’
최하위 천사에게 이식하는 일이라면 솔직히 그렇게까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애당초 공장에서 찍어내듯 양산 가능한 것이 최하위 천사들이었으니 말이다.
코델리아가 생각하는 것은 지천사였다.
대천사와 치천사 바로 다음이라 할 수 있을 고위 천사.
이 정도 천사의 육신을 만든 뒤 그 안에 평범한 인간의 영혼을 담아내는 것은 실로 어려운 일이었다.
코델리아의 신성과 영력 역시도 어마어마하게 소모될 것이 분명했고 말이다.
하지만 코델리아는 할 생각이었다.
두 사람을 위해서라면 상정한 것보다 열 배 이상의 자원이 필요하다 해도 마다치 않을 그녀였다.
“그래서 그러는데, 혹시 원하는 옵션들 있어?”
“오, 옵션이요?”
“응, 몸을 아예 새로 만들 거니까. 영혼이 잘 안착할 수 있게 기본적으로는 두 사람을 베이스로 할 거지만, 그래도 조금씩 고치는 건 가능하거든.”
유더를 밖으로 쫓아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같은 여자끼리면 모를까 남자인 유더가 있으면 두 사람 모두 자유롭게 원하는 바를 말하지 못할 테니까.
“딱 한 번밖에 없는 기회니까 괜히 나중에 가서 후회하지 말고 그냥 다 말해봐. 여간하면 다 가능하니까.”
어째 이야기를 하면 할수록 얼굴이 장난스럽게 변하는 코델리아였다.
두 사람이 어떤 옵션을 요구할지 기대된다는 듯이 말이다.
“그, 그, 어…….”
달리아는 혼란에 빠지기라도 한 듯 말을 더듬었다.
몸을 개조(?)한다고 생각하면 이것저것 바라는 것이 떠오르긴 했지만 막상 입 밖에 내자니 너무 민망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다, 단 거…….”
“응?”
“단 걸 먹어도 살이 잘 찌지 않는…… 그런 것도 가능할까요?”
마이아가 수줍은- 남들이 보기에는 무표정이었지만 달리아는 알아볼 수 있는 - 얼굴로 조심스럽게 묻자 코델리아는 눈을 깜박이는가 싶더니 이내 까르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응, 물론이야. 많이 먹어도 살이 잘 찌지 않는 체질 정도야 간단하지.”
코델리아의 말에 마이아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주먹을 살짝 움켜쥐었다.
생각 이상으로 기쁜 모양이었다.
‘마이아, 신경 쓰고 있었구나.’
낭창낭창한 허리를 가진, 언제나 가련하고 우아한 마이아.
그런데 사실 마이아도 체중 관리를 엄청 신경 쓰고 있었던 거구나.
단 것도 애써 참고 있던 거구나.
그랬던 거구나.
마이아에 대한 이해도가 10 올랐습니다- 같은 멘트를 본 기분이 된 달리아는 작게 웃더니 코델리아를 돌아보았다.
“아가씨, 저도 같은 걸로 부탁드려요.”
“응응, 물론이지. 그것 말고 또 없어?”
새로운 몸에 바라는 것.
이번에도 먼저 마이아가 수줍게 입을 열었고, 마이아의 요구 사항에 달리아는 또다시 작은 놀라움을 느꼈다.
코델리아는 까르르 웃었고 말이다.
“달리아는? 달리아도 똑같은 거?”
“어…… 네…….”
빨개진 얼굴로 수줍게 답한 달리아는 그대로 마이아를 보았고, 마이아는 언제나처럼 다정한 눈으로 달리아를 마주하였다.
그래서 달리아는 미소 지었다.
여전히 부끄러웠지만 코델리아를 돌아본 뒤 이것저것 바라는 것들을 늘어놓았고, 코델리아는 오오 하며 달리아의 바람들을 받아 적기 시작했다.
마이아 역시 손까지 들어가며 원하는 것들을 고백했고 말이다.
그리고 그렇게 세 사람이 즐거운 걸즈 토크를 이어나갈 때.
‘새로운 성경이 필요하겠군.’
문밖에 선 유더는 코델리아와 함께하는 두 천사의 구절과 삽화를 구상하며 속이 까만- 아니, 흐뭇한 미소를 머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