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엔딩메이커-431화 (431/473)

엔딩메이커 430화

제15장 - 메이드와 기사와

유델리아 신성국 수도 인근에 자리한 커다란 저택.

유더가 마이아에게 선물한 자택이지만 1년 열두 달 대부분을 왕궁에서 보내는 마이아인 터라 관리인이 있긴 해도 사실상 빈집이나 다름없던 곳.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며칠 전부터 제법 많은 사람들이 머물고 있었기 때문이다.

“왕궁이 복구되려면 그래도 시간이 제법 걸리겠지?”

“그렇긴 한데…… 그래도 교황 성하께서 나서시면 금방 되지 않을까?”

신성국의 왕궁에서 일하는 메이드들 가운데 절반 이상이 휴가를 받고 각자의 본가로 돌아간 상태였지만 그렇지 않은 이들도- 정확히는 마땅히 돌아갈 곳이 없는 이들도 적지 않았는데, 그들 대부분이 마이아의 저택에 머물고 있었다.

“음, 그러게. 어쩐지 모르게 교황 성하께서 나서시면 금방 해결될 것 같은 기분이야.”

실비의 말에 비앙카는 까르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맞아. 교황 성하시니까.”

멋지고 잘생기고 굉장하고 대단하고 아무튼 어마어마한 교황 성하.

성녀님만 바라보시는 일편단심이지만 그래서 더 멋진 것 같은 신성국의 아이돌.

“그런데 실비, 그거 설마 또 산 거야?”

비앙카의 물음에 실비는 순간 움찔했지만 이내 당당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자기 돈 주고 산 정식 굿즈였으니 부끄러울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애당초 비앙카는 굿즈의 진품 여부 때문에 물어본 것이 아니었다.

실비의 손에 들려 있는 천사의 성화집.

표지에는 미의 천사 마이아가 작은 미소를 짓고 있었는데, 그 미소가- 아니, 표지 전체에서 느껴지는 분위기가 참으로 오묘했다.

표현하기 어렵지만 뭐라고 해야 할까, 건드리면 금방 깨져 버릴 것 같은- 하지만 그래서 더욱더 아름다운 유리 세공품을 보는 기분이라고 해야 할까?

위태로움과 가녀림, 거기에 아름다움이 한데 섞여 묘한 분위기를, 조금 과한 표현을 쓰자면 색기를 만들어내는데 같은 여자가 봐도 가슴이 다 두근거릴 지경이었다.

얼굴이 빨개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말이다.

아무튼 미의 천사 마이아의 성화집.

애당초 시종장님을 동경하다 못해 나름 머리 스타일부터 시작해서 행동거지까지 흉내 내고 있던 실비인 만큼 성화집 구매가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지만, 비앙카가 굳이 ‘또’ 산 것이냐 물은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비앙카가 알기로는 벌써 똑같은 화보집을 다섯 권째 구매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저거 가격도 꽤 비싼데.’

가격을 아는 이유는 비앙카 자신도 한 권 구매했기 때문이지만 어찌 되었든 실비는 벌써 다섯 권째 구매였다.

“……이건 포교용이야.”

“대충 무슨 말을 하는지 감은 오는데 그럼 앞의 산 것들은 뭔데?”

“소장용이랑 예비 소장용이랑 감상용이랑 예비 감상용이랑 비치용이랑 예비 비치용.”

“잠깐, 앞에 산 거 네 권이 아니었어? 이게 일곱 번째 권인 거야?!”

비앙카의 경악에 실비는 다시 움찔하더니 소심하지만 확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월급을 아예 그냥 때려 박는구나.’

세트 맞춘다고 ‘수호의 천사 달리아’의 성화집도 사는 것 같던데.

이것도 일단 취향이니 존중해 줘야 하는 걸까.

비앙카는 잠시 당당한 척 하면서 이쪽 눈치를 슬쩍슬쩍 살피고 있는 실비를 마주하더니 이내 작게 웃으며 어깨를 늘어뜨렸다.

“아무튼 실비, 진짜 놀랍지 않아? 시종장님이랑 근위기사단장님이 천사님이 되시다니.”

“놀랍지 않아. 시종장님은 본래부터 완전 천사님이셨는걸.”

“그, 그래.”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말하는 실비의 모습에 살짝이지만 식은땀을 흘린 비앙카는 새삼 실비의 손에 들려 있는 마이아의 성화집을 쳐다보았다.

‘실비 말대로 예전부터 진짜 천사 같은 분이시긴 했는데…….’

그래도 이번 왕도 사건 이전만 하더라도 분명 인간이셨다.

시종장님은 물론이고 근위기사단장님도 말이다.

‘나도 나중에 잘하면 천사가 될 수 있을까?’

대체 뭘 어떻게 잘하면 천사가 될 수 있을지 상상조차 되지 않기는 했지만.

열심히 해서 시종장이 되면 천사 시험 같은 걸 볼 수 있다든지.

스스로의 상상에 피식하고 웃은 비앙카는 어느새 다시 황홀한 얼굴로 성화집의 표지를 보고 있는 실비의 옆모습에 잔잔한 미소를 머금었다.

‘시종장님도 내일은 돌아오시겠지?’

천사가 되신 이후로 엄청 바쁘신 것 같지만 그래도 여기가 시종장님의 집이니까.

달리아 님이랑 같이 돌아오시려나?

왕궁의 메이드들 중에서 감이 제법 좋은 편인 비앙카의 추측이지만 애석하게도 이번에는 완전히 엇나가고 말았다.

그도 그럴 것이 마이아와 달리아는 이미 저택에, 정확히는 마이아의 방에 자리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 * *

“……힘들어.”

“……나도…….”

저택 최상층에 자리한 마이아의 방.

발코니에 놓인 1인용 긴 의자에 각각 자리를 잡고 앉은- 아니, 드러누운 마이아와 달리아는 녹초가 된 얼굴로 온몸을 늘어뜨리고 있었다.

아침 해가 뜨기 시작한 무렵부터 별빛이 가득한 밤이 되기까지.

아니, 그냥 요 며칠 내내 시간이 어떻게 흘러갔는지도 모를 정도로 바쁘게 보낸 두 사람이었다.

“사인을 진짜 일만 번은 한 것 같아…….”

농담이 아니라 정말 손에 감각이 없을 지경이었다.

마이아의 우는 소리에 달리아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보다 사인을 세 배는 한 것 같은 마이아니 지금의 반응이 당연했다.

더욱이 천사가 되었다고는 하지만 애당초 가녀리고 연약한 마이아가 아니던가.

‘나도 인기가 좀 더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럼 마이아한테 갈 사인이 나한테 왔을 거고, 마이아도 사인을 덜 해서 덜 힘들었을 텐데.

뭔가 기묘한 논리였지만 달리아는 진심이었고, 그녀에게도 요 며칠의 강행군으로 인해 머리가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나름의 변명거리가 있었다.

어찌 되었든 녹초가 되어 늘어져 있는 두 사람이었지만 어느 순간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작은 미소들을 머금었다.

어쩐지 모르게 그냥 미소가 지어진 탓이었다.

“마이아.”

“응, 달리아.”

“그냥 불러봤어.”

실없는 말에 마이아는 달리아 쪽을 돌아보더니 특유의 작고 잔잔한 미소를 지어 보였고, 달리아는 어쩐지 모르게 어린아이가 된 기분이 들어서 얼굴을 붉혔다.

“아무튼 신기하지 않아?”

“뭐가?”

“천사가 된 게.”

신성국의 기사단장이 된 것도 정말 상상도 못 했던 일이었는데 이제는 아예 인간에서 천사가 되기까지 했다.

물론 코델리아뿐만 아니라 아델리아와 체이스 백작까지- 주변에 천사가 된 사람들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뭐라고 해야 할까, 그냥 다른 세계의 이야기 정도라는 느낌이었다고 해야 할까?

달리아 자신이 천사가 될 거라고는 정말 상상도 하지 못했었다.

‘마이아는 어쩐지 모르게 자연스러운 것 같지만.’

예전부터 정말 천사같이 예쁜 마이아였으니까.

‘그러고 보면 처음 만났을 때도 깜짝 놀랐었지.’

마이아를 처음 봤을 때.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체이스 백작을 따라 바이엘 백작가에 처음으로 방문했던 날.

십 대 중반이던 마이아의 모습을 떠올린 달리아는 쿡쿡하고 웃었다.

너무 예뻐서 잠깐이지만 넋 놓고 바라봤던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달리아?”

“아니, 그냥. 옛날 생각이 조금 나서.”

“언제?”

“좀 많이 옛날? 내가 처음으로 바이엘 백작가에 갔을 때.”

마이아는 십 대 중반 때도 이미 바이엘 백작가의 메이드였고, 달리아는 체이스 백작가의 견습 기사였었다.

“그러고 보니…… 한 번도 이야기한 적이 없는 것 같네.”

“어떤 걸?”

달리아가 묻자 마이아는 유더와 달리아 외에는 거의 본 사람이 없는 따스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예전에 뭘 했는지. 각자 바이엘 백작가랑 체이스 백작가에 들어가기 전에 어떻게 살았었는지.”

당연한 이야기였지만 두 사람 모두 태어났을 때부터 각각의 백작가에서 일한 것은 아니었다.

각자 어떻게 백작가에 들어가게 된 것일까.

백작가에 들어가기 전에는 어떻게 살았던 걸까.

생각해 보면 둘 모두 조금은 기묘한 구석들이 있었다.

마이아는 무척이나 어린- 거의 열 살 무렵부터 유더의 전속 메이드였고, 달리아는 본래 마법사 가문인 터라 견습 기사 같은 것은 키우지 않는, 오직 고용된 기사들만 있는 체이스 백작가에서 견습 기사 생활을 한 특이란 이력의 소유자였다.

어쩌다 두 사람 모두 그렇게 된 것일까.

마이아의 이야기에 달리아는 잠시 생각하는 표정이 되더니 이내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항상 잘 웃고 활달해 보이는 달리아였지만 사실 누구보다 속이 깊고 생각 역시 깊다는 것을 잘 아는 마이아는 잠시 기다렸고, 달리아는 이내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지나가듯 가볍게 말했다.

“나는 소매치기였어.”

“어?”

깜짝 놀란 마이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자 달리아는 귀한 것을 봤다는 듯 작게 웃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저런 표정의 마이아는 정말 귀했으니 말이다.

“웃지만 말고 마저 이야기해 줘.”

살짝 조르는 태도의 마이아 역시 진귀했기에 달리아는 기꺼운 얼굴이 되어 말을 이었다.

“그냥 평범한 이야기야. 길바닥에 나돌게 된 고아 여자애가 할 수 있는 일은 몇 개 없잖아? 그것도 아헨 같은 동네에서는.”

북부의 여러 도시들 가운데서 특히 치안이 좋지 않은 곳이 언급되자 마이아는 순간 움찔했지만 잠시뿐이었다.

마이아는 다시 이야기에 귀 기울이듯 옆으로 반쯤 누운 채 달리아를 바라보았고, 달리아는 밤하늘을 마주한 채 이야기를 이었다.

“건달패들 밑에서 구걸도 하고 소매치기도 하고…… 그냥 시궁창에서 뒹굴듯이 살다가 좀…… 모험을 해야 할 순간이 왔어.”

“모험?”

“응, 모험. 목숨을 걸어야 하는 그런 모험.”

지금 생각해도 식은땀이 난다는 듯 쓴웃음을 지은 달리아는 마이아 쪽으로 돌아누우며 말했다.

“체이스 백작님 지갑을 털었거든.”

“어?”

“체이스 백작님의.”

마이아는 잠시 체이스 백작의 웅장한 풍모를 떠올렸고, 어째서 달리아가 목숨을 건 모험 운운했는지를 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그때는 좀 뭔가…… 미쳤다고 해야 할까?”

“……그래서 성공은 했어?”

“아니, 당연히 실패했지. 주머니를 잡긴 잡았는데, 그때 백작님도 내 손목을 잡으셨거든.”

지금이야 웃으면서 말할 수 있는 옛 추억이지만 그때는 정말 죽는 줄 안 달리아였다.

“백작님이 슥 하고 날 내려다보시는데 진짜 와…… 이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 솔직히 그때 오줌도 살짝 지렸어.”

“살짝?”

“사실 왕창.”

부끄러운 고백에 마이아가 쿡쿡하고 웃자 달리아는 똑같이 따라 웃더니 다시 밤하늘 쪽으로 몸을 돌리며 말했다.

“근데…… 그게 행운이었던 것도 같아. 백작님께서 날 보시는 눈빛이 좀 달라지셨거든. 그때는 더럽게 오줌까지 싼다며 불태워 죽이는 건 아닌가 했지만…… 아니었어. 백작님은 날 데리고 체이스 백작가에 가셨지.”

지금도 왜 그러셨는지 알 수 없는 달리아였다.

단순한 변덕이었을까,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었던 것일까.

“그때부터 체이스 백작가에서 자란 거야?”

“응, 대충…… 열 살부터? 정확한 나이는 애당초 모르지만 대충 그쯤 되지 않을까 해.”

“뭔가…… 상상이 안 돼.”

“뭐가?”

소매치기 일을 하는 어린 달리아의 모습이.

아니, 단순히 소매치기 이야기가 아니었다.

아헨의 뒷골목은, 특히 달리아가 열 살 무렵의 아헨은 정말로 위험한 곳이었으니까.

그곳에서 본 독기가 잔뜩 오른 아이들의 모습이 지금도 잊히지 않는 마이아였다.

“사람은 변하게 마련이니까.”

빙긋 웃으며 말한 달리아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더니 이야기를 이었다.

“당시에 백작가에 고용되어 계셨던 마스터의 밑에서 견습 기사 생활을 했어. 코델리아 아가씨도 그때 처음 보았고.”

“그럼 그때부터 아가씨랑 친하게 지냈던 거야?”

“아니, 처음에는 아니었어. 아가씨를 정말 싫어했거든.”

“어?”

이번에도 생각지 못한 이야기였기에 마이아는 눈을 동그랗게 떴고, 달리아는 다시 웃더니 이내 표정을 정돈한 뒤 말했다.

“그냥…… 어린아이 같은 이야기야. 코델리아 아가씨를 보면서 질투를 참 많이 했거든.”

“질투를?”

“응, 나는 아헨의 뒷골목에서 진짜 죽을 둥 살 둥 하면서 온갖 고생을 다 했는데 아가씨는 태어났을 때부터 온갖 사랑을 다 받으면서 행복하게 살고 있으니까.”

불공평하다기보다는 그냥 질투에 가까운 감정이었다.

“아델리아 아가씨랑 에드워드 도련님은 두 분 다 마법 공부로 바쁘셔서 얼굴 뵐 일도 거의 없었는데…… 코델리아 아가씨는 뵐 일이 많았거든.”

사실 생각해 보면 체이스 백작의 호의 덕분에 인생이 바뀐 마당에 감히 질투까지 하는, 그야말로 배은망덕한 어린아이였지만 아헨의 뒷골목을 전전하던 당시의 달리아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눈매도 안 좋은 애였는데 뭐가 그렇게 좋으셨는지 아가씨께서 날 참 좋아하셨거든.”

백작 부인이 아꼈다는 화원에서 매일 볼 때마다 다리아 다리아 혀 짧은 말을 하며 달려와 안기고는 했으니까.

“사실 처음에는 귀찮고 짜증도 많이 났어.”

하지만 마음이 변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코델리아 아가씨가 너무 사랑스러우셔서?”

“그것도 맞지만…… 어느 날 내 품에 안겨 주무시다가 잠꼬대를 하셨거든.”

엄마.

엄마.

울먹임이 섞인 작은 목소리.

체이스 백작 부인은 코델리아를 낳고 얼마 안 있어 병사했다.

그랬기에 코델리아는 엄마의 품이라는 것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

아델리아나 에드워드처럼 엄마와의 추억을 쌓을 시간조차 없었고 말이다.

“그냥…… 그때부터였던 것 같아.”

소리 내어 말해본 적은 없었지만 코델리아를 친동생처럼 생각하게 된 것이.

또 한 명의 자신처럼 생각하게 된 것이.

“그래서였구나.”

달리아는 단순한 호위기사가 아니었다.

코델리아의 모든 것을 함께하는, 정말로 언니 같은 사람이었다.

“아무튼 난 그랬어. 마이아 너는?”

“난 사실 귀족이야.”

“어?!”

달리아가 깜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자 마이아는 특유의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다시 한번 말했다.

“켈러 자작가. 탄탈롯은 어머니 쪽 성이야. 지금도 이 성을 쓰는 건 아마 나뿐일 것 같지만.”

마이아다운 담담한 어조에 덩달아 놀란 가슴이 진정된 달리아였지만 그래도 쉬이 자리에 앉아 침착함을 되찾을 순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너무 놀라운 이야기였기 때문이-

“아닌가?”

마이아가 사실 귀족이다.

생각해 보니 제법 어울리는 이야기였다.

아니, 납득이 된다고 해야 할까?

“잠깐, 켈러 자작가라고?”

“응, 아헨에 있던 가문. 지금은 사라졌지만.”

애당초 아헨의 치안이 막장이 된 것은 도시를 지배하던 켈러 자작가가 악마 추종 죄로 말미암아 하루아침에 뭉개진 탓이 제일 컸다.

“나도 자세한 이유까지는 몰라. 정쟁이었는지, 아니면 아버지께서 정말 악마를 추종하셨는지.”

어찌 되었든 중요한 것은 켈러 가문이 그야말로 멸문을 당했다는 사실이었다.

“부모님은 처형당하시고…… 가문의 사람들도 뿔뿔이 흩어졌어. 노예가 된 사람들도 많고.”

침착하게 이야기하고 있었지만 달리아는 알 수 있었다.

마이아의 손이 작게 떨리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나는 운이 좋았어. 어머니 가문과 관련이 있던 분이 좋은 곳으로 갈 수 있도록 손을 써주셨거든. 그렇지 않았다면…… 아마 어딘가에 노예로 팔려갔을 거야.”

마이아가 가게 된 곳은 바이엘 백작가였다.

바이엘 백작이 마이아 자신의 출신이나 사정을 아는지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

“처음에는 정말 힘들었어. 적응이 잘 안되었거든.”

부유한 켈러 자작가의 영애에서 하루아침에 허드렛일을 하는 메이드가 되었으니 적응을 잘하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일 터였다.

더욱이 당시의 마이아는 갑자기 고아가 된 열 살 남짓한 어린아이였고 말이다.

처음 두어 달 동안은 매일 어딘가에 숨어서 엉엉 울었던 기억이 났다.

귀족이었던 것을 누군가에게 말하면 안 된다고, 바이엘 백작가로 자신을 보내준 분이 신신당부를 하셨던 터라 우는 것 말고는 울분과 괴로움을 어찌 해소할 방법도 없었고 말이다.

“힘들……었겠다.”

조금은 쥐어짜 낸 것 같은 달리아의 말에 마이아는 어깨를 살짝 늘어뜨리며 말했다.

“그래도…… 제법 괜찮은 편이었다고 생각해. 유더 도련님도 만났고.”

유더의 이름을 입에 담은 것만으로도 즐겁다는 듯 마이아가 작게 웃자 달리아는 다시 자리에 누우며 물었다.

“어쩌다 전속 메이드가 된 거야?”

“너랑 비슷해.”

“나랑?”

“어, 너랑. 유더 도련님이 날 너무너무너무 좋아하셨거든.”

마이아답지 않은 약간 뽐내는 것 같은 어조와 표정에 달리아는 쓴웃음을 지었고, 마이아는 계속해서 말했다.

“항상 마이아, 마이아 하면서 날 졸졸 따라다니시니까 백작님께서 날 도련님의 전속 메이드로 삼으셨어. 나도 도련님이 무척 좋았고.”

동병상련이라고 해야 할까.

몸이 약한, 그리고 어머니가 안 계신 유더에게 여러모로 마음이 간 마이아였다.

“더욱이 도련님은 옛날부터 무척 귀여우셨으니까.”

“설마 지금도 귀여운 거야?”

교황 성하가?

달리아의 물음에 마이아는 고양이처럼 웃었고, 달리아는 오늘따라 보게 되는 마이아의 진귀한 모습들에 결국 다시 웃고 말았다.

“그런데…… 이렇게 옛날이야기 하다 보니 갑자기 생각난다.”

“어떤 게?”

“도련님이랑 아가씨가 처음으로 주간도주하셨을 때.”

“아.”

그때 그 사건.

둘만의 시간을 갖고 싶다며 돌연 절벽 아래로 뛰어내리셨던 그 사건.

동시에 과거의 그날을 떠올린 두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아찔한 표정들을 지었고, 이내 서로의 이야기를, 당시 각자의 가문에서 있었던 사건들을 입에 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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