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딩메이커 426화
제14장 - 퍼스트 콘택트 #2
란디우스와의 첫 만남.
기억을 더듬듯 한 차례 눈을 감았다 뜬 카마엘은 작은 미소와 함께 입을 열었다.
“그건 내가…….”
“잠깐!”
“음?”
갑작스러운 난입에 놀란 란디우스가 눈을 깜박였을 때 다른 이들 역시 의아함이 담긴 눈으로 이야기를 끊은 자- 프란을 돌아보았다.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건가?”
어쩐지 모르게 딱딱한 카마엘의 물음에 프란은 얼른 두 손을 내저었다.
“아니아니. 문제가 있는 건 아니고. 그냥 순서를 좀 바꿨으면 해서.”
“어째서지?”
“그…… 뭔가 이런 건 역시 흐름이라는 게 있으니까? 별거 아닌 것부터 시작해서 중요한 것으로 이어진다든지. 뭔가 처음부터 카마엘 이야기를 듣는 건 케이크 먹을 때 딸기부터 먹는 기분이라고 해야 하나?”
“흠…… 과연, 그런 것인가.”
날카롭던 카마엘의 기세가 순간 누그러졌다.
그러자 프란은 악동 같은 미소를 흘렸고, 레나는 다소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리며 생각했다.
‘자기가 케이크의 딸기라고 납득하고 있어……!’
아닌데.
딸기는 누가 뭐래도 나인데.
하지만 그렇다고 자기가 딸기니까 제일 마지막에 하겠다는 이야기를 하기에는 뻔뻔함이 많이 부족한 레나였다.
그랬기에 레나는 일단 침묵했고, 프란은 그런 레나의 얼굴까지 힐끔 살펴보더니 빙긋빙긋 웃으며 말했다.
“그럼 제일 안 중요하고 별거 아닌 이야기가 나올 거 같은 영감 이야기부터 들어보자고.”
“……그런 식으로 나올 거라 생각했지만 역시나군.”
너무나 예상했던 그대로라 이제는 화도 나지 않는다는 듯 혀만 몇 번 끌끌 찬 벨키안은 새삼 앉은 자세를 정돈한 뒤 말했다.
“정말로 별거 아닌 이야기다.”
“그러니까 오히려 기대되잖아. 어떤 만남이었는데?”
“그건…….”
* * *
벨키안은 응접실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다.
파라곤 왕국.
대륙양강 가운데 하나인 세일룬 왕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서쪽의 작은 나라.
하지만 작다고 쉬이 얕볼 수 있는 나라는 절대로 아니었다.
세일룬 왕국은 물론이고 아르곤 제국까지도 능가하는 오랜 역사와 전통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대대로 실력 있고 뛰어난 기사들을 잔뜩 배출한 인재의 요람이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국민들 역시 대체로 키가 크고 미색이 뛰어나 주변국들로부터 ‘파라곤 왕국에는 미인과 천재가 많다’라는 이야기를 종종 듣고는 했다.
‘인간계의 엘프 나라라고 했던가.’
오고 가던 중에 들은 파라곤 왕국의 별칭을 떠올린 벨키안은 작게 웃으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지금 그가 앉아 있는 응접실은 다른 어디도 아닌 파라곤 왕국의- 그것도 궁전 마법사인 바르도의 응접실이었기 때문이다.
‘바르도다운 공간이군.’
궁전 마법사의 응접실답게 크기 자체는 무척이나 컸지만 화려함은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군데군데 쌓여 있는 서적과 두루마리, 각종 연구 자료들 때문에 응접실이라기보다는 연구실 창고를 연상시켰다.
그리고 어찌할 수 없는 소박함과 아늑함.
이 응접실의 주인이 바르도라는 걸 여실히 알려주는 그 특유의 느낌.
‘저건 좀 바르도답지 않지만…… 그래도 어울리는군.’
벨키안의 시선이 닿은 곳에 자리한 것은 하얗고 소박한 들바람꽃이었다.
작은 꽃병 안에 몇 송이가 꽂혀 있었는데, 응접실의 분위기와 무척이나 잘 어울렸다.
‘바르도가 꽂아둔 거라면 이미 말라 죽었을 터인데…… 왕국의 메이드들이 가져다 놓은 건가?’
아니, 어쩌면 새로 들였다는 제자가 한 일일지도.
벨키안은 잠시 눈을 감고 바르도가 보낸 편지들을 떠올려 보았다.
-내게 딸이 생겼다네.
짧은 글귀였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바르도가 새로 얻은 제자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여실히 느낄 수 있는 문장이었기 때문이다.
‘다만…… 딸이라기보다는 손녀에 가깝지 않을까.’
벨키안 자신이 그런 것처럼 바르도도 벌써 예순이 훌쩍 넘은 나이였으니 말이다.
쓰게 웃은 벨키안은 다시 찻잔을 들어 올렸다.
본래 방랑하는 마법사였던 자신이 지금 이렇게 응접실에 앉아 있는 것은 단순히 오랜 친구를 만나기 위함이 아니었다.
파라곤 왕국의 영입 제안.
왕국의 마법사가 되어달라는 왕가의 요청.
사실 그리 흔한 일은 아니었다.
벨키안 자신은 네크로맨서였으니 말이다.
죽은 자를 부리는 네크로맨서는 어느 왕국에서나 기피의 대상이었다.
쓸모 자체는 인정하지만 죽음이 가지는 어두운 이미지가 너무 강하다 보니 전면에 내세우기는 꺼려한다고 해야 할까.
그랬기에 여간한 국가들은 아예 네크로맨서와는 상종 자체를 하지 않았고, 세일룬 왕국이나 아르곤 제국 같은 강대국들도 어디까지나 비밀리에 네크로맨서들을 관리했지 대놓고 외부에 드러내는 일은 없다시피 했다.
‘바르도가 힘을 좀 썼겠지.’
아마 벨키안은 죽음이 아닌 생명의 힘을 다루는 마법사다!- 하는 식으로 이야기를 했을 터였다.
딱히 거짓인 것도 아니었고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네크로맨서로서 파라곤 왕국에 머물 생각은 없는 벨키안이었다.
이러나저러나 결국 네크로맨서인 만큼 바르도와 파라곤 왕국 모두에게 누가 될 수도 있는데다가, 결정적으로 벨키안 자신이 어디 한곳에 묶일 마음이 조금도 없었기 때문이다.
‘약제사 정도면 괜찮지 않을까.’
정착할 마음이 없는 벨키안이었지만 그래도 어딘가 근거지가 될 곳 정도는 필요했다.
그러니 1년에 몇 달 정도는 파라곤 왕국에 머물며 약제사 일을 하면 어떨까.
가끔씩 바르도와 함께 마법 연구도 하고.
썩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한 벨키안은 이내 쓴웃음을 지었다.
이런 생각을 하는 자신 자체가 이제 늙었다는 기분이 들어서였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이었다.
“늦어서 미안하네. 급히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서.”
허허 웃으며 응접실에 들어선 노인- 바르도는 그야말로 인상 좋은 이웃집 할아버지 그 자체였다.
마법사답지 않게 살짝 살집이 오른 얼굴과 인자함과 느긋함이 탑재된 이목구비, 거기에 펑퍼짐한 로브가 너무나 어울리는 통통한 체구까지.
솜사탕을 연상케 하는 곱슬 진 하얀 머리칼과 수염까지 그야말로 완벽하다고 해야 할까.
그냥 보기만 해도 푸근한 미소가 나오는 친구였던 터라 벨키안은 작게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괜찮네. 차 맛이 썩 좋아서 즐거운 기다림이었다네.”
“그리 말해주니 고맙구만. 내 제자가 직접 말린 찻잎이라네. 물론 차도 내 제자가 끓였고. 손재주가 정말 좋단 말이지.”
싱글벙글 웃으며 말하는 폼이 꼭 늦둥이 막내를 자랑하는 노년의 아버지였기에 벨키안은 다시 웃고 말았다.
“여자아이였던가?”
“그렇다네. 이름은 레나고, 얼굴도 예쁜데 마음씨는 더 예쁜 정말정말 귀엽고 예쁘고 사랑스러운 아이라네. 그 아이 금발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아나? 황금을 햇빛에 녹여 만든 것 같은 반짝임이라네. 푸른 눈동자는 마치 별빛 같고 말이야. 거기에 착하기는 또 얼마나 착한지. 진짜 지상에 강림한 천사나 다름이 없다네. 나중에 대성하면 분명 천사라는 이명으로 불릴 게 분명하네. 분명 그리할 게야. 거기에 성실하고 똑똑하고 솔직하고…… 아, 물론 마법 재능도 무척이나 뛰어나다네!”
“음, 과연. 다른 건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자네가 얼마나 그 아이를 아끼는지는 잘 알겠군.”
“아니, 이 친구가 지금까지 뭘 들은 겐가. 정말 예쁘고 착하고 똑똑하다니까?”
“그래, 그래. 레나. 바르도의 착하고 똑똑하고 예쁜 제자. 기억했네.”
“지상에 강림한 천사 같은 아이라는 것도 추가해 두게나.”
“……그러도록 하지.”
대체 어떤 아이길래 저러는 것일까.
슬슬 진짜로 궁금증이 생긴 벨키안이었다.
“아무튼 제안은 고민해 봤나?”
맞은편 자리에 털썩하고 앉은 바르도가 통통한 손가락으로 쿠키를 집으며 묻자 벨키안은 생각해 둔 답을 내놓았다.
“왕국 소속 마법사는 좀 아닌 것 같고, 약제사로 머무는 정도라면 생각해 보겠네.”
“예상한 그대로의 답이지만 아쉽구만. 너무 비싸게 구는 거 아닌가?”
“워낙 비싼 몸이라 어쩔 수가 없네.”
“흐흐, 그래도 농담을 하는 걸 보니 파라곤 왕국이 썩 마음에 든 모양이구만.”
“뭐, 자네도 있고…… 예쁘고 착한데 똑똑하기까지 한 천사 같은 아이도 있으니까.”
“과연 벨키안. 눈치가 빠르다니까.”
레나의 칭찬이 마음에 든다는 듯 껄껄 웃은 바르도는 쿠키를 와그작와그작 씹어댔고, 벨키안은 다시 작게 웃었다.
대마법사.
정신병자의 비율이 70%가 넘고 사이코패스의 비율은 그보다 더 높은 그야말로 정신병 그 자체인 직종.
하지만 눈앞의 바르도는 대마법사임에도 불구하고 선량한 인격을 고스란히 간직한 실로 진귀한 케이스였다.
그래서 벨키안은 바르도가 좋았다.
그와 있을 때면 다른 마법사와 함께할 때처럼 쓸데없는 견제와 의심으로 머리가 아플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그럼 내 연구실 옆에 방을 하나 마련하겠네. 약제사로 활동하려면 음, 약제도 많이 필요하겠지?”
“당연한 이야기를 하는군. 다만 정원이든 어디든 땅을 조금 주면 직접 재배도 할까 하네.”
“그것도 좋지. 아, 만드라고라 같은 건 위험해서 안 되네. 알겠지?”
“알고 있네. 나도 상식이라는 게 있으니.”
“흐흐, 상식을 논하는 대마법사라니 참 재미있구만.”
바르도가 다시 그렇게 웃을 때였다.
“마법사님,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문밖에서 들려온 씩씩한 목소리에 바르도는 양해를 구하듯 벨키안을 돌아보았고, 벨키안은 괜찮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음, 들어오게나.”
벨키안의 허락을 받은 바르도가 바로 말하자 키가 크고 체격이 좋은 청년 하나가 응접실에 들어왔다.
파라곤 왕국의 근위기사임을 증명하는 갑옷과 망토.
불꽃을 연상시키는 붉은 머리칼과 남자답게 잘생긴 미소가 가득한 얼굴.
벨키안이 저도 모르게 청년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자 바르도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껄껄 웃으며 말했다.
“여기 이 친구는 근위 기사단장의 아들인 란디우스라네. 기사단장의 아들답게 실력도 아주 좋고 얼굴도 잘생긴, 그야말로 전도가 유망한 청년이지. 장차 파라곤 왕국의 든든한 기둥이 되어줄 걸세.”
바르도다운 칭찬에 청년- 란디우스는 부끄럽다는 듯 얼굴을 살짝 붉히며 겸양을 표했다.
“과찬이십니다. 아직 부족한 몸입니다.”
“후훗, 겸손하기는. 아무튼 인사들 하게나. 이쪽은 내 친우인 벨키안이라고 하네. 아마 앞으로는 얼굴 볼 일이 많을 걸세.”
바르도가 그리 말하며 벨키안을 가리키자 란디우스는 오른 주먹을 가슴 위에 올리는 기사의 예를 표한 뒤 말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파라곤 근위 기사단의 기사인 란디우스라 합니다.”
씩씩하고 활기찬 청년.
그래서일까.
실내임에도 불구하고 야외에서 태양을 마주한 기분을 느낀 벨키안은 작은 미소를 그리며 답했다.
“벨키안이다.”
* * *
“잠깐, 그게 다임?”
바르도 만나러 갔다가 마찬가지로 바르도 만나러 온 란디우스와 조우해서 인사했다?
프란이 재차 확인하듯 묻자 벨키안은 뚱한 얼굴이 되어 답했다.
“이게 다다만.”
“아니, 이게 뭐야! 정말로 별거 없잖아!”
그냥 친구 만나러 갔다가 만났다니.
사건도 없고 임팩트도 없고 사연도 없고!
“막 좀비 사태를 막기 위해 같이 공투했다든지, 저주에 걸린 누군가를 구하기 위해 함께 모험을 했다든지 그런 것도 아니고 그냥 ‘란디우스입니다’, ‘벨키안이네’ 하고 인사한 게 다라니. 이게 뭐임 대체.”
“그래서 별거 없다고 말했지 않나!”
별거 없다고 말했고 정말 별거 없는 이야기를 하였다.
그런데 뭐가 문제란 말인가.
벨키안이 억울함과 분함을 담아 말하자 프란은 애당초 이런 반응을 노렸다는 듯 낄낄거렸고, 다른 일행들은 각기 고개를 내저으며 쓴웃음들을 지어댔다.
“아무튼 별거 없는 영감의 이야기는 들었으니 다음으로 넘어가자고. 아, 뭔가 시간 낭비한 기분이야. 그냥 친구네 응접실 찾아갔다가 만났다고 한 줄 정리하면 되는 걸 왜 그렇게 길게 이야기한 거야.”
“벨키안 님, 참으세요. 원래 저런 애잖아요?”
레나가 얼른 손을 잡으며 달래듯 말하자 벨키안은 후- 하고 긴 숨을 토한 뒤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프란도 프란이었지만, 레나의 방금 위로도 굳이 따지면 막말의 범주에 들어가기는 했다.
하지만 애당초 이런 관계라고 해야 할까.
부담 없이 막말을 해도 되는 관계.
어떻게 보면 참으로 막장스러운 관계였지만, 그만큼 서로 친밀한 관계이기도 한 파라곤의 다섯 영웅들이었다.
“그럼 다음은 제가 할게요.”
분위기를 전환시키듯 레나가 입을 연 때였다.
“아, 잠깐. 혹시 내가 해봐도 되나?”
“응? 란디가?”
“어, 열심히 생각해 보니 생각이 난 거 같거든.”
레나와의 첫 만남.
기사단에서의 만남이 아닌, 그 이전의 만남.
란디우스의 요청에 레나는 팔짱을 끼더니 살짝 악동 같은 표정이 되어 말했다.
“그런데 란디, 자신 있어? 틀리면 본전도 못 찾는 거 알지?”
얼굴은 웃지만 눈은 웃지 않는, 어쩐지 모르게 등골이 싸늘한 말이었지만 란디우스는 태양의 전사답게 껄껄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생각났으니 이야기하고 싶군. 내가 해도 되겠지?”
레나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에게도 허락을 구한다는 듯 시선을 돌리자 모두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란디. 한번 해봐.”
“훗, 그럼 시작하도록 하지.”
짐짓 시험 감독관 같은 표정을 짓는 레나의 허리를 와락 안아 결국 다시 웃게 만든 란디우스는 이야기를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