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엔딩메이커-433화 (433/473)

엔딩메이커 432화

제16장 - 짐승과 도둑과 검사와

레지나 바이엘이 태어나고 닷새째 되는 아침.

궁내부원의 말에 루카스는 미간을 좁혔다.

“오늘도…… 입니까?”

“그…… 죄송합니다. 그래도 지금까지의 전례상 오늘 오후쯤에는 만나보실 수 있을 겁니다.”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답하는 궁내부원의 모습에 루카스는 고개를 끄덕인 뒤 일단 자리에서 일어섰다.

교황과의 만남.

평신도들에게는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하늘의 검성인 동시에 교황의 절친한 친구인 루카스에게는 면회 신청 한 번이면 가능한 간단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런 루카스임에도 불구하고 자그마치 닷새 동안이나 교황과의- 유더와의 만남을 가질 수 없었다.

“아니, 둘 다 무슨 짐승이야? 어떻게 닷새나 침실에 처박혀 있을 수가 있어?”

세일룬 왕국 공인 짐승녀인 카이사의 불만에 스칼렛은 ‘네가 그런 말 할 처지니?’부터 시작해 ‘핑크폭탄은 짐승이 맞지 않을까?’에 이르기까지 참으로 많은 생각들이 떠올랐지만 그것들을 굳이 입에 담지는 않았다.

“아무튼 뭐…… 오후에는 만날 수 있을 거라니까 그때 인사하고 내일 아침에 떠나면 되지 않을까?”

예정보다 일정이 좀 늦어지긴 했지만 이 정도면 아직 문제가 생길 수준은 아니었다.

스칼렛의 말에 루카스는 고개를 끄덕였고, 투덜투덜거리던 카이사도 한숨을 한 번 길게 내쉬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 미간을 좁히며 동의했다.

“얼굴 한번 보기 힘드네, 진짜.”

“여신의 화신인 동시에 성녀잖아? 만나기 힘든 게 정상이지.”

“아니, 그렇긴 한데…… 아이씨, 오늘따라 왜 자꾸 그러는데? 그냥 같이 욕해주면 안 돼?”

“응, 안 돼. 그리고 카이사, 내가 말조심해야 한다고 그랬지? 툭 하면 씨씨거리는 거 언제쯤 고칠래? 응? 이제 곧 백작 부인도 될 사람이. 교양이 있어야지. 루카스랑 아버님, 그리고 어머님 얼굴에 먹칠을 할 생각이야?”

“아, 아니이…… 그런 게 아니라…… 그, 그리고 나 이미 후작 영애거든?”

“지금 너희 집 가문이 후작가라고 루카스네 가문 무시하는 거야? 그런 거야? 후작가가 백작가보다 높다는 거야?”

“아니, 왜 말이 그렇게 되는데?”

“네가 말을 그렇게 하고 있잖아. 안 그래?”

“으으윽…….”

몸으로 하는 싸움은 자신 있는 카이사였지만 말로 하는 싸움은 그렇지 않았다.

더욱이 상대가 다른 누구도 아닌 스칼렛이었으니 애당초 이길 수 없는 싸움이었고 말이다.

그랬기에 카이사는 어깨를 움츠리며 움찔하더니 루카스에게 도와달라는 시선을 보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스칼렛 역시 루카스를 돌아보았고, 두 여인의 상반된 시선에- 그러니까 도와달라는 시선과 그냥 놔두라는 시선에 루카스는 미안함이 가득한 얼굴로 후자 쪽을 택하였다.

스칼렛의 말마따나 카이사가 언행을 조심해야 할 필요성도 있었지만, 이러나저러나 현재 셋 사이에서 리더 역할을 맡고 있는 것은 최연장자인 스칼렛이기 때문이었다.

따지고 보면 스칼렛의 말이 옳기도 했고 말이다.

흐레스벨그 백작 부인.

오펀드 후작가의 영애인 카이사 오펀드는 앞으로 반 년 뒤에 하늘의 검성 루카스 흐레스벨그와 결혼해 ‘카이사 흐레스벨그’가 될 예정이었다.

이러한 결정이 내려진 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반년 전으로, 유델리아 신성국이 건국되기 직전의 일이었다.

* * *

“일단 카이사랑 결혼하고, 그다음에 나랑 결혼해. 카이사가 1부인 할 거고 내가 2부인 할 거야.”

“네?”

햇볕도 좋고 공기도 좋은 화창한 아침.

대련장에서 검을 마주한 스칼렛이 돌연 꺼낸 말에 루카스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경악성을 토했다.

지금 자신이 무슨 말을 들은 것일까.

잘못 들은 것이 아닐까?

하지만 아니었다.

대련장 바닥에 앉아 루카스와 스칼렛의 대련을 구경하던 카이사가 말을 보탰기 때문이다.

“언니 말대로야. 일단 나랑 결혼하고, 그다음에 언니랑 결혼해.”

“카, 카이사?”

“우리끼리 결정했어. 루카스 선택을 기다리다가는 둘 다 할머니가 될 것 같았거든.”

다시 스칼렛이 꺼낸 말에 루카스는 움찔했고, 카이사는 말 한번 잘했다는 듯 허리춤에 양손을 올리며 다시 말을 보탰다.

“루카스는 이제 선택권이 없어. 우리가 박탈했어. 우리 마음대로 할 거야.”

거의 으름장을 놓는 듯한 모습에 루카스는 다시 한번 스칼렛을 돌아보았다.

“스칼렛?”

“카이사 말대로야. 루카스의 선택을 존중하려 했지만…… 슬슬 우리 인내심도 바닥을 보이기 시작했거든.”

친구 이상 연인 미만.

아니, 친구 이상이긴 한데 연인 미만이라 하기에는 많이 애매한 관계를 지속한 지 벌써 1년이 훌쩍 넘지 않았던가.

“우리는 루카스를 잘 알아. 이번 생만이 아니라…… 몇 번이나 함께해 왔으니까.”

스칼렛 자신이 마인이 되었을 때는 카이사가, 카이사가 마인이 되었을 때는 스칼렛 자신이.

“둘 중에 하나는 고르지 못하겠다고, 차라리 혼자 살겠다고 버틸까 봐 강공은 안 하고 있었는데, 이럴 바에는 그냥 루카스를 공유하는 게 낫겠더라고.”

“고, 공유요?”

생각지도 못한, 거기에 민망하기까지 한 발언에 루카스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리고 사실 얼굴이 붉어진 것은 스칼렛이었다.

나름 뻔뻔히 말하기로 마음을 굳게 먹기는 했지만 막상 입 밖에 내고 있자니 정신이 나갈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왕 시작한 말이었고, 어떤 식으로든 결말을 지어야 할 이야기이기도 했다.

이미 며칠에 걸쳐 카이사와 함께 의논한 일이기도 하고 말이다.

“일단은 카이사네 가문이 좋은 건 사실이니까. 난 제국 사람인 반면에 카이사는 세일룬 왕국 사람이고. 그래서 1부인은 카이사가 하기로 했어. 그쪽이 보기도 좋고 나중에 뒷말도 덜 나올 가능성이 높으니까.”

솔직히 말해서 흐레스벨그 백작가 자체는 카이사보다 스칼렛 자신을 지지하고 있었다.

북부에 자리한, 그것도 북부12가문의 맹주격인 흐레스벨그 백작가 입장에서는 남부에 자리한 오펀드 후작가와의 결합이 딱히 매력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흐레스벨그 백작가가 크로스벨 백작가나 파이커스 백작가처럼 상업과 금융업에 종사했다면 남부와의 결합에서 상당한 가치를 창출할 수 있었겠지만 애석하게도 흐레스벨그 백작가는 무가였다.

북부를 지키는 변경백 자리에 있는 흐레스벨그 백작가 입장에서는 남부와의 결합에서 딱히 얻을 것이 없었다.

물론 북부의 맹주와 남부의 맹주가 힘을 합칠 경우 상당한 정치적 효과를 발생시킬 수 있겠지만 이 또한 흐레스벨그 백작가 입장에서는 딱히 달가운 일이 아니었다.

왕가뿐만 아니라 주변 여러 가문의 견제를 받을 만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당대의 흐레스벨그 백작은 뼛속까지 무인이었다.

하나뿐인 자식인 루카스 역시 마찬가지였고 말이다.

정치적 야심이 없는 두 사람 입장에서 오펀드 후작가와의 결합으로 인해 생기는 정치적 영향력은 무거운 짐일 뿐이었다.

반면에 스칼렛은 그렇지 않았다.

제국 사람이라는 게 약간 걸리긴 했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가문 간의 결합에 따른 정치적 영향력이나 주변의 견제 등을 고려할 필요가 없었다.

물론 스칼렛이 제국의 대귀족이었다면 이야기가 달라졌겠지만 스칼렛의 가문인 바이퍼 남작가는 그냥 평범한 시골 귀족에 불과했다.

그리고 스칼렛은 검의 천재였다.

흐레스벨그 백작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흐레스벨그 백작가 사람들은 그 점에 주목하고 있었다.

-도련님도 검의 천재이신데, 천재끼리 만나면 진짜 엄청난 천재가 태어나지 않을까?

2세에 대한 기대만이 아니었다.

까놓고 말해 칼잡이 집단인 흐레스벨그 백작가 입장에서는 괴력의 무투가인 카이사보다 검의 천재인 스칼렛이 더 마음에 들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여기에 더해진 하나.

-루카스에게는 똑똑하고 똑 부러진 아내가 필요해요.

흐레스벨그 백작 부인은 루카스의 어머니였고, 그랬기에 루카스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루카스는 분명 착하고 성실한 아이였지만, 우유부단한 면이 없지 않아 있었다.

그러니 루카스에게는 똑똑하고 똑 부러진, 한마디로 말해 루카스를 리드해 줄 수 있는 아내가 필요했다.

그런 면에서 더더욱 스칼렛이 마음에 든 흐레스벨그 백작 부인이었다.

스칼렛이 루카스보다 연상이라는 점까지도 마음에 들었고 말이다.

‘하지만…….’

저 모든 이야기는 둘 중에 하나만이 루카스와 맺어질 경우의 이야기였다.

‘둘 모두가 루카스와 결혼한다면 나보다는 카이사가 1부인이 되는 게 사리에 맞아.’

일단 오펀드 후작가가 문제였다.

남부의 맹주인데다가 카이사를 닮아 짐승들투성이인 오펀드 후작가의 남자들은 카이사가 2부인이 되는 상황 자체를 납득하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당장 그들만이 아니라 주변에서도 이런저런 말들이 나올 것이 분명했고 말이다.

‘거기다 나는 제국 사람이고.’

루카스는 이러나저러나 세일룬 왕국의 사람이었다.

그것도 십검호의 필두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왕국의 영웅이었으니 왕국 사람을 제치고 제국 사람을 첫 번째 부인으로 들이면 왕국 내의 여론 역시 좋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내린 결론이야. 카이사가 1부인을 할 거고, 내가 2부인을 할 거야.”

스칼렛이 따박따박 꺼낸 말들에 루카스는 복잡한 얼굴이 되었고, 카이사는 다시 말을 보탰다.

“하늘의 검성이잖아? 국왕 전하는 부인이 셋이나 되었고. 부인 둘 정도는 괜찮아. 문제없어.”

카이사는 시원시원하게 말했지만 문제가 되지 않을 리 없었다.

당장 카이사가 예시로 든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국왕’이지 않은가.

그리고-

정말로 괜찮은 것일까?

이런 식으로 두 사람 모두와 맺어져도?

루카스 자신은 그렇다 치더라도 정말 두 사람이 괜찮은 것일까?

“괜찮아.”

스칼렛이 말했다.

그녀는 루카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왜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랬기에 루카스의 눈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한 번뿐인 인생이야. 이제 두 번은 없어. 그러니까, 포기하고 싶지 않아.”

다음 기회는 존재하지 않았다.

더 이상 시간은 반복되지 않을 터였다.

스칼렛 자신은 포기할 수 없었다.

카이사 역시 그러했다.

그리고 두 사람은 그런 서로를 이해했다.

단순히 이번 생에 이어진 사이가 아닌, 몇 번이나 반복된 삶에서 때로는 적으로, 때로는 연인으로, 때로는 친구로 맺어진 실로 복잡한 인연이었기 때문이다.

스칼렛의 말에 루카스는 마른침을 삼켰다.

서로의 마음을 이해하는 것은 스칼렛과 카이사만이 아니었다.

유더와 코델리아 다음으로 지난 회차들의 기억들을 많이 가지고 있는 루카스였다.

사실 지금까지 표현만 하지 않았을 뿐 누구보다 마음이 들끓은 것 역시 그였고 말이다.

스칼렛은 미소 지었다.

바보같이 성실한, 그래서 사랑할 수밖에 없는 자신의 연인에게 손을 뻗어 그 뺨을 어루만졌다.

“괜찮아, 그냥, 루카스가 행운아가 되면 될 일이야. 기쁘게 받아들여. 솔직히 대단한 호사잖아?”

스칼렛이 찡긋 윙크를 하며 말하자 루카스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고, 카이사는 성큼 다가와 말했다.

“언니 말이 맞아. 그냥 루카스가 양다리 걸치는 쓰레기가 되면 되는 일이야. 그럼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어.”

“그…… 네?”

자기가 방금 무슨 말을 들은 것인가 싶어 저도 모르게 되물은 루카스였지만 카이사는 그저 웃을 뿐이었다.

스칼렛 역시 마찬가지였고 말이다.

“응, 맞아. 루카스가 양다리 걸치는 인간 말종 쓰레기가 되면 돼. 호색한에 파렴치한 정도?”

“나쁜 놈이라고 소문이 자자하겠지.”

“그래도 다들 속으로는 부러워할 거야.”

“사교장에도 우리 둘이 팔 하나씩 팔짱 끼고 나타나면 다들 수군수군거리겠지?”

“응, 그럴 거야. 분명히. 하지만 다 루카스 업보니까 어쩔 수 없지. 이렇게 착하고 예쁜 부인을 둘이나 얻는데 그 정도 대가는 치러야지.”

스칼렛과 카이사가 주거니 받거니 하는 말 사이에서 루카스는 다시 입술을 깨물었고, 스칼렛은 그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

그랬기에 다시 루카스의 뺨을 어루만지며 웃었다.

“웃어도 돼. 기뻐해도 되고. 우리가 선택한 일이니까.”

스칼렛의 따뜻한 눈빛에 루카스는 크게 심호흡을 하였다.

그대로 스칼렛과 카이사를 한 번씩 돌아보았고, 세상 진지한 얼굴로 말하였다.

“후회하지 않게, 해드릴게요.”

이런 말을 해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카이사 말마따나 쓰레기가 되어버린 기분이었지만, 그래도 분명하게 말했다.

“응, 그래. 믿고 있어.”

“뭔가 자꾸 조연이 되는 기분인데, 나도 믿고 있어.”

카이사가 그리 말하며 등 뒤에서 루카스를 와락 끌어안았고, 스칼렛은 까르르 웃더니 그대로 앞에서 루카스를 끌어안았다.

두 사람 사이에 끼게 된 루카스는 다시 입술을 깨무는가 싶더니 빨개진 얼굴로 두 사람 모두를 끌어안았고 말이다.

* * *

“그 날 이후의 루카스는 대단했지.”

“그러게, 완전히 ‘루카스는 이제 참지 않아요.’ 모드였으니까.”

새삼 떠오른 옛 기억에 카이사와 스칼렛은 키득거리며 웃었고, 루카스는 민망하다는 듯 헛기침을 토해댔다.

“아무튼 그럼 오후에 블랙망토랑 코델리아 만나고 내일 아침에 출발하자.”

리더인 스칼렛의 말에 루카스와 카이사는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했다.

하지만 세 사람이 유더와 코델리아를 만날 수 있었던 건 오후가 아닌 아주 늦은, 저녁 식사 시간도 살짝 지난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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