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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딩메이커-434화 (434/473)

엔딩메이커 433화

제16장 - 짐승과 도둑과 검사와 #2

“미안, 일이 좀 있어서.”

왕궁의 그나마 무사한 부분 가운데 하나인 교황의 집무실에 선 남자는, 코델리아교의 교황인 동시에 코델리아 상단의 상단주이자 플레이아데스 최강의 검사인 무검의 검호- 유더 바이엘은 상쾌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미남으로 소문난 남자답게 그 미소는 화사한 동시에 황홀하기까지 했지만 마주하고 있는 세 사람, 그중에서도 여자 둘은 썩은 표정을 지었다.

“블랙망토, 예전부터 느낀 거지만 양심이라는 게 없지 않아? 사람을 대체 몇 시간을 기다리게 한 거야.”

“언니 말이 맞아. 맨날 느끼하게 웃기나 하고.”

스칼렛은 팔짱을 낀 채 힐난했고, 카이사는 엄지로 지면을 가리키며 우우거렸다.

하지만 유더는 개의치 않는다는 듯 그저 훗 하고 웃으며 말했다.

“음, 역시 콩깍지들이 쓰여 있어서 그런가 미인계가 잘 안 통하는군.”

“그걸 또 자기 입으로 말하는 거야?”

“재수 없어, 진짜.”

스칼렛과 카이사가 다시 비난했지만 익숙한 일이었기에, 그리고 애당초 반쯤 장난에 가까운 것이었기에 유더는 이번에도 웃으며 루카스에게 말을 걸었다.

“루카스 공자, 흐레스벨그 백작령으로 돌아가시려는 건가요?”

“네, 슬슬 그럴 때이니까요.”

절친한 사이였지만 여전히 서로 존댓말을 하는 유더와 루카스였다.

“그런데 블랙망토, 핑크폭탄은?”

“맞아, 우리 코델리아는?”

스칼렛이 선창하고 카이사가 후창하는 게 무척이나 익숙해 보인다고 해야 할까.

외모는 전혀 다른데도 어느새 친자매나 다름없어진 둘의 모습에 새삼 작게 웃은 유더는 이번에도 부드럽게 답했다.

“씻고 준비 좀 하고 있어.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는 것 같아서 내가 먼저 나온 거고. 아직 식전들이지? 같이 저녁이라도 하는 게 어때?”

유더의 물음에 카이사와 루카스는 스칼렛을 돌아보았고, 스칼렛은 살짝 고민하는 표정을 짓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유더는 눈앞의 세 사람을 보고 생각했다.

‘역시 스칼렛이 리더구만.’

연장자인 것도 있지만 역시 성격과 기질 탓이 클 터였다.

워낙에 똑 부러진 성격인데다가 남 챙기기를 잘하는 스칼렛이었으니 말이다.

“그럼 식당으로 이동하지. 코델리아도 그쪽으로 올 테니까.”

“뭐야, 우리가 저녁 먹고 간다는 전제하에 이미 일을 진행하고 있던 거야?”

“실제로 먹을 거잖아?”

유더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하자 스칼렛은 진짜 얄미워 죽겠다는 표정이 되었지만 잠깐뿐이었다.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은 스칼렛은 루카스의 팔을 살짝 끌어안았고, 카이사는 얼른 루카스의 남은 팔 한쪽을 끌어안았다.

루카스는 민망한 얼굴로 어색한 웃음을 흘렸고 말이다.

“음, 일단 보기 좋네. 그럼 가자.”

유더가 앞장섰고, 그날의 밤은 그렇게 깊어갔다.

* * *

다음 날 아침.

짐을 꾸리고 숙소 앞에 나선 루카스와 스칼렛, 카이사 앞에는 커다란 마차가 두 대 세워져 있었다.

한 대는 북부 흐레스벨그 백작령으로 향할 마차였고, 다른 한 대는 남부 오펀드 후작가로 향할 마차였다.

“하아…… 나만 혼자 가는 거 싫다.”

“어쩔 수 없잖아. 결혼식 하기 전에 제대로 정리하고 와.”

카이사가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칭얼거리자 스칼렛이 어깨를 탁탁 두드려 주며 말했다.

기본적으로 프리랜서라 할 수 있을 스칼렛과 달리 카이사는 남부에서 사략함대를 이끌고 있는 몸이었다.

이번에 결혼하게 되면 남부를 떠나 북부로 올 예정이었으니 함장직 인계부터 시작해서 정리해야 할 일들이 적지 않았다.

스칼렛의 위로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는 얼굴이 된 카이사는 그대로 루카스에게 매달리며 말했다.

“루카스, 떠나기 전에 키스해 줘.”

카이사의 애교에 루카스는 작게 웃더니 카이사의 이마에 가볍게 입술을 맞추었지만 겨우 이 정도로 만족할 카이사가 아니었다.

순식간에 루카스의 목을 끌어안는가 싶더니 그대로 까치발을 세워 루카스의 입술을- 아니, 그 이상의 것들을 마음껏 훔쳐댔다.

“후, 내가 마지막이니까 봐준다.”

분명 어젯밤에도 이제 한동안 떨어져 있어야 하네 마네 하며 루카스를 독식하려 한 카이사였지만, 이번에는 진짜로 마지막이었으니까.

아마 적어도 두 달 이상은 만나지 못할 사이였으니 일단 참아주기로 마음먹은 스칼렛이었다.

카이사답게 열정적인 키스가 이어진 지 몇 분.

슬슬 스칼렛의 인내심이 한계에 봉착하려 할 즈음해서 키스를 마친 카이사는 무슨 맥주라도 한잔 마신 사람처럼 캬아- 하는 감탄사를 토했다.

“음음, 역시 우리 루카스는 삶의 보약이야.”

“진짜 아저씨 같은 거 알지?”

“하하핫.”

스칼렛의 비난에 정말로 아저씨같이 호탕하게 웃은 카이사는 그대로 두 사람에게 손을 흔든 뒤 폴짝하고 뛰어 마차 지붕 위에 올랐다.

“그럼 두 사람 다 북부에서 봐.”

“조심해서 가요, 카이사.”

“응, 루카스!”

카이사가 다시 크게 손을 흔드는 동안 마차가 덜컹덜컹거리며 남부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쟤는 진짜 언제나 철이 들런지.”

마차도 정상적으로 안 타고 지붕 위에 타는 건 또 뭐람.

역시 한 번 더 예절 교육을 할 필요가 있겠어.

스칼렛이 언니라기보다는 엄마 같은 생각을 하는 와중에 루카스는 북부로 향하는 마차의 문을 열었다.

“스칼렛.”

“응, 고마워 루카스.”

에스코트를 위해 내민 루카스의 손을 부드럽게 잡은 스칼렛은 무척이나 우아한 동작으로 마차 위에 올랐다.

그리고 다시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동그란 안경을 낀 채 카이사가 추천해 준 책을 읽던 스칼렛은 살짝 고개를 들어 맞은편에 앉은 루카스 쪽을 보았다.

무릎 위에는 빌트바인 영웅전이 올라가 있었지만 막상 루카스의 시선은 창밖을 향해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일까.

스칼렛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바로 그 화제를 꺼내는 대신 안경을 벗고 탁 소리가 나게 책을 접어 루카스의 시선을 끌었다.

“루카스, 아기 귀여웠지?”

약간은 생뚱맞은 질문이었지만 요 며칠 몇 번이나 오고 간 화제였기에 루카스는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무척이나.”

레지나 바이엘.

바이엘 백작가의 막내 영애.

열 달을 다 못 채우고 태어났지만 오히려 여간한 아기들보다 성숙한 모습으로 태어난 유더의 동생.

스칼렛은 레지나의 작은 손가락을 새삼 떠올리듯 허공을 만지작거리며 말을 이었다.

“자라면 어떻게 될지 궁금하지 않아? 블랙망토를 닮으려나?”

일단은 동생이었으니까.

말이 나온 김에 스칼렛은 잠시 눈을 감고 여자 유더를 상상해 보았다.

이러나저러나 외모 하나는 끝내주는 유더라 그런지 여자 버전도 썩 어울린다는 느낌이었다.

아니, 오히려 이쪽이 더 느낌이 좋다고 해야 할까?

‘그래도 진짜 블랙망토 닮은 건 좀 그럴지도.’

외모는 닮아도 되지만 성격까지는 좀.

스칼렛은 쿡쿡 하고 웃은 뒤 레지나와 유더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더 늘어놓았고, 루카스는 작게 웃으며 호응했다.

그리고 다시 몇 분이 지났을까.

“루카스, 제일검 생각하는 거지?”

스칼렛은 루카스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제일검.

룬 프라우드.

외신 전쟁 와중에 돌아온 검의 악마.

스칼렛은 알고 있었다.

요 며칠 내내- 제도에서 돌아온 이후로 루카스의 머릿속에는 항상 제일검의 생각이 가득했다는 것을.

루카스는 부정하지 않았다.

순순히 고개를 끄덕여 스칼렛의 생각이 맞음을 인정했다.

제일검과 검을 맞댄 것은 모두 합쳐 세 번이었다.

검의 연회에서 한 번, 레드 게이트에서의 싸움에서 한 번, 그리고 이번 제도에서의 싸움에서 한 번.

레드 게이트에서의 싸움에서 루카스는 분명 선전했지만 그뿐이었다.

단순히 결과만 놓고 보자면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루카스의 패배였다.

그리고 이번 제도에서의 싸움에서도 루카스는 이길 수 없었다.

최후의 검격을 나누었을 때.

루카스는 느낄 수 있었다.

제일검이 지평에 도달했다는 것을.

검리를 깨우쳐 검성 이상의 존재로 거듭났다는 것을.

만약 유더와 코델리아가 외신을 쓰러뜨리는 것이 조금만 더 늦었더라면.

그래서 제일검이 조금 더 오랫동안 싸울 수 있었더라면.

“좋아, 결정했어.”

스칼렛의 목소리가 수면 깊이 내려앉으려던 루카스의 의식을 다시 끌어올렸다.

어느새 루카스의 바로 옆으로 자리를 옮긴 그녀는 그대로 고개를 들어 루카스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다.

“아버님과 어머님께 인사드린 다음에 나랑 같이 제국에 가자.”

“제국…… 에요?”

“응, 제국. 우리 집에도 좀 들르고. 안 그러면 틀어박혀서 수련만 할 거잖아?”

스칼렛의 말에 루카스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움츠렸다.

그녀의 말이 맞았기 때문이다.

스칼렛은 그런 루카스의 뺨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하지만 그건 아니라고 생각해. 루카스에게 지금 필요한 건 그런 수련이 아니니까. 지평에 닿지 못한 나이지만…… 그 정도는 알 수 있어.”

지금 틀어박힌다면.

제일검의 검을 머릿속에서 내려놓지 못한다면.

오히려 심마에 빠질 터였다.

지평을 향해 느리지만 천천히, 끊임없이 나아가던 루카스의 발걸음이 멈출 수도 있었다.

그래서 스칼렛은 다시 활짝 미소 지으며 말을 이었다.

“이번에 들었는데, 바람의 검성이 새로운 경지에 올랐대. 셋째 출산 소식이랑 천사 강림 소식 때문에 완전히 묻혀서 아는 사람은 별로 없지만.”

바이엘 백작의 이야기에 루카스는 눈을 부릅떴다.

이미 검성의 경지에 오른 그가 새로운 경지에 도달했다는 것은 지평에 도달했거나 그 직전에 도달했음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바람은 언제나…… 자유로운 법이니까.”

스칼렛은 마치 노래하듯 읊조렸다.

젊은 시절 바람의 검성이 매일같이 입에 달고 다녔다는, 그래서 그의 흑역사라고도 불리는 결정대사.

하지만 그와 별개로 루카스가 무척이나 좋아하는 그 대사를 작게 읊조린 스칼렛은 머리칼을 가볍게 꼬며 말했다.

“다시 이 말을 입에 담았다고 해. 사실 난 잘 모르겠지만…… 바람의 검성은 젊은 시절의 치부라 생각하며 묻어두었던 이 말을 다시 입에 담음으로써 어떤 깨달음을 얻은 모양이야.”

아주 조금이지만 짐작이 되기는 했다.

자유로운 바람의 길.

지평으로 이어진 바이엘 백작의 길.

그렇다면 루카스의 길은 무엇일까.

지금 루카스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루카스는 눈을 깜박였다.

그리고 깨달았다.

제일검이 보여준 화려한 길에 시선을 빼앗기고 있었다는 사실을.

자신의 길을 마주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의 길을 보기 위해 발걸음을 멈추었다는 것을.

스칼렛의 말대로였다.

지금 루카스 자신에게 필요한 것은 어두운 구멍 속에 숨는 것이 아니었다.

루카스 자신의 길.

전생의 기억들 덕분에 빠르게 도달한, 그렇기에 조금만 방심해도 잃어버릴 수 있는 길.

“스칼렛.”

“응, 알아. 지금 너무너무 고맙지? 너무너무 사랑스럽고?”

스칼렛이 끼를 부리듯 고개를 기울이며 잔망스럽게 말하자 루카스는 평소의 그답지 않게 호탕하게 웃더니 그대로 스카렛을 와락 끌어안았고, 입술을 맞추었다.

반년 전 그날 이후 늘 그랬듯이 더 이상 참지 않았다.

* * *

시간이 흘렀다.

외신전쟁으로부터 일 년.

카이사 오펀드와 스칼렛 바이퍼가 각각 카이사 흐레스벨그와 스칼렛 흐레스벨그가 되고도 몇 달이 흐른 뒤.

코델리아의 새로운 신상을 고안 중이던 유더는 돌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눈을 부릅떴다.

그리고 그것은 코델리아 역시 마찬가지였다.

달리아에게 선물할 머리끈과 빗을 고르던 그녀는 어용상인을 급히 퇴실시킨 뒤 유더가 있는 집무실을 향해 달렸다.

“유더.”

급히 달려오느라 숨이 엉클어진 코델리아의 부름에 유더는 고개를 끄덕이며 손에 들린 물건을 내밀었다.

가운데가 똑 부러진 검은색 막대였다.

하지만 그냥 평범한 막대가 아니었다.

-진호와 유희에게 무언가 큰일이 생기면 부러뜨려. 그럼 우리가 바로 알게 될 거야.

만약을 대비해서 나타샤에게 남긴 마법적 기물과 한 쌍을 이루는 물건.

강진호와 홍유희에게 무언가 문제가 생겼다.

더욱이 검은색 막대였다.

나타샤에게 맡긴 여러 막대들 가운데서 가장 심각한 긴급사태를 의미하는 검은색 막대 말이다.

대체 무슨 일이 생긴 것일까.

다른 누구도 아닌 나타샤가 긴급사태라 판단할 만한 사태라면-

“서두르자.”

“그래, 코델리아.”

유더는 더 이상 지체하지 않았다.

단번에 코델리아를 등에 업은 뒤 창밖을 향해 몸을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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