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딩메이커 428화
제14장 - 퍼스트 콘택트 #4
카마엘은 태어났을 때부터 병약한 아이였다.
적어도 한 대에 한 명 이상- 파라곤 왕가에 발생하는 극한의 저주를 타고났기 때문이다.
본래라면 한기로 인해 혈맥이 막히는 구음절맥의 체질이 되어 시한부 인생을 살았어야 할 카마엘이었지만 다행히도 그런 일까지는 일어나지 않았다.
“극한의 저주를 완전히 떨쳐내는 것은 불가능하오. 하지만 이 아이가 극한의 저주에 익숙해져 극한 그 자체를 다룰 수 있도록…… 저주의 힘을 조정하는 것까지는 어떻게든 가능할 것이오.”
파라곤 왕가와 깊은 연을 맺고 있는 대드루이드 누아다가 카마엘의 몸에 특별한 봉인식을 새겨주며 한 말이었다.
카마엘의 성장에 따라 봉인해 둔 극한의 저주를 조금씩 해방하는 구조였는데, 덕분에 카마엘은 구음절맥이라는 극단적인 절맥증에 걸리는 일만은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극한의 저주였다.
정도 이상의 한기를 품고 태어난 카마엘은 또래 아이들보다 훨씬 작고 왜소한 체격을 가질 수밖에 없었고, 체력 역시 미약했다.
“싫어…….”
여섯 살.
부모에게 애정을 받으며 걱정 없이 뛰어놀 나이였지만 카마엘에게는 해당치 않는 이야기였다.
파라곤 왕국 귀퉁이에 자리한 별궁에서도 다시 귀퉁이.
낡고 오래된 별궁 옆에 자리한 그늘진 숲에 홀로 쪼그리고 앉은 카마엘은 멍한- 아니, 속이 텅 빈 초점 없는 눈으로 먼 곳을 바라보았다.
카마엘은 혼자였다.
어머니는 극한지기의 아이를 낳은 탓인지 카마엘이 무척이나 어렸을 때 병사하였고, 아버지인 파라곤 국왕은 애첩이었던 카마엘의 어머니가 죽은 이후로는 카마엘에게 딱히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딱히 악인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마냥 선하기만 한 호인 역시 아니었다.
대드루이드 누아다가 카마엘을 치료한 것은 단순한 우연이었다.
카마엘이 태어나던 날.
우연히 인근을 지나던 그가 극한의 저주를 감지한 덕분에 일어난 기적.
만약 누아다가 직접 찾아온 것이 아니었다면 카마엘은 극한의 저주 때문에 구음절맥에 걸리고 말았을 터였다.
파라곤 국왕이 카마엘을 위해 누아다를 부르는 일은 없었을 테니 말이다.
누군가는 말했다.
애당초 카마엘은 대에 한 명은 타고나는 극한의 저주를 해소하기 위해 만들어진 액막이 인형 같은 존재라고.
어쩌면 그의 말이 맞을지도 몰랐다.
카마엘이 태어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왕비가 아이를 임신했다는 소식이 들려왔으니 말이다.
카마엘은 그늘에 쪼그려 앉아 시간을 죽였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그저 멍하니 앉아 있다가 해가 지면 별궁에 돌아가는, 그런 무의미한 시간들.
그늘진 별궁의 뒤뜰은 아무도 오지 않는 장소였고, 카마엘은 고요와 적막 속에서 시간과 함께 자신 또한 죽이고 있었다.
그 소년을 만나기 전까지는.
“안녕?”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카마엘은 움찔하고 몸을 떨었다.
하지만 카마엘에게는 당황하거나 두려워할 시간이 없었다.
목소리의 주인이 바로 얼굴을 들이밀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뭐 해? 뭐 관찰해? 저쪽에 뭐 있어?”
정신 사나운 소년이었다.
어느새 카마엘 옆에 주저앉은 덩치 큰 소년은 카마엘이 바라보고 있던 방향을 유심히 살펴보며 미간을 좁혔다.
짧게 자른 붉은 머리.
여기저기 더럽혀졌지만 척 보기에도 비싸 보이는 옷.
허리춤에는 연습용 목검을 하나 차고 있었는데, 어린 카마엘이 보기에도 평범한 물건이 아니었다.
하지만 카마엘은 이번에도 목검에 대해 깊이 생각할 수 없었다.
정신 사나운 소년이 주의력 결핍이라도 걸린 것처럼 관찰을 그만두고 다른 화제를 꺼내 든 탓이었다.
“이거 볼래? 아까 잡은 건데. 진짜 크지?”
소년이 자랑스럽게 내민 것은 우람한 뿔을 가진 갑충이었는데, 정말로 커다랬던 터라 카마엘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헤헹, 그럴 줄 알았어. 나도 이렇게 큰 녀석은 처음 본단 말이지. 분명 이 숲의 우두머리 격인 녀석일 거야.”
아무리 커봤자 갑충에 불과한데 숲의 주인이라는 건 무리 아닐까.
어리지만 총명했던 카마엘은 그리 생각했지만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혼자 있던 시간이 길어 대화 자체가 낯선 것도 있었지만, 이번에도 소년이 바로 다른 화제를 꺼내 들었기 때문이다.
“이름이 뭐야? 나는 란디우스라고 해.”
소년은 그리 말하며 갑충을 든 손을 내밀었고, 소년의 손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치는 갑충을 피하고자 반사적으로 몸을 뒤로 뺀 카마엘은 대답할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음…… 뭐, 나중에 들어도 되니까.”
카마엘이 입술을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소년- 란디우스는 그렇게 말한 뒤 다시 활짝 웃으며 이번에는 갑충을 들지 않은 손을 내밀었다.
“아무튼 나는 란디우스야. 나랑 같이 놀자.”
놀지 않을래? 같은 의문형이 아니었다.
확정에 가까운 란디우스의 말에 카마엘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고, 란디우스는 활짝 웃으며 카마엘을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카마엘은 란디우스와 함께 시간을 누렸다.
매일같이 앉아 있던 장소였지만 카마엘은 뒤뜰에 수백 년이나 된 거목이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작은 연못이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고, 그 연못 속에 작은 물고기들이 산다는 것 역시 처음 알았다.
그리고 카마엘은 처음으로 검을 잡아보았다.
란디우스가 내민 수련용 목검.
연약한 카마엘이 다루기에는 지나치게 크고 무거운 검이었지만 손잡이를 움켜쥔 순간 카마엘은 지금껏 경험해 보지 못한 어떤 감각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건 지켜보던 란디우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랬기에 란디우스는 오늘 함께하며 보였던 수많은 미소들 중에서도 가장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거 너 줄게.”
척 보기에도 비싼 목검이었지만 란디우스는 통 크게 말했고, 카마엘은 눈을 깜박이다 입을 열었다.
“고마…….”
하지만 작은 감사는 마무리되지 못했다.
오늘 중에 처음으로 목소리를 낸 것이었지만, 더 큰 목소리에 묻히고 말았기 때문이다.
“란디우스! 어디에 있느냐!”
크고 우렁찬 남자의 목소리였다.
란디우스가 자라면 저런 목소리를 내지 않을까?
카마엘이 생각한 순간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돌아본 란디우스는 있는 힘껏 소리를 쳤다.
“금방 갈게요!”
우렁찬 외침에 과장 조금 보태 수풀이 흔들릴 지경이었고, 당연히 바로 옆에 있던 카마엘은 순간 넋이 나가고 말았다.
란디우스는 그런 카마엘을 보며 빙긋 웃더니 먹먹한 귀에도 명확히 들리는 말을 남겼다.
“내일 또 올게. 내일 또 놀자. 알았지?”
카마엘은 대답하는 대신 고개를 끄덕였고, 란디우스는 다시 활짝 웃은 뒤 손을 흔들며 돌아섰다.
카마엘은 그날 별궁에 늦게 돌아왔다.
평소보다 늦게, 그것도 손에 커다란 벌레와 목검을 든 채였지만 딱히 무어라 하는 사람은 없었다.
애당초 최소한의 관리만을 할 뿐 딱히 카마엘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는 사용인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랬기에 카마엘은 갑충이 들어간 상자를 머리맡에 둔 뒤 목검을 끌어안고 침대에 들어가는 일 역시 무리 없이 할 수 있었다.
내일.
내일도 란디우스가 온다.
병약한 카마엘의 체력은 이미 바닥이었다.
작은 미소를 그린 카마엘은 눈을 감았고, 내일을 기대하며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 * *
“과연. 그럼 그때부터 란디우스와 우정을 쌓아온 거임?”
제법 훈훈한 사연이라는 듯 프란이 푸근한 미소를 지으며 묻자 카마엘은 냉랭한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다음 날 란디우스는 오지 않았다.”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애당초 란디우스는 기억하지 못하는 두 사람의 첫 만남이었으니 말이다.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다시 그다음 날도. 나는 계속해서 기다렸지만 란디우스는 오지 않았지.”
후후후- 하고 웃음기를 더했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차갑게 느껴지는 목소리에 프란을 비롯한 모두는 뒤뜰에 혼자 쪼그리고 앉아 하염없이 란디우스를 기다리는- 혹시 란디우스가 오지 않았나 하는 마음에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실망해서 고개를 푹 숙이는 어린 카마엘의 모습을 떠올렸다.
“부, 불쌍해.”
프란의 말대로였다.
레나는 아예 자신의 허리를 안고 있던 란디우스의 가슴을 찰싹 소리 나게 때리며 말했다.
“너무해, 란디.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아, 아니. 그러니까.”
갑작스러운 비난에 란디우스는 당황한 얼굴로 카마엘 쪽을 돌아보았다.
‘그게 너였어?’-하는 표정이었는데, 카마엘은 쓰게 웃더니 란디우스에게 다시 구명줄을 던져주었다.
“어쩔 수 없었을 거다. 란디우스는 그때 아버지인 란포드 경과 함께 외국에 나갔으니. 란포드 경이 돌아온 뒤에도 몇 년이나 외국에서 살았고 말이다. 그리고…… 란디우스 입장에서야 우연히 만나서 논 아이에게 내일 또 놀자- 정도의 말을 한 느낌이었을 테니까.”
당시에도 두 살에 뱀을 잡은- 같은 칭호 덕분에 워낙 유명한 란디우스였던 터라 어린 카마엘도 금방 란디우스의 행방을 알 수 있었다.
“어찌 되었든…… 나에게는 정말 중요한 만남이었다. 덕분에 검도 익힐 수 있었고.”
카마엘은 검의 천재였다.
배운 것이라고는 란디우스가 가르쳐 준 기본 형식이 다였지만 그것만으로도 검귀의 두각을 드러내기에는 충분했다.
평소 카마엘에게 무관심한 사용인들조차 눈치챌 정도의 비범함은 파라곤 국왕의 이목 역시 끌어당겼고, 카마엘은 방치되어 죽을 병약한 서자가 아닌 왕가의 검이 될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
카마엘이 조용히 눈을 감으며 이야기를 마치자 란디우스는 다시 미안한 표정이 되었고, 레나가 다시 의문을 표했다.
“그런데 란디, 왜 그때의 소년이 카마엘이라는 걸 까먹고 있었던 거야? 지금 들은 대로면 그래도 기억에 남을 만한 일인 거 같은데.”
“아니, 그…… 그런 일이 있었다는 건 어렴풋이 기억나긴 하는데, 여자애인 줄 알았거든.”
란디우스가 뺨을 긁적이며 말하자 모두는 카마엘 쪽을 새삼 돌아보았고,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도 저렇게 아름다운 카마엘인데 어린 시절에는 그냥 여자애처럼 보였으리라.
어린 시절에 한나절 같이 논 여자아이가 사실 남자인 데다 카마엘이라는 사실을 한눈에 알아보는 것은 란디우스가 아닌 다른 누구라도 힘들었으리라.
“음…… 아무튼 미루길 잘했군.”
제법 좋은 이야기였지만 역시나 딸기가 되기에는 부족했다.
카마엘의 순서를 앞으로 당긴 스스로를 칭찬한 프란은 자신을 찌릿하고 노려보는 카마엘의 시선을 꿋꿋이 무시한 채 레나에게 말했다.
“자, 그럼 딸기의 이야기를 들어보자구.”
레나의 이야기.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자 다소 긴장한 듯 헛기침을 흠흠 토한 레나는 이내 살짝 달아오른 얼굴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 * *
레나의 고향은 파라곤 왕국에서도 시골이라 할 수 있을 변방의 작은 마을이었다.
레나는 부모님을 잘 기억하지 못했다.
너무나 어렸을 때 마을을 습격한 고블린 떼에게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를 잃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레나가 기억할 수 있는 것은 어머니의 품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그리 좋은 기억은 아니었다.
레나가 기억하는 것은 따뜻하고 부드러운 어머니의 품이 아닌, 고블린들에게 목숨을 잃어 차갑게 식어가던 어머니의 품이었으니 말이다.
고아가 된 레나는 시골 마을의 고아들이 으레 그러하듯이 촌장 밑에서 자랐다.
고아들은 마을의 공동재산이었고, 나이가 차면 노예나 일꾼으로 다른 마을에 팔려가고는 했다.
아직 어렸지만 얼굴이 고와 장차 미인이 될 것이 분명했던 레나는 촌장의 보물이었다.
다른 아이들보다 훨씬 더 비싼 값에 팔 수 있는 상등품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 하여 다른 고아들보다 딱히 사정이 나은 것은 아니었다.
그래봐야 고아였기 때문이다.
오히려 촌장의 별것 아닌 특별 대우 때문에 다른 고아들의 질투를 산 레나는 따돌림을 당해 늘 고독해야만 했다.
어떤 날이었는지는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저 언제나와 같은 날.
허드렛일을 하고, 맛없는 저녁을 먹은 뒤 일찌감치 잠자리에 든 밤.
고블린들의 습격이 있었다.
레나는 그날 밤의 일을 제대로 기억할 수 없었다.
두려움과 공포에 벌벌 떨다 눈을 떴을 때는 고블린들의 더러운 소굴 안이었고, 바로 눈앞에서 고아원의 대장 노릇을 하던 한스가 고블린들에게 산 채로 잡아먹히고 있었다.
레나는 울음을 터뜨렸다.
비단 레나만이 아니라 잡혀온 다른 아이들 역시 엉엉 울며 바지에 오줌을 지려댔다.
고아들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촌장의 아이도 있었고, 고아들 앞에서 부모님이 주신 것이라며 이것저것 자랑을 하던 대장간 집 딸 이리나도 있었다.
하나씩 잡아 먹혔다.
고블린들은 아이들의 비명 소리를 양념으로 삼기라도 한 것처럼 아이들 앞에서 식사를 이어나갔다.
정신이 나갈 것 같은 시간들이었다.
이제 겨우 여섯 살 난 어린아이가 감당할 수 있는 광경이 아니었다.
레나는 웅크려 울면서 엄마와 아빠를 생각했다.
비명을 지르며 울부짖는 대장간 집 딸을 보며 생각했다.
부모님도 고블린들에게 죽었다.
이제 곧 자신도 고블린들에게 죽을 것이다.
자신은 왜 태어난 것일까.
고블린들에게 잡아먹히기 위해서?
한스와 이리나처럼?
비명을 지르다 죽기 위해?
평범한 여섯 살짜리가 하기 어려운 생각이었다.
하지만 레나의 총명한 두뇌는 그것을 가능케 했고, 레나를 더욱 큰 절망에 빠뜨렸다.
이리나가 더 이상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간헐적인 신음밖에 들리지 않았다.
레나는 몸을 웅크린 채 끅끅거리며 울었다.
고블린들이 장난삼아 뿌린 이리나의 피와 내장이 머리와 몸을 뒤덮는 끔찍한 감촉에 히끅거리며 숨죽인 비명을 흘려댔다.
엄마 아빠.
엄마.
엄마.
엄마.
쾅!
굉음이 터졌다.
깜짝 놀란 레나는 더욱 몸을 웅크렸고, 그랬기에 볼 수 없었다.
그저 듣기만 하였다.
연이은 굉음과 고블린들의 괴성, 노여움에 찬 남자의 목소리.
그리고 다시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두 손으로 귀를 꼭 막은 채 벌벌 떨던 레나의 머리 위에 커다란 손이 얹어졌다.
“괜찮니?”
바보 같은 질문이었다.
괜찮을 리가 없지 않은가.
하지만 비난할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레나는 커다란 손과 목소리에 왈칵하고 눈물을 쏟았고, 남자는- 목소리의 주인은 피와 내장으로 엉망진창인 레나를 품에 꼭 안아주었다.
따뜻하지 않았다.
갑옷 때문에 오히려 딱딱하기만 한 품이었다.
하지만 레나는 포근함을 느꼈다.
피투성이인 자신을 조금의 거리낌도 없이 안아 든 남자의 호의를 무의식적으로 깨달은 덕분이었다.
“잠시 눈을 감고 있으렴.”
남자의 말대로 레나는 두 눈을 꼭 감았다.
남자가 무엇 때문에 눈을 감으라 한 것인지도 이해할 수 있었다.
다른 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고블린들의 괴성 역시 들리지 않았다.
남자의 품에 안겨 있는 것은 레나 자신뿐이었다.
이제부터 어떻게 되는 것일까.
마을은 어떻게 되었을까.
마을의 고아들은 정말로 모두 다 죽은 것일까.
머릿속이 복잡했다.
살았다는 안도감과 동시에 끔찍하고 두려운 생각들이 끊임없이 떠올랐다.
엄마.
엄마.
아빠.
얼굴도 기억나지 않지만 계속해서 불러보았다.
왜 자신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일까.
이러기 위해 태어난 것일까?
공기가 맑아졌다.
악취가 줄어들었다.
고블린들의 소굴을 빠져나온 것 같았다.
차가운 공기.
뺨에 닿아 서늘한 갑옷의 감촉.
“이제 눈을 떠도 돼.”
남자의 목소리에 레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여전히 남자의 품에 안긴 채였다.
남자- 아니, 이제 보니 소년이었다.
키가 무척이나 크고 덩치도 좋았지만 십 대 중반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얼굴이었으니 말이다.
소년은 레나를 보며 환히 웃지 못했다.
하지만 우울함과 안타까움이 섞인 그 미소에 레나는 더욱 큰 위로를 받은 기분이었다.
“저쪽을 보렴.”
소년의 말에 레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저 멀리 마을이 있는 방향 너머에서 여명이 밝아오고 있었다.
아름다운 일출의 순간이었다.
소년은 누구일까.
촌장의 집에 한 권밖에 없던 동화책에 나오는 기사님 같은 사람일까?
알 수 없었다.
소년은 서툰 위로의 말을 더 건네는 대신 잠시 동안 일출을 바라보았고, 레나는 그런 소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저도 모르게, 아침 해를 닮은 사람이란 생각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