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딩메이커 441화
SS #36 레지나 바이엘(2)
“건국기념회요?”
레지나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묻자 소(小) 바이엘 백작- 게일은 빙긋 웃으며 다시 말했다.
“그래, 건국기념회. 세일룬 왕국이 세워진 날을 매해 기념하기 위한 날이지.”
“아니, 오빠. 그건 나도 알고. 이름만 봐도 아는 거잖아 그건. 나도 상식이라는 게 있답니다?”
“흠흠.”
여동생의 정론 반격에 무안해진 게일이 헛기침을 토하자 벽난로 근처에 모여 있던 이들 모두가 작은 미소를 지었다.
체이스 백작가의-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엠버와 에이든의 방에 자리한 벽난로 앞에는 다섯 사람이 모여 있었다.
소 바이엘 백작이자 십검호 가운데 하나인 바람의 늑대 게일 바이엘.
소 바이엘 백작 부인인 동시에 바이엘 산업의 실질적인 경영자인 황금야차 아델리아 바이엘.
레지나를 인형처럼 뒤에서 끌어안은 채 생글생글 미소 짓고 있는 엠버 바이엘과 레지나 대신 베개를 끌어안고 있는 에이든 바이엘.
그리고 엠버의 품에 안긴 채 모닥불의 온기와 엠버의 따뜻함과 방금 들은 이야기의 두근두근함으로 말미암아 뺨을 발갛게 붉히고 있는 레지나 바이엘.
바이엘 산업의 유력자들과 함께한 저녁 모임에서 돌아온 게일과 아델리아는 아이들 앞에서 이런저런 소식들을 전달해 주던 참이었다.
“아무튼 올해 건국기념회는 무척 특별할 예정이란다.”
“다프네 왕세녀님이 드디어 왕위에 오르시는 건가요?”
게일의 말에 꼬리를 잇듯 엠버가 물었고, 게일은 잠시 당황했지만 이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엠버 네 말대로란다. 다프네 왕세녀님께서 이번 건국기념회 때 왕위에 오르실 거라고 공문이 내려왔단다.”
다프네 D 세일룬.
1왕비 유스티아 F 세일룬이 낳은 두 자식들 가운데 하나이자 왕가의 장녀.
이미 몇 년 전부터 실질적인 국왕으로서 세일룬 왕국을 운영해 온 그녀였지만 이러나저러나 국왕 대리일 뿐 진짜 국왕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번 건국기념회를 기점으로 그녀가 드디어 왕위에 오르는 모양이었다.
“생각보다 더 오래 걸렸네요. 사실 언제 즉위하셔도 이상할 게 없었잖아요?”
다프네 왕세녀의 정통성은 완벽했고, 주변에 경쟁자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같은 유스티아 왕비 소생인 디온 왕자는 다프네 왕세녀의 열렬한 추종자인 동시에 심복이었기에 애당초 적이 될 수 없었고, 2왕비 소생인 다리안 왕녀는 이미 유력 귀족에게 시집을 가 사실상 왕족이 아니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 그런 거야. 언제 즉위하셔도 상관없는 상태니 굳이 서두를 이유도 없잖아? 국왕 전하께서도 아직 정정하시고.”
엠버의 말을 에이든이 받자 레지나는 그런 거냐는 눈으로 게일을 바라보았고, 게일은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찌 되었든, 이번 건국기념회는 정말 성대하게 열릴 거란다. 그래서 전국의 귀족들에게 초대장이 내려왔고…….”
게일은 말끝을 흐리며 기대감 어린 눈으로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두근두근 눈을 빛내며 자신의 말을 기다릴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니었다.
엠버와 에이든은 이미 무슨 말이 나올 줄 다 안다는 얼굴이었고, 레지나도 뜸 들이지 말고 빨리 말이나 하라는- 약간 타박 섞인 눈빛을 보낼 따름이었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이었다.
게일이 작은 실망과 약간의 서운함 때문에 저도 모르게 어깨를 늘어뜨리자 아델리아가 아이들을 보며 눈짓과 턱짓을 보냈고, 황금야차의 경고에 아이들은 영혼 없는 리액션을 펼치기 시작했다.
“아빠, 빨리 말해주세요.”
“궁금해요, 아빠.”
“오빠, 나도 궁금해. 응?”
여우 같은 연기에도 능한 엠버 외에는 국어책 읽기에 가까운 괴멸적 연기력이었지만 효과는 굉장했다.
다시 기운이 난 게일은 하하하 웃더니 품에서 초대장을 꺼내 들었다.
“우리 바이엘 백작가와 체이스 백작가에도 초대장이 왔단다. 그러니 다 같이 왕도에 가자꾸나.”
왕도.
건국기념회.
온 가족이 떠나는 왕도로의 여행.
전부 예상한 그대로였지만 그래도 막상 듣고 나니 텐션이 올라가는 아이들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여행 자체를 떠나본 적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왕도까지면 마차 타고 가는 거야?”
“그래야겠지? 거기다 우리만 가는 게 아니라 정말로 바이엘 백작가와 체이스 백작가 모두가 같이 갈 거니까 마차도 여러 대가 필요하단다.”
게일의 대답에 레지나는 급히 손가락을 꼽아보기 시작했다.
사랑의 여행을 떠난 대(大) 바이엘 백작과 유나 바이엘- 아버지와 어머니를 뺀다고 해도 바이엘 백작가와 체이스 백작가 모두가 떠난다고 하면 상당한 대인원이 될 수밖에 없었다.
‘아더 삼촌, 에드워드 오빠, 실비아 언니, 게일 오빠, 아델리아 언니, 엠버랑 에이든, 벨라, 나.’
일단 바이엘 백작가와 체이스 백작가의 사람들만 합쳐서 아홉이었다.
여기에 루나 같은 메이드들과 일행을 호위하기 위한 기사들까지 더해진다면 수십 명을 우습게 헤아릴 터였다.
“전국의 귀족들이 다 모이면 정말 대단하긴 하겠네요. 이런 식으로 전국의 귀족들이 다 모인 건국기념회는 300주년 때 이후 처음 아닌가요?”
에이든의 물음에 게일은 이번에도 고개를 끄덕였다.
건국 300주년 기념회.
300년이라는 세월은 결코 짧지 않았다.
하나의 국가가 300년 동안이나 이어졌다는 것은 결코 흔한 일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세일룬 왕국의 300주년 기념회는 다른 의미로 좀 더 유명했다.
호국공의 반란.
왕가의 비극.
구국의 영웅이었던 호국공이 악마 추종자들과 결탁해 국왕을 비롯한 왕족들 전체를 시해하려 한 참혹한 사건.
다행히 국왕이 시해되는 일만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저 당시 왕가와 왕도 모두는 막대한 피해를 입어야만 했다.
헨리 2세와 1왕비, 2왕비, 3왕비.
그리고 다프네 왕세녀와 디온 왕자, 다리안 왕녀.
저 일곱을 제외한 왕족들은 사실상 몰살당했고, 왕도에서는 수만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사상자가 발생했다.
하지만 300주년 기념회는 패배의 역사가 아니었다.
오히려 승리의 역사였다.
‘환상의 커플!’
유더 바이엘과 코델리아 체이스.
호국공을 참하고 왕족들을 지켜낸 구국의 영웅들.
그 둘만이 아니었다.
호국공과 함께 배신한 타락의 검성- 제일검 룬 프라우드를 저지한 바람의 검성 바이엘 백작.
왕궁의 붕괴를 막은 붉은폭풍 체이스 백작.
단신으로 강대한 마인을 저지한 칠살검 세류.
좀비들을 격퇴하고 왕도를 지켜낸 파라곤의 대영웅- 뱀파이어 로드 벨키안.
악마 추종자들의 음모는 저지되었고, 왕가는 지켜졌다.
세일룬 왕국은 승리하였다.
“아빠랑 엄마도 맹활약했잖아요. 역사책에도 나오는걸요?”
엠버가 후후훗 웃으며 말하자 게일은 쑥스럽다는 듯 하하핫 웃었고, 아델리아는 새삼 그날을 회상하듯 살며시 눈을 감았다.
바람의 늑대 게일과 황금야차 아델리아.
치열하고 격렬한 전투였었다.
둘 중 하나가 아닌, 둘 모두가 목숨을 잃었어도 조금도 이상할 게 없는 그런 전투.
하지만 아델리아는 그날의 처절함과 치열함을 떠올리는 대신 더 좋은 기억들을 생각했다.
다시 만나길 손꼽아 기다렸던 게일과 왕도에서 재회했던 날의 추억.
자신의 저택에서 게일과 나누었던 모든 것들.
그리고 습격이 끝나고 며칠 뒤, 마침내 부활한 게일과 나누었던 격렬한 키스와 뜨거운 밤까지도.
벌써 십여 년이나 지난 과거의 일이었지만 바로 어제의 일처럼 생생한 일이기도 하였다.
“아델리아.”
“여보.”
똑같은 생각을 한 것인지 게일이 아델리아의 어깨를 부드럽게 안았고, 아델리아는 그런 게일의 품에 기대며 촉촉한 눈빛을 보냈다.
그리고 급격히 자신들만의 세계에 빠져드는 두 사람을 눈앞에서 직관하고 있던 아이들은 저마다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우리 여기 있는 거 완전히 잊은 거 같지?”
“이번에야말로 동생이 생기는 걸까?”
“분위기 좋지만 일단 깨고 본론으로 들어가는 게 어떨까?”
차례대로 레지나, 엠버, 에이든.
하지만 정말로 안 들리는지 게일과 아델리아는 촉촉하게 젖은 눈빛을 교환할 따름이었다.
그랬기에 레지나는 잠시 눈을 감고 상상해 보았다.
왕도로의 여행.
왕도에서 만날 모두들.
그리고 이전부터 들어 알고 있던 왕도와 300주년 기념회의 이야기들.
‘검의 연회라는 거 지금도 하려나?’
유더 오빠가 나가서 엄청 멋지게 우승했었다고 코델리아 언니가 그랬었는데.
‘나도 나가고 싶다.’
레지나 바이엘은 바람의 검성 대 바이엘 백작의 직계였고, 그에게 직접 바람의 검을 전수받았다.
레지나는 검이 좋았다.
엠버와 에이든과 같이 맛있는 것도 먹고 게임도 하며 노는 것 역시 좋아했지만, 가장 좋아하는 것은 바람의 검이었다.
‘바람은 언제나 자유로운 법이니까.’
아버지의 명언도 정말정말 좋았고 말이다.
물론 이제 겨우 열세 살인 터라 그렇게까지 높은 경지에는 오르지 못했지만, 그렇다고 경지가 낮은 것은 또 아니었다.
레지나에게는 검의 재능이 있었다.
이대로 성장한다면 서른이 되기 전에 검호의 경지에 도달할 것이 분명했다.
‘무도회도 보고 싶다. 나도 나가야겠지?’
코델리아 언니의 미모에 온 세상이 굴복한 날이라며 유더 오빠가 몇 번이나 이야기해 준 무도회의 밤.
코델리아 언니는 정말 예쁘니까.
진짜 여신의 화신인데다가 진짜 천사인데다가 아무튼 진짜 대단하니까.
‘그런데 나도 무도회 나가면 누구랑 춤을 추지? 에이든이랑 추나?’
아니, 춤 자체야 어차피 여러 명이랑 추겠지만 그래도 파트너는 있어야 할 것 같은데.
파트너.
레지나의 머릿속에 순간 여러 얼굴들이 떠올랐지만 어째 다들 성에 차지 않았다.
‘으으음…… 이게 다 오빠들 때문이야.’
태어나 보니 오빠 둘이 너무 잘났다.
특히 둘째 오빠는 거의 세상에서 제일 멋진 남자 수준이었고 말이다.
‘아무튼 기대되네.’
무도회에서 추는 춤도 춤이었지만 왕도에는 여기저기 구경할 곳도 많았으니까.
‘괴도 핑크폭탄의 성지도 여기저기 있고.’
로그 마스터 핑크폭탄.
활동 시기는 역대 로그 마스터들 중에서 가장 짧았지만 인상적이다 못해 충격적이기까지 한 괴도명과 놀라운 활약, 그리고 예쁜 코스튬 덕분에 새로운 로그 마스터가 등장한 지 십 년 가까운 세월이 지난 지금도 숨은 팬이 많은 세기의 대도.
‘빨리 가고 싶다.’
흐레스벨그 백작가의 ‘아이들’도 보고 싶고, 유더 오빠랑 코델리아 언니도 보고 싶고, 모두랑 같이 이것저것 하고 싶은 것들도 많고.
“이제 그만들 자렴.”
“그래, 어서 자려무나.”
“후, 어쩔 수 없죠. 저희가 이해할게요.”
“저는 이왕이면 남동생으로 부탁드릴게요.”
게일 일가가 나누는 대화를 흘려들은 레지나는 어어어 하는 사이에 엠버 품에 안겨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일주일 뒤.
왕도.
“레지나 고모.”
등 뒤에서 들린 맑고 고운 목소리에 레지나는 화색이 되어 돌아섰고, 기대했던 얼굴에 활짝 웃으며 소리쳤다.
“유리아!”
유리아 어거스트 바이엘.
엠버와 에이든에게는 비밀이었지만, 레지나가 제일 좋아하는 조카가 그곳에 서 있었다.