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딩메이커 429화
제14장 - 퍼스트 콘택트 #5
레나는 소년의 품에서 깊은 잠에 빠졌다.
이제 다 끝났다는, 살았다는 생각에 긴장이 풀리자 한 번에 피로가 몰려온 탓이었다.
레나는 꿈을 꾸었다.
안타깝게도 내용은 기억나지 않았지만, 적어도 악몽이 아니었다는 것만은 확신할 수 있었다.
즐거운 꿈.
무척이나 오랜만에 꿔보는 것 같은 행복한 꿈.
그래서 레나는 잠에서 깨어났을 때 어젯밤의 일도 모두 꿈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했지만 아니었다.
레나가 눈을 뜬 장소는 한나절 거리에 있지만 한 번도 방문해 본 적이 없던 이웃 마을이었다.
정이 많게 생긴 촌장 부인이 귀리죽을 주며 해준 이야기에 따르면 레나가 본래 살던 마을은 사실상 초토화가 된 모양이었다.
살아남은 마을 사람들은 다들 주변 마을로 뿔뿔이 흩어졌는데, 그나마도 수가 적어 두 손으로 모두 헤아리는 게 가능한 수준이라 했다.
레나를 키우던 촌장 역시 죽었다는, 제법 충격적인 이야기 역시 들었지만 레나는 스스로도 놀랄 만치 동요하지 않았다.
고블린 소굴에서 겪은 일들 때문인지 그냥 그랬구나- 정도의 감상이 들 뿐이었다.
촌장 부인은 멍하니 듣기만 하는 레나를 보며 무슨 오해를 한 것인지, 아니면 이런 반응을 보이게 된 일 자체를 안타깝게 여긴 것인지 레나를 꼭 끌어안고 눈물을 흘렸다.
촌장 부인의 품은 무척이나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하지만 레나는 딱딱하고 차가웠던 소년의 품을 떠올렸다.
새삼 아침 해를 닮은 소년의 얼굴이 보고 싶었다.
“란디우스 님은 다른 마을을 구하러 떠나셨단다.”
란디우스.
소년의 이름을 들은 순간 레나는 눈을 크게 떴다.
시골 벽지의 고아였던 레나였지만 ‘두 살에 뱀을 잡고 열 살에 곰을 잡은 란디우스’의 이야기는 들은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촌장 부인의 말에 따르면 소년- 란디우스는 곤히 잠든 레나를 마을에 맡긴 뒤 바로 다음 마을을 구하기 위해 이동했다고 한다.
“다른 마을이요?”
“그래, 공격받은 마을이 한둘이 아니라고 하는구나.”
나중에 안 이야기였지만 촌장 부인의 말마따나 고블린들의 공격은 실로 대대적이었다.
파라곤 왕국의 국경 지대 가운데 거의 절반 가까이가 공격을 당했는데, 수백 년 만에 탄생한 고블린 킹이 그 원인인 모양이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렴. 란디우스 님은 무적의 영웅이시니까. 기사단장이신 란포드 님은 더 강한 분이시고.”
촌장 부인은 사람 좋은 미소를 그리며 레나의 머리를 쓰다듬어 준 뒤 더 쉬라는 말을 남기고 방을 나섰다.
혼자가 된 레나는 짚단으로 된 침대 위에 누운 뒤 눈을 꼭 감고 란디우스의 얼굴을- 일출을 바라보던 그의 옆모습을 떠올려 보았다.
* * *
“그때부터 란디는 나의 영웅이었어.”
레나의 수줍은 고백에 란디우스는 조금 민망하다는 듯 어색한 미소를 지었고, 벨키안과 프란은 훈훈한 미소를 지었다.
“음, 좋아. 제법 딸기다운 이야기였어.”
혼자서 고개를 끄덕인 프란은 아예 짝짝 박수까지 쳐대는가 싶더니 이내 짓궂은 얼굴이 되어 말했다.
“그런데 란디우스, 저런 일을 겪었는데도 레나를 기억하지 못한 거야?”
저 정도면 정말로 진짜 기억에 남을 만도 할 텐데.
카마엘 때처럼 성별을 오해한 것도 아니고.
프란의 지적에 레나는 재미있다는 듯 똑같이 짓궂은 얼굴이 되어 란디우스를 올려다보았고, 란디우스는 여전히 어색한 얼굴로 뺨을 긁적이다 말했다.
“아니, 그…… 그 뒤로 계속 고블린들이랑 싸우느라 정신도 없었고…… 그때는 너무 어렸…… 으니까?”
란디우스 자신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레나를 말하는 것이었다.
그 당시 레나의 나이는 겨우 여섯 살이었으니 말이다.
“생각해 보니 그것도 그러네. 둘이 나이 차가 거의 열 살 정도 나지 않아?”
그랬다.
레나가 여섯 살이던 무렵 란디우스는 이미 열다섯 살이었으니 말이다.
“새삼스럽지만 란디우스가 도둑놈이었네.”
아홉 살 차이 나는 신부라니.
프란의 공세에 란디우스는 다시 헛기침을 토해댔고, 레나는 까르르 웃었다.
“그런데 레나.”
“왜?”
“그래서 레나는 왜 도망쳤던 거야?”
“어?”
“아니, 란디우스랑 재회했을 때 도망쳤다며.”
달리다가 넘어져서 치마가 다 뒤집어질 정도로 급하게.
프란의 예기치 못한 공격에 레나는 움찔하더니 슬쩍 란디우스 쪽을 돌아보았고, 란디우스는 정말로 궁금하다는 얼굴이 되어 레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 그게.”
“어, 그게.”
“너, 너무 갑작스러워서?”
고블린 소굴에서의 그날 이후 란디우스는 쭉 레나에게 있어 동화 속의 왕자님 같은 존재였으니까.
사실 아무에게도 말한 적이 없어서 그렇지 란디우스와 관련된 상품들을 죄다 사 모았을 정도로 열성적인 란디우스 매니아였던 레나였다.
프란은 나이 차 가지고 뭐라 뭐라 했지만 레나 입장에서는 장대한 역키잡(?)의 여정이었고 말이다.
어찌 되었든 재회하기 전부터 란디우스를 사모하고 있던 레나였던 만큼 망상 역시 꽤나 하고 있었었다.
이를테면 사랑 이야기의 한 장면 같은 ‘왕자님과의 재회’라든지 말이다.
“거, 거기다 그냥 작업복 차림이었고…….”
밀짚모자에 더러운 작업복.
흙투성이 손과 땀으로 범벅이 된 얼굴.
보여줄 수 없었다.
레나 자신이 상상하던 란디우스와의 재회는 이런 것이 아니었으니까.
훨씬 더 멋지고 아름답고 아무튼 더 굉장해야 했으니까!
레나는 빨개진 얼굴로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중얼중얼 말을 늘어놓았고, 란디우스는 그런 레나가 무척이나 사랑스럽다는 듯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옆에서 지켜보던 프란은 ‘으이구’를 연발하며 아저씨 같은 표정을 지었고 말이다.
“아무튼 결국 란디우스는 레나를 알아보지 못한 거군.”
훗 하는 미소와 더해진 것은 착각일까.
카마엘의 말에 레나는 볼을 부풀리는가 싶더니 새삼 서운하다는 듯 란디우스를 흘겨보았다.
“이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 내가 얼마나 실망했는지 알아?”
“어어?”
레나 자신이 란디우스를 생각하는 정도는 아니더라도, 란디우스 역시 자신을 기억 정도는 하고 있을 줄 알았는데.
그래서 그때 그 아이가 자라서 이렇게나 예쁜 소녀가 되었다니!- 하고 놀라는 란디우스의 모습을 몇 번이나 상상했었는데.
“도망친 소녀가 나였다는 것도 이제야 겨우 떠올리고…… 뭐, 그때는 기억 못 해서 다행이란 생각도 했지만.”
어찌 되었든 서운한 것은 서운한 것이었다.
레나가 볼을 부풀린 채 툴툴거리자 란디우스는 다시 어쩔 줄을 몰라 했고, 프란은 슬슬 눈꼴 시리다는 얼굴이 되어 끼어들 각을 재기 시작했다.
하지만 의외로 입을 연 것은 벨키안이었다.
“어찌 되었든- 지금 이렇게 함께하고 있다는 것이 중요하겠지.”
프란이 몇 번이나 강조했듯이 사실 하나하나 따져보면 별거 아닌 첫 만남들이었다.
하지만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모두가 만나 함께하였고, 지금 이 순간 역시도 함께한다는 사실이 중요할 따름이었다.
“아닌데, 영감 빼고는 다들 그래도 꽤 별거 있는 만남인 거 같은데. 그냥 친구 만나러 갔다가 ‘란디우스입니다’, ‘어, 벨키안이네’-한 만남 빼고는 다들 스토리도 있는 것 같은데.”
옆에서 프란이 언제나처럼 깐죽거렸지만 익숙한 일이었기에 벨키안은 동요하지 않았고, 그랬기에 카마엘과 레나 역시 푸근한 미소를 머금으며 벨키안의 말에 동의했다.
모두가 모였고, 모두가 함께하고 있다.
그 사실 자체가 너무나 감사하고 소중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역시 란디우스는 조금 더 특별했다.
그리고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은 비단 레나만이 아니었다.
악마들의 소굴이 된 파라곤 왕국을 마주했을 때.
리치가 되어 나타난 바르도와 대적해야 했을 때.
끝없는 절망 속에서 억척스럽기 짝이 없던 프란마저도 모든 것을 포기하였을 때.
모두를 지탱한 것은 란디우스였다.
다시 한번 싸울 힘을 불어넣은 것은 한결같은 그의 뒷모습이었다.
어둠이 짙으면 짙을수록, 밤이 깊으면 깊을수록 밝게 빛나는 한줄기 섬광.
마침내 떠올라 세상을 밝히는 황금빛 태양.
‘란디우스.’
우리의 태양.
우리의 영웅.
부끄럽다는 듯 빨개진 얼굴로 사람 좋게 웃고 있는 란디우스의 모습에 파라곤의 영웅들은 저마다 미소를 머금었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술잔을 들어 올리며 자신들의 영웅을 축복했다.
* * *
“그래서 란디, ‘아름다운 레이디 시리즈’라는 거 결국 해보긴 했어?”
따로 잡은 숙소로 돌아가는 길.
달이 밝은 밤하늘을 올려다보던 레나가 지나가듯 묻자 란디우스는 순간 움찔하며 긴장했다.
그도 그럴 것이 어째 답변 제대로 해야 할 것 같은 물음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래도 결국 란디우스는 란디우스였다.
한참을 꾸물거리던 그는 덩치에 안 맞게 수줍은 얼굴이 되더니 떠듬떠듬 말을 늘어놓았다.
“그…… 다는 못 하고 두어 개…… 정도?”
부끄럽다는 듯 어색하게 웃으며 꺼낸 말에 레나는 발걸음을 멈추었다.
얼굴은 웃지만 눈은 웃지 않는, 그런 얼굴이 되어 다시 물었다.
“누구랑?”
아니, 어떤 년이랑?
레나는 성천사인 동시에 대마법사였고, 당연히 무시무시한 마력의 소유자였다.
아마 담이 약한 자라면 레나의 눈빛만 봐도 오줌을 지렸으리라.
하지만 태양의 영웅인 란디우스는 그렇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덩치에 안 맞게도 몸을 좀 꼬는가 싶더니 여전히 수줍음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너랑.”
“어?”
“아니, 그…… 전부, 너랑.”
아름다운 달빛 아래에서의 키스라든지, 달빛 아래에서의 이것저것이라든지.
란디우스의 고백 아닌 고백에 레나는 레나답게 반응했다.
즉, 얼굴을 새빨갛게 붉힌 채 어쩔 줄 몰라 하다가 에헤헤 미소를 흘려댔다.
“저기…… 그럼 리스트 보여줄 수 있어?”
어떤 거 남았는지.
하고 싶었는데 못한 거 또 뭐 있는지.
“내가 다 해줄 테니까. 응? 내가.”
레나의 제안에 란디우스는 침을 꿀꺽 삼키더니 무척이나 낡고 오래된 수첩을 꺼내 내밀었고, 두근두근한 얼굴로 수첩을 펼친 레나는 이내 눈을 흘겼다.
“란디 변태.”
“아, 아니. 그…… 어, 어렸을 때. 혀, 혈기 왕성하던 시절이니까?”
“흠, 그럼 지금은 싫어? 안 하고 싶어?”
레나의 도발적인- 하지만 얼굴을 새빨갛게 붉힌 채 용기를 있는 대로 다 쥐어짜 낸 같은 물음에 란디우스는 한참을 흠흠거리다 레나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고, 레나는 은근한 미소를 흘렸다.
“우리 란디, 나 아니면 누가 받아줬을까. 나랑 결혼해서 다행이지?”
프란이 들었다면 가스라이팅이라 주장했을 발언이지만 란디우스는 아니었다.
태양의 영웅은 어린 시절 그러했던 것처럼 레나를 번쩍 안아 든 뒤 고개를 끄덕였고, 레나는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어렸을 때부터 꿈꿔온 왕자님과의 재회.
입술을 살짝 깨문 레나는 란디우스에게 입맞춤했다.
아름다운 달빛을 받으며 해맑게 미소 지었다.
* * *
같은 시각, 다른 장소.
파라곤의 영웅들이 옛 추억에 빠져든 밤에 똑같이 추억 이야기를 나누는 두 사람이- 아니, 두 천사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