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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딩메이커-428화 (428/473)

엔딩메이커 427화

제14장 - 퍼스트 콘택트 #3

란디우스는 파라곤 왕국의 근위기사단장인 란포드 경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에게 강인한 신체를, 어머니에게 붉은 머리칼과 밝은 성격을 물려받은 란디우스는 어린 시절부터 비범한 면모를 여럿 보였는데, 언제나 가장 먼저 언급되는 것은 두 살 무렵의 일이었다.

“두 살 무렵에 뭘 했는데 그럼?”

“별건 아니고, 침대에 숨어든 독사를 목 졸라 잡았어.”

“……어떻게 봐도 별거지만 란디우스의 일이라 생각하니 뭔가 당연한 것도 같다고 해야 하나…….”

잠시 한 손으로 독사의 목을 조르고 있는 아기 란디우스의 모습을 떠올려 본 프란은 이내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고, 이미 이 이야기를 알고 있던 나머지 일행들은 쓴웃음을 지었다.

“아무튼 그럼 계속하지.”

무럭무럭 자란 란디우스는 열 살이 되던 해에 종기사로서 근위기사단에 입단하였고, 열다섯이 되던 해에 역대 최연소 근위기사가 되었다.

그리고 열아홉이 되던 해.

파라곤 왕국의 유일한 검성으로서 근위기사단장 자리를 지키고 있던 란포드 경은 친애하는 아들인 란디우스에게 무사수행을 떠날 것을 명하였다.

“네가 온전히 자라기에는 파라곤 왕국이 너무 작구나.”

왕가에 대한 불경죄가 될 수도 있는 말이었지만 란포드 경은 개의치 않았다.

누가 봐도 명확한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란디우스는 무사수행을 떠났다.

파라곤 왕국에서 시작해 세일룬 왕국과 저 먼 동방을 거쳐 아르곤 제국을 통해 돌아오는 실로 장대한 여행길이었다.

검 한 자루에 말 한 필 달랑 타고 떠난 여행이라 당연히 오랜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

세일룬 왕국을 지나는 데만 일 년이란 시간이 걸렸고, 동방을 거쳐 아르곤 제국에 도달했을 때는 삼 년이 지나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사 년째가 되었을 때.

파라곤 왕국으로의 귀환 길에 오른 란디우스는 온갖 상황을 모두 겪어본, 그렇기에 일반적인 청년 기사들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노련함과 원숙함을 갖춘 걸물이 되어 있었다.

물론, 이는 어디까지나 기사로서의 완성도를 이야기하는 것이지 란디우스의 머릿속이라든지, 성격이라든지, 취향까지 포함한 것은 아니었다.

“바람은 언제나…… 자유로운 법이니까. 캬, 멋지다.”

세일룬 왕국의 십검호 가운데 하나이자 북부의 검장이라 불리는 바이엘 백작의 ‘결정대사’를 따라 읊어본 란디우스는 흐뭇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새삼스럽지만 바이엘 백작이 소위 말하는 ‘풍류’를 아는 사람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역시 남자라면 결정대사 하나 정도는 있어야지.’

검을 거둘 때 남기는 한마디라든가.

적과 대치했을 때 날리는 시그니처 대사라든가.

‘그러고 보니 그것도 있었지. 빛의 속도로 베여본 적이 있나?’

검림의 유망주라는 제일검 룬 프라우드의 결정대사.

차기 십검호 자리가 거의 확실하다는 남자였는데, 빛처럼 빠른 쾌검이 특기라는 모양이었다.

“후, 역시. 결정대사는 필요해.”

란디우스 자신은 무어라 하면 좋을까.

바이엘 백작도 제일검도 모두 자신이 익힌 검술을 기반으로 결정대사를 만들었으니 란디우스 자신은 구극태양신공을 살려야 하지 않을까?

“태양은 언제나…… 다시 떠오르는 법이니까. 오, 좋아. 멋진데?”

솔직히 좀 너무 바이엘 백작의 결정대사를 표절한 기분이 들긴 했지만 아무튼 마음에 들기는 했다.

“태양은 언제나, 다시 떠오르는 법이니까.”

다시 한번 말해본 란디우스는 흐뭇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단순히 멋진 걸 넘어 희망적인 느낌까지 들었기 때문이다.

‘일단 이걸로 해야겠다. 적어놔야지.’

마음을 정한 란디우스는 수첩을 꺼내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결정대사를 적기 시작했다.

수첩 안에는 무사수행을 하며 하고 싶었던 일들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는데, 거의 대부분 해낸 터라 줄이 좍좍 그어져 있었다.

‘전부 해내지 못한 건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위아래로 모두 줄이 쳐져 있는 가운데 갑자기 깨끗한, ‘아름다운 레이디와 달밤 아래에서 진한 키스를 하기’로 시작되는 ‘아름다운 레이디 시리즈’를 살핀 란디우스는 새삼 눈물을 삼킨 뒤 수첩을 접었다.

‘그나저나 이제 슬슬 올 때가 되었는데.’

주인을 닮아 똑똑한 것인지 알아서 잘 가는 커다란 군마 위에서 란디우스는 시선을 멀리하였다.

슬슬 파라곤의 국경 지대였으니 마중 나올 사람이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아, 있다.”

저만치 멀리 나무 아래에 눈에 익은 인영이 하나 자리하고 있었다.

새하얀 눈을 연상케 하는 백발을 길게 기른 미모의 기사.

“카마엘!”

란디우스가 손을 높이 들며 소리치자 그늘 아래에 있던 기사- 카마엘은 바로 달려오는 대신 똑같이 손을 들어 보인 뒤 말 위에 올랐다.

그늘까지 오면 그때서나 이동할 생각인 모양이었다.

‘카마엘답네.’

사 년 만에 마주하는 친우가 예전과 변함없다는 사실에 묘한 기쁨을 느낀 란디우스는 껄껄 웃으며 그늘을 향해 달려갔다.

“카마엘.”

“란디우스.”

옅은 미소가 더해진 미성에 란디우스는 절로 나온 웃음을 한바탕 시원하게 터뜨린 뒤 생각했다.

아니, 그냥 입 밖에 소리 내어 말했다.

“더 잘생겨졌네.”

아니, 저건 더 예뻐졌다고 해야 할까?

머리가 긴 것도 있지만 타고난 선이 가는 탓인지 단순히 잘생겼다를 넘어 아름답다는 느낌이 드는 카마엘의 미모였으니 말이다.

‘카마엘이었다면 ‘아름다운 레이디 시리즈’를 완수할 수 있었겠지?’

“무슨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 건강해 보이는군. 다행이다.”

냉랭한 듯하면서도 따스함이 묻어나는 카마엘의 말투에 란디우스는 다시 껄껄 웃은 뒤 카마엘과 말 머리를 나란히 했다.

“편지로 계속 전달은 받았지만, 왕국에는 별일 없지?”

“……너랑 방향만 다를 뿐 나도 무사수행을 떠났던 걸 잊은 건 아니겠지?”

“그래도 나보다 몇 달은 일찍 돌아왔잖아.”

당장 이렇게 마중을 나온 것부터가 그 증거였다.

그랬기에 카마엘은 무어라 더 말을 붙이는 대신 시선을 조금 멀리하며 말했다.

“큰일은 없는 걸로 안다. 굳이 따지자면 작년쯤에 대주교가 새로 왔다는 정도일까?”

“아, 그 대주교. 왕비 전하께서 무척이나 마음에 들어 하시는 것 같다고 아버지께서 그러시던데.”

“단장님의 말씀대로다. 왕비님께서는 애당초 솔라리의 독실한 신자셨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지만…… 뭐, 일단은 딱히 문제가 되거나 하지는 않고 있다. 대외 활동을 많이 하는 것도 아니고. 거의 항상 왕가에서 세운 교회나 자신의 거처에만 머무는 모양이니.”

카마엘의 말에 란디우스는 미간을 좁혔다.

내용 자체보다는 카마엘이 생각 이상으로 대주교를 주목하고 있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느낌이 안 좋기라도 한 거야?”

“……솔직히 그렇지만 방금 이야기한 것처럼 딱히 문제가 될 만한 일을 한 적은 없다. 그냥…… 단순히 기분 탓일지도.”

거기까지 말한 카마엘은 고개를 한 번 내젓더니 빙긋 웃으며 물었다.

“잠깐! 잠깐! 빙긋 웃었다고? 카마엘이?”

한참 이야기를 듣던 프란이 도저히 못 믿겠다는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치자 란디우스는 껄껄 웃으며 말했다.

“어, 빙긋. 환하게. 아니, 아름답게인가?”

아무튼 환한 미소.

란디우스가 거듭 주장하자 프란은 바로 카마엘을 돌아보았고, 카마엘은 특유의 뚱한 표정을 한 채 딱딱한 어조로 말했다.

“나도 사람이다.”

여러 가지 의미를 함축한 답변에는 날카로움이 묻어났지만 프란은 굴하지 않고 물었다.

“그럼 지금 웃어볼 수 있어?”

“싫다.”

카마엘은 딱 잘라 말했고, 프란은 저 보라는 듯 란디우스 쪽을 돌아보았다.

저런 카마엘이 환히 웃었다니 말이나 되냐는 얼굴이었지만 다른 이들은 그런 프란에게 동조하는 대신 다른 행동들을 보였다.

“커스.”

“억.”

프란의 뒤통수에 저주를 갈긴 벨키안은 급습을 당해 골골거리는 프란을 스켈레톤들을 시켜 자리에 앉힌 뒤 흐뭇함과 미안함이 뒤섞인 얼굴로 란디우스에게 말했다.

“이야기를 끊어서 미안하군. 계속해 보게.”

“예, 벨키안 님.”

란디우스와 카마엘은 이런저런 잡담을 나누며 천천히 말을 몰았다.

양쪽 모두 편지를 꽤 교환하기는 했지만 직접 만나는 건 사 년 만인 터라 쌓인 이야기들이 꽤 많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렇게 얼마나 나아갔을까.

“란디우스 님?”

옆에서 들려온 작은 소녀의 목소리에 란디우스와 카마엘은 동시에 고개를 돌렸고, 길가에서 제법 멀리 떨어진 꽃밭에 쪼그려 앉은 소녀를 발견할 수 있었다.

커다란 밀짚모자를 쓰고 투박한 회색 옷을 입은 소녀.

갑자기 처음 보는 아이가 자신의 이름을 부른 것이었지만 란디우스는 이상하게 생각하는 대신 환히 웃으며 손을 흔들어주었다.

“훗, 역시 고향에 돌아오니 나도 제법 유명한 건가?”

작게 말한 란디우스는 아예 소녀 쪽으로 말 머리를 돌렸다.

모처럼 만난 자신의 팬이었으니 제대로 팬서비스를 해줄 생각이었다.

세일룬 왕국의 바이엘 백작처럼 말이다.

하지만 란디우스가 말에서 내리려는 찰나였다.

“도망가는군.”

그랬다.

란디우스가 말 머리를 돌린 순간 어쩐 일인지 안절부절못하던 소녀가 그대로 돌아서더니 도망치기 시작했다.

어찌나 서둘러 도망치는지 몇 번이나 넘어질 뻔했는데, 밀짚모자까지 벗겨져서 환한 금발이 고스란히 보였다.

“넘어졌군.”

이번에도 카마엘의 말대로였다.

발을 헛디딘 소녀가 꺅 소리를 내며 앞으로 고꾸라졌는데, 어찌나 크게 넘어졌는지 치마 속이 보일 지경이었다.

“이런.”

란디우스는 기사였고, 신사였다.

그랬기에 란디우스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리며 눈을 감는 바람에 순간적으로 소녀를 시야에서 놓치고 말았다.

“다시 일어서서 달려가는군.”

이번에도 카마엘의 말대로였다.

란디우스가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는 이미 저만치 멀리까지 달려간 탓에 소녀의 뒷모습이 손가락보다도 작게 보였다.

“왜…… 도망가는 거지? 서, 설마 내가 무서워서?”

반쯤 얼이 나간 란디우스의 물음에 카마엘은 자기도 모르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고, 란디우스는 다시 고개를 돌려 두 번째로 넘어지는 소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 * *

“그때는 몰랐는데, 이제는 알 수 있어. 레나, 너였지?”

란디우스는 무척이나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고, 레나는 창피하다는 듯 빨개진 얼굴로 입술을 깨물었다.

“반응을 보니 맞는 모양이군.”

어쩐지 유쾌함이 섞인 것 같은 카마엘의 추임새에 프란 역시 낄낄 웃으며 물었다.

“레나, 진짜야? 그게 란디우스와의 첫 만남이었어?”

그렇다면 대체 왜 도망친 것일까.

정말로 란디우스가 무서워서?

“하긴, 무서울 만도 하지.”

프란이 이해가 간다는 눈으로 란디우스를 돌아보았다.

2.3미터- 아니, 이제는 2.5미터는 되어 보이는 근육 덩어리 거인.

어린 소녀라면 보고 겁을 먹는 것도 이해가 되었다.

“아니, 잠깐. 프란, 그때는 지금과 달랐다. 선조회귀를 하기 전이라 키도 190 정도밖에 안 되었고. 그렇지? 레나?”

란디우스가 억울하다는 얼굴로 묻자 레나는 빨개진 얼굴을 식히듯 손부채질을 하더니 이내 심호흡을 한 뒤 말했다.

“일단.”

“일단?”

“일단 땡이야. 그때 도망친 소녀가 나…… 그래, 나 맞기는 한데, 그게 란디와의 첫 만남은 아니야.”

레나의 선언에 란디우스는 미간을 좁혔다.

그때가 아니라면 대체 언제가 첫 만남이었단 말인가.

“정말 모르겠어?”

레나의 물음에 란디우스는 순간 흠칫했지만 이내 불쌍한 얼굴이 되어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생각이 안 나서였다.

“뭐…… 아쉽지만 솔직히 이해는 가. 기억하기 쉽진 않은 첫 만남이었으니까.”

레나는 화를 내는 대신 오히려 쿡쿡 웃었고, 란디우스는 안도하는 대신 더더욱 미안한 표정이 되었다.

레나의 이야기하는 모양새를 보니 정말 뭔가 특별한 만남이라도 있었던 거 같은데 기억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미안했기 때문이다.

“아무튼, 그럼 내가 이야기할게. 그러니까…….”

“앗! 잠깐!”

이야기를 끊은 것은 언제나처럼 프란이었다.

모두의 시선이 모이자 그는 손가락을 세우며 말했다.

“분위기를 보니 레나의 이야기야말로 딸기가 될 것 같은데 카마엘의 이야기를 먼저 듣는 게 어떨까?”

프란의 주장에 레나는 좋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고, 벨키안은 카마엘 쪽을 슬쩍 돌아보더니 마찬가지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카마엘은- 차마 자신이 딸기라고 주장할 수 없었던 남자는 살짝 불만이 섞인 얼굴로 말했다.

“그럼 내가 먼저 하도록 하지.”

“어른스러운 결정, 존경합니다.”

짝짝짝 손뼉까지 친 프란은 재빨리 자리에 앉았고, 카마엘은 다시 한번 한숨을 토한 뒤 이야기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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