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딩메이커 435화
제17장 - Happily ever after #2
띵동- 띵동-
연이어 울리는 초인종 소리에 유더는 일단 돌아서서 인터폰 쪽을 돌아보았지만 애석하게도 화면이 나오지 않는 상태였다.
“아, 고장 났어. 내일 고치러 온다고 했는데.”
나사 풀린 목소리로 말한 나타샤는 현관문으로 향할 생각은 애당초 없다는 듯 그대로 맥주를 마시기 시작했다.
띵동-
“배달- 아니다, 내가 나가볼게.”
시계가 가리키는 시각은 오후 11시 10분.
이 시간에 누가 찾아올 리도 없으니 배달 음식이라도 시킨 거겠지.
꽐라가 돼서 빨개진 얼굴로 히히히 웃고 있는 나타샤를 한 차례 돌아본 유더는 한숨을 한 번 내쉰 뒤 현관문 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문을 열었을 때-
“유, 유더 바이엘?”
눈을 크게 뜬 채 당황하는 분홍색 머리칼의 남자.
남자가 유더를 알듯이 유더 역시 남자를 알고 있었다.
채팅방 멤버들 가운데 하나.
야심한 시각 나타샤의 집에 찾아온 것은 코와붕가였다.
* * *
야생의 코와붕가가 나타났다!
코와붕가는 유더의 얼굴을 보았고, 유더를 ‘유더’라 생각하는 것 같다.
어떻게 해야 할까?
1. 기절시킨 다음에 기억을 지운다.
2. 기절시켜서 기억을 지우기 전에 나타샤랑 무슨 관계인지를 캐묻는다.
3. 기절시켜서 기억을 지우기 전에 성인용 장난감이 잔뜩 든 종이 가방을 든 채로 나타샤네 집에, 그것도 야심한 시각에 찾아온 이유를 고문을 통해 알아낸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이었다.
“앗, 코와붕가다.”
김혜은이 누워 있던 안방에서 나온 코델리아가 반가움과 놀라움이 반씩 섞인 얼굴로 말했고, 코와붕가는 이번에도 즉각적인 반응을 보였다.
“코, 코델리아! 진짜 코델리아다!”
어째서 이 자식은 코스튬플레이 대신 바로 유더와 코델리아 본인이라 생각하는 것일까.
짧게 한숨을 내쉰 유더는 코와붕가에게 손짓하며 말했다.
“일단 들어오시죠.”
“네? 아, 네!”
반색을 한 코와붕가는 서둘러 현관 안에 들어섰다.
그리고 몇 분 뒤.
소파 위에 다소곳이 앉은 코와붕가와 마주한 유더는 그냥 이 상황 자체가 즐겁다는 듯 얼굴 가득 미소를 띠고 있는 코델리아와 유더의 강압 때문에 대충이라도 옷을 걸치게 된 것에 대해 묘한 기쁨과 짜증을 동시에 표출 중인 나타샤를 번갈아 본 뒤 입을 열었다.
“코와붕가 씨는 초능력자죠?”
“네, 네. 맞습니다. 초능력자입니다.”
코와붕가가 의외일 정도로 순순히 자신의 정체를 인정한 순간이었다.
“아니, 잠깐. 무슨 소리야. 붕가붕가가 초능력자라고?
“누, 누나! 붕가붕가라고 부르지 말라니까?”
코와붕가가 정말로 부끄럽다는 듯 순식간에 얼굴을 붉히며 항의하자 나타샤는 코웃음을 쳤다.
“야, 코와붕가나 붕가붕가나 그게 그거지 뭐. 그리고 누가 닉을 그따위로 지으래?”
“크으윽…… 차라리 닌자거북이라고 불러줘…….”
애당초 닌자거북이에서 따온 닉이기도 하고.
하지만 어림없는 소리였다.
평소에도 장난기가 많은 나타샤에게는 작은 비밀이 하나 있었으니, 술에 취하면 평소보다 열 배는 더 유치해지는 데다가 장난기 역시 많아진다는 사실이었다.
“싫은데. 계속 붕가붕가라고 부를 건데. 내 마음대로 할 건데. 아무튼, 붕가붕가가 초능력자라고?”
“어, 초능력자야.”
확실하게 딱 잘라 말한 유더는 코와붕가를 돌아보았고, 코와붕가는 새삼 긴장한 듯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하는 모양새를 보니 이렇게 남들 앞에서 초능력자라는 사실을 공개하는 것이 처음인 것 같았다.
“능력은?”
나타샤가 맥주 캔을 내려놓으며 묻자 코와붕가는 잠시 주저하는가 싶더니 이내 내친걸음이라는 듯 용기를 내 말했다.
“사, 사이코메트리라고 알아? 그, 만지면 기억이나 생각을 읽을 수 있는.”
코와붕가의 목소리에는 약간이지만 희열이 묻어났다.
얼굴 역시 상기되어 있었고 말이다.
오랫동안 숨겨온 비밀을 공개한다는 사실에 해방감을 느끼는 모양이었다.
초능력자라는 사실.
그리고 자신이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한 공개.
절친들은 물론이고 가족들에게조차 숨겨왔던 비밀을 털어놓은 코와붕가는 기대와 불안이 뒤섞인 눈으로 나타샤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나타샤는 기분 나쁘다는 얼굴이 되어 말했다.
“넌 이제부터 나랑 스킨십하는 거 금지야. 절대 금지.”
“응? 스킨십?”
나타샤의 말에 무슨 말이냐는 듯 눈을 깜박인 것은 코델리아였다.
그도 그럴 것이 스킨십이라니.
나타샤와 코와붕가가 스킨십이라니.
코델리아의 눈이 순식간에 도끼눈이 되자 코와붕가는 당황해서 외쳤다.
“자 잠깐! 오해예요. 오해. 애당초 악수도 한 적이 거의 없는데 스킨십이라니. 누, 누나도 빨리 말해봐. 어?”
“흑흑. 어젯밤에도 그렇게 뜨거운 밤을 보내놓고 모른 척하기야?”
“아니, 이 아가씨가 갑자기 왜 이래.”
코와붕가가 울상이 되자 나타샤는 만족스럽다는 듯 까르르 웃더니 다시 맥주 캔을 집어 들며 말했다.
“가영이도 알아?”
“가영이?”
되물은 것은 코와붕가가 아닌 코델리아였고, 그랬기에 유더는 오랜만에 눈빛 대화를 시전했다.
‘AAA 본명.’
‘아, 맞다맞다.’
유가영.
분명히 그런 이름이었지.
코델리아가 홀로 납득하는 동안 나타샤는 현지화를 마친 외국인답게 집안에 비치 중이던 효자손으로 코와붕가를 쿡쿡 찌르며 다시 물었다.
“가영이도 알아?”
“아니, 그…….”
말끝을 흐리는 모양새만 봐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그랬기에 나타샤는 스스로의 어깨를 끌어안더니 참으로 슬픈 표정이 되어 말했다.
“모르네. 모르는구나. 가영이는 그런 것도 모르고 음침한 붕가붕가한테 일방적으로 기억을 읽히고 있는 거구나.”
나타샤의 비난에 코와붕가는 양심에 찔린다는 듯 가슴을 움켜쥐며 괴로워했고, 코델리아는 흥미진진함과 노여움이 반씩 섞인 얼굴로 코와붕가를 노려보았다.
그러자 움찔한 코와붕가는 다급히 변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 그치만 사이코메트리 능력이라는 게 그…… 오히려 말했다가는 안 좋은 일이 있을 수 있거든?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그, 어, 맞아. 하얀 거짓말?”
코와붕가의 필사적인 변명에 코델리아는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얼굴이기는 해도 도끼눈 자체는 해제했다.
나타샤야 애당초 반쯤 장난이었기에 그냥 맥주를 마시며 흥흥거렸고 말이다.
그리고 한 사람.
이 자리에 있는 이들 가운데 가장 이성적인 인물인 유더는 조금이지만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마인드 리딩 계열이니…… 코와붕가 말처럼 그냥 숨기는 쪽이 서로 좋을 수도 있지.’
아무리 연인끼리는 비밀이 없어야 한다고 하지만 그것도 비밀 나름이었다.
마인드 리딩 계열은 ‘일방적으로 마음을 읽힌다’라는 점이 굉장한 부담으로 다가올 수 있었기에 절친한 사이라도 순식간에 사이가 어그러질 가능성이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계속 비밀로 하는 게 또 좋은 것은 아니지만.’
그냥 사이도 아니고 스킨십을 자주 할 수밖에 없는- 한마디로 코와붕가가 실수든 무의식적이든 능력을 자주 발동시킬 수밖에 없는 연인 사이니 더욱 그러했다.
‘뭐, 결국 자기들이 알아서 할 문제지만.’
마이아나 달리아, 나타샤의 일이라면 자기 일처럼 진지하게 생각하며 두 손 걷고 나섰을 유더였지만 코와붕가면 그냥 걱정 정도 해주는 선에서 그친다고 해야 할까?
그랬기에 유더는 더 깊이 파고드는 대신 바로 화제를 전환해버렸다.
“아무튼 여긴 왜 온 거지?”
“맞아, 여자 혼자 사는 집에, 그것도 이런 야심한 시각에 야한 장난감이 가득 든 가방을 들고 불쑥 찾아오다니 역시 음침해. 헨타이. 변태. 나한테 무슨 짓을 하려던 거야? 야한 짓이 분명해. 내가 이런 변태인 줄 진즉에 알아봤지.”
“누나가 불렀잖아! 누나가!”
차례대로 유더, 나타샤, 코와붕가.
나타샤가 자기 양어깨를 끌어안으며 장난스럽게 말하자 코와붕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적극적인 항의를 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신을 바라보는 코델리아의 시선이 매우 곱지 못했기 때문이다.
‘수상해.’
다른 거 다 떠나서 저런 가방은 왜 들고 온 건데?
코델리아의 찌르는 것 같은 눈빛에 코와붕가는 진땀을 흘리며 다시 한번 변명했다.
“아니, 이, 이건 누나가 가져다 달라고 한 거거든요?”
“아닌데, 난 그런 적 없는데.”
“아니, 이 아가씨가 진짜 사람 잡으려고 하네.”
“흐흐흥, 그리고 만약 가져오라고 했어도 말이야. 술에 취해서 한 헛소리 듣고 진짜로 가져오는 쪽이 문제인 거 아닐까?”
가불기였다.
그랬기에 코와붕가는 새빨개진 얼굴로 흑흑거리더니 다시 코델리아 쪽을 보며 말했다.
“그, 정말로 진짜 이상한 게 아니라 제가 누나랑, 그리고 유희랑 협업을 하고 있거든요?”
“버튜버 일?”
코델리아가 미심쩍다는 얼굴로 묻자 코와붕가는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거랑 의논할 것도 있고 해서 디코로 이야기 좀 하는데 당장 안 오면 절교라느니, 성…… 아, 아니. 이것저것 안 챙겨오면 총알을 박아준다느니 어쩌니 해서 달려온 겁니다.”
“내가 그랬나?”
“그랬어, 누나가 그랬어. 제발 나 좀 살려주라. 어?”
코와붕가가 흑흑거리며 말하자 코델리아는 유더 쪽을 돌아보았고, 유더는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나타샤가 취하면 좀 개가 되긴 해.’
코델리아만큼은 아니지만 꽤 귀여워지기도 하고.
어찌 되었든 유더에게 있어 코와붕가가 변태로 매도되어 사회적 지위가 추락하는 일은 그다지 중요한 일이 아니었기에 다시 본론을 꺼내 들었다.
“아무튼 나타샤, 두 사람이 결혼을 서둘러야만 하는 이유가 뭔지 말해줄 수 있겠어?”
“결혼을 서둘러야만 하는 이유?”
되물은 것은 코델리아였고, 그녀는 혼자 눈을 몇 번 깜박이더니 화들짝 놀라 소리쳤다.
“서, 설마?!”
“지노 생일이 앞으로 열흘 남았거든.”
“에?”
코델리아는 눈을 깜박였고, 유더는 미간을 좁혔다.
결혼을 빨리 해야 하는 이유를 물었는데 강진호의 생일이 열흘 남았다가 그 대답이라니 이게 대체 무슨 소리란 말인가.
두 사람의 반응에 나타샤는 말하는 자신도 어이가 없다는 듯 한숨을 푹푹 내쉬더니 들고 있던 맥주 캔을 원샷으로 비운 뒤 투덜거리며 말했다.
“지노가 31살 아저씨 되기 전에 꼭 결혼해야 한대. 그럼 32살인 나는 대체 뭐야? 응? 뭐냐구.”
“아니, 잠깐만. 잠깐. 그게 이유야? 결혼해야만 하는 이유?”
“어, 이게 이유래.”
나타샤가 다시 툴툴거리는 것을 보니 진짜인 모양이었다.
그리고 이 순간.
코델리아는 팔짱을 끼더니 이해가 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알겠어. 납득이 가.”
왜죠.
왜 혼자서 저 이유에 납득하시는 거죠.
하지만 유더의 의문은 잠시뿐이었다.
애당초 서른 살 되기 전에 둘이 사귀어야 한다고 유더 자신을 그렇게나 갈구던 코델리아 아닌가.
태어나 자란 환경은 물론이고 이후 겪은 일들이 너무나 차이가 나 이제는 같은 사람이라 보기 힘든 코델리아와 홍유희였지만 그래도 일단 근본 자체는 동일했다.
아저씨 되기 전에 사귀어야 하고, 아저씨 되기 전에 결혼해야 한다.
아마도 홍유희에게는 강진호와의 나이 차가- 정확히는 둘의 나이 차에 대한 외부의 시선들이 생각 이상으로 신경 쓰이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잠깐. 너희 둘 다 혼전 임신 같은 거 생각한 거야? 지노인데?”
많은 것을 함축한 문장에 유더와 코델리아는 동시에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나타샤의 말대로였기 때문이다.
다른 누구도 아닌 강진호가 속도위반 같은 실수를 한다?
의도적인 음모가 아닌 한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런 사실과 별개로 꽤나 낯부끄러운 화제였기 때문인지 코와붕가는 어색한 미소를 흘리며 화제 전환을 시도했다.
“아니, 뭐…… 애당초 둘 다 언제 결혼해도 이상한 사이는 아니니까 괜찮지 않을까요. 아복이 형도 아닌 척하지만 은근히 빨리 결혼하고 싶어 하는 것 같고.”
“아, 그것도 납득. 그렇지 유더야? 응?”
“흠흠.”
코델리아가 놀리듯이 묻자 유더는 헛기침을 토했고, 코델리아는 발갛게 달아오른 유더의 귀 끝을 보며 만족했다.
귀여운 우리 집 댕댕이 같으니라구.
“저, 저기 그런데.”
코델리아의 얼굴에 떠오른 으흐흥 하는 미소에 나타샤가 다시 입술을 삐쭉이며 맥주 캔을 들어 올린 순간.
조심스럽게 입을 연 코와붕가는 유더와 코델리아를 번갈아 본 뒤 기대에 찬 얼굴로 말했다.
“호, 혹시 무공 보여주실 수 있나요? 마법이라든지…….”
초능력자에게도 무공이나 마법은 신기했으니까.
코와붕가의 요청에 코델리아는 유더를 돌아보았고, 유더는 쓰게 웃으며 흑염룡을 일으켰다.
* * *
“그래서 AAA랑은 잘 사귀고 있어?”
“가영이 누나랑은 헤헤헤…… 아, 마따마따. 스프링클러 정말 감사해요.”
술에 잔뜩 취한 코와붕가가 꾸벅 배꼽 인사를 하며 감사하자 마찬가지로 잔뜩 취해 얼굴은 물론이고 목까지 빨개진 코델리아가 흐흐흥 웃으며 답했다.
“응응, 그래. 계속 감사해. 많이 감사해. 스프링클러는 신이고 무적이야. 큐피트의 화살보다 훨씬 세. 아, 그리구 코델리아교도 믿고. 알았지?”
“네넵, 성실한 신자가 되겠습니다. 코델리아 님 완전 천사!”
“아니, 아니. 대천사. 은근슬쩍 직위 낮추지 말구.”
“아이고, 제가 실수를. 코델리아 님 완전 대천사!”
“헤헤헤.”
코델리아는 웃었고 코와붕가도 웃었다.
그렇게 두 사람이 더더욱 꽐라가 되어가고 있을 때 유더와 나타샤는 베란다에 서서 밤공기를 쐬고 있었다.
“지노, 아니, 유더.”
“응, 나타샤.”
“넌 진짜 나쁜 놈이야. 반항해도 그냥 확 잡아먹을 걸 그랬어.”
장난 섞인 목소리로 웃으며 말했지만 유더도 이제는 알 수 있었다.
강진호가 아닌 제3자의 눈으로 보았기에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랬기에 더욱 말을 아꼈다.
유더는 침묵했고, 나타샤는 원망과 고마움이 섞인 눈으로 유더를 바라보다 밤하늘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알렉세이 보고 싶다.”
“그러게.”
강진호의 결혼식을 보았다면 그는 어떤 말을 했을까.
대견하다며 뿌듯해했을까?
아니면 제 발로 감옥에 들어간다며 끌끌끌 혀를 찼을까.
어느 쪽이든 나타샤의 말대로였다.
알렉세이.
그가 보고 싶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유더와 코델리아는 강진호와 홍유희의 아파트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