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딩메이커 422화
제13장 - 천사강림
부서진 세계의 여신 아이리아의 강림으로부터 일주일.
플레이아데스 곳곳에 깊은 상처를 남긴 ‘외신전쟁’은 얼추 마무리가 되고 있었다.
“쟤들 결국 돌아가네.”
성벽 위에 선 프란의 말에 역병의사의 가면을 쓴 벨키안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밖에 나와서 싸울 정신이 없을 테니까. 아마 한동안은 동방 내부에서의 싸움으로 시끄러울 거다. 제국도 결국 붕괴할 테고.”
창천의 용이라는 구심점을 잃은 제국은 몇 갈래로 찢어질 것이 분명했다.
첩자들의 보고에 따르면 벌써부터 그럴 기미가 보였고 말이다.
“거 재앙전쟁 때도 그렇고 뭔가 와! 하고 싸우려다가 수뇌부가 당해서 흐지부지되는 그런 느낌이란 말이지.”
“다행인 일 아니더냐? 전면전이 되어봐야 피만 많이 흐를 뿐이다. 사람이 죽을 뿐이고.”
서방이든 동방이든 사람의 목숨이란 점은 같았다.
벨키안은 무익한 죽음을- 아니, 설사 가치가 있다 한들 사람이 죽는 것을 무척이나 싫어했다.
그랬기에 프란은 반사적으로 떠오른 ‘영감은 뱀파이어니까 피가 많이 흐르면 좋지 않아?’ 같은 되바라진 농담을 입 밖에 내진 않았다.
지켜야 할 선이라는 게 있는 법이었으니 말이다.
“아무튼 다행이네. 우리도 슬슬 다시 파라곤으로 돌아가도 될 것 같고.”
“그래, 돌아가야지. 말 나온 김에 바로 가도록 하자.”
“응? 지금? 바로?”
“시간을 끌어봐야 의미가 없으니까. 더욱이 가는 길에 들러야 할 곳도 있지 않나.”
벨키안의 말에 프란은 순간 눈을 깜박였지만 이내 기억났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 맞다. 맞다. 신성국에 들러야 하지. 천사 쇼를 한다고 했었나?”
“……쇼가 아니라 의식이다.”
“그게 그거지 뭐. 좋아, 아무튼 빨리 가자. 재미있을 것 같으니까.”
프란이 재촉하자 벨키안은 한숨을 한 번 내쉰 뒤 팬텀스티드들을 소환했다.
애당초 프란이 철들길 바라는 건 포기한 지 오래였으니 말이다.
“가자.”
“어, 영감.”
히히 웃은 프란은 드루이드답게 안장도 없는 팬텀스티드 위에 능숙하게 올라탄 뒤 자세를 잡았고, 벨키안은 팬텀스티드들을 출발시켰다.
유델리아 신성국을 향해.
프란과 벨키안이 밤하늘을 날아올랐다.
* * *
세일룬 왕국과 아르곤 제국의 국경 지대.
빠르게 달리는 사두마차에 탄 카플란은 쓴웃음을 지었다.
바로 건너편 자리의 상황 때문이었다.
제국과 왕국 모두를 뒤흔든 로그 마스터.
대륙 역사상 최연소 검성에 빛나는 하늘의 검성.
남부의 해적들을 소탕한 남해의 패자.
명성 하나만 놓고 본다면 대륙 어디에 가도 꿀릴 일이 없는 거물들이 한자리에 나란히 앉아 있는 광경.
상상만 하면 뭔가 가슴이 막 벅차오를 것 같았지만 현실은 전혀 달랐다.
“자, 루카스 아.”
“아닌데, 스칼렛 꺼가 아니라 내 꺼 먹을 건데. 그렇지 않아? 응? 루카스.”
“아하하…….”
작은 포크에 꽂은 사과를 내미는 로그마스터와 반대쪽에서 손수 깐 귤을 내미는 남해의 패자와 사이에 껴서 어색한 웃음을 흘리고 있는 하늘의 검성.
세 사람이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소문은 이미 알 만한 사람들 사이에는 널리 퍼진 이야기였다.
하지만 역시 아는 것과 실제로 보는 것 사이에는 큰 차이가 존재한다고 해야 할까?
카플란 자신이 연구실에 처박혀서 서류만 뒤지는 대신 직접 현장을 뛰는 이유이기도 했고 말이다.
‘아니지, 지금 현장 이야기 할 때가 아니지.’
중요한 것은 눈앞의 광경.
스칼렛과 카이사는 일부러라는 듯 서로를 보지 않고 오직 루카스만 보았고,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리던 루카스는 이내 결심했다는 듯 스칼렛이 내민 사과를 먼저 앙 하고 먹은 뒤 바로 연이어 번개처럼 카이사의 귤을 먹었다.
보통 사람인 카플란의 눈에는 거의 동시로 보일 정도의 엄청난 속도.
하지만 과일들을 내민 두 여인은 보통 사람들이 아니었고, 루카스가 무얼 먼저 먹었는지 명확히 알 수 있었다.
“흐흐흥.”
“칫.”
스칼렛이 콧노래를 부르며 씩 하고 미소를 짓자 카이사는 입술을 삐쭉이며 흥 소리를 내었다.
“그…… 저번에는 카이사가 내민 걸 먼저 먹었으니 이번에는 스칼렛을…….”
루카스가 작은 목소리로 이유를 설명했지만 딱히 효과는 없어 보였다.
‘역시 모든 일에는 나름의 고난이 있는 법이군.’
저렇게 아름다운 미녀 두 사람에게 사랑을 받는다고 마냥 좋은 것은-
‘-아니라고 하기엔 또 그렇군. 그냥 마땅한 고생이라 생각하자.’
쓴웃음 대신 흐뭇한 미소를 지은 카플란(51세, 솔로)은 창밖을 돌아보았다.
따스한 햇빛을 보니 새삼 코델리아가 떠오르는 그였다.
‘건국 선언일 이후 오랜만이군.’
두 사람 모두 잘 지내고 있을까.
사태 수습용인지 스칼렛과 카이사의 뺨에 번갈아 입을 맞추는 루카스를 외면하듯 카플란은 그저 창밖만 바라보았다.
* * *
테이밍한 커다란 새 위에 엎드려 누운 키라라는 콧노래를 부르며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너무너무 좋아하는 주인님들을 뵈러 가는 길이라 가만히만 있어도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기 때문이다.
‘칭찬 많이 해주시겠지?’
이번 싸움에서 공을 많이 세웠으니까.
사람들도 많이 구했고.
제도 중앙을 단신으로 돌파한 제일검의 위세가 엄청났던 터라 크게 부각되진 않았지만 전투 자체는 제도 전역에서 벌어졌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키라라는 제도 외곽 지대에서 싸움에 참여했는데, 그녀가 없었다면 제도의 사상자 수가 적어도 몇천은 추가되었을 터였다.
‘그래도…… 역시 피해가 너무 크긴 했어.’
제도 외곽부의 싸움은 규모 자체는 컸지만 실질적인 피해는 그렇게까지 큰 편이 아니었다.
어느 한쪽이 일방적으로 압도하는 것이 아닌 백중세의 싸움이 벌어졌기 때문인데, 제일검이 침투한 제도 중앙 쪽은 이야기가 전혀 달랐다.
‘소드 마스터들도 많이 죽었고.’
제일검 앞을 막아선 제국의 소드 마스터는 모두 합쳐 여덟.
그중에서 셋이 죽었고, 둘은 재기 불능의 부상을 입어 은퇴해야만 했다.
남은 셋 가운데 둘인 레온과 사라 역시 부상이 너무 심해 재활에 상당한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았고 말이다.
“후우…….”
죽거나 다친 사람들 생각을 하다 보니 절로 꼬리와 귀가 축 늘어진 키라라였지만 잠깐뿐이었다.
우울한 기분을 달래기 위해 소중히 간직하고 있는 주인님들의 초상화를 펼친 키라라는 다시 얼굴 가득 환한 미소를 지었다.
빨리 가서 주인님 무릎에 엎드려야지.
머리랑 등도 쓰다듬어 달라고 해야지.
유더 주인님이 만드신 츄르도 달라고 하고.
빙긋빙긋 웃기 시작한 키라라는 꼬리를 흔들며 시선을 멀리하였다.
아직 한참이나 남았지만 기분 탓인지 유델리아 신성국이 보이는 것 같았다.
* * *
“아가씨, 꼭 해야 하는 걸까요?”
“몰라, 유더가 꼭 해야 한대.”
유델리아 신성국의 임시 궁전인 별장 안.
유더가 준비한 무대의상으로 갈아입은 달리아가 어색해 죽겠다는 얼굴로 묻자 코델리아는 얼굴 가득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말만 들어보면 자기는 싫은데 유더가 시키는 거라 어쩔 수 없다- 지만 표정을 보면 코델리아도 적극 동의하고 있다는 사실을 누구나 알 수 있었다.
유더가 준비한 무대의상.
‘천사’ 하면 흔히 떠올리는 하얗고 하늘하늘한, 어깨가 고스란히 노출되는 가벼운 드레스.
달리아는 다리 쪽이 허전해 죽겠다는 듯 엉망이 된 얼굴로 치맛자락을 만지작거렸고, 코델리아는 무척이나 흡족한 얼굴이 되어 생각했다.
‘우리 유더 나이스.’
치마를 입은 달리아라니.
이 얼마나 귀한 광경이란 말인가.
“괜찮아, 달리아. 예뻐.”
바로 그때 거의 같은 복장을 한 마이아가 반짝반짝 빛나는 눈으로 말했다.
코델리아에게는 은근히 익숙한 눈빛이었는데, 유더가 코델리아 자신을 잔뜩 꾸며줄 때 자주 보여주는 눈빛이었기 때문이다.
‘원조는 역시 마이아였어.’
어찌 되었든 마이아.
평소에는 메이드답게 머리칼을 단정하게 틀어 올리고 다니는 그녀였지만 오늘은 달랐다.
온전히 풀어 길게 늘어뜨렸는데, 잿빛이었던 이전에도 아름답던 머리칼이 은빛이 되자 실로 빛이 나는 것만 같았다.
‘아니, 그냥 마이아가 너무 예쁜 건가?’
예전부터 예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제대로 꾸미니 그 미모가 실로 굉장한 수준이었다.
‘미안, 실비아 언니. 마이아가 더 예쁜 것 같아.’
북부 최고의 미녀로 손꼽히는 실비아였지만 지금의 마이아에게는 안 될 것 같았다.
인간인 시절에도 여리여리하면서도 가냘픈, 보호 본능을 마구 자극하는 선이 가는 미녀였던 마이아였는데 천사가 되고 나니 ‘가련함’이 그야말로 신급이 되어 그냥 가만히 서 있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의 애간장을 녹일 수준이었다.
더욱이 마이아의 요구로 코델리아 자신이 이것저것 수정한 사항들이 있지 않은가.
‘마이아, 신경 쓰고 있었구나.’
이전과 은근히 달라진 마이아의 몸매를 눈으로 슬쩍 훑은 코델리아는 아저씨 같은 웃음을 흘린 뒤 다시 달리아를 돌아보았다.
‘응, 우리 달리아도 예뻐.’
마이아나 실비아처럼 화려한 맛은 없었지만 인간 시절에도 이미 건강미 넘치는 미녀였던 달리아였다.
마이아와 마찬가지로 천사 보정이 걸리고, 코델리아의 손길을 거치자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미녀가 탄생하였다.
“노, 놀리지 마, 마이아.”
“놀리는 거 아냐. 정말 예뻐, 달리아.”
달리아가 새빨개진 얼굴로 치맛자락을 움켜쥐며 말하자 마이아가 특유의 표정을 한 채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달리아는 자연 더욱 부끄러워져 어쩔 줄을 몰라 했고 말이다.
“브로치가 비뚤어졌네.”
“으응.”
마이아의 지적에 달리아는 얼른 브로치를 손보려 했지만 마이아가 조금 더 빨랐다.
소리 없이 달리아에게 다가선 마이아는 달리아의 가슴께에 달린 브로치를 바로 하였고, 달리아는 얼굴을 붉힌 채 마이아의 가늘고 긴 손가락을 쳐다만 보았다.
“흐흐흐.”
그런 두 사람을 보며 다시 아저씨 웃음을 흘린 코델리아는 짝짝짝 박수를 치며 말했다.
“아무튼 리허설 제대로 해야 하니까 둘 다 날개 꺼내봐. 헤일로도 꺼내고.”
“으으…… 네, 아가씨.”
달리아가 여전히 부끄럽다는 듯 치맛자락을 쥔 손을 꼼지락거렸지만 그래도 이내 성실히 날개와 헤일로를 꺼냈다.
마이아 역시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날개와 헤일로를 꺼냈고 말이다.
“와아…….”
흩어지는 은빛 머리칼 아래로 빛의 날개가 펼쳐지는 광경은 그야말로 환상적이었다.
헤일로와 날개를 펼친 마이아의 자태는 여자인 코델리아가 봐도 얼굴이 빨개질 정도로 아름다웠고 말이다.
‘근데 머리칼은 왜 쓸어 넘긴 건지?’
순간 소소한 의문이 든 코델리아였지만 이런 코델리아의 의문과는 별개로 달리아는 순수한 감탄을 연발했고, 마이아는 수줍음과 만족스러움이 뒤섞인 작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자자, 그럼 대본 보고 리허설 시작하자.”
히히히 웃은 코델리아는 유더가 만들어준 대본을 펼쳤다.
이번 의식의 주인공은 달리아와 마이아였으니 부끄러움은 두 사람의 몫이지 코델리아 자신의 몫이 아니었다.
그러니 마음 편히 즐겁게 두 사람의 부끄러워하는 모습을 감상-
“어?”
“왜 그러세요, 아가씨?”
마이아의 물음에 코델리아는 바로 답하는 대신 대본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리고-
“야! 강유더! 내가 왜 나오는데?! 어? 내가 왜 나오냐고!”
유델리아 신성국.
교황의 거처.
분기탱천한 코델리아의 추궁에 유더는 언제나처럼 능청스러운 얼굴이 되어 답했다.
“응? 당연한 거 아냐? 사랑의 여신 코델리아께서 새로이 두 천사를 내려보내시니, 여신의 지상대행자인 성녀 코델리아가 천사들을 맞이하노라- 잖아? 여기 성경 구문도 있고.”
말을 마친 유더는 보란 듯이 성경을 펼쳐 보였고, 코델리아는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정말로 성경 구절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 이건 언제 또 새로 찍은 거야? 삽화는 언제 또 넣었고?”
“오늘.”
“아오, 진짜. 쓸데없이 유능해!”
보아하니 한 권만 만든 게 아닌 모양이었다.
“어, 맞아. 이미 양산했어. 의식 때 사람들에게 나눠줘야 하니까. 이거 제작비 엄청 드는 거 알지? 이제 못 무른다는 것도 알고?”
“아오, 나쁜 놈. 진짜 나쁜 놈.”
“어쩌겠어, 이미 찍은 거. 아무튼 잘 부탁할게, 코델리아.”
유더가 화사하게 웃으며 말하자 코델리아는 짜증 난다는 듯 두 손을 마구 흔들다 소리쳤다.
“너 미워! 너 싫어!”
“오랜만에 듣네. 그리운 울림이야.”
허허허 웃으며 자신을 끌어안는 유더의 행동에 약이 잔뜩 오른 코델리아였지만 언제나 그랬듯이 완벽한 유더의 포위망이었다.
코델리아는 결국 어깨를 늘어뜨린 뒤 입술을 삐쭉일 따름이었다.
“나중에 두고 봐.”
“미안해, 내가 맛있는 거 해줄까? 응?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파르페.”
“알겠습니다. 오늘 밤에 대령하도록 하겠습니다.”
“하아…… 진짜 미워 죽겠어.”
“그게 또 매력이잖아?”
“미친놈이 뭐라는 거야.”
욕지거리를 토한 코델리아였지만 얼굴은 어느새 웃고 있었다.
그리고 이틀 뒤 오후.
달리아와 마이아의 성경 데뷔를 알리는 강림 의식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